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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신약] 말씀과 행위에 권위와 힘을 지니신 예수님(마르 1,14-3,6)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0-07-25 조회수3,564 추천수1

[최혜영 수녀의 성경말씀나누기] 마르코 복음서 (6-11)

 

 

II. 말씀과 행위에 권위와 힘을 지니신 예수님(마르 1, 14~3, 6)


1. “때가 다 되어 하느님의 나라가 다가 왔다. 회개하고 이 복음을 믿어라.”(1, 14~15 예수님의 설교 요약)

 

마르코 복음을 묵상하다 보면 오직 한 길만을 달리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어떤 타협도 허용하지 않는 결단이 필요하다. 임박한 종말을 앞두고 각자 자신의 전부를 걸고 선택의 결단을 해야 했던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처한 긴박한 상황이 느껴진다.

 

예수님의 제자로 살아가는 길은 영화 ‘왕의 남자’속의 주인공들처럼 외줄을 타는 인생인 것 같다.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은 한가로운 여기(餘技)가 아니라 총력을 다 기울여 얻어야 하는 생존전략이다.

 

무대 밖으로 사라진 세례자 요한을 뒤로하고 예수님이 전면에 등장하신다. 그분이 전하는 설교 메시지는 분명하다. 몰라서 못 산다는 변명 따위는 통하지 않는다.

 

“때가 다 되어 하느님의 나라가 다가 왔다. 회개하고 이 복음을 믿어라.”(15절)

 

이보다 더 명확할 수 있을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또 우리가 학수고대하던 ‘때’가 찼다. 만일 그 ‘때’를 알아채지 못한다면, 우리는 빈말만을 되뇐 셈이다. 우리는 얼마나 많이 ‘하느님의 이름’을 불러왔던가? 바로 그분이 우리 곁에 와 계신다. 우리가 그토록 간절히 기다리던 순간, 곧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구원의 시간이 다가 왔다. 바로 그 ‘때’를 알아차리고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더 이상 지체하지 않고 하느님께로 되돌아오기만 한다면 ‘하느님 나라’를 차지할 수 있다는 것이 예수님께서 전하시는 기쁜 소식, 곧 ‘복음’이다. 예수님이야말로 ‘기쁜 소식을 전하는 사람’으로서 “복음” 자체이시다.

 

복음을 향유(享有)하는 사람이 되기 위해선 회심(回心)과 믿음이 필요하다. 참된 회개(回改)는 하느님을 향한 방향전환, 온전한 탈바꿈을 의미한다.

 

껍데기만 바뀌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생각과 말과 행동으로 나의 온 존재가 바뀌어야 한다. 믿음은 필요할 때 붙였다가 싫증이 나면 슬며시 떼어버리는 액세서리가 아니다. 믿음은 나의 인격이며 실존 자체이다. 성경의 뿌리가 되는 히브리식 사고방식에서 믿음은 인식의 차원이 아니라 행동을 수반하는 실천의 차원까지를 의미한다.

 

공관복음에서 예수님의 말씀과 행위를 이해하는 키워드는 ‘하느님 나라’라는 말이다. 그분의 말씀과 행위 모두 하느님 나라를 드러내는 것이다.

 

‘하느님 나라’라고 하면, 흔히들 천상의 낙원 같은 어떤 공간을 생각하기 쉬운데, 예수님이 설교하시는 ‘하느님 나라’(바실레이아 투 테우)는 ‘하느님의 왕정(王政)’이라는 역동적인 의미를 갖는다. 인류 역사 안에서 은밀하고 잠정적으로 자신의 힘을 펼치셨던 하느님께서, 역사가 완결될 때 결정적으로 당신의 왕도(王道)를 펼치시리라는 것이다. 역사가 종결될 때 하느님의 종말 통치가 완벽하게 실현되겠지만, 이미 예수님의 인품과 업적을 통하여 실현되기 시작하였다.

 

 

2. “그러자 그들은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1, 16~20 첫 번째 제자를 부르심)

 

14~15절에서 예수님의 복음 선포 집약문이 소개된 후 곧바로 첫 제자를 부르시는 이야기가 나온다. “나를 따라 오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17절)

 

갈릴래아 호숫가에서 그물을 던지고 있던 시몬과 그의 동생 안드레아,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은 예수님의 부르심에 응답한 첫 제자들로서, 앞으로 중요한 사건이 있을 때마다 복음의 증인이 될 것이다(5, 37; 9, 2; 13, 3; 14, 33).

 

“그러자 그들은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18절)

 

아무런 주저도 일말의 지체도 없다. 이렇게 예수님의 공생활 초창기에 소명사화가 나오는 것은 예수님의 설교 핵심인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는 가르침을(15절) 실천한 사람들, 곧 그리스도인들이 본받아야 할 이상적인 제자상으로서 제시된 것이다.

 

이제 그들은 예수님을 따라다니면서 예수님의 인품과 언행을 익히게 될 것이다. [가톨릭신문, 2006년 2월 12일, 최혜영 수녀(성심수녀회, 가톨릭대 종교학과 교수)]

 

 

3. “이게 어찌 된 일이냐?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이다.”(1, 21~34 카파르나움에서의 하루)

 

예수님께서는 네 제자와 갈릴래아 호수 북서쪽에 위치한 포구, 카파르나움으로 들어가시는데, 예수님의 하루 일정이 소개된다. 예수님의 활동상 전체를 한 눈에 보여주는 본보기인 셈이다.

 

안식일 낮에는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더러운 영에 사로잡힌 병자를 고쳐주시고(21~28절), 시몬과 안드레아의 집에서 시몬의 장모를 고치시고(29~31절), 저녁때가 되어 해가 진 후에는 온 고을에서 모여든 갖가지 병자들을 고치시고 많은 마귀들을 쫓아내신다(32~34절).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 곧 가르침과 치유 행위는 ‘하느님 나라’의 위대함을 드러내는 공통의 표징인 셈이다. 이러한 예수님의 행위를 보고 사람들은 예수님을 ‘놀라운 분’(22.27절)으로 이해하는데, 가르치시는 내용이나 방식이 율법 학자들과는 아주 달리 권위가 있었고(22절), 더러운 영을 쫓아내셨기 때문이다(27절).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미친 사람을 고치심(1, 21~28)

 

율법 학자들이 언제나 구약성서와 조상들의 전통을 근거로 내세워 율법을 가르친 것과는 달리,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체험을 바탕으로 하느님 나라, 곧 하느님을 선포하셨기에 가르침의 내용이 힘차고 새로울 수밖에 없었다. 참된 권위는 사람을 억압하고 복종시키는 데 있는 것이 아니고 사람을 사람답게 살도록 힘을 실어주는 데 있다. 예수님의 권위는 그분을 만나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존엄성을 깨닫고 힘차게 살아갈 수 있도록 생명력을 되찾아주시는 데 있다. 살아계신 하느님의 힘이 그분을 통해서 전달되는 것이다. 오늘날 리더십에서 예수님을 최고의 리더로 보는 것은 그분의 권위가 흔들림 없는 원천에서 비롯하고 또 사람들을 스스로 설 수 있도록 힘을 실어 주는 데 있는 것이라 생각된다.

 

“저이가 더러운 영들에게 명령하니 그것들도 복종하는구나.”(27절)

 

예수님의 가르침이 권위를 가질 수 있는 것은 예수님께서 사탄의 권세를 물리칠 수 있는 권능이 있는 것과도 연결된다. 오늘날의 관점에서 본다면 정신병자를 치유하신 것으로 볼 수 있겠는데, 옛 사람들은 정신병이 더러운 영, 악령에게서 왔다고 생각했다. 일원론적 사고방식을 가진 히브리인들에게 악령은 하느님과 맞서는 대단한 존재는 아니었지만, 하느님께 다가가는 길을 방해하는, 그 힘이 만만치 않은 악의 실체였다. 그런데 그런 악령을 단순한 명령으로 물리치시니 놀라울 수밖에 없었다. 사람들은 몹시 놀라 “이게 어찌 된 일이냐?”고 서로 묻는다. 이 물음은 마르코 복음 안에 계속하여 나오는 “이 분이 누구신가?”라는 질문과 맞닿는다. 오늘날 성경을 읽는 우리 역시 이 질문에 진지하게 답해야 한다. “지금 나에게 예수 이 분은 과연 누구이신가?”

 

시몬의 병든 장모를 고치심(1, 29~31)

 

마르코 복음에서 첫 번째로 나오는 이 치유 기적은 전형적인 치유 이적사화의 형식을 갖추고 있다. 보통 치유사화는 ① 상황 묘사 ② 기적적인 치유 ③ 치유의 실증 ④ 목격자들의 반응 순으로 진행되며 이야기에 따라 약간의 변형이 있다. 이 이야기에서는 예수님께서 손수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열이 가셨다고 하여 즉각적이고 완전한 치유가 이루어졌음을 강조한다. 치유를 받은 시몬의 장모가 시중을 들었다고 하는데, 제자로서의 사명을 나타태는 것 같다. 왜냐하면 ‘시중들다’(디아코네인)라는 동사가 ‘따르다’(아콜루테인)라는 동사와 함께 제자직분을 가리키는 데 고유하게 사용되기 때문이다.

 

많은 병자를 고치심(1, 32~34)

 

이 대목은 예수님의 활약상을 요약해 주는 집약문으로, 안식일이 지나고 보다 많은 사람들이 자유롭게 사방에서 몰려드는 장면을 상상하게 한다.

 

마르코는 예수님의 능력을 강조하기 위해 ‘갖가지’ 질병을 앓는 ‘많은’ 사람을 고쳐 주시고 ‘많은’ 마귀를 쫓아내셨다고 전한다. 그러면서도 마귀들이 예수님이 누구신지 말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시는데, 이것은 메시아 비밀과 연결된 함구령이다. 예수님의 진면모가 마귀들에 의해 드러날 수는 없다. 또한 예수님의 기적은 예수님이 누구신지 드러내 주는 하나의 표징일 뿐 예수님의 전 인격을 드러내 주지는 못한다.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진정으로 알기 위해서는 나의 온 존재를 걸고 그분을 따라가야 한다. 또 그분처럼 살아야만 하는 것이다. [가톨릭신문, 2006년 2월 19일, 최혜영 수녀(성심수녀회, 가톨릭대 종교학과 교수)]

 

 

4. “예수님께서는 온 갈릴래아를 다니시며, 회당에서 복음을 선포하시고 마귀들을 쫓아 내셨다.” (마르 1, 35~45 갈릴래아 지방에서의 활약상)

 

예수님께서는 카파르나움에서 발걸음을 옮겨 온 갈릴래아 지방을 두루 다니시며 하느님의 복음을 선포하시고 축귀와 병자 치유 활동을 펼치신다. 구원의 기쁜 소식은 어느 특정 지역이나 특정 인물에게만 주어지는 것이 아니고 만민을 위한 것이다.

 

예수님의 활약이 점점 커지고 사방에서 사람들이 몰려든다. 예수님께서 사명 수행을 위해 당신 제자들과 함께 발이 부르트도록 전도활동을 펼치시는 모습이 눈에 선하다.

 

이른 새벽 외딴 곳에서 기도하심 (1, 35)

 

예수님의 하루는 기도에서 시작된다. 사명 수행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목표가 뚜렷해야 한다. 예수님의 정체성은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신원의식을 기반에 둔 것이었고 사명수행의 목표는 ‘하느님 나라’의 실현이었다.

 

도자기를 빚을 때도 중심이 바로 서지 않으면, 몇 차례의 공정 과정을 거치는 동안 금이 가거나 결국은 깨어진다는 것을 알게 된다.

 

아직 캄캄한 새벽, 외딴 곳에서 홀로 기도하시는 모습은 예수님께서 낮동안 무엇을 위해 그토록 바쁘게 일하셨는지를 깨닫게 한다. 그리스도인의 하루도 무턱대고 분주하지 않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무엇하는 사람인가?”를 끊임없이 물으며 자신을 돌아봐야 한다. 예수님처럼 우리가 “하느님의 사랑 받는 자녀”로서 우리의 신원의식을 잃지 않으려면, 하느님과 홀로 외로이 대면할 수 있는 사막의 시간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마르코 복음에는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는 장면이 두 번 더 나오는데, 산으로 올라가 기도하시고(6, 46), 수난 전 게쎄마니에서 기도하신다(14, 32~42).

 

나병 환자를 고치심 (1, 40~44)

 

카파르나움에서의 하루 일정(1, 21~34)에는 시몬의 장모를 치유하신 이야기와 더러운 영에 사로잡힌 사람을 고치신 이야기 등 많은 병자를 고치신 이야기가 실린 반면, 갈릴래아에서의 활약상에서는 나병 환자를 치유하신 이야기만이 대표적으로 실려 있다.

 

성경에 나오는 나병은 현대 의학에서 한센병이라 일컫는 문둥병 뿐 아니라 온갖 종류의 피부병을 일컫는다. 피부병은 남 보기 불결하고 전염성이 강해서 극도로 다른 사람과의 접촉을 피했던 것 같다. 이 때 병자들이 사회적으로 고립되어 겪게 되는 소외감은 물리적인 고통보다 훨씬 심각한 것 같다.

 

필자의 경험에도 어린 시절 옻이 올라 얼굴이 논바닥처럼 갈라지고 눈이 퉁퉁 부어 학교에 갔을 때, 나의 이상한 몰골과 황 냄새 때문에 무용 시간에 나와 짝을 안하려고 피해가던 친구들 모습이 잊혀지지 않는다. 아무튼 인간 세상에서 외톨이가 된다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 자살하는 사람들을 통해서도 잘 볼 수 있다.

 

그런데, 이 이야기에는 특정한 시간이나 장소, 환자의 이름, 목격자들의 반응 등이 구체적으로 명시되어 있지 않다. 아마도 예수님의 일정한 치유 행적을 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예수님의 위대한 모습을 전하는 데 초점을 맞췄기 때문일 것이다.

 

또 마르코 복음에서는 예수님의 인간적인 면모가 잘 드러나는데, 무엇보다 병자를 치유하실 때 보여주시는 ‘연민’의 마음은 언제나 우리 마음을 푸근하게 해준다. 예수님께서는 나병 환자에게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어떤 사본에는 “화를 내시며”라고 하는데, 그리스 어 스프랑크니조마이(σπλαγχν?ζομαι)는 가여워서 애간장이 끓는 마음을 가리키는 것으로 예수님의 치유의 동기는 다른 어떤 것도 아닌 바로 이 연민의 마음이었다.

 

예수님께서 손을 내밀어 나병 환자에게 대시며 “깨끗하게 되어라”고 하시니 바로 나병이 가시고 그가 깨끗하게 되었다고 하는데(41~42절),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사제에게 가서 몸이 나았다는 것을 보이고 성전에 예물을 바치라고 분부하신다.

 

이로써 그가 온전한 사회 구성원이 되었을 뿐 아니라, 하느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었음을 보여 준다. 정화(淨化)의 궁극적인 목적은 관계의 회복에 있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마태 5, 8).

 

44절에 함구령이 다시 나오는데, 함구령은 예수님의 정체가 완전히 드러날 때까지 계속될 것이다. 치유된 나병 환자에 대한 함구령에도 불구하고 그는 떠나가서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를 널리 알리고 퍼뜨린다. 구원의 기쁜 소식, 곧 하느님의 복음은 널리 알려질 수밖에 없다. [가톨릭신문, 2006년 2월 27일, 최혜영 수녀(성심수녀회, 가톨릭대 종교학과 교수)]

 

 

5. “이제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음을 너희가 알게 해 주겠다.” (마르 2, 1~3, 6 카파르나움에서 벌어진 논쟁사화 5편)

 

예수님께서 유다 지도자들과 논쟁하는 장면을 보면, 우리가 앞서 살펴본 예수님의 모습과는 사뭇 다르다. 예수님께서 언제 연민의 마음으로 애간장을 끓이시고 부드러운 손으로 병자에게 손을 얹어 치유의 은혜를 베푸셨는지 의심이 갈 정도다.

 

마음이 완고해져서 도무지 자신의 위신과 체면, 명예와 영광밖에는 생각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깨우치는 길은 혹독한 비판과 단호한 질책뿐이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영광을 가리는 지도자들의 뻣뻣한 목덜미와 위선적인 태도를 못 참으시고 당신 말씀의 권위로써 적수들을 논박하신다.

 

마르코 복음 2장 1절에서 3장 6절에는 논쟁사화 5편이 실려 있는데(① 2, 1~12, ② 2, 13~17, ③ 2, 18~22, ④ 2, 23~28, ⑤ 3, 1~6), 예수님께서 병고와 죄, 사회적인 고립과 소외로 고통 받는 사람들을 해방시키시고, 단식과 안식일 같은 형식적인 규칙을 넘어서 자유를 가져다주신다. 이로써 군중들과 제자들에게는 상당한 지지를 받게 되지만, 유다 지도자들에게는 피할 수 없는 반대를 받게 되며, 결국 이야기 끝에 이르면 바리사이들과 헤로데 당원들은 예수님을 어떻게 없앨까 모의를 하게 된다(3, 6). 적대자들과의 논쟁은 앞으로 조상들의 전통에 대한 논쟁(7, 1~23), 수난사로 이어질 예루살렘에서의 논쟁 이야기(11, 27~12, 37)와 연결될 것이다.

 

예수님은 말씀과 행위 안에서 권위와 힘을 지니신 분이시다. 이제 논쟁사화 안에서도 예수님께서 어떠한 분이신지 ‘간접적인 그리스도론’이 전개될 터인데, 예수님의 말씀을 잘 보면, 자기정체성과 관련된 발언이 눈에 띈다.

 

사람의 아들은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신 분”(2, 10),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오신 분”(2, 17), “혼인 잔치의 신랑이신 분”(2, 19), “안식일의 주인”(2, 28)이시다. 그러니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2, 22c) 예수님께서 세상에 가져오시는 질서는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질서이다. 천지창조에 버금가는 새로운 창조이다. 옛 질서에 묶여 있는 한, 새로운 탄생은 없다. 날개를 달고 하느님 나라를 향한 비상을 꿈꾼다면, 새 것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예수님과 만남을 체험한 사람들은 새롭게 태어나는 기쁨이 무엇인지 깨달을 수 있게 된다. 구원은 새로운 탄생이다.

 

중풍 병자를 고치심 (2, 1~12)

 

이 이야기는 전형적인 치유이적사화에 사죄권 논쟁(2, 6~10)이 삽입되어, 예수님께서 인간의 병도 고쳐주시고 죄도 용서해 주시는 하느님의 권능을 지니신 분임을 드러낸다. 예수님께로부터 하느님의 권능을 본 사람들은 하느님을 찬양하며 “이런 일은 일찍이 본 적이 없다”(12c절)고 감탄하지만, 적대적인 율법학자로서는 하느님을 모독한다(7절)고 생각할 뿐이다.

 

중풍 병자는 자신이 생각한 대로 몸을 자유로이 움직일 수가 없는 사람으로, 누군가의 도움을 필요로 한다.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면에서 본다면, 우리 모두가 중풍 병자가 아닐 수 없다. 중풍 병자의 네 친구는 병자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헤아려, 그를 침대에 눕힌 채 지붕을 뚫고 침상을 내려 보낸다. 이스라엘 가옥 구조로 볼 때 쉽게 있을 수 있는 일이라고는 하지만 적극적인 그들의 행동은 친구에 대한 강한 애정과, 예수님께 대한 깊은 신뢰가 없이는 불가능하다. 중풍 병자인 우리로서는 내 몸을 낮춰 누군가에게 의탁할 수 있는 겸손함이 무엇보다 필요하지 않을까?

 

예수님께서는 친구들의 믿음을 보시고 - 당사자의 믿음은 그보다 훨씬 클 것으로 보인다 - “얘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는 말씀으로 치유해 주신다. 중풍 병자의 죄의 짐은 어쩌면 무거운 몸보다 훨씬 큰 짐으로 억누르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죄의 감옥에서 풀려나 가벼운 몸으로 자유를 향해 날개짓을 하자면 용서 받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누군가 나를 용서해 주지 않으면 나는 자유로워질 수 없다. 마찬가지로 나의 용서가 없이 죄의 굴레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이 밖에 알아내지 못한 죄에 대해서 통회한다”는 고백은 나의 죄와 이웃의 죄가 결코 무관하지 않다는 연대성을 나타낸다.

 

내가 모르고 지은 죄에 대해서 누군가의 용서가 필요하듯이, 우리에게 섭섭하게 한 사람들에 대해 너그러이 용서하는 마음이 필요하다. 나의 작은 용서가 누군가의 영혼을 구한다는 사실을 안다면, 굳이 마음을 닫아걸고 용서하지 못하겠다고 버틸 모진 사람이 있을까? [가톨릭신문, 2006년 3월 5일, 최혜영 수녀(성심수녀회, 가톨릭대 종교학과 교수)]

 

 

레위를 부르시고 세리들과 음식을 드심(마르 2, 13~17)

 

앞서 나온 예수님의 사죄권(2, 6~10)에 대한 구체적인 실증으로, 세리 레위의 부르심(2, 13~14)과 죄인들과의 식탁 친교(2, 15~17) 이야기가 나온다. 예수님의 활동을 통해 드러나는 자비로운 처사는 하느님 나라의 구원적인 모습을 드러내는 표징이 된다.

 

예수님 시대 당시 세리는 공식적으로 죄인 취급을 받았다. 왜냐하면, 이들은 관세를 거둬들이기 위해 이방인들과 자주 접촉을 했고 터무니 없이 높은 세금을 거둬들여 부당하게 치부하는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사회적 평판이 좋지 않던 레위(마태오라고도 불림)가 예수님의 열두 제자 중의 하나가 되었다는 사실은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것이 인간적인 자격으로 되는 것이 아님을 단적으로 보여 준다. 더구나 열두 제자 중에는 열혈당원이 두 명이나 있지 않았던가!

 

예수님의 밥상 공동체에는 예수님과 그분의 제자들,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자리를 함께 했다(15절). 식탁에 함께 앉아 음식을 함께 나눈다는 것은 매우 친밀한 사이를 나타낸다.

 

요즘도 근동 지역에서 식사를 함께 한다는 것은 큰 호의를 나타낸다. 아프가니스탄에서 빈 라덴을 끝까지 내주지 않았던 것은, 중동 사람들의 손님 대접이 얼마나 극진한가를 보여준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아무(?) 하고나 친구가 되신다는 것은 그야말로 스캔들이었다.

 

예수님께는 죄를 사하시는 절대적인 권한이 있음을 분명히 밝히셨다.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2, 17)

 

예수님께서 용서하지 못할 죄는 없다! 내적으로 자유로운 사람만이 사람들을 차별하지 않고 포용할 수 있다.

 

금식 논쟁 - 새 것과 헌 것(2, 18~22)

 

금식에 대한 논쟁(2, 18~20)과 두 가지 비유 말씀(2, 21~22)은 다섯 가지 논쟁사화 가운데에 놓여 나머지 이야기들을 해석하는 역할을 한다. 앞의 두 논쟁사화는 죄의 용서를 다루고 뒤의 두 이야기는 안식일 규칙을 다루고 있는데, 단식과 안식일 규정은 1세기 유다교 믿음 체계에서 중요한 토대가 된다. 예수님께서 이 두 근본 믿음에 대하여 중심을 잡아주시는 것이다.

 

“신랑이 함께 있는 동안에는 금식을 할 수 없다.”(20절) 성서에서 혼인잔치는 종말론적 구원을 상징하는 것으로, 예수님이야말로 구약의 약속이 실현되어 종말론적 구원을 이루시는 분이심을 알려준다. 예수님과 함께 있을 때 제자들은 단식을 할 필요가 없었다. 그분과 함께 있는 것이 구원을 경축하는 기쁨의 자리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재림을 간절히 기다리는 교회 시대에는 단식의 필요가 절실하다(19b~20절).

 

21절과 22절은 본디 앞뒤 문맥과 상관없이 전해 온 이중단절어로 새것(새 조각, 새 포도주)과 헌 것(헌 옷, 헌 가죽부대)은 서로 잘 어울리지 않는다고 말함으로써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 나라는 혁신적이고 위력적이므로 이에 맞갖은 ‘회개’ 역시 새롭고 힘차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안식일에 밀 이삭을 자름(2, 23~28)

 

안식일에 밀밭 사이를 예수님과 그 일행이 걸어가신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배가 출출했는지 아니면 입이 심심했는지 밀 이삭을 뜯기 시작했다. 이를 보고 바리사이들이 시비를 걸어온다. “보십시오. 저들은 어째서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합니까?”(24절)

 

이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이 통쾌하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27b절). 안식일 법을 상대화하고 사람을 중요시하는 인본주의적 법이념이 아니겠는가? 핵심을 놓치고 작은 일에 목을 매지 말라는 말이다.

 

“사람의 아들은 또한 안식일의 주인이다.”(28절)라는 말씀으로, 예수님의 권위가 안식일 제도에까지 미친다는 사실을 확인하신다.

 

안식일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집트의 종살이에서 풀려나 해방의 기쁨을 체험하게 한 은총의 사건이었다. 그러나 본래의 법정신을 잃어버리고 형식에 매어달릴 때 더 이상의 생명력은 없고 단지 사람을 옭아매는 덫이 되고 만다. 안식일이 참된 기쁨의 축제가 되기 위해서는 다른 모든 것은 필요 없고 하느님만이 전부이시라는 진리에 마음을 두어야만 한다. [가톨릭신문, 2006년 3월 12일, 최혜영 수녀(성심수녀회, 가톨릭대 종교학과 교수)]

 

 

안식일에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고치심(마르 3, 1~6)

 

카파르나움에서 벌어진 논쟁사화를 마감하는 이 다섯 번째 이야기는 본래 앞뒤 문맥과 상관 없이 전해오던 치유사화였으나, 이 자리에 배치되어 적수들이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의하는 것으로(6절) 예수님의 활약상을 마무리한다. 이야기의 전개는 치유이적사화의 전형적인 양식에 따라, ① 상황묘사(1~4절), ② 기적적 치유(5a절), ③ 치유실증(5b절), ④ 목격자들의 반응(6절) 순으로 진행된다. 파격적인 점은 치유가 이루어지는 사이에 논쟁이 벌어지고(2, 4절), 목격자들의 감탄 대신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의한다는 것이다.

 

유다교의 법해석으로도 생명이 위독한 경우에는 안식일일지라도 목숨을 구해야지 죽여서는 안된다고 하는데, 예수님께서는 한걸음 더 나아가 일반 병자까지도 고쳐주는 선행을 행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악행을 저지르는 것이라고 해석하신다.

 

사실 안식일의 휴식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큰 특전인가! 요즘은 우리나라에서도 형편이 좋은 기관부터 주5일제를 실시하여 가고 있는 추세지만, 가난했던 시절에는 아예 휴일은 학교나 관공서에서나 가질 수 있는 것으로 생각했었다.

 

그런데, 지금으로부터 삼천년도 훨씬 전인 모세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 안식일 제도가 있었다는 것은 실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우리도 기억하지만 머슴에겐 휴식이라는 것이 따로 없었다. 종은 그저 일만 부려먹으면 그만이지 인권이니 쉼이니 하는 것은 아예 안중에도 없었던 것이다.

 

이스라엘 민족에게 휴식의 정당성이 부여된 것은 하느님 안에서 만인이 평등하고 하느님만이 당신 백성의 주인이심을 선포하는, 실로 엄청난 해방과 구원의 체험이었다. 그러니 안식일의 근본 정신은 선하신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것이었다.

 

이 얼마나 멋진 일인가? 일주일에 하루 안식일이 있어 창조주 하느님을 생각하며 그분의 은총에 감사드리고, 칠 년에 한 번 안식년이 있어 땅까지도 쉴 수 있고, 칠 년이 일곱 번 지난 50년째 되는 해는 모든 빚이 탕감되어 해방의 기쁨을 맛볼 수 있다니! 이 세상 모든 것은 하느님께 속해 있다. 인간에게는 사용권만 있지 소유권은 없다.

 

예수님 시대에 안식일을 철저히 지킬 수 없었던 사람들은 가난한 사람들이었다. 생존을 위해 피치못해 일해야 하는 일이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현대인에게 필요한 것은 안식일의 법정신을 회복하여 하느님 안에서 제대로 쉴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생명의 하느님께서 시간을 선물로 주셨는데, 우리는 그분을 위해서 하루에 한 시간, 일주일에 하루 내어놓기도 얼마나 아까워하는지? 따로 웰빙을 찾을 것이 아니라 안식일만 잘 지켜도 우리 삶의 질이 훨씬 높아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느님 안에서의 쉼’이야말로 생의 충만함을 누릴 수 있는 지혜일 것이다. [가톨릭신문, 2006년 3월 19일, 최혜영 수녀(성심수녀회, 가톨릭대 종교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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