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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구약] 다니엘: 내용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0-07-31 조회수5,911 추천수1

[김혜윤 수녀의 성서말씀나누기] 다니엘(5-20) : 내용(1-16)

 

 

자신의 욕망 · 야심 버리고 하느님 뜻 겸손히 받아들여야

 

한 때 최고의 경영주로 부각되면서 한 시절을 풍미했던 유명그룹의 총수가 너무도 평범한 모습이 되어, 아니 피곤함과 두려움을 가득 담은 얼굴로 귀국했던 것을 기억한다.

 

몇 세기에 나올까 말까한 천재라 해도, 누구도 따라갈 수 없는 재능과 미모를 가졌다 해도, 그래서 남들이 감히 꿈도 꾸지 못할 자리에 올라 최고의 권력과 힘으로 세상의 중심에 당당히 섰던 이라 해도, 그것은 언제나 「잠깐」이고 「찰나」의 영광일 뿐이다. 그런 그들 중, 어느 누구도 쓸쓸한 퇴장에서 제외된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그들의 부상이 화려하고 극적일수록, 퇴장은 쓸쓸하고 고독했다. 최고의 자리에 올라서서 모든 것의 「오너」가 되었다면, 언젠가는 「루저」가 될 것을 예상해야 하는 것, 결코 낯설지 않은 인생의 시나리오인 것이다.

 

다니엘서는 당대 최고의 권력이었던 바빌론 왕 느부갓네살의 이야기로 시작된다. 불사조 같은 그였지만, 세상의 중심에서 자신의 존재를 외쳤던 것은, 인류의 긴 역사에서 본다면 그저 찰나였을 뿐이다. 최고가 된다는 것, 거부하기 힘든 매력이지만, 그 다음을 감당하는 것은 너무도 힘든 일일 것 같다. 언제나 절망적으로만 여겨지던 나의 무능함도 그러고 보니 신통하고 다행한 구석이 있었네…. 그걸 모르고 있었던거네….

 

 

다니엘서 1장

 

다니엘서의 1장과 7장은 각기 전반부와 후반부의 서론 역할을 하고 있으며, 특별히 다니엘서 1장은 유다인이었던 다니엘과 그의 동료들이 어떻게 해서 바빌론 궁정 안에까지 들어와 활동하게 되었는지, 그리고 포로로 끌려간 그들이 어떻게 해서 당대 최고 엘리트 대열에 들 수 있었는지, 그 경위를 설명해 준다.

 

 

개괄적 서론(1~2절)

 

1) 하느님의 전권

 

이 부분은 앞으로 전개될 이야기의 서론으로서, 바빌론왕 느부갓네살(기원전 605~561년)이 우선적으로 소개되고 있다. 다니엘이라는 인물의 등장에 앞서, 이미 바빌론의 왕을 소개하고 있음은 나름대로 저자의 신학적 의도를 드러내고 있다고 보여 지는데, 해가 지지 않는 나라를 이룩하고, 그 나라를 지상천국으로 만들겠다던 바빌론의 대왕 느부갓네살은 당시 지상에 존재하던 가장 강력한 권력의 상징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강력한 권세라 하더라도 다니엘서의 저자에게는 분명한 한계를 가진 것이었다. 다니엘서의 제작연대를 기원전 2세기로 보는데 동의한다면 저자는 찬란했던 바빌론 왕국의 종말과 그 허무한 최후(기원전 538년)를 이미 역사를 통해 잘 알고 있었던 것이고, 지상의 권력이 결코 영원하지 못함을 깨달았던 것이다.

 

느부갓네살이 상징하는 지상적 권력은 사실상 하느님께서 잠정적으로 부여하신, 즉 하느님께 종속된 하위 권력에 불과한 것임을 저자는 이를 통해 이미 암시하고 있다.

 

2) 역사적 문제

 

다니엘서의 1, 1은 그 연대기적 문제 때문에 많은 학자들의 논쟁을 불러일으켜 왔다. 왜냐하면 보도된 이야기가 실제 상황과 일치를 이루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1절은 여호야킴 3년에 느부갓네살 왕이 예루살렘을 침입한 것으로 보도하고 있는데, 여호야킴 3년이라면 기원전 606년이고, 이 시기 바빌론의 느브갓네살은 아직 왕위에 오르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아마도 다니엘의 이러한 문제는 2역대 36, 5~7의 오류적 보도를 그대로 적용한 탓으로 보여 진다. 결국 이러한 균열들은, 다니엘 1장이 유배와 그에 따른 여러 역사적 정황을 정확히 보도하는 데에 관심을 두고 있지 않음을 드러낸다. 성서가 신학적 산물이지 역사적 보도가 아님을 다시 한번 상기시켜 주고 있는 것이다.

 

3) 유배는 하느님의 심판

 

2절은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에 들어와 성전을 유린하고 기물들을 노획하였다」고 보도함으로써, 성전파괴라는 가슴 아픈 사건을 보도하고 있다.

 

그러나 2절은 문장의 주어를 『주님께서』로 명기함으로써, 예루살렘과 성전 파괴는 느부갓네살에 의한 패망이 아니라, 하느님의 심판인 것으로, 즉 하느님께서 선택하신 의도적 체벌로 표명하고 있다.

 

 

권력에 대하여

 

어떤 의미에서 본다면 성서는, 권력쟁취 혹은 권력에 대한 집착을 본질적으로 거부한다. 인간사의 크고 작은 승패는 모두 하느님의 계획안에서 결정되는 것이고, 따라서 유일한 권력자는 하느님 한분뿐이시라고 보기 때문이다.

 

아무리 집착하고 노력해도 안되는 것이 있다. 자신의 욕망과 야심 때문에 세상과 전면 대결구도에 들어가기 보다는, 하느님의 뜻을 겸손하게 받아들일 때, 삶은 의외로 쉽게 안정될 수 있다.

 

소박하고 억지가 없는 삶, 궤변과 변명이 필요 없는 정직한 삶, 가장 강한 자가 선택한 삶의 방식이 아닐까한다. [가톨릭신문, 2005년 7월 17일, 김혜윤 수녀(미리내 성모성심수녀회, 광주가톨릭대 교수)]

 

 

죽을 각오로 절실히 사는 것, 하느님 감동시키는 인간의 모습

 

『전쟁은 대개 종전과 함께 시작되고, 진짜 사랑은 이별과 함께 시작』된다는 말이 있다. 모든 일이 다 끝났다고 생각될 때 비로소 시작되는게, 가장 절실한 의미에서의 삶이 아닐까 한다.

 

전쟁은 끝났지만, 다니엘이 이국땅에서 마주해야할 개인적 차원에서의 전쟁은 이제 막 시작된 것이었고 동시에 그의 절박한 삶도 시작된다. 그들과 함께 살아가고, 그들 안에 편입되면서도, 야훼 하느님을 믿는 사람으로서는 그들과 구별되기, 그들과 구별되면서도 그것이 절대로 자신을 분열시키거나 교란시키지 않게 하기…. 그에게 부여된 결코 만만치 않았던 삶의 과제였던 것이다.

 

 

다니 1장 3~7절

 

3~7절은 주인공들을 등장시킨다. 느부갓네살은 영민한 사람이었다. 억압과 강제라는 이집트 파라오들의 통치노선이 절대로 사람들을 하나로 규합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던 사람이었고, 그런 그가 대안으로 도입한 제도는 정복한 각 나라의 인재들을 뽑아 정계에 등용하는 것이었다.

 

3~5절은 다니엘과 그 동료들이 이러한 등용책에 의해 선발된 인재들이었다는 것과 그 엄정한 선발기준을 소개함으로써 이들이 소지하고 있던 내외적 우월성을 부각시키고 있다. 이들은 왕족 혹은 귀족 가문의 자손이어야 하고, 인물이 수려해야 했으며, 기본적인 지식들을 이미 교육받은 이들이어야 했고, 학습 속도가 빨라 왕궁에서의 생활에 빨리 적응할 수 있는 이들이어야 했다(3~4절 참조).

 

선발된 젊은이들은 곧바로 언어교육을 받게 되고(4절), 왕이 제공하는 궁정 기숙사에서 특수 공동생활을 하며, 궁중 음식과 술을 먹게 되었다(5절). 그리고 이러한 3년 동안의 특수 교육이 마쳐지면 왕의 결정에 따라 정부 각 요소에 등용되게 되었다.

 

여기서 주목해야할 것은, 이렇게 뛰어난 조건을 두루 갖추고 있던 다니엘과 동료들이 모두 특이하게도 야훼 하느님의 이름(「-엘」(-el), 「-야」(-jah), 혹은 「-이야」(-iah))을 자신들의 이름 안에 포함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다니엘이라는 이름은 「하느님이 나의 심판자이시다」를 의미하고, 하나니야는 「야훼는 은혜로우시다」, 미사엘은 「하느님은 누구이신가?」, 아자리야는 「야훼께서 도우셨다」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갈등은 젊은이들이 내시장 아스브낫에게 새로운 바빌론 이름을 받게 되면서부터 시작된다. 다니엘서를 연구하는 많은 학자들은 이 바빌론 이름들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연구해 왔지만 아직 정확히 밝혀진 바는 없다.

 

다만 어근들을 추정해봄으로써, 그 이름들 안에 야훼 하느님의 이름 대신 다른 이방신들의 이름이 삽입되어있음을 알 수 있고(벨트사살은 벨(Bel)신의 이름이 들어있고, 사드락이라는 이름에는 바빌론의 수호신 마르둑의 이름이 들어있으며, 아벳느고는 「느보신의 종」이라는 뜻을 포함하고 있다), 이로써 저자는 야훼의 아들들이었던 그들이 이제 이방신들의 인재들로 태어나야 하는 강제적 상황에 놓여있음을 암시적으로 표현한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점은 이 개명사건에 대한 유다 젊은이들의 「유연한 태도」였다. 바로 여기에 저자가 궁극적으로 표명하고자 했던 지혜로운 자의 모습이 숨어있다고도 보여 지는데, 저자가 피력한 현자는 종주국의 통치를 거부하고 그것에 반기를 드는 자가 아니라, 그러한 모든 상황을 받아들이면서도, 이러한 현실 안에서 어떻게 하면 자신이 고수하고자 하는 것, 원하는 것을 실현할 수 있을 지를 고민하던 자였다. 즉, 정체성을 유지하는 지혜는 종주국에 대한 반역을 꾀하지 않고도 가능한 일이었음을 다니엘서 1장은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죽을 만큼 강한 삶

 

죽을 지도 모른다는 각오로써 삶을 절실히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어제 만난 친구 수녀님의 눈빛이 그랬고, 지하철 안에서 우비를 파시던 아주머니의 얼굴이 그랬다. 그들의 눈빛에서 발견하게 된 필사적인 생의 의지는 그 어떤 힘보다 종교적이고 감동적이어서, 거룩함이라는게, 숭고함이라는게 바로 저런 거지, 그런 생각을 하게 했다.

 

「죽을」 각오를 하고 필사적으로 「살고자 하는」 그녀들의 갈망과 소원이 제발 그녀들의 희망을 비껴가지 말기를 간절히 기도했고, 그런 그녀들의 마음이야말로 하느님을 가장 감동시키는 인간의 모습이 아닐까, 생각하기도 했다.

 

모든 성서의 인물들이 다 그렇지만, 다니엘서를 읽을 때 마다 느끼게 되는 것은 바로 그런 절실함과 지혜이다.

 

저자는 그것을 하느님의 지혜라고 부각시키고 있는데, 그건 어쩌면 그가 죽음을 정직하게 대면했기에 다가온 선물이요 결과였을지도 모르겠다. 어제 감동적이던 그녀들의 눈빛을 만나서였을까. 다니엘의 의지가 마치 손에 닿을 듯 전해져오는 듯하다. [가톨릭신문, 2005년 7월 24일, 김혜윤 수녀(미리내 성모성심수녀회, 광주가톨릭대 교수)]

 

 

하느님을 마음에 모시고 산다면 진정한 자신 발견할 수 있어

 

더 이상 감당할 수 없어진 자신의 욕망과 허영을 되잡아주게 하고, 진정한 자기 자신으로 돌아가게 하는, 그런 사람이나 사물을 마음에 품고 있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다. 쓰다보니, 바다에만 가면 자신이 누군지가 기억난다고 말하던 친구도 생각나고, 자식이라는 단어만 떠오르면 당신이 누구이신지로 돌아간다는 나의 부모님도 생각난다. 세상에서 가장 강한 사람은 이처럼 마음 속 깊이 소중한 무엇을 간직하고 있는 사람일 것이다. 다르게 표현한다면 이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은 마음에 소중한 무엇을 간직하지 못한 사람….

 

다니엘은 적의 심장부라고 할 수 있는 「궁정」에 인질로 끌려가 있었다. 그가 누추해지거나 비굴해지지 않고도 자신을 지킬 수 있었던 비결은, 하느님을 믿는 유다인으로서의 기억, 그 선명한 정체성 때문이었다.

 

 

갈등의 고조(1장 8~16절)

 

이제 1장의 핵심 내용이 전개된다. 1장은 모든 갈등 상황을 「음식」이라는 모티브를 통해 전개하고 있다. 즉 새로운 환경 안에서도 유지되어야할 유대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음식 문제를 통해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1, 8~16은 1장안에 들어가 있는 「액자 소설」처럼 독립적인 성격을 띠는데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되어 있다. 8절ㄱ에서 다니엘은 왕이 주는 기름진 음식이 「자신을 더럽히는」 것임을 알고 이를 거절하기로 다짐한다. 결국 1장에서의 시련, 고난, 시험의 동기는 「자신을 더럽히지 않으려는」(8절) 노력에 의한 것이었음이 강조되고 있는 것이다. 결국 1장의 문제는 왕이 주는 음식 자체의 문제가 아니라 그것이 자신을 더럽게 한다는 데에 있었고, 먹느냐, 마느냐,의 문제라기보다는 유다인으로서의 정체성을 보존하느냐, 포기하느냐, 의 문제였음을 알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자신의 정체성을 지키려 다짐한 다니엘의 결단은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삶에 구원이 있음을 확신했기에 가능했던 자세였다.

 

본문은 이와 대비되는 또 다른 「두려움」을 소개하고 있는데 바로 바빌론 관리가 품었던 「두려움」이었다. 다니엘이 두려워했던 대상이 하느님이었던 것에 비해, 바빌론의 관리가 두려워했던 존재는 바빌론의 왕이었다(10절). 그가 왕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그들의 제안을 수락하지 않자, 다니엘은 감독관을 찾아가 그를 설득하고 야채와 물만 먹는 선택을 하게 된다. 8~16절에서 부각되어 있는 다니엘의 태도는 변화에 순응하지만 필요할 때는 자기주장을 펴는 대담함이다. 다니엘이라는 이름이 시사하듯(하느님은 나의 심판자), 주위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든 중요한 것은 하느님 앞에 올바로 살겠다는 의지이고, 삶의 모든 것은 하느님께서 심판하신다는 확신으로 살아가는 것, 다니엘서가 강조하고 있는 현자(賢者)의 모습인 것이다.

 

 

문제의 해결(1장 17~21절)

 

위기의 상황까지 다다랐던 유다 청년들이었지만 이제 상황이 그들에게 유리해지면서 그들은 왕의 인정까지 받게된다(18~20절). 이로써 그들이 감당해야 했던 시련도 끝이 난다. 결국 다니엘서 1장은, 다니엘을 비롯한 유다 청년들이 시련을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이 그들의 특별한 다이어트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가지고 있던 확신과 신념 때문이었음을 피력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사건의 우여곡절 안에서 특별히 강조되고 있는 것은 바빌론 궁중에 있던 대신들과 왕까지도 이제 유다인들의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게 되었다는 점이다.

 

 

1장의 핵심사상

 

책을 쓰거나 글을 쓸 때 가장 나중에 쓰게 되는 부분은 「서론」 혹은 「들어가는 말」이다. 다니엘서 1장 역시, 본론이 이미 제작된 이후에 완성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는 1장의 주제가 책 전체의 내용을 수렴하는 것임을 암시한다. 앞에서 강조되었지만 여기에서 가장 부각되고 있는 주제는 「정체성의 문제」이다. 다니엘의 성공을 통해 저자는, 헬레니즘의 소용돌이 속에 있던 당시의 독자들에게, 유다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지키는 것이 곧 사는 길임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정체성

 

정체성의 문제는 하도 들어서 때로는 진부하게까지 들리는 주제이기도 하다. 중요성은 알고 있지만 실천과 적용이 언제나 희생과 양보를 요구하기 때문에 고루하고 진부하게 여겨지는, 그런 주제 말이다. 그러나 다니엘서 1장은 이에 대한 화두를 다시금 우리에게 던지고 있다. 도대체 내가 왜 이러는지, 무슨 마음으로 이러는건지, 스스로도 잘 모를 때, 자신을 반듯하게 지켜날 수 있는 비결은 하느님을 마음에 모시고, 그분께서 만사를 주관하신다는 확신으로 하루를 사는 것임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마음이 우리를 진정 우리 자신일 수 있게 하는 힘과 지혜의 시작이라고…. [가톨릭신문, 2005년 7월 31일, 김혜윤 수녀(미리내 성모성심수녀회, 광주가톨릭대 교수)]

 

 

누구나 갖고 있는 불안감 극복, 하느님께 진정 다가갈 때 가능

 

불안한 글, 불안한 그림, 마음속에 어두움을 안은 눈동자, 그런 것들을 좋아했던 적이 있다. 내가 그만큼 불안했을 때였다. 그러나 불안은 하느님 없이 사는 삶의 본질적 특징이라는 것을 배우게 되면서, 나는 비로소 그 불안과 피곤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원고를 쓰려고 다니엘서 2장을 다시 읽으니 마음에 다가오는 것은 「불안」이라는 주제이다. 성서 본문은 처음부터(2~3절), 바빌론 왕이 꿈을 꾸고 그것이 무슨 뜻인지 몰라 『불안해져서 잠을 이루지 못했다』는 말을 반복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불안함」을 묘사하기 위해 사용된 히브리어는, 「강타하다」, 「때리다」라는 의미를 가지는 「파암」이라는 동사의 재귀형(히트파엘형)이다. 결국 다니 2장이 사용한 「불안하다」라는 히브리어는, 스스로의 마음을 때리고 괴롭히는 상태를 묘사하며, 궁지에 몰린 인간의 가학적 심리를 잘 표현해 주는 단어라고 할 수 있다. 자기를 스스로 깨물고 할퀴면서 결국 파멸로 이끌어가는 무서운 병, 불안….

 

물론 느부갓네살의 불안함을 말끔히 걷어 준 존재는, 하느님으로 자신을 완전히 무장하고 있었던 순수청년 다니엘이었다.

 

장마가 끝났다고 한다. 맑고 강렬한 하느님의 존재가 모두의 불안과 근심을 뽀송뽀송 말려주었으면 한다.

 

 

다니 2장의 개관

 

지난번에 우리는 다니엘서 전반부(1~6장)의 서론 역할을 담당하던 다니 1장을 살펴보면서, 청년 다니엘의 비범한 지혜는 하느님을 언제, 어디서고, 삶의 중심에 두려던 그의 굳은 신앙과 충절에서 기인한 것임을 살펴보았다. 본론이 시작되는 다니 2장에서는 그러한 그의 지혜가 바빌론 궁정 안에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현실화되는지를 묘사해 준다.

 

다니 2장이 제시하는 문학적 특성은, 다니엘서 입문 과정에서 언급하였던 바와 같이, 2장의 시작인 1~4ㄱ절만 히브리어로 되어있고 그 이후로는 아람어 부분이 제시되고 있다는 점이다. 학자들은 히브리어 부분이 원래 아람어로 저술된 부분이었지만 후대에 히브리어로 번역된 것이라 추정한다.

 

 

내용

 

등극한지 2년이 되어가던 느부갓네살은 점차 왕이라는 신분에 익숙해지고 있었지만, 바빌론의 미래와 점차 강대해지는 주변 국가들의 정세는 하나의 근심거리로 자리 잡게 된다. 불안해진 그는 급기야 꿈까지 꾸게 되는데, 그 꿈의 내용이 왕의 마음을 더욱 산란하게 하였고, 결국 왕은 꿈을 해석할 지혜자(賢者: 요술사, 주술사, 마술사, 점성가. 2절 참조)들을 찾아 나서게 된다. 먼저 불린 이들은 바빌론의 현자들이었는데, 그들은 자신의 꿈 내용을 일체 제시하지 않는 왕에게, 꿈을 말해주지 않는다면 그 꿈을 해석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4,7,10,11절). 이에 격분한 왕은 바빌론의 모든 현자들을 죽이라고 명하게 되고(12~13절), 이렇게 상황이 다급해지자 다니엘은 하느님께 그 꿈의 신비를 알려달라고 기도한다(18~23절). 마침내 기도가 받아들여져, 다니엘은 그 꿈의 내용을 알아내 해석해준다.

 

다니엘이 알아낸 왕의 꿈은 이러했다. 매우 이상한 모습의 형상이 보였는데 머리는 순금으로 되어있고 가슴과 팔은 은으로, 배와 넓적다리는 청동으로 되어있으며, 아랫다리는 쇠로, 발은 쇠와 진흙이 서로 혼합되어있는 모습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돌멩이 하나가 날아와 그 형상의 발을 치니 모든 것이 부서져 그 흔적조차 볼 수 없게 되었고, 그 후 돌은 거대한 산이 되어 온 세상을 채운다(31~35절). 이러한 꿈에 대하여 다니엘은 다음과 같은 해석을 제시한다. 4가지 금속들은 앞으로 연속적으로 일어날 강력한 4왕국을 가리키며, 이 나라들은 결국 돌멩이로 은유된 나라에 의하여 분쇄될 것이라는 해석이었다(36~45절). 느부갓네살 왕은 자신의 꿈을 알아맞히고, 이를 명쾌히 해석한 다니엘에게 바빌론 모든 현자들을 거느리는 총 감독관의 지위를 내리고, 아울러 그에게 지혜를 허락하신 유다인들의 하느님을 모든 신들 중의 참 하느님으로 고백한다(46~49절). 느부갓네살의 이러한 고백은 한 때 예루살렘을 침입하여 성전을 모독한 인물이었던 그의 결정적인 회심과 굴복을 암묵적으로 표현한 저자의 신학적 작업이라고 할 수 있겠다.

 

 

불안의 극복

 

결국 하느님께 다가가지 않는다면 아무리 천하를 호령하는 자(바빌론의 왕)라 하더라도 삶의 고비 고비에서 마주치게 되는 불확실성과 불안으로부터는 자유로울 수 없다. 사고다발지역. 운전을 하다 보면 종종 마주치게 되는 팻말이다. 아닌 게 아니라 그런 곳에는 어김없이 안개와 불안이 자욱하다. 그렇게 불의의 사고와 재앙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주어진 불확실성과 불안인 것이다. 승패의 비결은 그런 불안 속을 하느님과 함께 「뚫고」 가느냐, 마느냐 일뿐. 너무 더워 인터넷이 열을 받았나보다. 이 햇빛을 「뚫고」 원고 보내러 가야겠다. [가톨릭신문, 2005년 8월 7일, 김혜윤 수녀(미리내 성모성심수녀회, 광주가톨릭대 교수)]

 

 

하느님께 감사의 마음 갖는 것 우리 삶 풍요롭고 행복하게 해

 

특별히 여름이 되면 나 자신에게 다짐하는 것이 있다. 사소한 것에 목숨 걸지 말기, 위험한 일에는 뛰어들지 말기, 그저 조용히, 조용히 견디기…. 마음먹은 대로 되는 것은 아니지만 이런 노력과 연습 없이 여름을 무사히 나기란 너무도 어려운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방인」의 뫼르소는 작열하는 태양 때문에 살인을 했다고 했고, 신영복도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에서 더위가 공연히 사람을 화나게 한다고 하지 않았던가. 화염 같은 더위가 주위의 사람들을 부담스럽게 하고, 급기야 자신까지도 받아들이지 못하게 하니, 모든 것이 위험하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하지만 이런 생각도 해본다. 이런 더위가 아니라면 가을을, 그 서늘함과 맑음을, 그리고 그 청명한 위안을 우리가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까, 라는….

 

다니엘서 3장은 불가마의 화염 속에 휩싸여 있는 세 청년의 이야기로 유명하다. 8월의 더위보다 비교할 수 없이 뜨거웠을 그 곳, 그들은 과연 그 죽음의 자리를 어떻게 견뎠을지, 궁금하다.

 

 

다니 3장 개관

 

3장의 가장 부각되는 특징은 주인공 다니엘이 등장하지 않는다는 것과 대신 1장에 등장했던 그의 세 친구들을 축으로 진행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다니 3장을 다른 다니엘 전승과 구별시키는 본질적 요인이라 할 수 있는데, 더욱이 여기서 등장한 세 친구들은 이후 전혀 등장하지 않기에, 대부분의 학자들은 다니 3장이 다니엘 전승과 분리되어있던 독립된 전승의 하나였을 것으로 간주하고 있다.

 

다니 3장은 내용상으로도 중요하지만, 그 구성 형태 때문에 주목을 받아왔다. 문제는 히브리 성서의 번역본인 그리스 성서가 히브리 본문보다 분량 면에서 훨씬 길게 서술되었기 때문인데, 이러한 현상은 그리스 성서에 3가지 독립적 단편들이 첨가되어짐으로써 야기된 것이었다.

 

즉, 그리스 성서는 1) 시문(詩文)으로 되어있는 아자리야의 노래(26~45절)와 2) 산문(散文)으로 기술된 불가마에 던져진 세 청년 이야기(46~50절) 그리고 3) 세 청년의 노래(52~90절)를 히브리 본문에 추가하고 있는 것이다. 후대 첨가된 부분들은 당연히 그리스어로만 존재하고(제2경전), 이로써 3장 전체는 매우 복잡한 언어구조를 띄게 된다.

 

즉 다니 3장은 23절까지는 아람어로 되어있고, 24절부터 90절까지는 그리스어로 존재하며, 이어지는 4장에서는 다시 아람어로 복귀하고 있는 복잡한 구성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3장의 귀결 부분도 조금 차이가 있어서, 히브리 성서는 그리스 성서가 91~97절에 두고 있는 부분을 24~30절로 두며, 이것을 3장의 종결부분으로 삼고 있다.

 

이러한 복잡한 구조와 함께 흥미롭게 등장하는 것은 세 친구들의 이름인데,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라는 바빌론 이름으로 등장했던 세 청년의 이름이, 제2경전 부분인 49절, 88절에서는 아나니야, 아자리야, 미사엘이라는 히브리식 이름으로 등장한다.

 

 

간추린 내용

 

다니 1~2장은 포로로 끌려갔던 다니엘과 그의 친구들이 어떻게 하여 종주국의 행정조직 내부에까지 편입되게 되었는지, 그 경위를 알려주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이 바빌론 현자들과 동등한 지위에까지 올랐다고 해서 그들이 겪어야하는 불평등과 모략의 위협이 완전히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3장에서 유다 청년들은 그들이 바빌론 현자들로부터 겪어야했던 견제와 질투를 묘사하고 있다.

 

다시 말해, 바빌론의 고급 관리들은 「아웃사이더」였던 유다 청년들의 존재를 자기들의 내부 조직에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이고, 결국 모든 관리들이 초청된 신상 개막식 자리에서 이 누적된 갈등을 표출시킨다. 느부갓네살은 거대한 신상을 금으로 건립한 후, 누구든지 그 신상을 경배할 것을 명령한다.

 

그러나 우상에게 절할 것을 거절한 유다인들은 결국 그 자리에서 체포되고, 그 벌로 불 지핀 화덕에 들어가야 하는 고문을 당하게 된다. 그러나 유다 청년들은 당황하지 않고 기꺼이 이 불의 시험을 감수하며 화덕 안으로 들어가는데, 놀라운 일이 발생한 것은 그 다음이었다.

 

그들은 전혀 불길에 손상당하지 않은 채 천사의 모습을 한 또 다른 인물과 화덕 안을 걷고 있었던 것이다. 이에 왕은 즉시 그들을 화덕으로부터 끌어내어, 그들의 하느님을 칭송하였으며, 더욱 중요한 자리로 그들의 지위를 격상시켜준다.

 

 

일상을 넘어서는 지평

 

일상은 그 일상을 넘어서는 또 다른 삶의 지평을 숨기고 있다. 숨쉬기도 어려울 만큼 덥고 짜증나는 일상이지만, 그 안에 숨어있는 초월적 지평을 발견하는 사람은 서늘하고 관대한 평화를 누릴 수 있다. 물론 그 지평은 하느님! 지금껏 살게 해주시고, 그 삶을 이끌어주신 하느님께 감사의 마음을 갖는 것만으로도, 삶은 당분간 다행스럽고 행복할 수 있지 않을까. [가톨릭신문, 2005년 8월 14일, 김혜윤 수녀(미리내 성모성심수녀회, 광주가톨릭대 교수)]

 

 

하느님께 대한 확고한 믿음 있다면 어떤 역경 · 난관도 극복할 수 있어

 

「오프사이드」, 2002년 월드컵 이전까지는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말이었다. 축구경기를 처음부터 끝까지 본 적이 없었으니까…. 아무튼 이 규칙은, 수비가 없는 공간에 먼저 공이 들어가면 이를 무효화시킨다는 것인데, 월드컵 때 그것 때문에 땅을 치게 억울한 적도 있었지만, 또한 그것 때문에 안도의 숨을 몰아쉰 적도 여러 번 있었음을 모두는 기억할 것이다. 경기를 보면서, 그런 규칙을 오프사이드라고 한다면, 인생에도 오프사이드가 분명 존재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것 때문에 죽고 싶을 만큼 억울하고 고통스러울 때가 있지만, 사실은 그 울분과 고통이 나를 새롭게 세워주고 다시 살리기도 하는, 그런 유리하면서도 불리한 중립 지대가 인생에는 반드시 존재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다니엘서 3장의 세 청년이 처했던 죽음과 불의 고통은, 인생이라는 게임에서 우리 누구나가 경험하게 되는 삶의 「오프사이드」였다. 그 고통이 너무도 커서 사람을 죽기보다 힘들게 하지만, 동시에 이를 통해 자신의 본질을 되찾고, 인생의 질과 품위가 전격 향상되는, 소중하고도 멋진 재생의 기회가 바로 그런 지점일 수 있는 것이다. 이미 3장의 소개는 끝났지만, 함께 묵상할 수 있는 소재가 많은 부분이라서 이번 주에는 그것들을 중심으로 진행하고자 한다.

 

 

고발

 

3, 8~12에서는 바빌론의 신상에 절하지 않는 세 명의 유다 청년이 고발되는 장면이 소개된다. 흥미로운 것은 8절에 등장하는 「고발하다」(카라츠) 라는 아람어 동사인데, 이를 직역하면 그들의 「살점들을 먹다」, 혹은 그들을 「갈기갈기 찢다」라는 의미이다. 타인에 대한 고발과 단죄는 그를 찢고 살점을 파내어 먹는(?) 엽기적 행각과 다를 바 없음을 부각시킨, 강한 표현이라고 하겠다.

 

다니엘서에서 이 고발은, 바빌론 왕 자신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바빌론 관리들에 의해 주동되었다. 즉 이들의 고발은 진정한 의미에서의 고발이 아니라, 유다 청년들에 대한 질시와 질투 때문에 등장한 비극이었던 것이다. 질투는 타인을 잔인하게 죽게 하고, 이 성서 본문의 마지막이 제시하는 것처럼, 그 사건을 초래한 당사자에게도 똑같은, 아니 그 이상의 고통과 죽음을 되돌아오고야 만다. 공평한 덫인 셈이다.

 

 

기적을 낳게 한 믿음

 

분노한 왕은 곧바로 그들을 체포하고 법정에 세운 후 자신에게 복종할 것을 강요한다. 그러나 유다 청년들은, 설령 그들의 하느님께서 지금 당장 구하러 오지 않으신다 해도 이방신에게는 절대로 절하지 않을 것임을 분명히 하는데(17~18절), 이는 그들의 철통같던 믿음을 보여주는 태도였다. 결국 이 표현은 우리에게 「믿음이 기적을 통해 생기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 「믿음이 기적을 낳게 하는 것」임을 역설적으로 표현해준다. 어쩌면 느부갓네살은 이렇게 확고했던 유다 청년들의 신앙과 신념 앞에 이미 패자로서 무너졌을지도 모르겠다.

 

 

고통 속에 함께 계신 하느님

 

제2경전 부분인 91절에서 왕은 「묶어서 불 속으로 던져진 세 명」이 어느새 모두 결박을 풀고, 유유자적하며 걷고 있다는 것(91절)과 집어넣은 사람은 세 명이었는데 모두 네 명이 함께 걷고 있다는 사실에 경악한다(92절). 그 네 번째 존재를 느부갓네살은 『신의 아들 같다』(92절)고 표현하는데, 히브리식 사고로 본다면 「신의 모습을 닮은 이」라는 표현은 곧 천상적 존재를 의미하며, 이러한 존재들은 구약성서 전반에서 하느님과 동일한 존재로 암시되고 있다.

 

그렇다면 이 장면은 시험과 불이라는 현재적 고통 속에서도 「고통 받는 자들과 함께 하시는 하느님」을 전면 부각시키고 있는 것이라 하겠다. 즉 모든 고난의 순간에도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느님께 대한 믿음만 있다면, 뜨거운 불길 속에서도, 그리고 움직일 수 없이 결박된 상태에서도 「풀릴 수 있고」, 「자유로울 수 있음」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하느님의 시험

 

당시 근동지역의 화덕은 문이 달려있어 태울 재료들을 집어넣고 태워진 재를 빼내게 되어있었다고 한다. 하느님의 시험은 이처럼 「입구」와 「출구」가 동시에 존재한다. 들어갈 때가 있으면 반드시 나올 때가 있는 것이다. 유다 청년들이 흔쾌히 바빌론측의 고발을 받아들인 것은 이미 이 「출구」를 보았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다니엘서의 저자는 이러한 그들의 「영리함」을 하느님의 「지혜」로 소개하고 있다.

 

물론 그들이 발견한 출구는 하느님께 대한 확고한 믿음과 그것을 통해 발휘되는 진실의 힘이었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기적 때문에 믿음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 강한 믿음이 기적을 낳게 한다.

 

이 비결을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그 어떤 시련에서도 의연할 수 있고, 그 누구도 하느님으로 무장된 그를 건드리지는 못할 것이다. 이미 그는 신의 모습을 닮아있기 때문이다. [가톨릭신문, 2005년 8월 21일, 김혜윤 수녀(미리내 성모성심수녀회, 광주가톨릭대 교수)]

 

 

삶속에 떠 있는 무지개 발견할 때 인생의 참 의미 깨달을 수 있어

 

책이 빡빡하게 들어선 작은 내 서재에는 아직도 몇 권의 동화책이 꽂혀 있다. 전문서적들과 함께 꽂혀 있는 동화책이라니, 역시 정서가 언밸런스야, 하던 누군가의 지적이 기억난다. 아마도 동화가 주는 단순한 행복과 비현실적 순수가, 내게는 아직도 위안이 될 때가 있어서 인가 보다.

 

그중에도 제일 좋아하는 이야기는 무지개를 소재로 한 동화이다. 그런 동화를 읽는 데는 단 한 번도, 이걸 읽어야 하나? 라는 갈등을 겪어본 적이 없고, 처음 나온 졸서의 표지에도 무지개를 그려 달라고 했을 정도이니, 무지개를 좋아하는 수위가 보통을 넘었음은 충분히 가늠된다.

 

그래서일까. 사실은, 비밀인데(?), 박사학위 최종 시험을 보는 날 아침에도 활짝 웃고 있는 무지개를 보았다. 꿈이 아니라 실제로…. 아침기도를 마치고 옥상에 올라갔을 때였는데, 어떻게 무지개가 뜬 그 짧은 시간에 거기 올라가게 되었는지, 혼자서 감탄에 감탄을 연발하며 간직하고 있는 흐뭇한 우연 중의 하나이다. 물론 여름이었고, 지중해성 기후인 로마의 기후를 참작한다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긴 했다.

 

지난번에도 친구 수녀님과 서점에 갔다가 은근히 동화책 코너에서 어슬렁거리는 나를 보고, 웬 동화책? 이냐며 의아해 하길래, 으응- 조카 주려구, 했다. 하지만 우리 집 가족사를 훤히 뚫고 있는 그녀인지라, 조카 아직 돌도 안됐잖아, 하며 즉시 태클을 걸어 왔고 나는, 으응-, 고모가 누구니, 날 닮아서(?) 머리가 좋아. 한글 금방 깨칠거야…. 하고 또 얼버무렸다. 그냥 내가 보려고, 하면 쉬웠을 걸, 둘러치는 나를 안됐다는 눈으로 쳐다보는 그녀에게 왠지 창피하고 조금은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권력과 힘을 잡으려고 혈안이 되어 폭풍우 속을 걷고 있는 사람들은 그 폭풍우 이면에 있는 무지개를 보지 못한다. 그러나 어쩌면 그게 우리 삶일 지도 모른다. 권력을 잡기 위해서는 권력 잡은 이들의 폭력을 견뎌야만 하고, 다스리기 위해 다스림 받는 위치를 감수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지개를 잡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노동의 시간들이 삶이 아니라, 무지개와 함께 사는 아름다운 시간이 삶임을 깨달을 때, 비로소 진정한 삶은 시작된다. 각자의 삶 안에 떠있는 무지개를 보지 못하고 평생을 사는 것은 너무 불쌍하고 잔인한 일이다. 그러니 여유를 내어 하늘을 볼 일이다. 하늘나라는 지금, 여기에, 우리 안에 이미 와있기 때문이다. 다만 우리가 무지개를 보지 못하듯, 하느님 나라를 발견하지 못하고 있을 뿐.

 

느부갓네살. 신생 바빌론을 신흥 대제국으로 탄생시켰던 장본인이었던 그 역시 하느님 없이 자신의 힘만으로 혁혁한 성공을 이루었다고 생각해왔던 인물이었다. 이제 우리가 살펴보게 될 다니 4장은 하느님 없이 성공하고 출세하며 꽤 인생을 잘 꾸려왔다고 생각하던 그가 인생 유전 끝에 어떻게 해서 하느님을 만나고 신앙을 고백하게 되는지, 그 파란만장한 과정을 소개해준다. 무서운 고통의 끝에서 만나게 된 하느님은, 그가 마침내 발견한 인생의 무지개가 아니었을까.

 

 

전반적 특징

 

다니 3, 31~4, 34은 바빌론왕 느부갓네살이 그의 백성에게 보내는 일종의 공식서한(Epistle)으로 되어 있다. 그 시작이 왕의 서한에 의례적으로 등장하는 고정적인 틀, 즉 발신자의 이름을 밝히고 이어서 수신자가 등장하는 고유 어법으로 되어있기 때문이다.

 

이 부분이 가지는 또 다른 특징은, 복잡한 텍스트 문제를 가지고 있다는 점인데, 마소라 텍스트의 절수 표기와 그리스 텍스트의 표기가 서로 일치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가톨릭측 번역들은 모두 히브리 본문인 마소라 텍스트(MT)의 절수 표기를 따르고 있고, 개신교측 번역은 그리스어 본문을 따르고 있다. 이러한 이유로 우리가 3, 31~4, 34로 표기하는 내용을 개신교에서는 4, 1~37로 표기한다.

 

마지막 특징은 「1인칭 시점」을 통한 고백문(confession) 성격이라 하겠다. 이러한 1인칭 시점은 다니엘서의 전반부(1~6장)에서 유독 이 부분에만 발견되는 것이기에 좀 특별하다고 할 수 있다(16절과 25~30절에는 3인칭 관점이 삽입되어 있다).

 

 

구성

 

이상의 특성을 배경으로 서술되어 있는 3, 31~4, 34은 사실상 매우 체계적인 구조를 띄고 있다. 그런데 이 중 가장 시선을 끄는 부분은 이야기의 처음과 끝을 함께 조응하도록 구성한 「인클루시오」(inclusio) 기법이다.처음 등장하는 세 절(3, 31~33)과 마지막 네 절(4, 31~34)이 모두 하느님의 왕권을 칭송하고 찬양 드리는 「송영」(doxology)을 포함하고 있으며, 느부갓네살의 1인칭 고백 양식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즉 이 이야기는 하느님께 대한 느부갓네살의 찬양으로 시작하고 끝나게 되어있으며, 그 사이에 자신의 회개 여정을 삽입하는 구조로 되어 있는 것이다. [가톨릭신문, 2005년 8월 28일, 김혜윤 수녀(미리내 성모성심수녀회, 광주가톨릭대 교수)]

 

 

성공을 향한 힘든 여정속에서도 가끔 하늘을 바라보는 여유 갖자

 

지난 주 지면에서 필자는 다니 4장을 강철왕 느부갓네살의 회심과 그 여정으로 소개한 바 있다. 성공, 출세 자체가 나쁜 것은 결코 아닐 것이다. 그러나 성서는 「번영」과 「안정」을 가장 위험한 인생의 덫으로 본다. 하느님을 잊고 살게 하는 가장 최적의 조건이기 때문이다. 성공과 번영을 자신의 능력으로 말미암은 것이라 믿으며 하느님을 제외시키는 삶, 가장 위험한 삶의 형태인 것이다.

 

 

내용

 

다니 4장의 이야기는 느부갓네살의 꿈으로 시작된다. 기괴한 꿈을 꾼 그는 즉시 바빌론의 해몽가들에게 꿈 해석을 요구하지만 그들은 왕의 꿈을 해석할 수 없었다. 결국 왕은 다니엘을 부르게 되는데, 이렇게 느부갓네살의 꿈과 연결되어 이루어지는 바빌론 현자들과 다니엘의 대조는 이미 2장에서도 유사한 양식으로 보도된 바 있다.

 

꿈 이야기의 중심에는 큰 나무가 등장한다. 그 나무는 땅의 중심에 서 있는 것으로서 그 끝이 하늘까지 닿아 있었는데 짐승들과 새들이 가득 모여와 둥지를 틀 정도로 거대한 것이었다(4, 7).

 

이러한 그의 꿈은 「거룩한 감시자」(4, 11)에 의해 나무가 잘려지는 장면으로 이어진다. 나무는 뿌리등걸만 남겨진 채 잘려지고 깃들였던 동물들도 모두 사라지게 되며, 그는 이후 짐승처럼 7년을 살게 된다.

 

이상과 같은 꿈의 비극적 내용이 다니엘을 당황하게 하지만, 그는 어쩔 수 없이 이 나무의 주인공이 바로 왕 자신이라는 것을 밝혀준다(4, 19).

 

한 나라의 왕을 나무에 비유해서 설명하는 것은 민담이나 전설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것으로, 예수님이 당신 자신을 포도나무에 비유하신 것도 이와 유사한 개념이라 할 수 있다.

 

아무튼 이를 통해 자신을 너무 높게만 간주해오던 느부갓네살에게 이제 가장 비참한 위치로의 추락이 다가옴이 경고된다. 이어 다니엘은 정의와 자비를 베풂으로써 이 죄에서 벗어나기를 촉구한다(4, 24).

 

1년이 지나서 꿈은 그대로 현실로 돌아왔다(4, 25~26). 왕은 정계에서 밀려나 짐승들이 사는 곳에 피신하며 오랜 시절을 보내야 했고(4, 30), 이 때 왕은 다니엘의 조언을 받아들여 그 자신의 죄를 진정으로 속죄한다. 이러한 그의 모습을 보시고 하느님은 다시 영광과 영예를 회복하여 주시는데, 이러한 은혜에 보답하여 드리는 느부갓네살의 찬양으로 이야기는 끝맺어지게 된다(4, 31~34).

 

 

나보니두스의 이야기

 

다니 3, 31~4, 34의 이야기는 느부갓네살의 꿈을 소재로 하고 있지만, 사실상 학계에서는 이 이야기가 바빌론의 마지막 왕이었던 나보니두스(기원전 556~538)의 이야기였으리라고 추정하고 있다. 바빌론의 실록은 나보니두스가 그의 재위기간 중 10년간을 아라비아에 있는 테마(Tema)에서 지낸 적이 있다고 보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다니 3, 31~4, 34에 소개된 나보니두스 전승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 것일까? 이에 대하여 콜린스(J.J. Collins)는 다음과 같은 가설을 제안한다. 다니 3, 31~4, 34은 나보니두스의 전승들을 토대로 한 것인데, 다니엘서의 저자가 이 전승을 자신의 책에 도입할 때, 나보니두스라는 인물보다는 다니 1~3장에서 이미 언급되었고, 유다 독자들에게 훨씬 더 잘 알려져 있던 인물, 즉 무력으로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성전을 무너뜨렸던 장본인인 느부갓네살의 이야기로 내용을 재구성하였다는 것이다. 이러한 그의 가설이 설득력 있다고 여겨지는 것은, 처음 세 구절에서 느부갓네살의 입을 통하여 하느님 왕권에 대한 찬양과 신앙고백을 하게하고, 또한 마지막 부분에는 그가 공적으로 서한을 띄워 만민에게 하느님의 통치와 그 주권을 공적으로 언표 하는 것으로 되어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는 성서 저자의 자유스럽고 개방적인 편집, 교정을 통한 신학적 작업으로 볼 수 있다.

 

 

오버 더 레인보우

 

옛 영화 「오즈의 마법사」에 나오는 노래 「오버 더 레인보우」. 무지개를 좋아하는 필자가 놓칠 리 없는 노래이다. 무엇보다도 「어딘가에 있을 무지개 저편」(Some where over the rainbow)이라는 예쁜 가사는, 옛 LP판이 가지고 있는 특유의 잡음과 혼합되어, 거부하기 어려운 독특한 매력으로 다가온다.

 

어제도 거짓말 같지만, 소나기 때문에 검게 내려앉은 구름 뒤편에, 노을을 담아 분홍빛을 띠고 있는 구름을 보았다. 이상한 일이었다. 수녀원 모원에 와야만 비로소 하늘을 볼 여유를 가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성공과 성취를 향해 돌진하는 삶은 늘 피곤하고 고통스런 여정이다. 그러한 고통의 끝에서 「눈을 들어 하늘을 바라본」(다니 4, 31) 느부갓네살의 마음으로 이 여름의 끝에 만난, 그 검은 구름 사이에 비치던 차갑고도 맑았던 하늘, 쉽게 잊지는 말기로 하자. [가톨릭신문, 2005년 9월 4일, 김혜윤 수녀(미리내 성모성심수녀회, 광주가톨릭대 교수)]

 

 

하느님의 따뜻한 메시지 통해 다가온 가을이 보다 아름답길

 

대부분이 남학생들인 학교에 근무하다보니, 남성들이 나누는 악수가 내 인사법이 되어버렸다. 개강을 하고 서로 다시 만나 악수를 하면서 표정은 얼굴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손에도 있다는 것을, 아니 어쩌면 더 정직한 표정이 손 안에 담겨 있다는 것을 깨닫곤 한다. 나에게 화난 손, 나를 재미있어 하는 손, 나에게 수줍은 손, 호탕하고 명랑한 손….

 

다니 5장은 난데없이 나타난 「하느님의 손」을 소재로 하고 있다. 물론 손이 그 사람 전체를 말해 주듯이 하느님의 손가락은 그분의 존재 전체를 기억하고 상징한다. 사랑, 기쁨, 불안, 오만, 권태를 경고해주는 그분의 손을, 오늘 나는 내 일상 안에서 느낄 수 있을까.

 

 

전체 개관

 

지금까지(다니 1~4장)가 느부갓네살 치하를 배경으로 하고 있었다면, 5장은 벨사살이라는 새로운 인물을 등장시킨다. 그를 통해, 예루살렘 성전에서 약탈해온 기물을 사용하여 술을 마시고 흥청대는 연회와 이런 신성모독의 죄가 어떤 재앙을 불러일으키는지를 보도하고 있다. 그 용서받지 못할 죄의 결과는 왕의 비참한 죽음과 바빌론 대제국의 멸망이었다.

 

 

벨사살과 이야기의 역사성

 

우선 살펴보아야 할 것은 벨사살이라는 인물이다. 다니엘서의 다른 이야기들처럼 다니 5장 역시 역사적인 사실과는 좀 다른 내용을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바빌론의 왕으로서 재위했던 적이 없었고, 19세기에 발견된 몇몇 설형문자 문서들은 벨사살을 나보니두스의 아들로 명기하고 있다. 나보두니두스는 재위 기간 동안 전쟁을 치르느라 거의 왕궁에 부재하였고, 따라서 그의 아들 벨사살이 관직을 대신 수행했을 가능성은 없지 않다. 특히 다니엘이 벽의 신비한 글자를 해석한 공으로 나라에서 「세 번째 높은 지위」를 받게 되었다는 언급(5, 16.29)은 당시 벨사살이 바빌론의 두 번째 지위에 있었음을 암묵적으로 제시하는 것일 수 있다. 그러나 5장 내내 벨사살이 「왕」으로 호칭된 것과 그의 아버지가 느부갓네살이라고 되어있는 것(2절)은 쉽게 설명될 수 없는 부분이라 하겠다.

 

 

하느님의 손가락

 

성서에 등장하는 많은 놀라운 묘사들 가운데 가장 압권이라고 할 수 있는 것 중의 하나가 바로 다니 5장에 등장하는 손과 그 손가락이 벽에 쓰는 글씨 「머네 머네 터켈, 그리고 파르신」(25절)이라는 문구이다. 상상력을 조금 발휘하여 당시의 사건 현장으로 가보자. 휘황찬란한 불빛과 귀를 때리는 음악, 웃음소리로 가득한 잔치에 갑자기 찢어지는 비명소리가 들린다. 난데없이 등장한 커다란 손 때문이었다. 모두가 놀라 그 곳을 쳐다보니, 해괴하게도 사람의 손만 등장하여 벽에다 글씨를 쓰고 있었고(5절), 그 글씨의 내용은 도무지 알 수 없는 기괴한 말이었다(7~8절). 흥청대던 파티 분위기가 순식간에 공포로 바뀌고, 임금 역시 그 「얼굴빛이 달라지고」, 「허리의 뼈들이 풀리며 무릎이 서로 부딪」(6절)칠 정도로 두려워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 문자는 다니엘뿐 아니라 역대 성서학자들에게도 과제로 주어진 암호로서, 여전히 풀리지 않는 난제이기도 하다. 일반적으로 이 말은 무게나 화폐의 단위를 말하는 것이라고 간주되고 있는데, 다니엘은 벨사살의 날수를 「계수하여」 보니 날수가 다 되었고, 그의 「무게를 달아보니」 모자랐으며, 결국 나라가 둘로 「갈라져」 메대와 페르시아인들에게 주어진다는 해석을 제시한다(26~28절 참조). 이전의 경우와 같이 여기에서도 바빌론 현자들의 실패(7~9절)와 다니엘의 승리가(10~12절) 다시금 반복되고 있는 것이다.

 

이야기는 급격하게 마무리된다. 벨사살이 하느님 성전의 그릇들로 술을 마시고 유흥에 빠지는, 절대로 용서받을 수 없는 신성 모독의 죄악을 저지른 탓이었다(17~23절). 에피소드는 급작스런 적의 침략을 언급하고 왕이 그 밤에 독살되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따뜻한 손

 

어느새 손끝이 차가와 지는 계절이 왔다. 손이 또 하나의 감추어진 얼굴이듯, 지독했던 여름은 서늘한 가을의 얼굴을 감추고 있었던 것일까. 거짓말처럼 하루아침에 가을이 다가왔으니 말이다. 처음으로 여름이 무섭다고 느꼈을 만큼 지독했던 더위였다. 그러나 그 어떤 난폭한 더위도 하느님의 질서를 뒤집지는 못하는 법. 이제 여름은 어디에도 없다.

 

차가와 지는 계절이지만 하느님의 따뜻한 손을 일상의 굽이굽이에서 느끼고 기억할 때, 엉겨 붙어 있는 듯한 생의 복잡한 문제들은 의외로 쉽게 풀릴 수 있다. 벨사살의 궁전 벽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 안에 따뜻한 손가락으로 써주시는 그분의 메시지를 통해, 다가온 가을이 모두에게 좀 더 긍정적이고 아름다울 수 있었으면 한다. 가을의 미소를 언뜻 본 듯도 하지 않은가. [가톨릭신문, 2005년 9월 11일, 김혜윤 수녀(미리내 성모성심수녀회, 광주가톨릭대 교수)]

 

 

하느님을 마음에 모시고 산다면 어떠한 역경도 두렵지 않으리라

 

다니 6장은 「사자굴 안에 갇힌 다니엘」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준다. 성서의 그 어느 내용보다 잘 알려진 부분이다. 여기서 넌센스 퀴즈 하나. 여러분들, 세상에서 사자굴에 갇힌 다니엘보다 더 비참한 존재가 누군지 아시는가? 정답은 그 굴 안에 있던 사자이다. 배는 고파 죽겠는데 다니엘을 잡아먹고 싶어도 천사가 입을 틀어막고 있으니(6, 23참조) 약이 올라 심장이 터질 것 같고, 그래도 명색이 「동물의 제왕」인데 그 앞에서 하나도 놀라지 않고 순한 눈망울로 앉아 있는 다니엘 때문에 자존심과 스타일을 구겼으니 그 또한 절대로 남들이 알아선 안 될 일이기 때문이다. 지나친 차분함과 순수는 때때로 상대의 억장을 무너뜨리기도 한다. 가만있자, 주인공은 사자가 아니었지. 수다는 접고 다시 다니엘 이야기로 돌아가기로 하자.

 

아무튼 다니엘이 그런 불가능한 용기를 낼 수 있었던 것은 결코 기적 때문만은 아니었다. 기도로 이루어진 탄탄한 일상과 그로 인해 쌓여진 하느님과의 돈독한 우정이, 지극히 자연스럽고 강한 내면적 힘으로 자신을 지키게 하였던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과장되고 비현실적인 부분이 없지 않지만, 이 이야기는 일상의 기도가 왜 기다림이요 용기인지, 그리고 왜 그러한 힘이야말로 가파르기 만한 삶의 굴곡을 오르는 우리의 소중한 생명을 지켜줄 수 있는 유일한 진실인지를 가르쳐 준다.

 

 

전체의 내용

 

다른 에피소드처럼 6장의 이야기도 역사적 정황들이 비교적 자유롭게 표현되어 있는데, 우선 메데 사람 다리우스(9, 1과 11, 1에도 등장)라는 인물이 그러하다. 역사적 기록에 의한다면 페르시아의 고레스 이전에는 그러한 인물이 통치했던 사실이 없기 때문이다. 아마도 이야기는 메대의 다리우스가 아니라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1세 때를 배경으로 한 것으로 보여 진다. 이러한 오류는 저자가 고레스 이후의 통치자를 이전의 인물로 착각했거나, 아니면 이야기 자체를 철저하게 허구적으로 구성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역사적 사건들을 어긋나게 보도하는 문학적 기교를 적용한 것일 수도 있다.

 

이야기의 주요한 내용은 다니 3장과 많은 면에서 비슷하다. 3장의 젊은이들이 활활 타는 화덕 속에 던져졌다면 6장의 다니엘은 사자굴에 던져졌고, 이야기의 뼈대 역시 거의 동일하게 전개되기 때문이다. 왕의 총애를 한 몸에 받고 있던 다니엘은 동료들의 노여움을 사게 되고, 질투에 혈안이 된 동료들은 다니엘을 궁지로 몰아넣을 계략을 꾸민다. 다니엘은 신앙이 그를 고립시키는 단서였음을 잘 알고 있었지만, 이를 철회하지 않고 오히려 더욱 강한 신앙으로 이 위기를 견뎌낸다. 결국 그는 사자굴 안에 들어가게 되는 극형을 받게 되지만, 그 속에서도 예의 평온함을 유지하며 구출된다. 이러한 기적을 보고 왕은 다니엘의 하느님을 찬양하고 그분께 대한 신앙을 고백한다. 6장의 마지막(29절)은 다니엘이 고레스 통치까지 살았음을 보도하는데, 이는 다니엘이 고레스 원년까지 왕궁에서 살았다는 1, 21의 내용과 맞물려 있고, 이렇게 6장이 1장과 편집적으로 조응한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다니엘서 전반부(1~6장)의 기나긴 여정이 마쳐짐을 암시하고 있다.

 

 

칼을 잡는 것보다 더한 용기, 기도

 

타인의 부정적 시선을 알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결 같이 자신을 지켜갈 수 있는 힘은 도대체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다니엘은 금령의 내용과 자신이 모함에 빠졌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제나처럼 예루살렘을 향해 창이 나있는 다락방에서 하루 세 번 기도를 바친다(11절). 이는 자신이 옳다고 여기는 원칙에 철저하고 이 확신으로 자신을 지키고자 하는 단호함이 바로 구원의 힘임을 강조하고 있다. 제가 누구를 두려워하겠습니까?

 

주변 사람들이 호의적이지 않은 것 같다고 느껴질 때, 이내 마음이 복잡해지고 머리가 아파 오는 것은 누구나 체험하는 인간의 본성이요, 한계일 것이다. 그런 상황에 처하면, 사자굴에 들어간 다니엘과는 비교도 안 되는 상황이지만, 이내 우리는 죽음을 체험하고 만다. 「잡아먹히기도 전」에 이미 「잡아먹힌 듯한 느낌」에 마음이 무너지고 마는 것인데, 그런 무서운 느낌에 사로잡히게 되는 본질적 이유는 타인인 「그들이」 내 삶의 주인으로 서있기 때문이다. 이럴 때 가장 필요한 것은 「그들」이 아니라 「주님」을 내 삶의 주인으로 모시는 「종말론적 연습」이라 하겠다.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이는 하느님이외의 누구도 두려워하지 않으며, 따라서 아무도 입을 벌려 그를 삼켜버릴 수 없기 때문이다.

 

태풍이 지나간 자리, 거짓말 같이 가을이 와 있다. 하느님을 마음에 모시고 있어서 그 누구에게도 내 삶의 소중한 부분들을 빼앗기지 않을 때, 태풍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우리는 자신을 안전하게 지킬 수 있다. 그 분이 내 안에 계신데, 도대체 내가 누구를 두려워한단 말인가? [가톨릭신문, 2005년 9월 18일, 김혜윤 수녀(미리내 성모성심수녀회, 광주가톨릭대 교수)]

 

 

기다림과 견딤 잘 극복하면 풍성한 결실 거둘 수 있어

 

포스트모더니즘 시대가 도래 하면서 세상이 주목한 부분은 ‘보이지 않는 부분’에 대한 매력이었다. 보이는 것만을 보는 것은 너무 평범하고 진부해서, 보이지 않는 부분을 끌어낼 줄 아는 능력이 비범함이 되고, 그런 비범함이 자본과 명예로 이어지는 시대가 된 것이다.

 

현대 미술이나 소설, 영화, 광고, 철학에 이르기까지 사회 전반에서 아이디어를 쥐어 짜내고 있는 부분은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상상력, 그것이 아니던가. 그런데 이러한 구도는 성서 묵시문학 안에서 이미 발견되는 부분이다. 보이는 현실 안에 녹아있는 보이지 않는 것, 그 절대자의 이름을 찾아내어 구차한 삶에서도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포기하지 말자는 것이 묵시문학이 전달하고자 했던 진정한 메시지이기 때문이다.

 

다니엘서 7장은 구원자 ‘사람의 아들’에 대한 절대적인 기다림을 담아 두고 있다. 작가 이문열의 소설 ‘사람의 아들’이, 떠다니듯 방황하며 ‘새로운 신’의 도래를 갈구하던 60~70년대 젊은이들의 갈망을 담고 있다면, 다니 7장은 도래하실 ‘사람의 아들’을 기다리며 박해라는 그 무거운 절망을 견디던 당시 독자들의 갈망을 담고 있다.

 

 

다니 7장의 개관

 

성서 묵시문학의 대표적 본문중의 하나인 다니 7장은 묵시문학이 가지는 가장 기본적 틀을 드러내준다. ① 소재들의 상징성(바다에서 떠 오른 네 가지 짐승, 뿔, 기이한 자연 현상등), ② 천상집회 장면, ③ 환시에 뒤따르는 해석, ④ 해석자의 등장(주로 ‘천사’가 해석자로 등장하며 때로는 ‘천상적 존재’가 해석을 전해줄 때도 있다)이 그것이다.

 

또한 다니 7장에 등장하는 ‘사람의 아들’ 주제는 다니엘서 안에서 가장 중요한 의미를 갖는 주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그리스도교는 전통적으로 다니 7, 13의 ‘사람의 아들 같은 이’를 나자렛 예수님을 지칭한 그리스도론적 표현이라고 주장해왔고, 이 ‘사람의 아들 같은 이’의 오심을 ‘재림’과 연결시켜 해석해왔기 때문이다.

 

 

환시의 내용

 

다니 7장의 이야기는 벨사살 원년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이는 연대기적 순서를 완전히 뒤집는 것으로, 이미 6장에서 벨사살 보다 후대의 인물인 메대의 다리우스 이야기가 언급되고 있기 때문이다. 다니 7장의 이야기는 크게 두 부분으로 구성된다. 전반부(2~14절)에서는 환시의 ‘내용’이 제시되고, 후반부(15~27절)에서는 그에 대한 ‘해석’이 주어진다.

 

다니엘의 꿈은, 하늘에서 갑자기 ‘네바람’이 바다로 몰려오는 것으로 시작된다(3절). 그러자 거대한 짐승 네 마리가 바다에서 올라오게 되는데 모두 괴상한 형체의 것들이었다. 첫 번째는 독수리 날개를 가진 사자였고(4절), 두 번째 짐승은 입에 갈비뼈 세 개를 물고 있는 곰이었으며(5절), 세 번째는 날개와 머리가 각각 네 개씩이나 달려있고, 몸은 표범인 짐승이었다(6절). 마지막 것은 가장 무서운 모양을 한 것이었는데 커다란 쇠이빨을 가지고 있어서 무엇이든 으스러뜨리고 짓밟아 버리는 괴물이었다(7절).

 

이 마지막 짐승은 뿔을 열개 가지고 있었고, 그 사이로 갑자기 작은 뿔이 생기더니 먼저 생긴 뿔 세 개를 뽑아버린다. 놀랍게도 이 작은 뿔에는 사람의 눈 같은 것이 박혀져 있었고, 입이 있어서 말도 하고 있었다(8절). 이후 장면이 바뀌면서 다니엘은 천상옥좌와 거기 앉으신 ‘연세 많으신 분’(9절)을 보게 된다. 불길이 강물처럼 뿜어져 나오는 옥좌에 앉으신 분 앞에서 천상법정이 개최되는데, 이 때 네 번째 짐승은 살해된다(11절). 나머지 짐승들 역시 통치권을 빼앗긴 채 얼마간 연명하지만(12절), 이후 ‘사람의 아들 같은 이’(13절)가 구름과 함께 나타나 ‘연세 많으신 분’께로 인도되고 그에게는 전적인 통치권과 영예가 주어지게 된다(14절). 꿈이 끝나자 다니엘은 천상적 존재로부터 이 환시의 뜻을 설명 받는다(15~27절).

 

이상의 내용을 통해 다니 7장은 박해받던 이스라엘에게, 악한 세력들(네 짐승으로 상징되는)의 종말과 이후에 도래할 메시아(사람의 아들)의 통치를 전하고 있다.

 

 

메시아를 기다림

 

갑자기 혼자 있게 되었을 때, 떠오르는 사람의 이름이 있다면 그는 보물을 간직하고 있는 사람이다. 다니 7장의 저자는, 비록 박해의 위협 속에 하루하루를 살아가던 사람이었지만, 결코 불행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힘이 되어주는 존재, 죽음과 같은 현실을 독하고 무서운 각오로 참아낼 수 있게 하는 존재, 즉 ‘사람의 아들’을 기억하고 있었고, 그분에 대한 기다림을 품고 있었기 때문이다.

 

가을이 되었다. 기다린 만큼 결실도 풍성한 수확의 계절이다. 그러나 지난 봄과 여름이 간절한 기다림과 견딤의 시절이 아니었다면 결코 아름다울 수도 생산적일 수도 없는 계절이기도 하다. 열심히 살지 않았다는 것, 절절하게 살지 못했다는 것, 가을이 낯설게 느껴진다면 바로 그 때문이 아닐까. [가톨릭신문, 2005년 10월 2일, 김혜윤 수녀(미리내 성모성심수녀회, 광주가톨릭대 교수)]

 

 

행복은 자신과의 싸움통해 소중하게 실체를 드러내

 

21세기 경쟁사회가 창출한 많은 이슈들은, 강한 자가 되어 살아남는 것이 곧 행복의 길이라고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강한 자가 되는 것’과 ‘행복할 수 있는 능력’은 별개의 주제이다. 행복할 수 있는 능력은 ‘확보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삶에 대한 건강한 의식을 통해 ‘다가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니엘서 8장은 그 어떤 힘에 의해서도 부서질 것 같지 않던 독재의 덫이 하느님에 의해 어떻게 산산이 부서지는 지를 설명해 준다. 특별히 25절은 “사람의 손이 닿지 않아도 부서질 것이다.”라고 언급함으로써 인간이 아무리 애써 보존하려고 해도 하느님께서 허락하시지 않으신다면 단 하나도 유지할 수 없음을 제시하고 있다.

 

 

전반적인 개관

 

다니 8장이 가지는 가장 큰 특징은 본문이 다시 히브리어로 기술된다는 점이다. 아람어로 씌어진 2, 4b~7, 28에 이어, 1장을 시작할 때 사용되었던 히브리어가 다시 등장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8장은 7장의 배경이 된 벨사살 통치를 여전히 시대적 배경으로 삼고 있다. 1절의 “첫 번째 환시에 이어”라는 언급은 먼저 주어진 환시(7장)가 있었음을 암시한다.

 

 

전반적 내용

 

8장은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되어있다. 다니엘은 환시를 통해 숫양과 숫염소를 보게 되는데 숫염소는 숫양을 공격하여 승리를 거둔다. 그러는 사이 숫염소의 큰 뿔은 네 개의 뿔로 변하고, 네 개의 뿔은 다시 ‘작은 뿔’로 대체된다. 이러한 환시의 해석자로 등장한 가브리엘은 이 환시가 메대-페르시아, 그리고 그리스제국의 역사를 표현한 것임을 알려준다.

 

즉 숫양의 머리에 난 두 뿔은 각각 메대와 페르시아를 상징하고, 숫염소는 그리스를, 두 눈 사이에 있던 뿔은 알렉산더 대왕를 말한다.

 

숫염소가 숫양을 무찌르는 장면은 알렉산더의 메대와 페르시아 정복을 의미하고 이 뿔이 부러지고 4개의 뿔이 새로 나는 모습은 그의 급작스런 전사와 제국의 4분할 통치를 의미한다. 특별히 숫염소의 작은 뿔은 안티오쿠스 4세를 상징하며, 그의 무서운 폭력은 인간의 능력이 아닌 하느님에 의해서만 평정될 것임이 제시된다.

 

 

역사적 상황

 

다니엘서는 ‘사후예언’의 시각에서 서술된 책이다. 다니 8장도 예외는 아닌데, 내용상으로는 다니엘이 벨사살 3년(즉 바빌론 통치 때)에 미래에 있을 사건들을 내다보는 설정으로 되어있지만 사실 환시를 통해 제시되고 있는 이 사건들은 이미 저자나 당시의 독자들이 경험한 바 있던 안티오쿠스 4세의 박해에 대한 보도이다. 즉 저자는 그들이 이미 체험한 사건들을 바빌론 시대의 벨사살 통치라는 가상적 설정 안에 재구성하고 있는 것이다.

 

 

다니 8장의 의미

 

다니 8장은 7장과는 다른 환시를 전하고 있지만 사실은 동일한 주제를 반복하고 있다. 세상에는 악과 폭력이 난무하지만 이러한 악은 세상의 주인이신 하느님에 의해 평정될 것이라는, 바로 그 주제이다. 특별히 8장은 25절에서 “사람의 손이 닿지 않아도 부서질 것이다”라는 표현을 통해 하느님에 의한 직접적인 평정을 강조하고 있다.

 

이는 묵시문학의 중요한 신학 중의 하나인 ‘비폭력성’에 대한 뚜렷한 표현이라고 할 수 있는데, 1) 악한 자들의 폭력이 언젠가는 종식될 것이라는 점, 2) 이 종식은 그 어떤 인간의 힘에 의해서도 이루어지지 않고 초월자의 개입으로만 이루어질 것이라는 점이 강하게 부각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부분은 다니엘서 전체를 이해하는데도 결정적 시각을 제시한다. 다니엘서의 익명의 저자는 당시 거세게 일어나고 있던 유다 마카베오의 ‘무력항쟁’에 편승하지 않고, 하느님의 직접적 개입만을 희망하는 ‘비폭력적 입장’을 강력히 피력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저자는 모두를 파국으로 이끄는 ‘무력 저항의 길’보다는, 초월자에 대한 절대적 경외를 근거로 한 ‘비폭력적 자세’가 사실상 가장 지혜로운 선택일 수 있음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행복이란

 

감기가 오는가 싶어 바로 주사를 맞았다. 아프기에는 할 일이 너무 많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예방주사라는게 병균을 투여하여 항체를 만드는 것이라 한다. 결국 병균을 투여해 싸움을 거는 거였다. 병균들이 들어와 내 몸이 싸움터가 되어야 건강해진다는게 우스웠지만, 그게 삶이구나, 그런 생각이 스쳤다.

 

행복은 타인과의 싸움을 통해 획득되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과의 싸움을 통해 다가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행복은 내가 남보다 낫다는 상대적 우월감을 통해 주어지는 ‘잠시적 환상’이 아니라, 자신과의 정직한 싸움을 통해 아주 힘들게 그러나 그만큼 소중하게 실체를 드러낸다는 것, 이 사회가 배워야할 가장 기본적 상식이 아닐런지…. [가톨릭신문, 2005년 10월 9일, 김혜윤 수녀(미리내 성모성심수녀회, 광주가톨릭대 교수)]

 

 

기대에 못미친다 좌절하지 말고 믿음과 희망을 갖고 최선 다해야

 

나의 무능함이 어찌 부모 탓이랴마는, 다가오는 상처를 이기지 못하면 언제나 애꿎게 화살을 꽂는 곳은 부모님이다. ‘어쩌겠니, 그게 네 인생인걸.’ 부모 원망에 잔인하게 속을 긁어 놓는 철없는 딸에게, 힘없는 전화 목소리로 엄마가 해주신 말이었다.

 

삶이라는 회피할 수 없는 고통을, 마치 엄마가 나를 낳음으로써 고스란히 전해 준 듯한 자책이 서려 있는 말이어서 속이 더 뒤집어 졌다. 공교롭게도 그 다음 날 미사의 독서는 요나 이야기의 한 단락이 나와 있었다. 아주까리 잎으로 더위를 면할 그늘을 주시면 ‘그럼 그렇지, 내가 누군데’ 하다가, 잎이 말라 햇빛에 시달리게 되자 ‘이렇게 사느니 죽는 편이 낫겠습니다’를 연발하는 요나. ‘내가 못살아…’를 연발하는 나의 모습 그대로를 보는 듯했다.

 

다니 9장은 70주간이라는 고통의 시간을 언급한다. 이 숫자가 무엇을 상징하는지에 대해서는 여러 의견들이 분분하지만, 이 한정된 기간을 통해 고통도 끝이 있음을, 삶이 아무리 견딜 수 없을 것 같아도 결국은 흘러가는 것임을 표현해 준다. 이를 통해 다니엘서는 박해의 고통 속에 ‘차라리 죽는 편이 낫겠습니다’를 연발하던 유다인들에게 ‘죽음까지도 이길 수 있는 희망’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다니 9장의 특징

 

다니 9장은 짧은 도입문으로 시작되고, 죄의 고백과 자비를 구하는 내용의 긴 기도문이 이어지며, 천사의 담화부분으로 마무리된다. 서로 다른 문학 양식들이 함께 어우러져 있는 특징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또한 예루살렘의 멸망과 그 기간(70년)에 대하여 언급한 예레미야서 25, 11~12; 29, 10를 해석하는 독특한 양식(미드라쉬)을 적용하고 있다.

 

 

전반적 내용과 구조

 

다니 9장의 전체적 내용은 이러하다. 어느 날 예레미야 예언서를 읽고 있던 다니엘은 예루살렘이 멸망하고 다시 회복되기까지 70년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내용을 알게 된다(2~3절). 그러나 그 뜻을 정확히 이해하지 못해 고심하고 하느님께 기도를 바친다. 이어 가브리엘이 등장하여 그 비밀을 풀어주는데, 이 부분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일흔 주간’(24절), ‘일곱 주간’, ‘예순두 주간’(25절), ‘한 주간’(27절), ‘반주간’(27절) 등이 제시하는 시간 개념들이다. 정확하게 이 숫자가 어느 계산법에 의한 것인지 명시된 바는 없지만, 분명한 것은 여기서 ‘주간’이라고 제시된 것이 현재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주간과는 다른 개념이라는 점이다.

 

즉 우리는 일주간을 ‘칠일’ 단위로 보고 있지만, 다니 9장에서 언급하고 있는 일주간은 ‘칠년’으로 구성된 개념이다(이와 같은 계산법에 대해서는 민수 14, 34 참조). 그렇다면 24절에서 언급된 ‘일흔 주간’은 곧 우리의 계산법으로는 7년(1주간)×70이 되어서 490년에 해당되는 기간이 된다.

 

같은 방법으로 계산하여 25절의 ‘일곱 주간’은 7×7이 되어 49년을 말하고, ‘예순두 주간’은 7×62가 되어 434년을 말하며, ‘한 주간’(27절)은 7년, ‘반 주간’(27절)은 삼 년 반을 의미한다.

 

다니 9장에 언급되어 있는 이 기간들이 구체적으로 어떤 사건들을 가리키는 것인지는 학자들과 세간의 관심을 모아왔고, 이러한 논쟁을 중심으로 종말에 대한 계산을 주장하는 ‘시한부 종말론’도 각양각색으로 발생하였다.

 

현재까지도 개신교의 몇몇 교파들은 이 기간들을 종말에 있을 그리스도의 재림과 적 - 그리스도의 출현에 대한 예고로 해석하고 있다.

 

곧 다니 9장에 등장하는 고통의 기간 ‘70주간’을 시간적으로 계산하여 시한부적 종말을 준비하는데 적용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다니 9장의 종말에 대한 상징적 기간들은 전적으로 다니 9장의 저자와 독자가 경험했던 당시의 혼란과 고통의 역사에 대한 상징적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이스라엘이 고난을 당해야 할 70주간(490년)은 정확한 역사적 사건에 근거한 기간이라기보다는, 레위 25장에 언급되어 있는 ‘희년’에서 영감을 받은 상징적 숫자라고 이해해야 하는 것이다. 희년’이 ‘해방의 해’이듯이 ‘490년’은 고역의 시간이 지난 해방의 해를 의미한다.

 

 

한계도 아름다움이다

 

우리의 고통은 대부분 기대에 대한 좌절 때문에 생긴다. 엊그제 부모의 마음을 긁어 놓은 심술도, 사실은 의욕은 앞서지만 거기에 상응하지 못하는 자신의 부족함 때문에 생긴 일이었다. 자신의 무능함에 상처받고, 그 부족함을 비웃는 이들이 많을까봐 또 상처받고…

 

혹시 저처럼 욕심이 많아 스스로 무덤을 파는 분들이 계시다면 들려드립니다. 제 수첩 한 귀퉁이에 적혀 있는 구절을요. ‘기대한 만큼 채워지지 않는다고 초조해 하지 마십시오. 믿음과 희망을 갖고 최선을 다한 거기까지가 우리의 한계이고, 그것이 우리의 아름다움입니다.’ [가톨릭신문, 2005년 10월 16일, 김혜윤 수녀(미리내 성모성심수녀회, 광주가톨릭대 교수)]

 

 

하느님께 대한 확고한 믿음으로 모욕과 분노, 공포 견뎌내야

 

창의력과 아이디어가 이젠 바닥을 쳤나보다. 다니엘서 10장에 대한 원고를 쓰려고 끙끙대 보았지만 이전에 썼던 내용과 비슷한 얘기만 머릿속에 떠오른다. 드디어 올 것이 오고야 말았구나 하는 생각에 꿈속에서까지 원고를 써보았는데, 거기에서도 신통한 장면은 나오지 않았다. 암이나 교통사고보다 사람을 더 많이 해치는게 두려움이라더니 이제는 원고 쓰기도 두려움이 되어 버렸다(엄살 좀 보태서…). 그런 이유로 이번 주 시작하는 말은, 사순시기는 아니지만, 굶는다.

 

 

10~12장 : 거대한 역사적 보고서

 

다니 10~12장은 하나로 형성된 거대한 단일 문학작품이라고 볼 수 있다. 고레스왕 3년, 한 천상적 인물에 의해 다니엘에게 주어진 환시를 내용으로 하고 있는 이 부분은 고대 중동 지방의 ‘역사 개관’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당시의 실제적 상황을 상세히 소개하고 있다. 페르시아 시대와 그리스 알렉산더 시대를 거쳐 안티오쿠스 4세의 폭정과 그의 종말까지의 역사가 본문이 소개하고 있는 내용이다. 다니 10~12장이 일반 역사서술에 비해 구별되는 점이 있다면 상징 언어, 즉 전형적인 묵시문학적 문체로 서술하고 있다는 점이다.

 

특별히 다니 10장은 천상적 인물과 다니엘의 대화로서 앞으로 계속하여 진행될 역사적 계시(10~12장)의 ‘서론’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내용

 

전형적인 묵시문학 작품에 해당되는 다니엘서 후반부(7~12장)는 전쟁에 대한 언급으로 진행된다. 네 마리 짐승과의 전쟁(7장), 숫양-숫염소와의 전쟁(8장), 70주간 동안의 전쟁(9장)에 이어 이제 10장에서는 천사들간의 전쟁이 언급되고 있기 때문이다.

 

다니 10장은 페르시아의 첫 번째 왕인 고레스 3년, 다니엘이 3주간의 고행 중에 받은 묵시를 기술하고 있다.

 

이 환시는 히브리 성서에서 ‘고레스 3년’에 주어졌던 것으로 되어 있는데, 칠십인역에서는 고레스 1년으로 제시되고 있다. 연대기적 부정확함의 문제는 앞으로 소개될 내용들이 역사적 사실에 대한 ‘정확한 보도’라기 보다, 이러한 여러 사건들 뒤에 감추어져 있는 하느님의 의도를 ‘신학적으로 재구성’한 것임을 암시한다.

 

다니 10장이 가지는 또 다른 특징은 다니엘을 ‘벨트사살’이라는 이름으로 소개하고 있다는 점이다. 다니엘서의 마지막 환시인 이 부분(10~12장)에서 다니엘을 전반부에 등장한 이름 ‘벨트사살’로 부름으로써, 이 책의 마지막과 처음을 서로 연결시키려는 편집적 의도가 반영되어 있는 것이다.

 

환시는 천상적 존재가 알려주는 ‘큰 전쟁’에 대한 것으로 천상적 존재는 다니엘이 ‘깨달음을 얻기 위하여 극기하기로 결심한 첫날부터’ 하느님께서 그의 말을 들으셨음을 전달한다(12절). 이 전쟁은 페르시아의 장수와 천상적 존재 자신이 벌이는 싸움이라는 것, 그리고 이스라엘의 수호자 미카엘이 그를 돕기 위해 올 것이라는 사실이 제시된다. 그는 ‘진리의 책에 적힌 것’을 알려주고, 이스라엘의 제후 천사 미카엘 말고는 적들을 대적할 이가 없음을 분명히 강조한다(21절).

 

 

신학적 의미

 

다니 10장의 저자는 그들의 역사가 이미 ‘진리의 책’에 적혀져 있는 대로 가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인간의 의무는 그저 이 길을 수용하고 걷는 것뿐임을 독자들에게 강조한다.

 

역사의 주인이신 하느님은 당신과 당신을 따르는 이들을 위한 궁극적인 승리를 위해 역사를 움직여 가고 계시고, 따라서 하느님께 성실한 태도를 일관하는 것은 현재의 폭력적 매커니즘에 대항하는 또 하나의 묵시주의적 투쟁방식이라 볼 수 있다. 하느님의 정의로우심을 믿으며, 그 분의 최후 승리를 확신할 때, 현재적 불의와 폭력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망가지지 않고도, 혹은 비열한 타협을 자청하지 않고도, 폭력의 소용돌이를 걸어갈 수 있다는 것, 묵시문학 저자들이 제안했던 ‘삶의 질서’인 것이다.

 

 

기억과 극복

 

나이가 든다는 것은 사람들이 모두 내 마음 같지 않다는 것을 알아가는 과정일지도 모르겠다. 타인의 마음과 나의 마음이 다르다는 사실을 애써 외면해보지만, 결국에는 그걸 알아버리고야 마는 것, 그것이 고통으로 다가오지만 별 도리없이 받아들이는 법을 배우는 것… 오늘의 모욕을 기억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일 아침 일어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그 누구를 다시 만난다 하더라도 결코 서먹하지 않게 시작하는 것은 인간 모두가 어려워하는 삶의 과제일 것이다.

 

모욕을, 분노를, 공포를 견디는 힘, 그것은 이 모든 현실을 지켜보고 계시는 하느님에 대한 확고한 믿음 때문에만 가능하다. 그러니, 인생의 낯선 시간도 우리는 견딜 수 있다. 하느님께 대한 확실한 믿음만 있다면… [가톨릭신문, 2005년 10월 23일, 김혜윤 수녀(미리내 성모성심수녀회, 광주가톨릭대 교수)]

 

 

남을 위한 숭고한 희생과 고통은 인간이 진정 아름다울 수 있는 이유

 

인간이 도무지 상상하지 못했던 방식으로 발전해 나가는 것이 ‘역사’이다. 역사의 주인은 인간이 아니라, 우주를 지어내시고 이룩해 가시는 하느님이시기 때문이다.

 

불과 20년 전만 해도 소비에트 연방이 그런 방법으로 무너지리라고는, 그리고 북한 배우가 우리 방송의 광고스타가 되리라고는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었다.

 

결국 역사는 아주 사소한 것일지라도 하느님에 의해 결정되어 가는 것이다. 개인의 역사도 마찬가지이다. 내일, 아니 5분 후에 내가 어떤 모습으로 되어 있을지, 엄밀한 의미에서 본다면,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 근래 있었던 파키스탄의 지진, 발리 폭발사고 등은 그러한 삶의 진리를 여실히 보여준다. 근사한 레스토랑에서 밥을 먹으며 호화로운 휴가를 지내는 중에도 ‘5분 후의 죽음’은 언제나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니 11장은 근동 지역의 역사 전개를 통해, 모든 역사는 하느님의 원하심과 그분의 계획대로 이루어짐을 제시해주고 있다.

 

 

개관적 특징

 

다니 11장은 페르시아의 마지막 왕으로부터 시작하여 시리아 셀류쿠스 왕조의 안티오쿠스 4세(에피파네스)에 이르는 근동지역의 역사를 상징적인 문체로 서술하고 있는 일종의 ‘역사 보고서’이다. 등장하는 인물들의 실제 이름들이 명시되고 있지는 않지만, 그에 대한 서술과 묘사를 통해 당시의 독자들은 쉽게 그 내용의 주인공이 누구인지를 알아낼 수 있었다.

 

 

구성

 

본문은 하나의 사건을 일반적인 기승전결 기법으로 서술하지 않고, 매우 다양한 사건들을 열거함으로써 이를 통합하는 메시지를 부각시키고 있다. 왕들의 등극과 함께 근동의 패권이 어떻게 변화되었는지를 매우 길게 묘사하고 있는 11장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페르시아 시대(2b절) -> 2) 알렉산더의 등장(3~4절) -> 3) 프톨레미 왕조의 발전(5~6절) -> 4) 이집트와 시리아의 전쟁(7~9절) -> 5) 안티오쿠스 3세(10~19절): a.제1차 이집트 원정(10~12절); b.제2차 이집트 원정(13~15절); c.전성기(16~18a절); d.몰락(18b~19절) -> 6) 셀류쿠스 4세의 짧은 통치(20절) -> 7)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21~45절): a.등극(21~24절); b.제1차 이집트 원정(25~28절); c.제2차 이집트 원정과 유다인 박해(29~35절); d.전성기(36~39절); e.최후 전투와 죽음(40~45절).

 

 

박해에 대한 대응 : 마스킬림 프로파간다

 

위의 여러 사건들을 모두 다 설명하기에는 지면의 한계가 있어, 그것들 중 저자가 가장 부각하려 했다고 생각되는 부분을 선택하여 설명하기로 한다. 박해에 대한 이스라엘 측의 반응은 여러 가지였다.

 

‘영합’과 ‘투항’의 자세를 취하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이에 대한 무력적 대응도 있었다(마카베오 항쟁의 경우). 그러나 다니 11장의 저자는 ‘마스킬림’이라는 이들을 전면적으로 부각시킴으로써, 이들이 보여주었던 비폭력적 대항을 가장 고무적인 자세로 제시하고 있다(32~34절). 그들의 대사회적 기능은 정신 의식의 고취(계몽)와 연관된 것으로서, ‘많은 사람’(33절)들이 그 시대의 징표와 사건들을 통한 하느님의 뜻을 ‘알게’하도록 하는 것과 이 앎을 통한 비폭력적 대항을 제시하는 것에 집중되어 있었다. 즉, 현재 일어나고 있는 모든 고통스러운 사건들은 하느님의 손에서 조정되는 사건들이고, 이미 그 결과는 하느님과 그분께 충실한(의인들) 이들의 승리로 정해져 있다는 사실을 ‘인지’ 함으로써, 지혜롭게 이 시련의 시간들을 ‘견디어내자’는 것이다.

 

결국 이러한 입장에서 본다면, 모든 것은 하느님의 손에 의해 이루어져 나가는 역사의 과정이므로, 인간 측의 무력저항이나 물리적 책략은 필요하지 않다. 오직 강한 신앙과 역경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자신을 지키려는 의지, 고통을 통해 자신을 정화하려는 자세만이 필요한 것이다(35절). 이러한 입장은 ‘순교’에 대한 절대적 지지로 발전하고, 이에 대한 보상은 이어지는 다니 12장에서 ‘부활’이라는 주제로 제시된다.

 

 

삶을 완성시키는 방법

 

스스로를 중대한 인물로 여기는 과대망상과 타인들에 의해 중요한 인물로 평가되는 것은 다른 일이다. 스스로를 ‘신의 나타남’(에피파네스)이라 칭하며 남의 목숨을 유린했던 안티오쿠스 4세와 목숨을 바쳐가면서까지 유다인으로서의 정체성과 하느님께 대한 신앙을 수호하려했던 마스킬림의 대비를 통해, 저자는 ‘단 한 번에 삶을 완성시키는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갈등과 흔들림으로 가득한 인간의 삶이지만, 그래도 구원과 자유를 향해 나가길 원한다면 길은 단 하나, ‘자기희생’이라는 과제를 거쳐야 한다는 것이다. 인간이 아름다울 수 있는 이유는, 때로는 남을 위해 상실의 고통을 선택할 수도 있는 숭고한 희생 때문은 아닐는지… [가톨릭신문, 2005년 10월 30일, 김혜윤 수녀(미리내 성모성심수녀회, 광주가톨릭대 교수)]

 

 

자신의 한계와 현실 정확히 직시하고 스스로 변할 때 새 희망 찾을 수 있어

 

이미 너무 늦어버렸을 때, 사실은 그 때가 새로 시작해야할 시점이라는 말, 살면서 더욱 실감하게 되는 진리이다. 때로는 이런 생각마저 든다. 이미 늦어버렸다고, 죽음 밖에는 길이 없다고 낙담하고 있었을 때, 바로 그 절망 속에서 하느님은 이미 또 다른 길을 시작하고 계셨던 것은 아닐까라는….

 

대부분의 성경 저자들은 종말이 곧 임박했다는 의식을 가지고 성경을 저술하고 있었고,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는 종말에 대하여 여러 가지 다른 해석을 제시하였다.

 

다니 12장은 다니엘서의 마지막 장으로, 지연되는 종말에 대한 각기 다른 숫자들을 언급한다. 다니엘서가 서로 다른 날짜를 그대로 함께 제시하고 있다는 사실은, 최종 편집자가 중요시 여겼던 것이 종말에 대한 정확한 숫자 제시가 아니라, 그 숫자가 가지는 상징적 의미였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늦었다’고 생각되었을 때 이미 다른 구원이 ‘시작’된 것이라는 역설이 모순이 아니라 삶의 희망이고 진리이듯, 종말론적 구원은 ‘늦어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지금 이 자리에서 ‘시작’되고 있음을 깨닫는 것이야말로 성서 묵시문학이 제시하고자 하는 ‘지금, 여기’(hic et nunc)의 신학이라 할 수 있다. 12장의 내용에 접근해 보기로 하자.

 

 

개관

 

다니 12장은 크게 두 부분은 나뉘어 진다. 첫 부분은 이미 10장에서부터 시작된 ‘천사 담화’에 연결된 부분으로 담화의 결론에 해당되는 12, 1~4이고, 두 번째 부분은 다니엘서 전체의 결어 부분에 해당되는 12, 5~13이다.

 

 

내용

 

10장부터 시작된 고대 근동의 역사 이야기는 안티오쿠스 4세의 최후로 종결된다(12, 1). 이스라엘의 제후 천사(10, 13.21 참조) 미카엘이 승리하게 된 것이다. 그의 승리는 곧 하느님 백성의 승리로 연결되지만 모든 이스라엘 백성이 구원되는 것은 아니었다.

 

구원이 ‘생명의 책’에 이름이 기록되어 있는 이들에게만 해당되는 특권임을 12, 1은 분명히 하고 있다. 구원의 구체적 내용은 ‘부활’이다(2절).

 

땅 속에 묻혀 있는 이들 중, 많은 이들이 깨어나 보상을 받겠지만, 어떤 이들은 영원한 부끄러움 속에 남아있게 될 것임이 제시되고 있다. 즉 다니엘서는 분명 죽은 이들의 부활을 언표하고 있지만, 이 부활이 모든 이에 해당되는 그런 ‘보편적 부활’은 아님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부활을 보장받은 이들 중 특별히 부각되어 있는 이들은 ‘지혜로운 자들’, 즉 마스킬림이다. 그들은 마치 ‘하늘의 별들처럼 될 것’임이 묘사되어 있는데(3절), 유다 전승에 의하면 별들은 천상적 존재, 즉 하늘나라의 구성원을 의미하며, 결국 별처럼 된다는 의미는 하늘나라의 구성원으로 격상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지혜로운 자, 즉 신앙에 충실했던 이들(마스킬림을 중심으로 비폭력적 대응에 섰던 이들)은 고통을 받겠지만, 그 고통을 통해 정련되어 최후의 보상을 받게 될 것이고, 이러한 구원의 속성을 깨달은 이들은 지혜로운 이들로서, 현재의 고난을 견디어 낼 수 있는 내적인 힘을 받게 된다는 것이, 이와 다른 모습을 선택한 이들과의 대조를 통해 다신 한번 강조되고 있다.

 

12장의 마지막은 다니엘 자신의 개인적 부활에 대한 약속으로 되어 있다(13절). 다니엘의 최후는 정확히 마스킬림에게 보장된 약속과 동일하게 제시되고 있는 것이다. 다니엘서 저자의 마스킬림 소속설을 다시 한번 확인하게 하는 구절이다.

 

 

변화되지 않는 것 앞에서

 

묵시문학과 예언문학이 제시하는 종말론의 가장 궁극적 차이는 ‘세상을 인간의 힘으로 변혁할 수 있는가?’에 대한 입장이다.

 

예언서는 이를 긍정적으로 보지만 묵시문학은 대체로 비관적이다. 세상은 오로지 ‘하느님의 힘’으로만 변혁될 수 있다고 이해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세상의 개혁을 주장하며 민중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카리스마적 지도자라해도 정권을 잡게 되면 이내 민중을 외면하고야 마는 현실을 반복적으로 경험하면서, 더 이상 인간의 통치에는 기대를 두지 않겠다던 마음이 묵시문학에 그대로 반영되어 있는 것이다.

 

현실에 상처 입은 마음과, 현실에는 더 이상 기대를 두지 않는 시선이 다소 비관적이고 음성적인 태도처럼 보일 수 있지만, 사실은 묵시주의의 이러한 입장은 그 어느 사조보다도 인간의 한계와 현실을 정확히 직시한, 현실적이고도 진보적인 사조일 수 있었다.

 

변화시킬 수 없는 것들 앞에서 그래도 희망을 갖자는 무기력하고 고루한 호소보다 더 희망적일 수 있는 것은, 내가 변하자는 태도일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변할 때 삶은 의외로 쉽게 찾아질 수 있다. [가톨릭신문, 2005년 11월 6일, 김혜윤 수녀(미리내 성모성심수녀회, 광주가톨릭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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