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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신약] 사도행전을 따라가는 성경의 세계: 바오로 생애의 마지막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22-12-05 조회수1,851 추천수0

[사도행전을 따라가는 성경의 세계] 바오로 생애의 마지막

 

 

- 로마 성밖 바오로 대성전에 있는 사도 바오로의 프레스코화(BiblePlace.com)

 

 

사도행전은 마지막을 이렇게 마무리합니다. “바오로는 자기의 셋집에서 만 이 년 동안 지내며 자기를 찾아오는 모든 사람을 맞아들였다. 그는 아무 방해도 받지 않고 아주 담대히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하여 가르쳤다.”(사도 28,30-31) 지난 호에서 잠시 언급했듯이 사도행전의 이 대목은 바오로가 비록 수인의 몸이기는 하지만 로마에서 자기 셋집을 얻어서 지낼 만큼 비교적 자유로이 지내면서 복음을 선포했음을 알려줍니다.

 

이 대목을 바탕으로 유추하자면 바오로는 2년이라는 가택 연금 기간이 끝나고 재판을 받고 순교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학자들 사이에서는 바오로가 가택 연금이 끝난 후 바로 재판을 받고 순교한 것이 아니라 일단 풀려났다가 나중에 다시 체포돼 재판을 받고 순교했다고 보는 의견이 있습니다. 이렇게 보는 데는 나름의 근거가 있습니다.

 

 

로마에서 두 번 수인 생활을?

 

무엇보다 에페소 사람 트로피모스와 관련해서입니다. 트로피모스는 바오로가 3차 선교 여행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바오로와 동행한 인물입니다(사도 20,4). 그는 바오로와 함께 예루살렘에 와서 바오로와 함께 예루살렘 성안에 있었습니다. 이를 본 유다인들은 바오로가 이방인인 트로피모스를 성전 안으로 데리고 들어갔다고 여겨 군중을 선동해 바오로를 붙잡아 성전 밖으로 끌어내 죽이려고 했습니다(사도 21,27-31). 이것을 발단으로 바오로는 체포되고 황제에게 상소하는 바람에 로마까지 오게 된 것입니다.

 

- 바오로 대성전 안의 바오로 사도 무덤과 바오로 사도가 찼던 쇠사슬(BiblePlace.com)

 

 

그런데 바오로는 티모테오에게 보낸 둘째 서간에서 트로피모스가 병이 나서 밀레토스에 남겨 두었다고 씁니다(2티모 4,20). 사도행전에 따르면 바오로가 밀레토스에 머무른 것은 3차 선교 여행을 마치고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에 에페소 교회 원로들과 작별 인사를 하기 위해서였습니다(사도 20,15-17 참조). 만약에 이때 트로피모스가 병이 나서 바오로가 그를 밀레토스에 남겨 두었다면 예루살렘에서 트로피모스와 함께 있었다는 내용과 맞지 않습니다. 이런 이유를 근거로 바오로는 로마에서 2년 동안의 가택 연금 생활을 한 후에 풀려났고 병이 난 프로피모스를 밀레토스에 남겨 둔 것은 이때의 일이라는 것입니다.

 

만약에 바오로가 로마에서 두 번이나 수인 생활을 했다면, 첫 번째 수인 생활(가택 연금)에서 풀려난 후에 바오로는 무엇을 했을까요? 바오로는 가택 연금이 끝나고 풀려나자 스페인까지 가서 복음을 전했다고 보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이런 주장을 펴는 학자들은 바오로가 로마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에 주목합니다. 이 서간에서 바오로는 에스파냐 곧 스페인으로 간다는 언급을 두 번이나 합니다(로마 15,24.28). 또 사도 시대 교부(敎父)의 한 사람이자 제4대 교황인 로마의 클레멘스와 요한 크리소스토모(344/354?-407) 같은 이들은 바오로가 에스파냐에 갔다고 기록합니다.

 

그렇다면 바오로는 첫 번째 수인 생활에서 풀려난 후 스페인까지 갔다가 돌아와 다시 로마에서 체포돼 두 번째로 수인 생활을 했고, 그런 다음 재판을 받고 마침내 순교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 사이 어느 시기에 크레타섬을 비롯해 에게해 일대를 다녔고 그때에 트로피모스를 밀레토스에 남겨 두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바오로가 두 번 수인 생활을 했다는 주장을 선호하는 이들은 바오로의 순교 시기를 네로 황제가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던 시기인 서기 67년쯤으로 잡습니다.

반면에 바오로가 사도행전의 마지막이 시사하는 것처럼 2년 가택 연금을 마친 후에 재판을 받고 순교했다고 보는 학자들은 바오로의 순교 시기를 네로 황제의 그리스도인 박해 이전인 63년쯤으로 추정합니다.

 

- 세 분수의 바오로 성당과 내부(BiblePlace.com)

 

 

세 분수의 바오로 성당과 성 밖 바오로 대성전

 

바오로는 당시 로마 근교에 있던 사형집행장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했습니다. 칼을 맞아 목이 잘린 바오로의 머리는 세 번 튀었고 세 번 튄 그 자리마다 샘이 솟았다고 전해집니다. 하지만 이는 전해오는 이야기일 따름이며 역사적으로는 그리스도교 이전 시대부터 그 자리에는 샘이 있었다고 하지요.

 

바오로가 순교한 자리에는 ‘바오로 참수터 성당’이라고도 하는 ‘세 분수의 바오로 성당’(San Paolo alle Tre Fontane)이 서 있습니다. 5세기에 처음 성당이 세워졌는데 현재의 성당은 17세기에 다시 지은 성당입니다. 성당 안에는 참수된 바오로의 머리가 튀었다는 세 곳에 작은 분수가 있습니다. 또 성당 앞길에는 로마 시대의 포장도로가 깔려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세 분수의 바오로 성당으로 향하는 입구에는 오른쪽에 작은 성당이 보이는데 하늘 계단의 성모 마리아 성당입니다. 3세기 말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박해로 순교한 성 제노를 비롯한 로마 병사 만여 명의 순교자를 기념하는 성당입니다. 하늘 계단의 성모 마리아 성당에서 세 분수 성당 쪽으로 조금만 더 걸어가면 왼쪽에 오래된 성당이 있습니다. 성 빈첸시오와 성 아나스타시오 성인에게 봉헌된 6세기의 성당입니다. 이 세 성당은 트라피스트 수도원이 관리합니다.

 

- 성 밖 바오로 대성전 전경(BiblePlace.com)

 

 

한편 바오로가 목이 잘려 순교하자 루치아라는 신심 깊은 신자가 시신을 거두어 근처에 있는 자기 가문 소유의 땅에 안장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로마 제국에 그리스도교를 용인한 콘스탄티누스 황제 때에 무덤 위에 작은 기념 성당이 지어졌습니다. 이후 몇 차례 새로 짓고 다시 짓고 하면서 성당은 더욱 크고 웅장해졌습니다. 그러다가 1823년 대규모 화재가 발생해 절반 이상이 타버렸고, 옛 모습대로 복원한 대성당을 새로 건축해 1854년에 축성했습니다. 이것이 오늘날 성 밖 바오로 대성전입니다. 길이 132m 너비 30m인 바오로 대성전은 로마에서 성 베드로 대성전에 이어 두 번째로 큽니다. 또 성 요한 라테라노 대성전, 성모 마리아 대성전과 함께 로마의 4대 성전 가운데 하나입니다. 2006년에는 바오로 대성전 지하의 무덤을 발굴해 그 무덤이 바오로 사도의 무덤임을 확인하기도 했습니다.

 

열성적인 바리사이파로서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박해에 앞장섰다가 그보다 더 열성적으로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어 이방인을 위한 사도로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고 마침내 순교의 칼날을 받은 바오로 사도. 세 분수의 바오로 성당과 성 밖 바오로 대성전은 바오로 사도의 생애 마지막 순간뿐 아니라 그리스도를 위해 열정을 불사른 바오로 사도의 삶 전체를 되돌아보며 묵상할 수 있는 좋은 곳입니다.

 

※ ‘사도행전을 따라가는 성경의 세계’는 이번 호로 마칩니다. 지난 3년간 애독해 주신 월간 레지오 마리애 독자 여러분에게 감사드립니다.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22년 12월호, 이창훈 알퐁소(전 평화신문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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