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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문화] 야훼님과 주님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09-07-15 조회수2,425 추천수0

성서의 세계 : 야훼님과 주님


“민족들이 주님의 이름을 경외하리이다”(시편 102,16)

 

 

언제부터인가 교회에서 하느님의 이름인 ‘야훼’ 대신 ‘주님’이라는 칭호를 쓴다는 사실을 알고, 의아하게 생각하는 교우들이 있을 것이다. 왜 하느님께서 쓰라고 주신 이름을 포기하는가? 왜 ‘야훼’ 대신 ‘주님’인가?

 

여기에는 ‘하느님의 이름을 어떻게 옮겨야 하는가?’라는 근본적인 문제가 들어있다. 외국의 고유명사를 옮기는 일반방식에 따라서 구약성서에 쓰인 대로 ‘야훼’라고 음역하면 되지 무슨 어려운 문제가 있느냐 하겠지만, 사정이 그리 간단하지 않다. 우선 지난달에 언급한 대로, 옛날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느님의 이름을 어떻게 발음하였는지 확실하지 않다. ‘야훼’는 그중 가능성이 가장 큰 것일 따름이다. 그리고 구약성서 본문이 확정될 때에 유다인들은 ‘야훼’라고 기록된 것을, 읽을 때에는 이미 ‘아도나이(=주님)’라고 발음하고 있었다. 그러면 우리는 쓰인 대로 번역해야 하는가, 아니면 읽힌 대로 옮겨야 하는가? 구약성서 자체에서도 ‘야훼’를 다른 말로 바꾸는 경향을 볼 수 있다. 예컨대 시편 42편에서 83편까지에는 본디 대부분 ‘야훼’가 쓰여 있었는데, 후대의 편집자가 이 하느님의 이름을 조직적으로 ‘엘로힘(=하느님)’으로 바꾸어놓았다고 판단된다. 그러면 우리는 이 편집자를 따라야 하는가, 아니면 그 이전의 상태로 거슬러 올라가야 하는가?

 

이와 같은 여러 사정을 고려할 때, 하느님의 이름을 우리말로 옮기는 방안은 크게 두 가지가 제시된다. 곧 ‘야훼’로 음역하는 방안과 ‘주님’으로 번역하는 방안이다.

 

‘야훼’로 음역해야 하는 근거들을 몇 가지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야훼’는 고유명사이기 때문에, 번역할 때에도 고유명사로 취급해야 한다. 곧 고유명사는 가능한 대로 원발음에 가깝게 음역해야 한다는 것이다. 둘째, 하느님께서 쓰라고 알려주신 이름이기 때문에, 그대로 쓰는 것이 당연하다. 셋째, 음역하지 않을 때, 다른 많은 이름에 쓰인 ‘야훼’와의 연관성을 상실한다.

 

구약성서에는 신의 이름이나 칭호를 넣어 인명이나 지명으로 삼는 고대 근동의 관습에 따라, ‘야훼’의 줄임말과 함께 이루어진 이름들이 많이 나온다. 이름의 앞 부분에서는 ‘여호-’나, 이것의 단축형 ‘요-’, 그리고 뒷 부분에서는 ‘-야후’나 ‘-야’가 쓰인다. 예컨대 ‘여호야긴’(2열왕 24,6), ‘요담’(판관 9,6), ‘미가야후’(2역대 17,7). ‘말기야’(예레 21,1) 등이다. 그리고 ‘할렐루야’의 ‘야’, 또는 ‘야훼’의 단축형으로서 독립적으로 쓰이는 ‘야’도(출애 15,2) 여기에 보탤 수 있다.

 

‘야훼’를 ‘주님’으로 옮겨야 하는 근거들도 여럿 있다. 첫째, 오랜 전통이다. 구약성서 본문이 확정되기 전부터 유다인들은 ‘야훼’를 ‘주님’으로 읽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구약성서를 처음으로 번역한 칠십인역에서는 ‘야훼’를 모두 ‘퀴리오스(주님)’로, 그리고 그리스도교에서 오랫동안 큰 권위를 누려왔던 ‘대중 라틴말 성서(불가타 성서)’에서는 ‘도미누스(주님)’로 옮겼다. 이렇게 해서 그리스도교의 전례에서는 하느님을 거의 항상 ‘주님’으로만 불러왔다. 현재 여러 나라 교회의 ‘공용’ 또는 ‘표준 번역 성서’들도 이 전통을 따른다.

 

둘째, 신약성서와의 관계이다. 신약성서에서는 더 이상 ‘야훼’라는 이름이 쓰이지도 불리지도 않는다. 칠십인역에서처럼 ‘퀴리오스(주님)’만 사용한다. ‘야훼’로 불리셨던 하느님께서 구약성서의 후대와 칠십인역을 거쳐 신약성서에서는 ‘주님’으로만 불리신다. 그래서 구약성서에서 ‘야훼’를 쓸 경우, 신약성서에 나오는 ‘주님’과의 연관성을 흐리게 만들어버릴 수가 있다.

 

셋째, 우리는 애초의 이스라엘인들과는 달리 하느님의 고유한 이름을 그다지 필요로 하지 않는다.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당신의 이름을 계시하시게 된 동기는, 당신의 신원을 분명히 밝히셔야 했던 필요성에 있었다. 에집트로 가서 당신의 백성을 구해오라고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명하셨을 때, 모세는 이렇게 아뢴다. “제가 이스라엘의 자손들에게 가서 ‘너희 조상들의 하느님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고 말하면, 그들이 저에게 ‘그분 이름이 무엇이오?’ 하고 물을 터인데, 제가 그들에게 무엇이라고 대답해야 하겠습니까?”(출애 3,13). 그때는 종족마다, 심지어 가문마다 자기들만의 신 또는 하느님을 모셨다. 그래서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께서는 당신이 ‘야훼’라는 ‘하느님’이심을 밝히셔야 했다(출애 3,15).

 

다신론이 그대로 받아들여지던 그 옛날에는 ‘야훼’가 말 그대로 이름 구실을 하였다. 그러나 유일신론이 적어도 이스라엘에서는 당연시되던 구약성서의 후대에 와서는, ‘야훼’가 하느님의 고유한 이름이기보다는, 단순히 한 분이신 하느님의 칭호로 기능을 하게 된다. 이러한 사정은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이다. 우리에게 하느님께서는 한 분뿐이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그분만의 고유한 이름으로 그분을 부를 필요가 없는 것이다. 더군다나 ‘야훼 하느님’이라 할 때, 사정을 모르는 비그리스도인들은 물론이고 그리스도인들까지도 사전지식이 없을 때에는, 이분께서 자기들이 지금까지 알고 있던 하느님과는 다른 분이시라는 인상을 받기가 쉽다.

 

넷째, 우리 나라에서는 예의상 어른의 함자를 함부로 부르지 않는다. 물론 인간에게 다가오셔서 당신의 이름까지 알려주신 하느님, 인간과 더욱 가까워지기를 원하시는 하느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당연하지 않느냐고 반문할 수도 있다. 하느님께서는 ‘사랑의 하느님’이시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께서 하느님을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가르쳐 주셨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여기에서 ‘하늘’은 사람과 하느님 사이의 거리를 뜻한다. 하느님은 우리 자신보다도 우리에게 더 가까운 분이시다. 그러나 그분께서는 우리가 아무렇게나 대해도 좋은 분이 아니시다. 하느님 앞에 선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자세 가운데 하나가 바로 경외심임을 구약성서는 끊임없이 강조한다. 신약성서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다.

 

다섯째, 우리는 언어 관습상 많은 경우 이름을 부르지 않고 직책이나 칭호만 부른다. 같은 직책이나 칭호를 가진 사람이 여럿 있는 경우에도 별다름이 없다. 더군다나 그 직책이나 칭호를 가진 이가 한 명뿐인데도 그 앞에 이름을 덧붙여 부르면, 그 사람과 거리를 두는 것으로 이해되거나 때로는 실례가 되기도 한다. 하느님께서 한 분뿐이신데, 구태여 그분의 이름을 덧붙일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야훼’ 이름을 부르는 문제와 ‘예수’ 이름을 부르는 것과는 구분지어야 한다. ‘예수’는 사람이 되신 성자의 이름이다. 곧 성자께서는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이 되셨기 때문에, 그분의 이 고유한 이름을 불러야 한다. 그러면서 조금이라도 실례를 덜하고 그분을 높여 부르기 위해서, ‘부처님’ 하는 식으로 ‘님’을 붙이는 것이다.

 

이렇게 ‘야훼’로 음역하는 방안과 ‘주님’(‘주 하느님’처럼 ‘님’ 자가 겹칠 경우에는 ‘주’)으로 번역하는 방안을 놓고 따져볼 때, 후자가 최선책은 아니라 할지라도 그중 더 낫다고 판단된다. 그래서 주교회의 성서위원회에서 편찬하는 “구약성서 새번역”에서는 ‘야훼’라고 쓰인 것을 ‘주님’으로 옮기기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예외를 두기로 하였다. 곧 하느님께서 당신의 이름을 알려주시는 경우(출애 3,15), 그리고 이름과 함께 당신 자신을 소개하시는 경우이다(출애 6,2-3). 이밖에 ‘야훼’가 들어간 장소의 이름과(창세 22,14) 특별한 제단의 이름 등을 예외로 인정한다(출애 17,15; 판관 6,24).

 

그렇다고 해서 이런 경우 외에는 늘 ‘주님’만을 써야 한다고 고집할 수는 없다. 교회 전례용 성서라든가 ‘교회 표준 번역 성서’ 외에, 주로 학문적인 목적을 지닌 번역본 같은 데에서는, 히브리말 성서에 쓰인 대로 ‘야훼(님)’로 옮길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사전지식을 지닌 이들에게 강의 같은 것을 할 때에도, 간략한 설명과 함께 ‘야훼(님)’를 사용할 수 있으리라고 본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든 ‘민족들이 주님의 이름을 경외하리이다.”라는 시편 102편 16절의 말씀처럼, 경외심과 함께 하느님을 부르고 그분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이, 십계명을 비롯하여 성서 전체가 한결같이 강조하고 바라는 사실임을 늘 명심해야 것이다.

 

[경향잡지, 1997년 9월호, 임승필 요셉 신부(주교회의 성서위원회 총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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