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묻고답하기

제목 당신은 구원받았습니까? 라고 묻는 개신교 근본주의자들에 대해 카테고리 | 천주교
작성자오성훈 쪽지 캡슐 작성일1999-01-07 조회수1,551 추천수6 신고

 

 

 안젤로입니다.

 약속드린대로 근본주의자들이 가톨릭 신자들에게 흔히 하는 질문인 ’당신

은 구원받았습니까?’에 대해 우리 가톨릭의 입장을 신학적으로 가톨릭의 정

통 교리로서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에 대해 이야기하겠습니다.

 개신교 근본주의가 다소 엉뚱한 만큼 제 글도 순서대로 정리돼서 나가지
못하는 점 양해바랍니다.

 먼저 현재의 상황을 이야기하면 우리 가톨릭은 근본주의자들과 성서 구절
에 의한 논쟁 - 이것을 굳이 비유하자면 탁구 게임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
이지만 - 에 그렇게 곤란을 당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가톨릭 전체가
아닌 개개인 가톨릭 신자의 경우 교리에 둔한 경우나 세례받은 지 얼마 안
된 경우에는 근본주의자들이 고장난 녹음기마냥 성서 해석을 들먹이는 것하
며 당신은 구원받았느냐고 다짜고짜 물어올 때 난감해 하는 것 또한 사실입
니다.

 이에 필자는 항상 안타까움을 느껴오던 바 여기에 대해 정통적인 가톨릭의
신학적 관점과 근본주의자들을 퇴치(?)하는 법을  이 글에서 말하고자 합니
다.분명히 우리 가톨릭 신자들이 알아두어야 할 것은 성서 해석은 결코 누가
빨리 대답하느냐에 승부가 달려있는 퀴즈 게임과 같은 것은 아니라는 사실
입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오늘날의 가톨릭 신자들은 근본주의자들이 여러 가지로
도전하는 가톨릭 신앙에 대한 성서적 대답 - 말씀의 의미 - 들을 이해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 길은 성서를 더욱 깊이  깨닫고 이해할 수 있도록
오로지 성서를 연구하는 길 뿐입니다. 앞서 살펴본대로 근본주의자들의 일
부는 가톨릭과 단순하게 대화하지 않으며 대화하는 사람들과 나눌 수 있는
공통의 기반 역시 성서일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우리는 숙지할 필요가 있습
니다.   

 이제 제 서론은 여기서 접고 아래의 근본주의자들의 질문에 대답해 보겠습
니다.
 

 

 

  당신은 구원받았습니까?

 

 

 

 근본주의자들에게 있어서 이 질문은  신앙생활 자체이며  전부입니다.

즉, 그들은 ’당첨됐느냐’라는 문제에 모든  것을 걸고 있습니다. 가톨

릭 신자들은 이 질문에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라 당황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잠시 필자의 경험을 이야기한다면 당황이라기보다는 황당하다

는 것이 더 맞는 표현이 될 것이라고 생각되지만, 우리 가톨릭 신학에

서는 근본주의자들이 주장하고 있는 "단 한 번의 구원이 영원한 구원

이다" 라는 개인적이며 순간적인 구원 신학 - 나중에 이야기하게 되겠

지만 가톨릭 신학은 ’나’ 가 아닌 ’우리’의 구원 신학이며 개신교 근본

주의의 신학적 관점은 언제나 ’우리’가 아닌 ’나’의 구원에 그 초점을

두는 개인적 구원 신학인 것을 미리 말해 둡니다. -을 결코 인정하지

않습니다.

 

 

 가톨릭 신자들은 필립비서 2장 12절에 나타난 사도 바오로의 개종신

학에 초점을 맞춥니다:

 

 

  "여러분은 내가 함께 있을 때에도 언제나 순종하였거니와 그 때뿐만

아니라 떨어져 있는 지금에 와서도 더욱 순종하여 두렵고 떨리는 마음

으로 여러 분 자신의 구원을 위해서 힘쓰십시오."

 

 

 이 성서 구절은 분명하게 ’이미 그리스도를 받아 들인 자’ 들과 그리

고 그들 스스로 그리스도 신자라고 자부하는 사람들을 향한 말씀입니다.

 

 만약 사도 바오로가 ’단 한 번의 구원이 영원한 구원’을 가져왔다는

것을 주장했다면 왜 필립비 인들에게 "자신의 구원을 위해서 힘쓰라"

는 애절한 부탁을 했을까요?

 

 대답은 분명합니다. 바오로는 한순간의 구원 신학을 믿지 않았던 것입

니다.

 

 그에게 있어서 구원은 믿는 이들을 위한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의 승

리, 즉 믿는 이들이 삶 속에서 끊임없이 발전시켜 나아가야 하는 지속

적 작업입니다.

 

 이 개념을 더 분명하게 이해하려면 - 이점에 있어서 근본주의자들에게

정확하고 이지적인 대답을 주기 위해 - 바오로 신학을 집중적으로 연구

하려는 집념이 요구됩니다.

 

 구원에 대한 바오로 신학을 토론하려면 의로움(Justice), 믿음(Faith),

그리고 율법(Law)에 대한 개념들을 먼저 이해해야 합니다. 사도 바오로

가 사용한 의로움은 Diakaiosyne, 즉 ’고결함’ 혹은 ’강직함’이라고 번

역해야 옳은 것이 됩니다.

 

 바오로에게 있어서 인간은 - 모든 유대인들이 그렇듯이 - 어느 누구

도 고결할 수 없는 것이며 고결한 분은 오직 하느님 한 분뿐입니다.  

 

 바오로가 로마, 갈라디아, 그리고 필립비 인들에게 던진 질문은 하느

님의 고결함을 어떻게 인간이 함께 나눌 수 있는가, 어떻게 ’의로울’수

있는가였습니다.

 

 바오로가 규탄하는 것은 단순히 율법이 지시하는 법을 지킴으로써 ’의

로움’에 도달한다는 가르침인 유다이즘입니다. 바오로는 율법이란 용어

를  몇가지 다른 함축적 의미로 사용하고 있으나, 그 중 가장 기본적으

로 모세 오경에 보전되어진 가르침과 이 오경을 인간이 해석하여 규정

한 가르침을 뜻하고 있습니다. 그 해석은 인간이 만들고 이루어 놓은

것입니다.

 

 바오로는 ’의화(Justification)’ - 의롭지 못한 인간이 어떻게 의롭게

변화하는가 - 를 로마서에서 보다 더 풍부하게 취급하고 있습니다. 바오

로에게는 신앙인이 의롭게 되어 가는 촉매 역할을 믿음이 하고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그가 사용한 믿음이라는 용어가 그리스어로는 Pistis입

니다.

 

 이 말을 단순하게 ’신앙’이라든가 ’일치’ 라고 하는 의미로 보지는 않

습니다. 오히려 ’받아들임’ 이란 행위에 가까운 의미로 쓰고 있는데, 이

받아들임은 예수님을 주님이며 나의 구원자라고 고백하는 신앙인의 생활

속에서 증거들을 통해 명백히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한 인간이 단순하게 "나는 믿습니다" 라는 말 한 마디로 하

느님 앞에서 고결하게 변할 수 있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물론, 그 고백이 믿음의 출발점이라는 것은 옳은 말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를 온전히 믿는 표현은 한  인간의 삶을 주님의 주권에 올

바로 내어 놓는(양도) 행위로 나타나야 합니다.

 

 "예수는 나의 주님이시다" 라고 고백하면서 이 믿음의 전제라 할 수 있

는 예수님과 다른 형제들에 대한 사랑을 보여주지 않는다면, 분명 바오

로는 그의 믿음이 어떤 것인지조차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바오로는 각 개인이 각각 다른 환경에서 자신의 믿음을 성장시켜야 한

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믿음 자체가 끊임없는 성장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바오로는 신앙인들의 믿음의 성장과 그들 안에 나타나는 사랑의 실제

행위가 상응하게 자라날 것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다른 또 하나의 바

오로의 용어인 속량(혹은 되찾음, Redemption)을 살펴보기로 하겠습니

다.

 

 

 속량은 레위기와 같이 오래된 구약 성서의 개념입니다. 레위기 25장에

서 저자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들이 전에 지고 있던 빚을 되찾을 권

리를 기술하고 있습니다.

 

 현대에 있어서 되찾음(속량)에 대한 좋은 예는 전당포 체계에서 쉽게

살펴볼 수 있습니다.  돈이 필요한 사람은 가진 물건을 전당포에 맡깁

니다. 시계를 예로 들어봅시다. 맡긴 시계를 되돌려(Redeem)받기 위해

서 약속되어진 시간에 원금과 이자를 지불하면 ’상환’법에 의해 시계를

되돌려받습니다.

 

 구약시대의 사람들은 그들이 진 빚의 크기에 따라서 자신을 전당할 수

있었습니다. 저당법은 레위기 25장 45-55절에 잘 나타나 있으며, 이 법

에 따라 그들이 속신 혹은 해방될 수 있다고 선포합니다.

 

 구약성서 저자들은 야훼 하느님이 당신 백성을 상환하시는 분 혹은 해

방자라고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야훼의 구원과 해방의 행위가

시간이 되었을 때에 나타남을 보았습니다.

 

 

  "내 영혼이 주님을 더 기다리옵니다. 새벽을 기다리는 파수꾼처럼 이

스라엘이 야훼를 기다리옵니다. 인자하심이 야훼께 있고 풍요로운 속량

이 그에게 있으니 그가 이스라엘을 속량하시리라, 그 모든 죄에서 구하

시리라" (시편 130, 66-8)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속량의 개념에 적용하여 바오로는, 하느님께

서 지금 예수님을 통해 구약성서가 예언한 ’퐁요한 속량’을 인류에게

주고 있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인류는 죄로부터의 해방

과 자유를 예수님 안에서 얻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우리의 기대와는 달리 바오로는 예수를 ’속량자’ 라고

부르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속량’(I 고린 1, 30)이라 말합니다. 이에 대해 로마서

에서 사도 바오로는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 예수님을 통해서 모든 사람을 죄에서 풀어주

시고 당신과 올바른 관계를 가질 수 있는 은총을 거저 베풀어 주셨습

니다."(로마 3, 24).

 

 

 사도 바오로는 ’예수님을 통해서’라고 하지 ’예수에 의해’ 속량(구원)

되었다고 하지 않는데에 주목해야 합니다.

 

 그 이유는 구원이 아직 계속되어져야 하기 때문이며 예수님의 두번째

오심,즉 예수 재림 때에 가서야 비로소 모든 구원을 볼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입니다.

 

 바오로는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화해’라 묘사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원수였던 때에도 그 아들의 죽음으로 하느님과 화

해하 게 되었다면 하물며 그분과 화해가 이루어진 지금에 와서 우리가

살아계신 그리스도를 통해서 구원 받으리라는 것은 더욱 확실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로마 5, 10).

 

 

 "인류(우리)가 하느님의 원수였다" 라는 말을 바오로가 사용한다고 해

서 하느님이 인류를 저주한다거나, 그들이 짓는 죄를 벌하시려고 마지

막 날까지 기다린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것이 바로 근본주의자들이 이해하는 예수님의 속죄의 죽음에 대한

잘못된 이해입니다.

 

 

 즉, 하느님께서 가혹하게도 예수님 위에 죄지은 인류를 놓고 화풀이로

그를 십자가에 못박은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바오로는, 세상의 죄를 혐오하시거나 죄인을 미워하시는 하느님이 아

니심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구약성서 전부를 통해 야훼 하느님은 당신

의 현존 안에 모두 거룩하다고, 더러운 것은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거

룩하지 못한 것은 하느님과 거리가 있는 것이며 바로 하느님의 원수라

고 하셨습니다.

 

 하느님의 거룩함은 비거룩함과의 끊임없는 싸움이며, 빛과 어둠의 싸

움과 같습니다. 이렇게 볼 때에 화해라는 의미는 하느님께서 당신을 거

스르는 자들에 대한 화를 없애셨다는 것도 아니고, 또 화를 언제나 첫

째 자리에 앞세우고 계시다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하느님의 거룩하심

이 인류의 비거룩함을 누르셨다는 의미입니다.

 

 

 바오로가 말하는 하느님의 원수들이란 훗날 거룩하게 되기 위해 ’약해

진’ 사람들(로마 5, 6)로서 하느님의 거룩함을 입은 사람들을 뜻합니다.

 

 

 하느님의 원수였던 사람들이 이제는 "주 예수님 덕분으로 우리는 지금

하느님을 섬기는 기쁨을 누리게 되었다"(로마 5, 11b) 고 대담하게 이

야기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바오로가 주는 인상은 갑자기 감옥문이 열려 전쟁 포로들이 나오는 것

과 같은 것입니다.

 

 

 로마서 5장 9절에서 바오로는 "우리는 이제 그리스도의 피로써 하느님

과의 올바른 관계를 얻었으니 그리스도 덕분으로 하느님의 진노에서 벗

어나게 될 것은 너무나 분명합니다"라고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그 외에

로마서의 여러 곳에서 구원에 대해 언급합니다(1, 16:10, 10:13, 11).

 

 바오로가 사용한 이 용어들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바오로는 그리스도

를 통해 나타난 역사의 절대적인 결론이 구원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그

러기에 구원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그리고 우리가 논의하고 있는 속

량, 화해와 의화의 효과를 모두 포함합니다.

 

 구원은 아직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단어는 아닙니다. 그 말은 많은 뉘

앙스를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구원은 속량되고 화해를 이루며, 의로워진 피조물을 위해 하느님께서

유보하신 마지막 날의 승리임을 바오로는 역설하고 있습니다. 구원은

창조물을 거룩하게 만드는 하느님의 처음부터 끝까지의 행동 전부를 요

약하는 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초대 교회의 신자들처럼 바오로도 구원의 마지막 순간 - 예수님의 두

번째 오심 - 에 대한 깨우침을 바꾸어야 했습니다. 바오로의 초기 편지

에 나타나는 것처럼 그는 예수님의 오심이 곧 이루어질 것으로 생각했

으나 긴박한 재림의 기대는 후기 서간에 오면서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그 때문에 그는, 종말이 벌써 여기에 와 있으나 아직 오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또한 구원은 벌써 충만하게 실현되었지만 아직 오지 않았다

고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II 고린 6, 2 ; I 데살 1, 9-10 비교).

 

 

 아마도 바오로의 ’바로 여기, 지금’ 이라는 구원의 관점과 ’이미 와

있으나 아직’이라는 관점을 이해하는 길은 그가 쓴 구원의 의미와 의

화의 의미를 대비시켜 보는 것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구원이 마지막의 일 혹은 종말의 결과라고 이해하면서

도 의화는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의 결과로서 ’지금’ 존재한다고 분명히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로마서 5장 9절을 보면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 "우리가 이제

그리스도의 피로써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얻었으니 그리스도 덕분

으로 하느님의 진노에서 벗어나게 될 것은 너무나 분명합니다."

 

 

 

 만일 바오로 시대에 자칭 개신교 근본주의의 설교자라는 사람이 바오

 

로에게 "형제여, 그대는 구원되었는가?" 라고 질문했다면 바오로는 이렇

 

게 대답했을 것입니다.

 

 

 

 "형제여, 나는 의롭게 되었소.  그러나 나는 아직도 구원을  얻고 있는

 

중이오."

 

 이것이 오늘날의 개신교 근본주의자들에게 줄 수 있는 우리 가톨릭 신

 

자들의 대답입니다.

 

 

 

 

 

 

 

 

 







갈현동에서

catholic knight 안젤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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