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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성경] 유대인 이야기25: 끊이지 않는 망치소리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09-08-20 조회수4,601 추천수2

[유대인 이야기] (25) 끊이지 않는 망치소리


“우린 더 이상 떠돌이 민족이 아니다”

 

 

이스라엘 팀나 국립공원에 있는 ‘솔로몬의 촛대’(King Solomon’s Pillars) 바위. 네게브(Negev) 사막에 위치하고 있는 팀나 국립공원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구리광산 유적으로 이집트 이스라엘 로마에 이르기까지 고대 문명의 발전에 큰 영향을 주었다.

 

 

솔로몬은 중대 결심을 한다. 성당을 세우기로 한 것이다. 당시까지 유대인들은 성당을 갖지 못했다. 사실 성전 건립 프로젝트의 시안을 처음 만든 것은 솔로몬의 아버지, 다윗이었다. 다윗은 왕국을 세우자마자 성전 건립에 대한 강한 원의를 드러냈다. 그래서 차곡차곡 돈도 모았다. 하지만 정작 자신은 꿈을 이루지 못했다. 왕국의 기틀을 다지는 일이 우선이었기 때문이다. 성전 건립의 꿈은, 아버지가 차린 밥상에 숟가락만 놓으면 됐던 솔로몬에 의해 달성된다. 예루살렘에 드디어 망치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솔로몬 통치 4년째인, 기원전 959년경의 일이다.

 

성전 건립은 유대민족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공사였다. 열왕기 상권 5장을 보면 그 엄청난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성전 건축에 필요한 목재를 레바논에서 운반해 오는 일에만 3만 명이 동원됐다. 또 돌을 캐고 다듬고 운반하는 데는 8만 명의 석공과 7만 명의 인부가 동원됐다. 이들을 관리하는 인부만 3300명이었다고 하니 오늘날 기준으로 봐도 대공사였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이를 악물고 꿈을 이뤄낸다. 공사 시작 7년 만인 기원전 952년경, 드디어 웅장한 모습의 성전이 모습을 드러냈다. 광야에서 떠돌며 천막에 하느님을 모셔야 했던 유대민족으로서는 감격적인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성경은 당시 성전의 규모와 모습, 내부 장식 및 성전에 들어간 기물 등을 상세히 묘사하고 있다(1열왕 6장 참조). 석조로 이뤄진 성전은 대략 길이 28m, 폭 10m, 높이 14m 규모였다. 서울대교구 명동대성당이 길이 69m, 폭 28m, 지붕 높이 23m, 종탑 높이 45m 이니까, 솔로몬 성전은 명동대성당의 약 3분의 1 규모였던 것으로 짐작된다.

 

성전 내부는 순금 등잔대 등으로 화려하게 장식했다(1열왕 7,13-50 참조). 성전에는 가로 세로 약 9.5m 규모의 지성소도 마련했는데, 역시 향백나무에 금을 입혀 화려하게 장식했다. 탈무드 전승에 의하면 이 지성소에는 계약궤와 모세의 지팡이, 아론의 막대기, 만나가 담긴 항아리, 야곱이 하늘에 이르는 사다리 꿈을 꾸었을 때 베고 잤던 돌 베개 등이 보관됐다. 하지만 훗날 예루살렘 멸망(기원전 587년) 이후 모두 사라져 지금은 확인할 수 없다.

 

성전 축성식이 열리던 날, 백성들은 기뻐하고 환호했다. 유대민족은 이제 더 이상 떠돌이 민족이 아니었다. 번듯한 성전을 가진 아시아의 유력 민족으로 거듭난 것이다. 백성들은 솔로몬에게도 환호했다. 솔로몬은 성전 건축의 위업을 이룬 지혜로운 재판관이자 민족을 이끌어갈 영도자였다.

 

하지만 솔로몬은 여기서 멈췄어야 했다. 돈이 많으면 욕심도 함께 커진다. 욕심은 파멸을 낳는다. 솔로몬은 성전 건축이 끝나자마자 자신과 왕비들, 후궁들이 살 왕궁도 짓겠다고 선언했다. 문제는 왕궁의 규모였다. 솔로몬이 계획한 왕궁은 성전보다 30% 정도 더 큰 규모였다. 당연히 왕궁 건축 기간도 성전 건축 기간의 두 배 가까운 13년이라는 세월이 소요됐다. 성전 건축보다 훨씬 많은 인력이 투입됐음은 물론이다.

 

공사 시작 7년 만인 기원전 952년경, 솔로몬 성전은 웅장한 모습을 드러냈다.

 

 

백성들은 지치기 시작했다. 게다가 솔로몬의 지갑도 얇아졌다. 성전 건축을 포함, 21년간 계속된 대형 토목 공사로 인해 국고도 서서히 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늘어난 관료 계급, 솔로몬의 대규모 식솔과 그들의 호화로운 왕궁 생활도 왕실 재정의 위기를 앞당겼다.

 

여기서 솔로몬은 또다시 실수를 저지른다. 재정 적자가 늘어나면 토목 사업을 줄이고 왕궁 소요경비를 절감하는 등 긴축재정을 했어야 했다. 하지만 솔로몬은 정반대의 길을 걷는다. 그가 선택한 방법은 지출을 줄이는 것이 아니라, 수입을 늘리는 것이었다. 정복 전쟁을 하지 않는 상황에서 수입을 획기적으로 늘리는 방법은 한가지밖에 없다. 바로 세금을 늘리는 것이다.

 

솔로몬은 왕국을 12개의 행정구역으로 나눈다. 그리고 한 구역에서 한 달씩 돌아가며 왕궁 생활 유지비를 부담케 했다(1열왕 4,7-19). 또 가나안 사람들(유대인이 아닌 사람들)을 노예로 삼아 궁과 성, 요새 건축 등에 투입했다(1열왕 9,15-25).

 

그럼에도 재정 적자는 개선될 여지가 보이지 않았다. 솔로몬은 여기서 또다시 유대인들이 경악할 일을 저지른다. 다윗이 어렵게 획득한 영토를 헐값에 팔아넘긴 것이다. 솔로몬은 성전과 왕국 건립에 사용할 나무와 금을 제공한 이방인 왕에게 갈릴래아 땅의 성읍 20개를 넘긴다(1열왕 9,11). 이쯤 되면 솔로몬의 재정이 얼마나 심각한 상황에 처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솔로몬의 잘못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솔로몬은 파라오의 딸을 비롯한 자신의 여인들에게 그들을 위한 궁전과 이방인 신전을 지어주고 이방인들이 모시는 신에게 제사를 지내도록 허용했다.

 

“솔로몬은 자신의 모든 외국인 아내를 위하여 그들의 신들에게 향을 피우고 제물을 바쳤다.”(1열왕 11,8)

 

예루살렘은 이제 하느님의 성읍이 아니었다. 지중해 연안 모든 민족의 신들의 집합장소가 됐다. 결국 하느님은 솔로몬에게서 등을 돌린다(1열왕 11,1-13).

 

“내가 반드시 이 나라를 너에게서 떼어 내어 너의 신하에게 주겠다. 다만 네 아버지 다윗을 보아서 네 생전에는 그렇게 하지 않고, 네 아들의 손에서 이 나라를 떼어 내겠다.”(1열왕 11,11-12)

 

주변국들이 서서히 그의 권력을 넘보기 시작했다. 내부적으로도 강력한 경쟁자(여로보암)가 등장했다. 솔로몬 왕국의 종말이 서서히 다가오고 있었다.

 

[가톨릭신문, 2009년 8월 16일, 우광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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