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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구약] 다니엘: 개관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0-07-31 조회수4,142 추천수1

[김혜윤 수녀의 성서말씀나누기] 다니엘 (1-4) : 개관 (1-4)

 

 

모든 이들을 넉넉히 받아들이고 삶의 행복 발견하는 지혜 가져야

 

「불행」과 「행복」의 명징한 차이가 뭔지 아시는가? 불행은 노력하지 않아도 오는데 행복은 노력해도 잘 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한 가지 더. 「무의미한 고통」과 「참된 고통」사이의 차이가 무엇인지 아시는가? 무의미한 고통은 인간을 내외적으로 붕괴시킬 뿐이지만, 참된 고통은 인간을 더욱 참된 자아로, 고귀한 내면적 가치를 가진 자유로운 인간으로 성숙시킨다는 것이다.

 

결국 무의미한 고통은 인간을 처참하게 죽이고, 참된 고통은 사람을 진짜로 살게 한다.

 

오늘부터 살펴보게 될 다니엘서는 지혜로운 사람 다니엘의 인생여정을 통해 「진정 시련은 불행일까?」라는 질문을 우리에게 던지고 있다.

 

시련과 고통은 결코 누구에게도 만만치 않은 현실적 과제이며 무거움이지만, 지혜로운 자에게는 시련과 억압이 결코 불행과 상처가 될 수 없음을 제시해주고 있는 것이다. 인생의 어두운 그늘들을 통과하면서 인간은 비로소 하느님의 지혜를 체험하기 때문이다.

 

 

개관

 

성서의 책들 중, 다니엘서만큼 복잡한 문제들을 많이 안고 있는 책도 드물 것이다. 다니엘서의 외형만을 본다하더라도 우리는 복잡한 다원적 구조를 쉽게 찾아낼 수 있다.

 

1) 두 가지 경전

 

다니엘서는 성서 안에서 두 부분으로 나뉘어져 등장하는데 일부는 제1경전에 속하고 나머지 부분은 제2경전에 속해 있다. 지난주까지 살펴본 에스델서와 비슷한 문제를 갖고 있는 것이다. 이런 특이한 예를 보여주고 있는 책은 성서 안에서 다니엘서와 에스델서 뿐이다.

 

2) 세 가지 언어

 

원어로 된 다니엘서를 보면, 언어문제 역시 복잡하게 얽혀져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하나의 책 안에 세 가지 언어(히브리어, 아람어, 그리스어)가 혼용되어 있음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제1경전에 해당되는 부분은 셈족 계열 언어인 히브리어와 아람어로 서술되어 있는 반면, 제2경전 다니엘서는 그리스어로 되어있다. 제1경전 역시 사용된 언어에 따라 두 부분으로 구분되는데 처음과 끝부분(1, 1~2, 4ㄱ과 8~12장)은 히브리어가 사용되었고, 그 사이에 들어가 있는 부분(2, 4ㄴ~7, 28)은 아람어로 되어있다.

 

다니엘서는 여러 그리스어 역본들에 대해서도 각별한 관심을 갖게 하는데, 특별히 칠십인역과 테오도시온역이 큰 차이를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학자들은 테오도시온 번역이 히브리어 본문에 더 근접해 있다고 보고 있다.

 

3) 두 가지 위치

 

다니엘서가 배치되어있는 자리도 성서에 따라 다르게 등장한다. 그리스도교의 성서라 할 수 있는 칠십인역에서는 다니엘서가 「예언서」 범주에 자리하고 있지만, 히브리 성서는 다니엘서를 「성문서」 안에 자리매김 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디아스포라 유다인들은 다니엘서를 예언서 그룹에 위치시켰지만, 본토의 유다인들은 이를 지혜문학과 가까운 성문서의 하나로 본 것이다.

 

이러한 문제는 비단 문학적 - 문체적 성격의 구분일 뿐 아니라, 저작 연대와 정경 목록에로의 영입 시기와도 관련되어 있어 더욱 복합적인 문제로 남아있다.

 

4) 두 가지 장르

 

내용 역시 두 가지 장르가 혼합되어 구성되어 있는데, 전반부(1~6장)는 다니엘과 그의 친구들이 벌이는 전설적 이야기들이 「설화」 양식으로 소개되고 있는 반면, 후반부(7~12장)는 환시를 등장시키는 「묵시문학」 양식을 취하고 있다.

 

 

행복은 네 곁에 있다

 

그 어떠한 상황에서도 행복과 성공을 만들어 내는 사람을 우리는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부른다. 「현자」(賢者) 다니엘이 가지고 있던 행복의 비결은 언제 어디서도 「그분과 함께」 한다는 의식이었고, 사실 이 의식은 신구약 성서전체가 끈질기게 제시하고 있는 구원의 비결이기도 하다.

 

지혜롭지 못한 사람은 주위에 잔잔히 퍼져있는 행복을 결코 발견하지 못한다. 정말 행복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행복하지 않다고 느끼는 어리석음이 그를 정말로 불행하게 하는 것이다.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세상이지만, 현재를 행복으로 전염시키는 것, 언제나 얼씨구나 좋다, 하는 마음으로 모두를 넉넉히 받아들일 수 있는 저력, 하느님 아니면 불가능한 기적들이다.

 

「행복이란 네 곁에 있다」. 우리나라 60~70년대 동네 이발소에 걸려 있던 액자 속의 말이 아니라 유명한 괴테의 말이다. 그렇게 저명한 분의 말씀이라니 왠지 한번 정도는 믿어봐야 할 것 같지 않은가? [가톨릭신문, 2005년 6월 19일, 김혜윤 수녀(미리내 성모성심수녀회, 광주가톨릭대 교수)]

 

 

우리를 삼켜버릴지 모를 절망 강한 신앙의 힘으로 극복하자

 

불과 3년 전까지 만해도 거의 매일 한강을 보면서 통학하거나 출근을 해서인지, 지금도 한강을 보면 늘 반가운 마음이 든다. 그런데 내가 본 것은 그저 한강의 화려한 외형이었을 뿐, 그 자체를 본 것은 아니라는 것을, 이번 봄 소풍 때 우연히 앉게 된 작은 개울가에서 깨달을 수 있었다. 그렇게 늦게서야, 남들 다 아는 진리를 깨닫는다는게 나 자신에게는 고통이지만, 더 늦기 전에 알려주신 하느님께 감사하기로 했다. 다분히 촌스러운 이야기가 되겠지만, 거기서 나는 『삶은 강물처럼 흘러가는 것이구나』라는 생각을 처음으로 하게 되었다. 아무리 무시무시하고 견딜 수 없을 것 같은 순간도 살다보면 다 흘러가는 것이라고, 그렇게 상처와 흉터를 가지고도 삶은 계속되는 것이라고, 돌돌돌 깨끗한 소리를 내며 흘러가던 작은 강은 내게 조용히 말해주었던 것이다.

 

다니엘은 파란만장한 역경을 거치면서도 하느님께 대한 전적인 신앙으로 그 많은 우여곡절을 극복해 낸다. 마침내 최고 재상의 자리에까지 오르는 그의 모습을 통해, 우리는 고통의 순간은 그렇게 흘러가는 것임을 다시금 확인하게 된다.

 

 

저자문제에 대한 전통적인 입장

 

다니엘서는 다니엘이라는 인물에 대하여 두 가지 다른 방식의 보도를 하고 있다. 1~6장에서는 다니엘을 「그-3인칭시점」에서 소개하고 있지만 후반부인 7~12장에서는 「나-1인칭 시점」으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 교회는 전통적으로 이 책이 언급하는 「나」를 책의 저자로 간주했고, 「나」는 기원전 6세기, 바빌론에 포로로 끌려갔던 바로 그 「다니엘」인 것으로 생각해왔다. 이 같은 교회의 해석은 초세기 교부들로부터 16세기에 이르기까지 정설처럼 군림하여온 입장인데, 이와 다른 주장을 편 학자들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예로니모는 「다니엘서 주석」이라는 저서에 포르피리(Porphyry)의 증언을 인용하면서, 다니엘서는 기원전 6세기의 작품이 아니라, 기원전 2세기의 작품이라는 것을 명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기원전 2세기 제작설에 대하여

 

앞에서 제시된 포르피리의 증언은 다니엘서의 저자를 기원전 2세기경의 인물로 주장하고 그 시기에 책이 저작되었음을 제시한다. 다니엘서가 배경으로 삼고 있는 시기는 바빌론 유배시기(기원전 6세기)이지만 이는 그저 이야기의 배경이었을 뿐, 실제 제작된 것은 그보다 400년 후인 안티오쿠스 박해 때(기원전 2세기)라고 보고 있는 것이다. 즉, 2005년에 저술된 저서라고 해서 꼭 현대적 배경의 이야기와 소재만을 고집하지는 않는 것과 같은 맥락이라고 할 수 있겠다.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은 이 시대극들이 동시대를 살고 있는 독자나 시청자들에게, 단순히 그 먼 옛날의 사회-생활을 보도하는 「다큐멘터리성」 기능만을 수행하지 않고, 그들에게 도움이 되는 메시지를 실어놓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다니엘서라는 시대극(?)을 읽으며 놓쳐서는 안되는 점이 있다면, 바빌론 유배라는 기원전 6세기의 배경 속에 숨겨져 있는, 그러나 400년 후인 기원전 2세기 독자들에게 반드시 부각시키고자 했던 메시지, 바로 그것을 알아내는 일일 것이다.

 

다니엘서가 기원전 2세기경의 작품이라는 사실을 확실히 뒷받침 해주는 단서들은 다니엘서 자체가 암시하고 있는 내용들 안에서도 발견된다. 10~12장이 묘사하고 있는 정치-사회적 상황들은 기원전 2세기 중반, 근동 지역과 팔레스틴 지역의 정황을 상징적으로 상세히 묘사하고 있다. 그 시대를 살았고, 당시 주변정세에 매우 박식했던 인물이 아니라면 도저히 표현해 낼 수 없었을 정치-사회적 혜안을 우리에게 시사하고 있는 것이다. 이외에도, 기원전 190~180년경에 저술된 집회서의 예언자들 목록에 다니엘이 언급되지 않고 있다는 점, 반면 134~104년 사이에 저술된 마카베오 상권의 저자는 다니엘서를 알고 있었다는 사실도 다니엘서의 2세기 저작설을 뒤받침하고 있다. 특별히 다니엘서의 내용이 안티오쿠스에 의한 성전 유린(기원전 167년; 11, 31참조)과 박해(11, 33), 그리고 마카베오가의 성전정화(164년; 11, 34참조)에 대하여는 잘 보도하고 있지만, 안티오쿠스의 죽음(164년)에 대해서는 정확히 묘사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은 우리로 하여금 다니엘서의 최종 편집 연대를 안티오쿠스 왕의 죽음 즈음, 혹은 죽음 직전인 기원전 164년경으로 추정하게 한다.

 

 

절망을 극복하는 법

 

요즘 너무 재미있다는 소문이 있어서 일부러 본 드라마가 있는데, 거기서 유독 내 눈길을 끌었던 인물은 말 못하는 꼬마 아가씨였다. 원래 말을 못하는 아이가 아니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말을 못하게 되었다고 한다. 도대체 어떤 아픔과 절망이 그 아이의 마음을 삼켜 버린 것일까…. 드라마지만 그게 자꾸 내 마음을 붙잡았다.

 

절망은 우리를 삼켜버릴 수 있을지 몰라도, 하느님을 정복하지는 못한다. 우리에게 신앙이 필요한 절대적이고 근본적인 이유이다. 절망을 극복하는 법, 앞으로 다니엘서를 읽어가면서 배울 수 있는 지혜였으면 한다. [가톨릭신문, 2005년 6월 26일, 김혜윤 수녀(미리내 성모성심수녀회, 광주가톨릭대 교수)]

 

 

평화로운 태도 유지의 원동력은 하느님과 함께 살아간다는 믿음

 

학기말만 되면 예외 없이 다가오는 지옥(?)이 있다. 바로 학기말 시험이다. 거의 지옥이 따로 없을 것 같은 시험기간을 지내는 학생들을 보면, 왠지 측은한 마음이 들어, 솔직히 내 과목만이라도 시험을 면해주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다.

 

그러나 그런 마음이 오히려 내게는 시련이고 「시험」이다. 다른 교수님들과 상의 없이 나 혼자만 결정할 수는 있는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아무튼 시험 때가 되면 내게도 예외가 아니었던 시험지옥이 기억난다. 도무지 자부심이나 자신감 같은게 없는 나 같은 사람도, 그런 시간들을 「죽지 않고」 견뎌왔다는 것을 생각하면 왠지 스스로가 대단하고 비범하게 느껴진다.

 

우리는 그렇게 모두, 각자의 시련과 고통의 순간들을 견뎌온 사람들이다. 죽지 않고 어제를 살았으니 대견하고, 살아서 오늘을 맞았으니 비범하지 않은가.

 

그렇다면, 지배자들의 박해가 극에 달했던 시기에 살아남아서, 남의 나라 땅의 재상까지 되었던 다니엘의 비범함은 말할 필요조차 없을 것이다. 다니엘서는 그 비결을 오로지 「하느님께 대한 절대적 신앙」에 두고 있다. 오늘 소개할 다니엘서의 저자 문제는, 그런 절대적 믿음 때문에, 그어떤 폭력의 상황에서도 비틀거리지 않고, 가장 지혜롭게 삶의 평정을 유지했던 지혜로운 인물들 「마스킬림」을 소개하고 있다.

 

 

가명(假名)성

 

지난 주 우리는 다니엘서의 저자가 기원전 2세기경의 사람임을 알아보았다. 그렇다면 다니엘서의 「나」를 왜 6세기의 인물 다니엘로 규정하였는지가 궁금해진다.

 

답은 간단하다. 이미 지혜문학과 시문학을 소개하면서 「가명성」 이라는 기법을 설명한 바 있는데, 이는 작품의 권위와 공신력을 더해주기 위해, 그 방면에 명성을 날리던 전설적 영웅들의 이름을, 책의 저자로 표기하던 기법이었다.

 

다니엘서는, 고대로부터 「현자」(지혜로운 자)의 대표적 인물로 여겨지고 있던 「다니엘」을 자기 작품 주인공의 이름으로 규정하고, 이로써 작품 전반에 대한 「지혜적」 특성을 전격 부각시키고자 한 것이다.

 

 

진짜 저자는?

 

그렇다면 이렇게 가명성을 작품에 도입시켜 자신을 다니엘이라고 소개한 「원래의 저자」는 누구인지가 문제된다. 많은 학자들은 다니엘의 저자를 「하시딤」이라는 그룹에 속했던 사람으로 보고 있다.

 

이 그룹은 율법준수를 강하게 주장하던 경건파 사람들이었는데(1마카 2, 42; 7, 12~13), 2마카 14, 6에는 이들이 때로는 군사적 행동도 감행했던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군사적 캐릭터는 다니엘서가 강조하고 있는 「비폭력적 태도」와 상반된 것이기에, 콜린스(J.J. Collins)같은 다니엘서 연구의 대가는, 기존의 하시딤 가설에 반기를 들고 있다.

 

최근 학자들은 다니엘서의 저자가, 11, 34과 12, 3 등에 언급되어있는 「마스킬림」의 한 사람이었을 것이라고 본다. 다니 1, 4; 11, 33~35; 12, 3; 12, 10이 제시하는 내용에 의하면, 그들은 자신을 정화하고 정련함으로써, 박해 속에서 주어질 수 있는 모든 고통과 슬픔을 인내하던 사람들이었고, 그러므로 폭력과 혁명의 그림자와는 거리가 먼 일종의 「평화주의자」들이었다.

 

이들이 보여준, 비폭력적 저항과 그것을 감수하게 한 힘은, 박해와 고통의 현실 속에 함께 하고 계신, 하느님 현존에 대한 확신이었다. 하느님께 대한 신앙은, 고통스런 현재를 견딜 수 있게 하는, 그리고 불의에 찬 현실에 동요하지 않고 담담히 그 환난을 감수하게 하던 힘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마스킬림의 모습은 유배라는 고통스러운 현실을 하느님께 대한 신앙으로, 담담히 견뎌낸 지혜로운 다니엘의 모습과 상통하는 것이었다. 이처럼 마스킬림은 「폭동」과 「혁명」이 시대의 혼란을 해결할 수 있는 대안이 아님을 알고 있던 이들이었다.

 

다니엘서에서만 「마스킬림」이라는 이름이 발견되고, 성서 다른 곳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복수명사 형태로) 이유는 아마도 이들이 대중적으로 활동했던 그룹이 아니라 소수 정예의 엘리트 그룹이었기 때문인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뒤집힌 승자

 

평화적 태도나 비폭력적 모습은 「인격」도 아니고, 「체질」도 아니며, 「스타일」도 아니다. 그것은 신앙 때문에 가능한 일종의 「은총」이요 「선물」인 것이다. 무력항쟁, 폭동, 살육, 불의, 모함….

 

이런 것들은 비단 다니엘만이 당면해야 했던 문제는 아니었다. 오늘 우리의 삶 안에서도 이 모든 지옥(?)은 언제나 반복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모든 것에서부터 우리를 비폭력적이게, 담담하고 평화롭게, 평정을 유지하게, 하는 것은, 그 무엇도 아닌 「하느님과 함께 살아가고 있다는 믿음」이다.

 

다니엘서는 그런 신앙의 자세야 말로 최후의 승자가 되게 하는, 가장 지혜로운 비결임을 알려준다. 이 무더위 속에 주어진, 한줄기 빗줄기 같은, 시원한 말씀이다. [가톨릭신문, 2005년 7월 3일, 김혜윤 수녀(미리내 성모성심수녀회, 광주가톨릭대 교수)]

 

 

시련 · 오해 · 음모 등의 어려움 철저한 신앙으로 극복해나가자

 

「비밀」이 신비로운 이유는 「나만 알고 있다」는 제한성 때문이다. 너도 알고, 그도 알고, 그녀도 아는 내용이라면, 그건 더 이상 비밀이 아니다. 다니엘서는, 「묵시문학」이라는 특별한 장르로 규정되고 있는데, 이 문학의 가장 독특한 성격은 바로 이런 「비밀성」에 있다. 이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자.

 

 

묵시문학의 등장배경

 

묵시문학은 「위기」라는 특정한 상황에서 배태된 신학적 대응이었다. 즉, 묵시문학은 평화로운 서재나 연구실에서 사색과 탐문을 거듭하다가, 혹은, 성전에서 감미로운 관상에 잠겨 있다가, 돌연히 미래에 대한 환시를 보게 되고, 이를 낭만적 문체로 써나간 일종의 「안방 문학」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묵시문학은 당시의 독재와 억압, 불평등에 대한 주체적 대응이라는 시대적 대의가 산출한, 일종의 「사회-정치-신학의 총체」였다고 할 수 있다. 인간 모두를 하나의 통치이념 안에 구속하려는 이데올로기는, 「정복자에게 충성!」이라는 획일적 명분만을 내세워 폭력과 불의를 자행했고, 이러한 무력 앞에서 유다인들의 신앙과 하느님은 절대로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말해질 수 없었던, 아니 말해져서는 안 되던 이야기들이었다.

 

그러나 말해져서는 안된다고 강제된 것들보다 더 말해져야 할 이야기들이 있을까? 삼엄한 규제 속에 신앙과 하느님에 대한 소통이 갇히게 되자, 그들은 일반적 언어가 아닌 그들만의 언어, 상징, 꿈, 환시라는 장치들을 통해 소통을 모색하게 된다. 같은 신앙과 같은 의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도저히 해독해 낼 수 없는 언어로, 말해질 수 없던 것을 말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다니엘서의 제작 배경

 

바로 이러한 이유가, 유다 묵시문학의 정수라고 간주되고 있는 다니엘서를 그저 한 청년의 우여곡절 많던 무용담 정도로만 이해해선 안 되는 이유이다.

 

이 아름답고 화려한 이야기 뒤에는, 박해 받던 당시의 사람들 사이에 유포 되어야할 하느님의 메시지가 저장되어 있었던 것이고, 다니엘서 이해의 관건은 바로 이 숨어있는 밑그림을 읽어내는 데에 있다고 할 수 있겠다.

 

이 책에서, 하느님의 지혜로 최후의 승리를 이룩하는 다니엘의 모습은, 지혜롭고 유일한 통치자이신 하느님의 지배를 연상하게 하고, 그들이 희망했던 메시아 왕국에 대한 갈망을 떠올리게 한다.

 

즉 삶의 의미를 상실한 잔인한 박해 속에서 그들은, 다니엘이라는 이상적 인물을 통해 하느님의 통치를 의식 안에 강하게 무장했던 것이다.

 

 

여러 분파들의 탄생 - 유다이즘의 성장

 

이러한 정치-종교적 박해는, 당시 이스라엘의 선각자들에게 뜻을 같이하는 사람끼리 주체적인 그룹을 형성하게 하고, 이러한 그룹은 일종의 운동 형태(movement)로 성장하게 된다. 바로 이것이 「유다이즘」과 그 여러 분파들의 탄생이었다. 이 그룹들 안에는 우리에게 잘 알려진 바리사이파, 사두가이파, 에세네파 등이 속해 있었고, 또한 무력항쟁으로 투쟁에 나선 마카베오 집안도 끼어 있었다.

 

다니엘서 역시 이러한 반응들의 한 부류라고 할 수 있는데, 다니엘서가 다른 운동들과 비교되는 점이 있다면, 그 어떤 대응들보다 「비폭력적」으로(글을 써서) 대응했다는 점일 것이다. 그들은 독재의 무력에 또 다른 무력으로 맞서는 것은 결코 근본적 대안이 될 수 없음을 확신했던 사람들이었고, 따라서 다니엘서 안에는 그 어떤 폭동, 혁명의 그림자를 찾아볼 수 없다. 그들은 오히려 「지금, 여기」의 현실 안에 숨어있는, 그러나 반드시 존재하는 하느님의 주권을 초월적 시각으로 간파하고, 그러한 신앙적 전망으로 지금의 모든 시련을 견디어내자는 「종교적-비폭력적 대안」을 일종의 문학 양식으로 제시했던 인물들이었다.

 

다니엘서가 제시하는 다니엘의 태도는 폭력이나 반역과는 거리가 멀었다. 시련과 시험, 오해와 음모 속에서도 다니엘은, 하느님 친히 함께 계셔주심에 대한 철저한 신앙만을 유일한 도구로 삼았을 뿐이다. 바로 이러한 비폭력적 자세와 전망을 저자는, 그 시대의 어둠을 이겨낼 수 있는 가장 확실하고 지혜로운 대안으로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싸움에서 손을 떼는 법

 

싸움은 둘 다 똑 같기 때문에 일어난다. 한 쪽이 조금 여유 있고 비어 있어서, 상대를 받아들일 수 있다면 싸움까지 가지 않아도, 서로는 소통이 가능하다. 다니엘이 제시하는 비폭력적 노선은, 폭력적 상황을 벗어나는 유일한 지혜를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다. 피터지게 싸워야 뭔가 폼이 난다고 생각하는, 격투기 전문선수들이 아니라면, 이제 마음을 비워둘 때이다. 마음이 비워져야 누구든 타인이 들어와 소통할 수 있을 것 아닌가. 덥다. 그러고 보니 마음이 필요 없는 것으로 꽉 차있어서 더 더웠나보다. 내 탓이다. [가톨릭신문, 2005년 7월 10일, 김혜윤 수녀(미리내 성모성심수녀회, 광주가톨릭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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