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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구약] 에스델(에스테르): 내용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0-07-31 조회수3,629 추천수1

[김혜윤 수녀의 성서말씀나누기] 에스델 (3-7) : 내용 (1-5)

 

 

상대방에 예의와 존중 갖출 때 주체적 삶에 대한 구현 가능

 

사람이 일생동안 가장 관심을 쏟는 부분은 무엇일까? 각 세대마다, 그리고 각자가 처한 환경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겠지만, 그래도 가장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관심은 「주체적 삶에 대한 구현」이 아닐까 한다. 여성, 남성이라는 생물학적 구별을 넘어서서 인간이라면 누구나 자신의 삶이, 타인이나 외부적 제도에 의해 억압되는 상황을 가장 두려워한다. 삶의 주체에 대한 질서가 붕괴되기 때문이다.

 

이제 곧 25주년을 맞이하는 5,18사건 역시, 인간 본연의 주체성 상실에 대한, 가장 처절하고 비극적 저항이었음을 우리는 기억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에스델서는 자신의 목소리를 전적으로 박탈당한 피지배인 으로서의 여성과 식민지 여성이 감수할 수밖에 없었던 절박하고 불평등한 삶을 전달해주고 있다.

 

특별히 오늘 살펴보게 될 에스델 1장의 사건(와스디 왕비의 폐위)은 남성위주의 고대 관료사회가 저지르는 병폐와 어리석음을 우리에게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자신의 존재가 진열장의 인형처럼 박제되는 것, 남편의 능력을 과시하기위한 일종의 상품으로 전락하는 것, 입이 있어도 슬프고 아프다고 말하지 못하는 것, 모든 아내와 여성들이 경험해보았을 가장 두려운 현실이요 비극은 아닐까.

 

 

구성에 대한 문제

 

지난번에도 언급한 바 있지만, 에스델서는 제1경전(히브리어 부분)과 제2경전(희랍어 부분)이 합성되어 있어서 본문접근에 어려움을 준다. 그러나 현재 우리가 진행하고 있는 고찰은 「히브리어 성서」의 「성문서」 연구이기에 여기서는 희랍어 부분에 대한 접근은 생략하고자 한다. 에스델서의 히브리어 부분의 구성은 다음과 같다.

 

1장~2장: 에스델이 왕비가 되기까지 → 3장~9, 19: 하만의 음모와 운명의 극복 → 9, 20~9, 32: 부림절 → 10, 1~3: 맺음말.

 

 

1장. 왕비 와스디의 폐위

 

1절은 이 이야기가 아하스에로스(페르시아의 왕이었던 크세르크세스 1세(기원전 485~465년)는 에스델서와 에즈 4, 6에서 「아하스에로스」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 시대의 사건이었음을 제시한다.

 

에스델서에 의하면 그는 재위 3년, 「수사」라는 도시의 궁궐에서 모든 장군들과 귀족들을 위한 잔치를 무려 180일 동안 베푼다.

 

이는 자신의 영화와 경제력, 권세를 과시하기 위한 일종의 정치적 제스처였다(3~4절). 이렇게 귀족들만의 축제가 끝나자 수사성에 사는 모든 백성을 위한 잔치가 7일간 이어지는데(5~8절), 이때 왕비 와스디는 여자들만을 위한 잔치를 주관한다(9절). 입문부분에서 설명한 바 있지만, 와스디라는 이름의 왕비는 페르시아의 실록 그 어디에서도 발견되지 않는다.

 

더욱이 역사학자 헤로도투스는 크세르크세스 왕의 아내를 아메스트리스라고 호칭하고 있기에, 와스디라는 인물의 역사성은 거의 부정되고 있다. 어쨌든 에스델서가 제시하는 「사건」은 그 화려했던 잔치 마지막 날 발생한다.

 

『술로 기분이 좋아진』(10절) 왕은 왕비의 미모를 사람들에게 자랑하고 싶어서, 그녀를 단장시켜 잔치에 참석한 모든 이들에게 보여주고자 한다. 그러나 자신의 동의 없이 내려진 꽃단장(?) 명령에 마음이 상한 왕비는 왕의 명령에 불복한다. 이에 격분한 왕은 그 잔치에 모여 있던 당대 최고의 법률가들에게 그녀를 어떻게 처벌할지를 의논한다.

 

13~22절은 당시 고대 사회의 현실이 여성에게 얼마나 부조리한 것이었는지를 여실히 제시하는데, 윤리적이거나 도덕적인 죄를 짓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와스디의 행위는 왕에 대한 모욕일 뿐 아니라 모든 백성들을 무시한 행위로 치부되기 때문이다(16절).

 

설상가상으로 이 사건이 페르시아의 여인들에게 퍼져 남편들의 위상이 손상될 것을 우려한 남성 귀족들은(17절) 왕비 와스디를 폐위시키는 것으로 사건을 종결짓는다. 여성들의 도전을 사전에 차단하는 극적인 처방을 쓴 셈이었다.

 

 

모욕과 상처가 되는 말

 

여성의 입장에서는 상처가 될 수밖에 없는 폭력들이 있다. 인형도 아니고, 장식물도 아니건만 아무 때나 남성들에게 소유물이나 상품취급을 받을 때이다. 치장을 하고 사람들 앞에 나오라는, 도무지 분별력 없는 남편의 명령이 와스디에게 얼마나 치명적 사건이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성서 본문은 그 명령이 갈등의 시발이었음을 명시한다.

 

남성들이 여성과의 성별적 차이를 상하 계급성의 도식으로 이해하려드는 한, 그리고 자신들의 어머니 역시 여성이었음을 반복적으로 망각하는 한, 진정한 남녀관계의 재구성은 묘연한 관념이자 허구적 환상으로 남아있을 뿐이다.

 

「관계」라는 까다로운 시스템은 상대방의 주체적 삶에 대한 예의 있고 진심어린 존중을 통해서만 다가설 수 있는, 일종의 초월이자 희생이기 때문이다. [가톨릭신문, 2005년 5월 15일, 김혜윤 수녀(미리내 성모성심수녀회, 광주가톨릭대 교수)]

 

 

우리 삶에 정작 필요한 것은 단순한 예의와 하느님 향한 열정

 

믿을 수 없을 만큼, 비열하고 이기적일 수 있는 게 인간이라는 슬픈 현실을 마주하게 될 때, 나 역시 그럴 수 있고 내가 사랑해온 사람들도 그럴 수 있다는 것을 알게될 때, 그래서 삶에 짙은 그늘과 상처, 그림자가 어쩔 수 없이 드리워지게 될 때, 유일한 희망과 자존심의 보루로 마음 안에 꼭꼭 챙겨두는 것은 힘겹지만 거짓 없는 「진실」이다. 난관을 마주할 때 마다, 이미 적이 된 상대와 보이지 않는 지능싸움은 시작되고 머리를 싸매 최대한 영리하고 야무진 대안을 모색해 보지만, 그건 사건을 더욱 복잡하게 할 뿐, 보다 명료한 진실을 위해 필요한건 그저 단순하게 정돈된 마음, 성모님의 마음을 닮은 마음임을 깨닫게 된다. 에스델이 왕비로 간택된 것은 화려한 치장 혹은 이목을 끄는 미모 때문이 아니었다. 이번 주에 읽게 될 성서 본문은 「가장 소박한 치장」을 한 그녀가 왕비로 간택되었음을 부각시키면서, 우리에게 정작 필요한 것은 삶에 대한 단순한 예의와 하느님을 향한 열정임을 가르쳐준다.

 

 

2장, 새로운 왕비 에스델

 

2장은, 모르드개의 도움으로 왕비에 오른 에스델과(전반부: 1~18), 왕에 대한 음모를 밝혀내는 모르드개의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후반부: 21~23절).

 

와스디가 폐위되자 왕의 시종들은 나라에 있는 모든 아가씨들 중, 용모가 어여쁜 젊은 처녀들을 수소문하여 새 왕비로 삼고자 한다(2절). 이러한 풍습은 고대 궁궐내부 사회가 그곳에서 일할 여성들을 선택하던 일반적 관행이었다. 이는 고대 근동 지역뿐 아니라 유럽의 오래된 동화에서, 그리고 우리나라의 전설이나 역사실록에서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이러한 간택 과정 중, 수사 성에 살고 있던 유다사람 모르드개(5절)와 「하다사」라고 불리던 에스델이 등장한다(7절). 「하다사」란 일종의 나무이름으로, 「향기 나는 상록수」를 지칭하는 히브리이름이었고, 「에스델」은 바빌론의 여신이었던 이쉬타르(Ishtar)에서 파생된 바빌론-페르시아식 이름이었다. 교포들이 일반적으로 한국이름과 외국이름을 공유하고 있듯이 에스델은 히브리이름과 페르시아 이름을 동시에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모르드개는 에스델과 사촌지간이었지만, 부모 없는 고아였던 그녀를 자기 수양딸로 삼아 길러왔다(7절).

 

다른 아가씨들과 함께 왕궁에 들어간 에스델은 거기서 궁녀들의 총관리인이었던 해개의 총애를 받게 되는데, 10절은 그녀가 자신의 「국적」을 밝히지 않았음을 제시함으로써, 앞으로 전개될 이야기가 유다인이었던 그녀의 국적과 관련된 것임을 암시한다. 화려하기 그지없던, 무려 12달 동안의 「몸만들기」 과정 후(12~13절), 그녀는 왕을 만나게 되고, 소박한 치장에도 불구하고 왕의 간택을 받게 된다. 왕의 재위 7년 10째 달이었고, 와스디가 폐위된 지 4년만의 일이었다(17절).

 

2장의 후반부는 왕을 암살하려는 음모를 밝혀내는 모르드개의 이야기가 전개된다. 전반부와 전혀 다른 이야기를 내용으로 하고 있고, 전반부에 비해 내용이 매우 빈약하여, 학자들은 이 본문이 많은 부분 훼손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러나 빈약한 본문에도 불구하고 에스델서 전체의 맥을 이끌어줄 주요 주제, 「모르드개의 지혜」, 「에스델의 국적」, 「모르드개의 충고를 따르는 에스델」 등의 내용이 종합적으로 제시되어 있다.

 

 

3장, 하만의 등장과 박해

 

3장에서는 아각 사람 하만이 등장한다. 경위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그는 왕의 절대적인 총애를 받게 되어, 모든 대신들이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절해야할 정도로 막대한 권력을 휘두르게 된다(2절). 갈등의 시작은 유독 모르드개만이 하만에게 절하지 않은데서 발생했다(2절). 하만의 분노는 극에 달했고, 결국 그는 모르드개와 그의 백성을 전멸시키는 것으로 복수를 계획한다(6절). 이 부분에서 주목하게 되는 것은 하만이 단순히 모르드개 개인에게만 복수를 계획한 것이 아니라 유다민족 전체를 대상으로 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구도를 통해 저자는 에스델이 쟁취한 구원이, 비단 모르드개만을 위한 것이 아닌 유다 민족 전체를 위한 것이었음을 역으로 강조하고 있다. 이 피비린내 나는 몰살계획이 모의된 것은 아하스에로스 재위 12년째였고, 에스델이 왕비에 간택된 지 5년이 지난 때였다. 하만이 제기한 유다인들의 죄는 그들이 자기네 법(율법)만을 지킬 뿐, 페르시아 왕의 법은 지키지 않는다는 것이었다(8절). 하만은 이러한 고발과 함께 그들을 멸족시키는 것을 허락한다면 왕에게 은 일만 달란트를 왕궁으로 유입할 것을 약속한다. 이렇게 하여 전국에는, 모든 유다인들을 몰살할 것을 명하는 칙령이 내려진다(12~13절). 그러나 역사적 관점에서 본다면 이러한 잔인한 몰살 명령은, 관용책을 전면에 내세웠던 페르시아의 정치노선과는 거리가 있는 것이어서, 이 사건을 실제 일어난 사건이라고 보기는 어렵다고 해야 한다. 이러한 풍전등화의 상황에서 등장하게 되는 것이 에스델의 활약이다. 그 내용은 4장에서 전개된다. [가톨릭신문, 2005년 5월 22일, 김혜윤 수녀(미리내 성모성심수녀회, 광주가톨릭대 교수)]

 

 

하느님께 대한 자발적 믿음만이 삶의 변화·평화 가져올 수 있어

 

만약 그 때 다른 길을 갔었더라면, 만약 다른 사람을 만났더라면, 만약 그곳에 가지 않았더라면…. 이제 더 이상은 뒤돌아보지 말아야할 지점에 이르게 되었을 때 우리가 흔히 던지게 되는 가정들이다. 가지 않은 길에 대한 상상처럼 매혹적인 위로도 없지만 그러나 사실 그것만큼 부질없는 질문도 없다. 이번주에 살펴볼 내용 중, 『누가 알겠소? 지금과 같은 때를 위해 그대가 왕비자리에 이르렀는지』라는 표현은 난관에 봉착한 이스라엘을 위해 목숨을 걸어야할 에스델에게 모르드개가 해준 말이었다. 모든 역사는, 아주 사소하고 평범한 개인의 삶까지, 그리고 때로는 어쩔 수 없이 감당해야하는 고통의 순간까지도, 더 깊은 성숙을 위해 하느님께서 계획하고 주관하심을 고백하는 일종의 신앙고백인 셈이다.

 

1~3장의 내용을 토대로 본다면, 아직까지 주변의 난관을 굳은 신념과 지혜로 극복해 가는 인물은 모르드개이다. 에스델이 점차 이야기의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것은 4장부터인데, 단지 착하고 예쁜 규수일 뿐이었던 그녀가, 어떻게 해서 목숨을 걸고 자기 민족을 구해낼 만큼 강하고 지혜로운 여인으로 거듭나게 되는지 그 구체적인 내용이 제시되고 있다.

 

 

4장, 난관에의 봉착

 

유다인들에 대한 하만의 음모를 전해들은 모르드개와 전국의 유다인들은 탄식과 통곡을 쏟아낸다(1~3절). 모르드개는 자루옷을 입고 궁궐대문에서 시위를 하고, 그 때까지 영문을 몰랐던 에스델은 이러한 모르드개의 행동에 당황해하며 시급히 옷을 보낸다. 에스델이 시종을 보내 그 연유를 묻자, 모르드개는 하만의 음모와 유다인 절멸의 대가로 왕에게 내놓겠다고 한 은전의 액수를 알려준다. 이어 반포된 칙령의 사본까지 보내면서 무엇인가 조처를 취할 것을 요청한다(7~8절). 특별히 8절의, 모르드개가 에스델에게 전하라고 한 말 중에는 『그녀의 민족을 위해』(8절)라는 히브리어 표현이 눈에 띄는데, 이는 그녀가 난관 앞에서 짊어져야할 「거국적」이고 「민족적인」 책임을 의도적으로 부각시킨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시종으로부터 모르드개의 이야기를 전해들은 에스델은 왕이 부르기 전에는 왕을 만날 수 없고 이를 어길 경우 사형에 처해지게 되는 법규를 설명한다(11절). 이러한 비인격적인 법규가 정말 존재했었는지 현재 우리로서는 확인할 수 없는데, 그 어떤 고대 법령에서도 이와 유사한 내용 혹은 역사적 증거가 발견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저자가 이러한 내용을 통해 에스델이 이제 「목숨을 내놓는 용기와 모험」을 단행하게 될 것임을 의도적으로 암시하고 있다는 점이다.

 

에스델의 곤란한 사정을 듣게 된 모르드개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든 유다인들이 멸절당할 상황에 혼자 살아남을 생각은 아예 하지 말라는 일침를 가한다(14절). 이러한 모르드개의 반응도 좀 의아하게 느껴지는 부분인데, 에스델의 곤란한 처지가 뭔가 왜곡되어 이해된 듯하기 때문이다. 아마도 13~14절에 제시된 모르드개의 날카로운 반응은 에스델에 대한 비난이라기보다는, 이 책을 읽게 될 독자들을 겨냥한 저자의 직접적인 경고로 이해할 할 수 있겠다. 즉, 저자는 이러한 표현을 통해 에스델서가 최종적으로 제작될 당시의 유다인 고관들에게, 민족 전체가 말살될 수도 있는 지경 중에, 자신의 이익만을 찾으려는 이기적 계산으로는 결코 살아남을 수 없음을 경고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14절의 『누가 알겠소? 지금과 같은 때를 위하여 그대가 왕비 자리에까지 이르렀는지』라는 표현은 저자의 신학적 관점을 결정적으로 드러내 주는데, 하느님이라는 단어가 등장하지는 않지만, 모든 역사와 인간사를 전적으로 주관하시는 분은 오직 하느님뿐이심을 잘 규명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 얘기를 다시 전해들은 에스델은 모든 유다인들이 함께 삼일간 단식하고 기도할 것을 제안한다. 하느님 안에서의 진정한 연대는 「공동기도」를 통해 심화될 수 있음을 그녀는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자신 역시 민족과 타인을 위해 기꺼이 죽을 각오가 되어 있다는 비장한 다짐을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법을 거스르는 것이기는 하지만, 임금님께 나아가렵니다. 그러다 죽게 되면 기꺼이 죽으렵니다』(16절).

 

 

사는데 필요한 믿음

 

쉽게 동의하고 받아들이기 힘든 각자의 인생이고 역사일 수 있지만, 내게 일어난 모든 일들이 사실은 가장 충실하고 진정한 하느님의 사랑과 이끄심의 발로였음을 인식하게 될 때, 아직 다 못푼 과제, 즉 이 세상에 왜 태어났으며 죽는 순간까지 어떻게 살아가야 하나, 라는 질문은 더 이상의 조급한 화두로 남아있지 않을 수 있다. 초연한 평화, 그것은 하느님께 대한 전적인 믿음과 의탁을 통해서만 도래함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동시에, 그런 평화가 내 마음에 없다면 세상은 언제 어디에서고 그저 감옥으로 느껴질 뿐임을 또한 아는 때문이다. 그러니, 하느님께 대한 보다 의식적이고 자발적인 믿음만이 내 삶의 방향을 바꿀 수 있다. [가톨릭신문, 2005년 5월 29일, 김혜윤 수녀(미리내 성모성심수녀회, 광주가톨릭대 교수)]

 

 

완벽을 향한 욕심과 미련 인생을 절망으로 떨어뜨려

 

인간은 모든 것을 갖고자 하지만 어느 누구도 그런 완벽에 이른 적은 없다. 비극은 인간이 그 자명한 진리에 도무지 잘 적응하지 못한다는 데서 발생한다. 완벽을 향한 통제되지 않는 욕심과 도달하지 못할 목표에 대한 미련은 자신을 괴롭히는 가장 강력한 「악」이 되어 결국 인생을 피곤과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뜨리게 하니 말이다. 모든 것을 가졌어도 자신이 못 가진 한 가지 때문에 불행하다고 여기는 덫이야말로 어쩌면 우리가 가장 경계해야할 인생의 함정일지도 모르겠다.

 

오늘 살펴보게 될 5~6장에서 하만은 모든 것을 가졌지만 자신을 무시하는 모르드개 때문에 괴로워하고, 이러한 과욕과 질투, 언제나 최고가 되려고 하는 망상이 결국 돌이킬 수 없는 살육의 원인이 됨을 보여 준다.

 

 

5장, 에스델의 초대

 

5장은 에스델이 이제 더 이상 모르드개에 의존하는 나약한 여자가 아니라 스스로의 삶과 민족 전체의 운명을 책임질 만한 큰 인물이 되었음을 드러내준다. 삼일간의 기도 끝에 자신을 하느님으로 완전무장한 에스델은 죽을 각오를 하고 왕의 뜰에 들어선다. 다행스럽게도 왕은 왕홀을 그녀에게 내밀어 갑자기 찾아온 이유를 묻는데(1~3절), 그녀는 자신의 연회에 왕과 하만을 초대하고 싶다고 말한다(4~5절). 갑자기 등장한 하만의 이름은 이 연회가 단순히 남편(임금)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하만을 겨냥한 자리가 될 것임을 암시한다. 초대에 응한 왕과 하만은, 다음 날에 있을 연회에도 기쁨으로 응하겠다고 말한다(7~8절).

 

5장의 후반부(9~14절)는 하만과 모르드개의 갈등으로 주제가 전이된다. 흡족한 마음으로 왕비의 궁을 나온 하만은 우연히 모르드개를 만나지만, 여전히 자신에게 머리를 숙이지 않는 모르드개를 보자 격분하게 되고(9절), 집에 돌아온 즉시 아내와 친구들에게 모르드개를 처단할 방법을 논의한다. 막대한 재산과 자식들, 임금의 총애, 거기에 왕후의 호의까지, 그의 인생은 모든 것이 장미 빛이지만(12절), 모르드개 때문에 자신은 결코 행복할 수 없음을 고통스러워 하는 하만에게, 아내와 친구들은 해결안을 제시한다.

 

『높이 쉰자짜리 말뚝을 만들어』 모르드개를 거기에 처형하라는 것이었다. 「쉰자」는 거의 25미터에 달하는 높이로서, 자신을 대적한 모르드개의 최후를 만인에게 공포하고 다시는 아무도 하만에게 대적할 수 없음을 제시하는 기능을 가진 것이었다.

 

 

6장, 반전의 시작

 

6장에서부터 서서히 이야기의 반전은 시작된다. 우연히 옛 기록을 읽다가 모르드개의 업적을 알게 된 왕은 어떻게든 상을 줘야 겠다는 마음이 들고, 그때 마침 자신이 세운 말뚝에 모르드개를 매달 것을 청하러 온 하만(4절)에게 이를 논의한다. 왕이 자신에게 상을 내리려 하는 줄로 착각한 하만은 구구절절 포상의 내용을 제안한다(6~9절).

 

10절부터는 이러한 왕과 하만의 「동상이몽」의 결과가 제시되는데 왕은 하만이 제안한 그 모든 내용을 빠짐없이 모르드개에게 하사하도록 지시하고, 모르드개는 그대로 왕의 영광을 입게 되기 때문이다(10~11절).

 

열세에 몰린 하만은 『머리를 감싼 채』 집으로 돌아가는데, 그 제스처는 그가 얼마나 수치심과 분노, 슬픔에 빠졌었는지를 묘사한다. 고통스러워하는 남편에게 하만의 아내 제레스는 『모르드개가 유다 출신이라면 이제 그에게 대적할 수 없을뿐더러 그 앞에서 무너질 수밖에』 없음을 충고한다. 아내의 예견 중, 모르드개의 승리를 그의 민족 전체의 승리와 연결시킨 부분, 이미 유다인들의 승리가 계획되었음을 부각시킨 내용 등은 모두 저자의 가치관과 신학을 반영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즉 저자는 유다인들에 대한 하느님의 신적개입과 구원의지를 제레스의 입을 통해 다시금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동상이몽

 

같은 언어를 말하고 같은 음식을 먹으며, 같은 장소에 있어도 사람들은 모두 각기 다른 생각을 가지고 살아간다. 사랑해서 손잡고 함께 바라본 하늘과 바다지만 그가 본 것이 내가 본 것과 같은 색, 같은 이미지일 수는 없는 것이다. 6장에서 아하스에로스와 하만은 동상이몽의 실체를 보여준다. 상대와 내가 너무 밀착되어 내 생각을 타인에게 무의식적으로 강요할 때 촉발되는 것이 동상이몽이기에 그 결과는 몇 배로 극대화된 배신감과 절망, 치명적 상처를 줄 수 있다. 그 경우 최선의 방법은 그를 내게서 분리시켜, 사랑하는 마음을 잠시 접어두는 것이다. 그러면 그가 그렇게 할 수밖에 없던 상황을 조금씩 객관적으로 이해하게 되고 운이 좋으면 연민까지 느끼게 될지 모르니 말이다.

 

하만과 모르드개, 하만과 아하스에로스의 갈등, 어쩌면 그것은 그들이 너무 비슷했고 같은 것을 원했기에, 그러나 불행하게도 꿈은 서로 달랐기에 발생한 역설이며 비극은 아니었을까. 처음으로 그런 생각을 해본다. [가톨릭신문, 2005년 6월 5일, 김혜윤 수녀(미리내 성모성심수녀회, 광주가톨릭대 교수)]

 

 

하느님의 눈으로 타인을 인정하고 서로 다름을 능동적으로 존중하자

 

생각이 지나치면 오히려 혼란에 빠질 수 있고, 좋은 것도 지나치면 독이 될 수 있다. 그뿐인가, 머리를 잘못 쓰면 자기가 판 구덩이에 빠질 수도 있다. 하만은 모르드개를 처형하기 위해 만든 말뚝에 결국 자신의 머리를 달게 된다. 자초한 죽음이었고 스스로 준비한 결과였다.

 

에스델서가 제시하는 하느님의 지혜는 바로 이런 게 아닐까 싶다. 무엇이든 지나치지 말 것, 오버하지 말 것, 이기심과 잔꾀의 한계를, 그리고 그 마지막을 언제나 기억할 것, 적어도 자기가 판 구덩이에는 빠지지 말 것.

 

 

7장, 하만의 최후

 

왕과 하만은 에스델의 두 번째 초대에 응하게 되고, 기분이 좋아진 왕은 왕비의 소원을 묻는다(1~2절). 이에 그녀는 자신과 민족의 목숨을 살려줄 것을 애원하는데(3절), 감히 왕비의 목숨을 노리는 자가 있고(5절) 더구나 그가 하만임을 알게 된 왕은 격분하여 밖으로 나간다. 궁지에 몰린 하만은 에스델에게 살려줄 것을 애원하는데(6~7절), 물론 아직까지 왕과 하만이 왕비의 국적을 모르고 있었다는 본문의 설정은 상식적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하만이 이를 알았더라면, 그리고 모르드개가 에스델의 양부였다는 것을 알았더라면 그런 음모를 꾸미지는 못했을 것이라는 점이다. 다시 돌아온 왕은 결정적인 장면을 목격하게 되는데, 하만이 왕비의 침대에 쓰러져 있었던 것이다. 왕은 이를 하만이 왕비를 폭행하는 것으로 알고, 격노를 터뜨린다. 이 일련의 사건들은 하만의 위상을 완전히 추락시켜 놓는다. 결국 하만은 『얼굴을 가리게』 되는데, 이는 사형을 언도받은 사람에게 가해지는 행위였다. 하만은 그가 세워놓은 높이 쉰자의 말뚝에 달리는 것으로 최후를 맞는다(9~10절).

 

 

8장, 새로운 칙령

 

이후 왕은 왕비에게 『유다인들의 적』 하만의 집을 하사하고, 모르드개가 에스델의 양아버지라는 사실도 알게 된다(1~2절). 그러나 문제가 완전히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이미 하만에 의해 반포된 유다인 학살 칙령은 유효한 것으로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에스델은 왕에게 이 칙령을 취소하기를 간청하지만(3~6절), 이미 공포된 칙령은 취소할 수 없다는 페르시아의 법이 걸림돌이 된다. 결국 왕은 유다인들을 살릴 수 있는 새로운 칙령을 작성할 것을 모르드개에게 제안한다(8절).

 

이렇게 해서 작성된 두 번째 칙령은, 유다인들이 자신들을 몰살하려는 세력에 적극 대응하는 것을 윤허하는 내용이었다. 이는 유다인들에게는 더할 수 없는 기쁨의 칙령이 되는데, 하만의 처형 이후, 페르시아의 실세로 부상한 인물은 모르드개였고, 그가 유다인인 이상 유다인들에게 대적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이다(15~17절).

 

물론 이러한 일들이 실제 역사적으로 발생했는지는 알 수 없다. 이러한 유다인들의 위상은 에스델서 저자의 이상을 반영하고 있는 것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아무튼 클라인즈(D. Clines) 같은 학자들은 기쁨에 겨워하는 유다인들의 모습을 마지막으로, 본래적인 에스델서가 마무리 된다고 본다. 다음에 등장하는 9, 1~10, 3는 후대 첨가된 부분이라는 것이다.

 

 

9장~10장, 유다인들의 승리

 

이제 이야기의 흐름은 완전히 반전된다. 멸절 당하게 될 바로 그날이, 유다인들에게는 적을 무찌르는 「역전의 날」이 되었기 때문이다(1~2절). 에스델은 그 칙령의 시효기간을 다음날까지 연장할 것을 청하고(13~14절), 유다인들의 승리가 확실해 지자 모르드개는 해마다 이날들(아달월(2월경) 십사일과 십오일)을 축일로 지내기를 공포한다(20~21절). 물론 많은 주석가들은 이러한 보도가 부림절의 기원을 설명한 것으로 이해한다. 부림절은 원래 바빌론의 풍습에서 기원한 것이지만 이스라엘 민족 안에 이미 대중적으로 알려져 있던 이야기를 함께 혼합함으로써, 이 축제를 자신들의 것으로 토착화 했다고 보는 것이다. 특별히 9, 23~28은 이 부림절의 기원과 내력을 요약하고 있다. 에스델서는, 모르드개야말로 진정한 유다인이요 하느님 백성의 모범이었음을 강조하는 내용으로 종결된다(10, 1~3).

 

 

일상의 분노와 폭력

 

신문지상에 연일 보도되는 연쇄살인 사건들은 일상의 작은 분노가 얼마나 무서운 폭력을 야기 시키는지 극명하게 보여준다. 모르드개를 향한 하만의 분노는, 사실 각박해져만 가는 우리의 일상 안에서 여전히 반복되고 있는 「부딪침」이라고 할 수 있다. 타인은 언제나 나와 다르기 때문에 내편에서는 크고 작은 분노와 섭섭함을 느낄 수밖에 없고, 결국 타인과의 관계는 언제나 낯설고 불편한 것으로 남아있게 된다.

 

뻔한 이야기일 수 있지만, 결국 이를 극복할 대안은 하나뿐이다. 하느님의 눈으로 타인을 받아들일 것, 그래서 그의 다름을 능동적으로 존중할 것, 그렇지 않으면 세상은 그저 무거움과 감당할 수 없는 속박으로 다가올 뿐이니…. [가톨릭신문, 2005년 6월 12일, 김혜윤 수녀(미리내 성모성심수녀회, 광주가톨릭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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