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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성경] 유대인 이야기28: 아! 북 이스라엘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09-09-19 조회수4,135 추천수2

[유대인 이야기] (28) 아! 북 이스라엘


역사 속으로 사라진 북 이스라엘

 

 

아시리아의 침략으로 북 이스라엘은 무너지고, 북 이스라엘 유대인들은 오늘날의 이란 이라크 지역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사진은 북 이스라엘의 수도였던 사마리아 궁전의 망루와 성벽 유적.

 

 

그야말로 ‘요지경’이다.

 

북 이스라엘의 왕 즈카르야는 통치 6개월 만에 살룸에게 살해됐다(2열왕 15,10). 살룸도 한 달 후 므나헴에게 암살됐다(2열왕 15,14). 북 이스라엘은 만신창이가 되어갔다. 실제로 북 이스라엘은 쇠약해질 대로 쇠약해져 므나헴 시대에 이미 아시리아 왕에게 조공을 바쳐야 했다.

 

“므나헴은 아시리아 임금에게 주려고, 모든 부자에게서 은을 쉰 세켈씩 거두었다.”(2열왕 15,20)

 

이런 상황을 주먹으로 가슴 치며 바라본 사람이 있었다. ‘페카’는 유대 민족이 강대국에게 조공을 바치는 상황을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그래서 므나헴에 이어 왕위에 오른 프카흐야를 죽이고 스스로 왕위에 올랐다. 그리고 대 강경 아시리아 정책을 표방한다.

 

아시리아에 대항하기 위해선 남 유다와의 연대가 최우선 과제였다. 그래서 남 유다의 왕 ‘아하즈’(2열왕 16,1-20 참조)에게 손을 내밀었다.

 

“함께 힘을 모아 아시리아에 대항하자.”

 

돌아온 대답은 “NO”였다. 남 유다의 왕 아하즈는 아시리아에 대항하는 것은 무모한 짓이라고 판단했다. 그는 오히려 친(親) 아시리아 정책을 편다.

 

북 이스라엘 입장에서 보면 혹을 떼려다 붙인 꼴이다.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유다 왕국을 놔둘 경우, 아시리아와 유다로부터 동시에 협공을 받을 수 있었다. 결국 유다에 반(反) 아시리아 성향의 새로운 왕을 세우기 위해 전쟁을 일으킨다(이사 7,1-9; 호세 5,8-6,6).

 

이런 상황에서 남 유다 왕국이 선택할 수 있는 카드는 오직 하나밖에 없었다. 바로 아시리아에 원군을 청하는 것이다.

 

“아시리아 임금에게 사신들을 보내어 이렇게 말하였다. ‘저는 임금님의 종이며 아들입니다. 저를 공격하고 있는 이스라엘 임금의 손아귀에서 저를 구해 주십시오.’”(2열왕 16,7)

 

아시리아로선 호박이 넝쿨째 굴러들어온 셈이다. 남 유다 왕국의 원군 요청은 그렇지 않아도 이스라엘 침공의 기회를 엿보고 있던 아시리아에게 전쟁의 명분을 준 꼴이 됐다. 아시리아는 망설이지 않았다. 즉각 군사행동을 시작한다. 당시 고대 근동의 최강 군사력을 자랑하던 아시리아군은 순식간에 다마스쿠스를 장악하고, 북 이스라엘 대부분 지역을 점령했다.

 

“아시리아 임금 티글랏 필에세르가 와서, 이욘, 아벨 벳 마아카, 야노아, 케데스, 하초르, 길앗, 갈릴래아와 납탈리 온 지역을 점령하고, 사람들을 아시리아로 끌고 갔다.”(2열왕 15,29)

 

북 이스라엘의 수도 ‘사마리아’만 간신히 살아남아 버티고 있는 상황이었다. 북 이스라엘 왕 ‘페카’는 이미 정치적 능력을 상실했다. 이런 페카를 죽이고 스스로 왕위에 오른 인물이 북 이스라엘의 마지막 왕 ‘호세아’(예언자 호세아와는 동명이인이다)다.

 

호세아도 허리 굽히기를 싫어했던 인물이다. 겉으로는 아시리아에 조공을 바치는 척하며 기회를 엿보다가 마침내는 이집트에 도움을 요청, 아시리아에 대항한다. 아시리아는 더 이상 참지 않았다. 대군을 몰고 와서 북 이스라엘의 마지막 숨통이었던 사마리아마저 함락시켰다(기원전 722년). 그리고 북 이스라엘 유대인들을 오늘날 이란과 이라크 지역으로 강제 이주시켰다.

 

“아시리아 임금은 사마리아를 함락하고, 이스라엘 사람들을 아시리아로 끌고 가서 하라와 고잔 강 가 하보르와 메디아의 성읍들에 이주시켰다.”(2열왕 17,6)

 

아시리아는 원래 다른 민족들을 정복한 후 ‘이주’라는 극단적 방법을 사용하지 않았던 나라였다. 초기 상황을 보면, 유대인들과의 전투에서 이긴 후에도 친화 정책을 우선시했다. 하지만 다른 민족과 달리 유대인들은 쉽게 아시리아에 동화되지 않았다. 끊임없이 봉기하고 반항했다. 제국을 유지해야 했던 아시리아 입장에서 보면 유대인들은 분명 다루기 힘든, 골칫덩어리 민족이었을 것이다. 결국 아시리아는 ‘강제 이주’라는 극약 처방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유대인들이 떠난 도시에는 아라비아 사람들을 이주시켰다.

 

“아시리아 임금은 바빌론과 쿠타와 아와와 하맛과 스파르와임에서 사람들을 데려다가, 이스라엘 자손들을 대신하여 사마리아 성읍들에 살게 하였다. 그리하여 그들은 사마리아를 차지하고 그 성읍들에서 살았다.”(2열왕 17,24)

 

유대 역사상 최초의 엄청나고도 거대한 비극이 발생했다. 유대민족의 북쪽 10지파는 이제 역사와 신화 속으로 사라졌다. 언어와 신앙도 모두 사라졌다. 극적으로 사마리아에 남을 수 있었던 행운을 가진 유대인들도 이주민들과 자연스럽게 어울리며 결혼하는 동안 혈통을 상실했다. 오늘날 유대인이라고 할 때, 소위 순수 혈통을 유지하는 것은 남 유다 왕국의 후손들뿐이다.

 

남 유다 왕국 유대인들이 보았을 때 북 이스라엘의 유대인들은 더 이상 유대인이 아니었다. 유대인들의 인식 속에 사마리아인들은 더 이상 선민이 아니었다. 사마리아인들과는 더 이상 약속받은 땅을 공유할 수 없었다. 사마리아인들은 이방인들과 피가 섞인 사람들이었다. 예수님 시대에 이르기까지 사마리아 사람들이 유대인들로부터 천대받았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요한 4,1-42 참조).

 

북 이스라엘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이제 유대인들의 나라는 남쪽 유다 왕국만 남았다.

 

[가톨릭신문, 2009년 9월 6일, 우광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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