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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구약] 에스델(에스테르): 입문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0-07-31 조회수3,283 추천수1

[김혜윤 수녀의 성서말씀나누기] 에스델 (1-2) : 입문 (1-2)

 

 

하느님으로만 삶 무장한 에스델의 지혜 본받아야

 

어떤 사람은 벽에 머리를 부딪친 후 머리가 더 좋아졌다고 하고, 어떤 사람은 더 나빠졌다고 한다. 작가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는 창문에 머리를 부딪친 후 여러 날을 혼수상태에 있다 깨어났는데, 이후 훨씬 훌륭한 작품들을 남기게 되었다고 한다.

 

반면, 여기저기 잘 부딪치고 다니는 암울한(?) 습관을 수십 년째 간직하고 살고 있는 필자는 후자에 속하는 것 같다. 불과 1분전에 하던 이야기의 내용을 잘 기억하지 못하는가 하면, 얼마 전 수업시간에는 한 학자의 주요학설을 열을 내서 설명하다가 다른 학자와 혼돈한 적도 있다. 학생들에게 잘난 척이나 하지 말걸…. 즉시 미안한 마음을 표현했지만, 이미 구겨진 스타일은 수습하기 어려웠다. 애교와 미소작전도 무색하고, 진땀나는 변명도 초라할 뿐이다. 나이가 들면서 생겨난 건망증에, 병인가? 라는 생각도 해보지만, 이제는 그냥, 내 삶이 총명함과는 더더욱 거리가 먼 인생이 되었구나, 쯧쯧…. 그러면서 포기하고 있다.

 

이처럼 한 가지 사건에 대한 결과는 매우 다르게 나타날 수 있다. 어찌 보면 불공평한 일일지 모르지만, 그건 아마도 지금까지 살아온 삶의 내공과 하느님의 은총이 합치된 결과일 것이다. 나 역시 조금만 더 열심히 살았더라면 지금의 건망증은 나타나지 않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오늘부터 우리는 인생의 어느 고비에서 만나게 된 난관을 새로운 도약의 기회로 전환시켰던 의지의 여성을 만나보게 될 것이다. 자신과 민족의 운명이 거의 몰살의 위기에 몰렸음에도 불구하고 하느님께 대한 강한 신앙과 삶에 대한 신념으로 그 난관을 이겨낸 아름다운 에스델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녀를 닮은 화사한 봄에 이 책을 읽게 되어 더욱 즐거운 기분이다.

 

 

개관

 

에스델서는 「메길롯」의 마지막 책으로, 「부림절」(Purim) 때 낭독되었다. 이 책이 「부림절」의 기원을 설명해주고 있다고 간주된 때문이었는데, 등장인물 하만이 유다인들을 절멸시킬 날을 정하기 위해 「주사위」를 던지는 장면이 부림절의 기원이라고 보았던 것이다(부림절의 「부림」은 「부르」라는 히브리어의 복수형이며 「주사위」를 의미한다). 그러나 이 「부르」가 원래 아카디아어에서 유래했다는 입장도 있어서, 원래 이방민족의 축제였던 것이 후대에 이스라엘 안에 도입되었다고 보기도 한다. 즉 이스라엘은 이민족의 축제였던 부림절을 도입하여 자신들의 야훼신앙에 부합하는 축제로 재구성했다는 것이다.

 

 

본문의 문제

 

에스델서를 읽을 때 항상 부닥치게 되는 문제는 본문의 복잡한 장, 절에 대한 것이다. 이러한 혼란은 희랍어 번역인 칠십인역이 히브리어 본문에 93개의 절을 추가함으로써 초래되었는데, 아마도 칠십인역은, 히브리 본문이 하느님께 대한 직접적 언급을 뚜렷이 포함하고 있지 않기에, 여기에 신학적이고 종교적인 내용을 보충하려고 93개절을 추가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스도교는 이러한 종교적 성격 때문에, 칠십인역의 첨가부분만을 전례 중에 봉독하고 있다. 추가된 부분의 배치에도 문제가 있는데, 칠십인역은 첨부한 부분을 히브리어 본문에 적절히 삽입하고 있는 반면, 불가타는 첨가부분만을 따로 발췌하여 뒷부분의 부록으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어 번역인 새번역은 칠십인역의 형태를 따르고 있고(첨가된 부분을 이탤릭체로 표기), 공동번역은 라틴어 번역의 형태를 따르고 있다.

 

 

경전성

 

에스델서는 하느님에 대한 직접적 언급을 내포하지 않고 있으며, 이민족의 축제를 토착화하려는 목적에서 제작되었다고 간주되었기에, 처음에는 경전성을 인정받지 못했다. 그래서인지 에스델서는 신약성서에 단 한번도 인용된 적이 없으며, 모든 성서 사본이 부분적으로나마 발견된 꿈란 유적에서 조차 전혀 발견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서기 100년경 개최된 얌니야 회의에서 히브리어 본문이 유다인들의 경전에 포함되었고, 1546년 트리엔트 공의회에서는 에스델서 전체(첨가된 부분까지)를 가톨릭 교회의 경전으로 인정하였다. 즉 히브리 본문을 제1경전으로, 희랍어 본문을 제2경전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삶의 도전들

 

인생의 어느 고비에 이르게 되면, 자신의 전존재를 다해 삶에 응답해야할 시기가 오는 것 같다. 성서신학적으로 말하자면, 인간은 그렇게 자신을 완전히 뒤 짚는 듯한 소용돌이를 치열하게 통과하면서 비로소 참 자신과 조우하게 되고, 그런 고통을 허락하신 하느님께 다다르게 된다.

 

온갖 궁중의 화려함을 경계하고 오로지 하느님으로만 삶을 무장시킨 에스델의 지혜를 통해, 우리 삶도 하느님으로 더 충일해 지기를 희망해 본다. 에스델이 경험한 기쁨과 슬픔, 고독과 혼란은 사실 우리 모두의 삶에 예외 없이 등장하는 요인들이기에…. [가톨릭신문, 2005년 4월 25일, 김혜윤 수녀(미리내 성모성심수녀회, 광주가톨릭대 교수)]

 

 

나를 지키는 강력한 무기는 순수와 진실로 무장된 믿음

 

꽃샘추위가 늦게까지 기승을 부렸지만, 그래도 봄은 신비로울 정도로 아름다운 꽃들을 한 아름 안고 우리를 찾아왔다. 반가운 손님 같다. 「천일의 앤」으로 유명한 헨리 8세의 애첩 앤 볼린이 결국 아들을 낳지 못하고 단두대에서 처형되기 전 마지막으로 한 말은, 오월이군요, 라고 한다. 짧은 말이었지만 결코 가볍지 않은 표현이었다.

 

생명에 대한 여운과 비극적 운명에 대한 담담한 수용이 그 말 안에 다 녹아있는 듯하기 때문이다. 천하의 요부(妖婦)로 소문나 있던 그녀였지만, 그런 진솔한 표현은 아마도 깊은 소외와 어둠의 과정을 정직하게 거치면서 하느님 앞에 서는 법을 배웠기에 나온 설득력이요 진실이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에스델 역시 죽음을 직면하게 되면서 그녀 자신과 민족을 지키는 유일한 길이 무엇인지를 배우게 된다. 답부터 제시하자면 그것은 오염되지 않은 사랑과 믿음이었다. 나를 지키는 가장 강력한 무기는 결국 순수와 진실로 무장된 믿음 아닐까.

 

 

역사성

 

에스델서는 매우 구체적인 묘사로 이야기를 전개하고 있다. 페르시아의 도시 수사(Susa)에 대한 상세한 지리적 설명, 당시의 정치적 상황, 연대기적 표기, 등장인물들의 이름 등은 전달되는 스토리에 매우 생생한 역동성을 부여하고 있다. 그러나 에스델서가 실제 사건에 대한 객관적인 보도인가 라는 질문에는 쉽게 긍정하기 어렵다. 에스델의 남편으로 되어있는 아하스에로스왕은 「크세르크세스」(그리스식 이름)라는 이름으로도 알려져 있는데, 역사적 기록들에 의하면 그의 왕비는 와스디가 아니라 「후타오사」(그리스식 이름은 아토싸, 그리스의 역사가 헤로도투스는 그녀를 아메스트리스로 호칭함)로 되어있다.

 

그런가하면 유다인 여자가 페르시아의 왕비가 되었다는 언급은 그 어떤 기록에서도 발견할 수 없고, 페르시아 통치시대에 유다인들에 의해 계획된 조직적 저항이 있었다는 기록도 발견되지 않는다. 결국, 에스델서는 매우 사실적인 묘사로 내용에 긴장감을 주고 있기는 하지만, 이를 역사적이고 실제적인 사건이라고 단언하기는 어렵다고 볼 수 있다.

 

 

문학유형

 

에스델서는 일종의 「역사소설」로 간주되어져 왔다. 부림절이라는 축제의 기원을 설명하기 위해 창작된 소설이라고 이해되어 온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 책을 「미드라쉬 문학」이라고 보기도 한다. 「미드라쉬」란 성서본문에 대한 해설을 이야기식으로 풀어가는 일종의 성서해석 방법론인데, 에스델서가 창세 37~50장에 등장하고 있는 요셉 이야기와 매우 유사한 줄거리로 되어 있기에 제기된 입장이었다. 즉 에스델서는 창세기에 등장하는 요셉 이야기에 대한 일종의 각색으로, 요셉 이야기를 설명하기 위해 제작된 비유적 표현이라고 보는 것이다. 또 다른 학자들은 에스델서를 「교훈문학」으로 이해하기도 한다. 여성이 가지는 매력, 상선벌악에 대한 전반적 주제 등은 지혜문학적 주제와 깊이 관련되어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제작 연대와 저자

 

역사소설은 그 연대를 추정하기 쉬울 듯이 보이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이순신 장군에 대한 소설은 분명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겠지만, 그 제작은 2005년 현재에도 얼마든지 가능하기 때문이다. 에스델서는 페르시아 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유다인들이 받는 박해가 강하게 내포되어 있다는 점에서, 유다인에게 관대했던 페르시아 시대의 작품으로 보기에는 어려움이 있다. 오히려 이러한 분위기는 유다인들에 대한 박해가 극에 달했던, 시리아 셀류쿠스 왕조의 안티오쿠스 4세 치정에 더 어울린다. 즉 이야기의 배경은 페르시아 시대이지만, 저술된 것은 그보다 훨씬 후대인 그리스 대제국시대로 보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에스델서는 기원전 3세기경 히브리어 본문이, 그리고 기원전 2세기 중엽에 그리스말 본문(첨가된 부분을 포함한)이 완성되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저자에 대하여도 정확히 알려진 바는 없지만, 요셉 전승이나 출애굽 전승 같은 유다인들의 고대 전승에 익숙했고 이를 자유롭게 재구성할 수준의 실력을 갖춘 익명의 유다인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생명을 사는 법

 

5월을 맞으니 오래된 비밀의 정원에 들어선 것처럼, 온 세상은 신비롭고 아름다운 생명으로 가득하다. 어떤 사건이든, 어떤 시간이든, 무엇인가가 내게로 다가올 때는 인생이 나에게 무엇을 또 가르쳐주고 싶어 하는구나, 그런 생각을 습관처럼 하게 된다.

 

계절의 여왕 오월을 닮은 에스델의 이야기를 통해, 하느님과 세상에 대한 오염되지 않은 사랑과 믿음, 전적인 헌신을 배웠으면 한다. 그렇게 될 때 나의 내일은 오늘보다 더 부드럽고 강해질 수 있을테니…. 부드럽고 포근하지만 점점 강력한 저력으로 생명을 전해주는 이 오월처럼. [가톨릭신문, 2005년 5월 8일, 김혜윤 수녀(미리내 성모성심수녀회, 광주가톨릭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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