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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구약] 출애굽기(탈출기)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09-07-15 조회수7,209 추천수0

[성서의 세계 - 구약] 출애굽기

 

 

중요성

 

출애굽기는 구약성서에서 가장 중요한 책 중의 하나이다. 현재의 구약성서가 비록 천지 창조 혹은 아브라함 시대부터 시작되고 있어도, 이스라엘 백성의 구원 역사의 진정한 시발점은 거기에서부터 비롯되는 것이 아니다. 그들로 하여금 역사적 공동체로서 자의식을 갖게 한 결정적인 역사적 체험이 바로 이스라엘의 참된 역사의 시작인 것이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결정짓는 중대한 사건은 바로 출애굽, 즉 에집트에서의 탈출이다. 그리스도인들이 주의 만찬을 거행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재현하듯이, 유다인들도 오늘날 과월절을 거행하면서 출애굽 사건을 회상하고 재현하고 있다. 출애굽 사건을 통해 비로소 하느님이 어떠한 분이시며, 억압받고 억눌린 사람을 어떻게 대하시는가 하는 사실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나아가 이 출애굽 사건은 하느님의 백성이 스스로 체험한 하느님의 구원에 대한 보답으로 억눌리고 억압받는 사람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에 대한 기준이 된다(미가 6,1-8). 즉 출애굽은 하느님이 구체적으로 어떠한 분이시며 따라서 인간은 하느님을 닮아 이웃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를 말해 주는 사건이다.

 

 

주제 및 내용

 

출애굽기와 그 뒤의 책들을 연관시켜 전체적으로 그 내용을 구분해 보면, 노예 상태에서의 구원(출애 1-18장)과 시나이 계약과 관계되는 거대한 전승(출애 19,1-민수 10, 10)으로 나눌 수 있다. 다시 후자를 야휘스트 · 엘로히스트계 문헌(JE)의 시나이 단락(출애 19-24장, 32-34장)과 제관계 문헌(P)의 시나이 단락(출애 25-3l장, 출애 35,1-민수 10,10)으로 크게 나눌 수 있다.

 

출애 1-18장 : 구원 및 인도

출애 19,1-민수 10,10 : 시나이 계시(레위기 전체가 포함됨)

출애 19-24장 : 계약의 체결과 계명

출애 32-34장 : 계약의 결렬과 갱신

출애 25-31장 : 성막과 성궤의 건축 지시

출애 35-40장 : 성막과 성궤의 건축

레위 1,1-민수 10,10 : 전례법

 

여기서의 광야 여행은 홍해를 건너 시나이산에 이르기까지의 여행이며, 시나이산에서 머무르는 동안 일어난 사건(계약 체결, 계명 하사, 성막과 성궤 건축, 전례법)은 방대한 분량을 차지하고 있다. 시나이산을 떠나서 가나안 땅에 이르기까지의 긴 여행은 민수기 10장 11절부터 다시 시작된다. 보통 계약 체결 이후에 법이 주어지며 원래의 계약의 법은 십계명(출애 20장)이다. 그런데 이 십계명 바로 뒤에 계약의 책(출애 21-23장)과 성막과 성궤에 관한 지시 사항 그리고 전례법 등의 방대한 법률 자료가 덧붙여진 것이다.

 

출애굽기의 내용을 주제별로 구분해 보면 다음과 같다.

 

1,1-15,21 : 에집트로부터의 구원

15,22-18,27 : 시나이산까지의 광야 여행

19,1-24,18 : 계약의 체결과 계명의 하사

25,1-31,18 : 만남의 장막과 계약의 궤를 건축하도록 지시하심

32,1-34,35 : 계약을 깨뜨림과 계약의 갱신

35,1-40,38 : 만남의 장막과 계약의 궤를 지시대로 건축함

 

이와 같이 출애굽기는 하느님이 이스라엘을 종살이에서 은혜로이 기적적으로 구해 주시고(구원), 광야를 통해 그들을 인도해 주시고(광야 인도), 그들과 계약을 맺어 당신의 백성으로 삼으시고(계약 체결), 이스라엘이 하느님과의 이 계약 관계를 잘 유지하고 또 회복할 수 있도록 함께 계심(현존)을 말해 주고 있다. 쉽게 비유해서 말하자면 부모가 지식을 낳아(구원) 부모와 자녀라는 관계(계약)를 맺고, 그 자녀가 훌륭한 사람이 되도록 여러 가지 가르침(계명)을 주고, 자녀가 자립할 때까지 항상 함께 있으면서(성막, 성궤) 그를 입히고 먹이고 돌보는 것(광야 인도)과 비슷한 셈이다.

 

 

노예상태

 

요셉이 에집트에서 베푼 은혜를 모르는 새로운 파라오가 등장하자(약 400년 후) 그는 무섭게 불어나는 이스라엘 백성을 박해하기 시작한다(1장). 그는 이스라엘 사람들의 사내아이를 죽이고 또 그들을 강제 노동에 동원시킨다. 이것은 성조들에게 하신 약속(후손과 축복의 약속)을 방해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더욱 중요하고 심각한 것은 단순히 사회학적인 노예 상태나 고된 육체적인 노예 상태가 아니라, 이방신(異邦神)에 대한 신학적(神學的)인 예속이다. 고대 근동의 사고 방식에 의하면 신들에게는 고유한 영역이 있고, 어떤 지역에서는 어떤 특정한 신이 지배하고 있어서 그곳에서는 그 신을 섬길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에집트 안에서는 에집트인들의 신인 파라오를 섬길 수밖에 없었다. 에집트의 신에게 예속되어 그를 섬길 수밖에 없는 상태는 성조들에게 주신 하느님의 약속 수행을 직접적으로 방해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갈등은 해결되어야만 한다. 파라오의 권세에서부터 이스라엘을 구출하는 것은 땅에 대한 약속을 이루기 위한 필요 불가결한 전제 조건과도 같다.

 

이와 같이 출애굽기 1-15장에서 중요한 것은 두 신들의 대결, 즉 히브리인들의 하느님인 주님과 에집트의 신인 파라오 사이의 대결이다. 에집트의 통치자는 옛부터 왕좌에서 세상을 통치한 신 ‘호루스’로 여겨져 왔다. 파라오는 죽으면 ‘오시리스’의 신이 되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모세가 파라오를 찾아갈 때마다 그에게 선언한 “그들이 나를 섬기도록 내 백성을 놓아 보내어라.”는 양식은 독특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다시 말해서 그것은 “이스라엘의 하느님인 나를 섬길 수 있도록 에집트의 신인 너 파라오를 섬기는 것에서 내 백성을 떠나가게 하라.”는 뜻이다. 사실상 파라오를 에집트의 신으로 이해함으로써 출애굽 설화는 독특한 색채를 띠게 된다. 출애굽은 단순히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대결이나 싸움이 아닌 것이다.

 

 

파라오의 고집과 재앙

 

이스라엘 사람들을 해방하라는 모세의 요구에 대해 파라오의 대답은 한결갈다. “주님이 누군데 내가 그에게 복종해서 이스라엘을 내보낸단 말인가? 나는 이스라엘을 보내지 못하겠다’(출애 5,2 등). 여러 가지 재앙들은 파라오의 그러한 고집스런 태도에 대한 대답의 역할을 하고 있다(7,17; 8,28; 9,17 등). 그의 고집은 여러 가지 재앙들(7,14-10,29)이 아무러한 효력도 내지 못할 정도로 그렇게 강하다. “주님께서 파라오의 마음을 무디게 하셨다.”(7,3; 9,12; 10,20.27 등)는 말은 하느님이 장난하신다는 뜻이 아니라 파라오의 고집이 말할 수 없이 세어서 그를 그 고집 속에 내버려 두신다는 뜻이다. 그래서 최후의 재앙은 이제까지의 재앙과는 달리 에집트인들의 목숨을 직접 빼앗는 그러한 재앙이다(11,1-10; 12,29-34). 이렇게 재앙 설화들은 하느님이 당신 백성을 에집트의 억압에서 구출하시기 위해 모세와 아론을 시켜 행하신 가능한 한 모든 시도들을 극적인 방법으로 묘사하고 있다. 마지막 재앙에 굴복하여 파라오는 이스라엘 백성을 떠나 보낸다(12,35-42). 그렇지만 파라오는 또다시 고집을 부리고 그들을 부리지 않고 내보낸 것을 후회하게 된다(14,5-9). 그는 전군을 총동원하여 갈대 바다까지 이스라엘을 추격한다. 그곳에서 하느님과 파라오 사이에 마지막 결정적인 싸움이 벌어지게 된다.

 

마지막 재앙의 설화 전후에 과월절 법규(12,1-14. 21-28. 43-51), 무교절 법규(12,15-20; 13,3-10) 그리고 맏아들과 맏배에 관한 법규(13,l-2. 11-16)가 뒤섞여 있는데, 이것은 최종 편집자(사제계 편집자, P)가 자신이 보기에 중요한 이러한 법규들을 설화들 사이사이에 삽입시킨 결과이다. [경향잡지, 1992년 6월호, 박광호 베드로(대구 가톨릭 대학 교수 · 신부)]

 

 

바다에서의 싸움(출애굽기 14장)

 

마지막 재앙에 굴복하여 이스라엘 사람들을 떠나보낸 파라오는 곧 마음이 변하여 ”이스라엘 백성을 부려먹지 않고 풀어 보내다니, 안될 일이다.”며 정예 부대인 기마와 기병을 총동원하여 그들을 추격한다(14,5-9). 바다에서 두 신인 야훼와 파라오 사이에 마지막 결정적인 싸움이 벌어진다(14,10-31). 에집트인들이 덮칠듯이 뒤따라오자 이스라엘 백성들은 질겁을 하고서 자기들을 에집트에서 왜 불러내었느냐고 모세를 원망한다(10-12절). 이렇게 구원의 은혜를 입은 지 얼마 되지도 않아서 그들은 출애굽의 구원 자체를 부정하고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한 모세의 대답은 “두려워하지 말라. …… 야훼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워 주실 터이니 모두들 진정하다.”(13-14절)는 것이다. 과연 이 말대로 야훼께서 어둠(20절)과 바람(21절)과 바다(27-28절)를 이용하여 직접 파라오의 군대를 쳐부수신다. 구원 행위는 전적으로 야훼의 것이기 때문에, 이스라엘에게 요구되는 것은 군사적인 원조가 아니라 적이 아무리 많고 그 힘이 세다 하여도 두려워하거나 떨지 말고 진정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신앙이다(이사 7,9 참조)

 

 

출애굽 사건의 신학적 의미

 

1) 하느님의 자아 계시(自我啓示)

 

모세가 불붙는 가시덤불 속에서 야훼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 그분이 하신 말씀은 이스라엘에 대한 당신의 의향을 잘 드러내 보이신다. “나는 내 백성이 에집트에서 고생하는 것을 똑똑히 보았고…… 괴로워 울부짖는 소리를 들었다. …… 그들이 얼마나 고생하는지 잘 알고 있다. …… 나 이제 내려가서 그들을 에집트인들의 손아귀에서 빼내겠다”(3,7-8). 여기에 사용된 동사(動詞)들에는 이스라엘에 대한 하느님의 자세가 잘 나타나 있다. 하느님은 하늘 높은 곳에 앉아 계시면서 인간의 고통과 억압을 수수방관하는 그러한 분이 아니시다. 하느님은 당신의 의도를 실현하시기 위해 인간사에 직접 관여하신다. 하느님은 당신의 행위, 즉 역사적 사건들을 통해 당신을 드러내신다.

 

모세가 하느님의 이름을 알려 달라고 해서 “야훼” (‘나는 곧 나다’ 혹은 ‘나는 있는 바 그로다’로 보통 해석되지만 그 의미가 분병하지 않다.)라는 이름이 주어지지만, 그분은 이름을 통해서 알려지실 분이 아니시다. 이스라엘의 하느님은 이름이나 철학적인 사고를 통해 추상적이거나 정적(靜的)으로가 아니라, ‘행동’을 통하여 자신에 대해 알려 주신다. 다시 말해 “하느님은 누구신가?” 하는 질문은 구체적인 사건들, 즉 출애굽에서 그 대답을 얻게 된다 : “내가 너희를 에집트 땅 종살이하던 집에서 이끌어 낸 하느님 야훼이다”(출애 20,2)

 

2) 하느님의 의(義)

 

출애굽 사건을 통하여 하느님의 의로움이 구체적으로 드러났다. 하느님의 의로움이란 그분과 그 백성 사이에 놓여 있는 것으로서, 이스라엘 공동체에 필요한 하느님의 행위를 말한다. 출애굽 사건은 이스라엘로 하여금 바로 이 “야훼의 의”를 이해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이 “야훼의 의”는 약한 자, 억눌린 자, 가난한 자, 노예된 자들을 구원하기 위해 인간사에 직접 관여하시는 하느님의 힘이다. 그것은 보통 우리가 생각하듯이 사회적 신분에 따라 분배되는 법적인 의가 아니라 곤궁에 처한 이들을 위한 구원의 행위이다. 이스라엘의 윤리의 바탕도 여기에서 유래한다. 즉 하느님이 의로우시듯이 이스라엘도 의로워져야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자면, 경제적으로 강한 자가 약한 자의 가난과 빈곤을 이용해서 자신의 이익을 도모해서는 안된다(22,20-26 참조).

 

3) 출애굽 의미의 확대

 

“야훼께서 당신 백성을 에집트에서 구출하셨다.”는 표현이 어디에 나타나든 그것은 항상 신앙 고백적인 표현이다. 신명기 26장 5절 이하의 옛 신앙 고백에서조차, 에집트에서의 구출은 여러 사건들의 중심을 차지하고 있다. 여호수아 24장 2절 이하에서도 그것은 마찬가지이다. 이 구원은 구약 성서 전체의 모든 시대(다니엘 9장 15절까지)뿐만 아니라 모든 다양한 문맥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그런데 설화 편집 작업으로 인해 전문적인 사항과 신학적인 측면에 있어서 그 사건은 더욱 확대되었다. 다시 말해서 이 출애굽 사건에는 여러 가지 다양한 요소와 의미와 사건들이 결부되게 되었다. 예컨대 출애굽 사건은 여러 가지 기적들로써 이루어져 있다고 한다 - 열 가지 재앙, 구름 기둥(출애 14,19, 에집트 병거의 바퀴들이 얽힘(25절), 야훼께서 에집트 군대를 당황케 하심(24절), 모세가 지팡이로 바다를 가름(16절) 등. 두 신들의 싸움에 있어서 이스라엘이 수동적으로 가만히 있다는 내용, 야훼의 영광스러운 승리는 인간의 도움에 좌우되지 않는다는 점(17절), 이스라엘의 신앙에 대해 그렇게 강조하는 것(31절), 이 모두는 출애굽 사건에 대해 신학적으로 상당히 숙고하였음을 말해주고 있다.

 

4) 출애굽 사건의 응용

 

이렇게 출애굽 사건은 그 주위에 다양한 사건과 의미가 결부되어 있는 핵심적인 사건이기 때문에, 후대의 예언과 예배 생활에 있어서 그것은 다양한 상황들에서 인용될 수 있었고 또한 응용될 수 있었다. 예를 들면, 하느님의 위엄과 권능에 대한 찬양(시편 13,6 이하, 135-136편), 하느님의 사랑에 대한 명상 및 이와 대조되는 것으로서 이스라엘의 사랑에 찬 순종이 결여됨(호세 11장 참조; 시편 78.106편), 환난으로부터 구원해 달라는 개인적인 탄원(이는 하느님의 옛적의 위대한 구원 행위들에 입각한 것임; 시편 77편), 제2의 출발(바빌론 유배로부터의 구출)에 대한 희망의 기초가 되는 제1의 출발(이사 51,9-11) 등의 내용이 출애굽 사건에 그 바탕을 두고 있다.

 

 

시나이 계약(19-24장, 32-34장)

 

하느님은 이스라엘을 에집트에서 구원해 내신 후 시나이산에서 그들과 계약을 맺으신다. 계약 체결은 출애굽 사건을 더욱 발전시키고 완성시켜 준다. 하느님은 그들을 구원하는 것으로 내버려두지 않으시고 이제 계약을 통해 그들을 당신의 백성으로 삼으시고 그들과 친밀한 관계를 맺으신다. 성조사(聖祖史) 전체에 있어서 계약은, 하느님이 이스라엘에 대한 약속에 스스로를 의무 지우시는 맹세에 근거한 그러한 계약으로서 일종의 무조건적인 계약이었다. 그러나 시나이 계약은 이와 좀 다르다.

 

계약과 관계되는 부분은 19장 3-8절과 24장 3-8절이다. l9장 4절의 내용(“에집트인들을 어떻게 다루었는지…… 독수리 날개에 태워, 나에게로 데려왔다.”)은 과거에 하느님이 이스라엘에게 베푸신 은혜를 상기시키고 있다. 여기에는 출애굽, 광야 인도, 가나안 정복이 모두 포함되어 있다. 19장 5a절(“이제 너희가 나의 말을 듣고 내가 세워준 계약을 지킨다면”)은 계약의 법규에 해당한다. 하느님이 스스로에게만 의무를 지우고 인간에게는 아무 조건도 제시하지 않았던 그러한 성조들과의 계약과는 달리, 여기 시나이 계약에서는 하느님이 곧 체결될 계약을 지키라고 이스라엘에게 의무를 지우며 그 계약 관계는 ‘조건적’인 것임을 말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킨다면” 식의 조건은 하느님의 행위의 자발성을 제거하지도 않고 그 행위를 무효화시키지도 않는다. 우리의 본문에서 하느님의 구원과 인도는 ‘벌써’ 일어날 일이다. 그렇지만 이제 약속된 축복을 체험하기 위해서 이스라엘은 어떤 조건들을 채워야 한다(이와 비슷한 표현으로서 신명 8,19; 13,18; 28,1.2.15.58; 30,10 참조). 이스라엘이 지켜야 할 사항은 바로 뒤에 나오는 20-23장의 십계명과 계약의 법규이다. 19장 5b절과 6절은 계약상의 축복과 관계되는데 계약의 준수 결과 이스라엘은 하느님의 “특수한 보물”(내 것)이 되고, “사제들의 왕국”(사제의 직책을 맡은 내 나라)이 되고, “거룩한 나라”(거룩한 내 백성)가 되리라는 것이다.

 

24장 3-8절은 위와 같은 계약을 피의 예식으로써 체결하는 것이다. 모세가 계약서를 읽어 준다(7a절). 복종을 맹세하는 백성들의 반복되는 응답(3,7b절)은, 24장 3-8절을 19장 8절의 백성들의 맹세(“야훼께서 말씀하신 것은 모두 그대로 실천하겠습니다.”)와 밀접히 연결 짓고 또한 19장 5a절에 나온 계약상의 조건과도 밀접히 연결 짓는다. 모세가 백성들에게 피를 뿌림으로써 계약 체결이 종결된다(24,8).

 

출애굽기 19-24장의 계약에 관계되는 전승은, 중간에 사제계 사료(P)가 삽입된 후, 32-34장에 가서 다시 이어진다. 여기에는 계약을 맺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이스라엘은 황금 송아지를 만듦으로써 계약을 깼다는 내용이 나타나 있다. 이 설화는 창조 후의 타락 이야기와 더불어 앞으로의 이스라엘의 미래상 - 즉 죄스런 백성, 거역하는 백성 - 을 암시해 주고 있다. 모세의 기도 중재 덕분에 하느님의 용서가 임하고(32,11-14), 하느님은 이스라엘에게 십계판을 다시 만들어 주심으로써 그들과 계약을 갱신하신다(34,10-28). [경향잡지, 1992년 7월호, 박광호 베드로(대구 가톨릭 대학 교수 · 신부)]

 

 

계약 법규(계명)의 하사

 

고대 근동에서는 나라끼리의 계약에 있어서 체결 뒤에는 항상 계약의 법이 주어졌다. 그것은 계약 당사자에게 구속력을 부여함으로써 일단 맺어진 계약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느님께서도 계약 체결 후에 이스라엘에게 계약의 법규를 주신다. 그렇지만 이 법은 단순히 이스라엘을 얽어 매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느님이 당신의 구원된 백성에게 은혜로 주신 것으로써 그 목적은 그들을 생명으로 인도하고 당신의 현존을 확실히 해주기 위한 것이다. 출애굽기 20-23장(나아가 25-3l장과 35-40장, 레위기 전체 그리고 민수기 1-10장)의 법전(法典)들의 모음은 하느님의 구원의 은혜에 뒤이어 오는 하느님의 뜻이다. 이 확장된 법 체계는 이스라엘에게 하느님의 구원된 자로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 그리고 동시에 하느님의 뜻이 모든 세대를 통해 어떻게 항상 현존해 있을 수 있는지를 설명해 준다.

 

이렇게 이스라엘은 계명들을 윤리를 규정하는 절대적인 도덕법으로 이해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그것을 자신들의 역사의 일정한 순간에 하사된 ‘계시’(啓示)로 이해했으며 이를 통해 생명의 선물이 부여되었다. 하느님은 계명과 함께 당신 백성에게 생명을 주고자 하신다. 그렇지만 선택은 이스라엘에게 달려 있다. 계명의 성취와 더불어 이스라엘은 생명 혹은 죽음에 대한 ‘결단’(決斷)을 내려야 한다(신명 30,15; 5,30 등). 그렇지만 어떤 경우든 이들 계명이 조건적인 전제로서 계약의 서두에 붙여진 것은 아니다. 마치 일단 복종이 뒤따를 때에만 계약이 효력을 발생한다는 식으로, 오히려 실제의 상황은 정반대이다. 먼저 계약이 체결되고 난 이후 이와 함께 이스라엘은 계시된 계명들을 받아들인다. 우리는 후대의 신명기에서조차 동일한 순서를 발견할 수 있다. 즉 ‘너희는 오늘 너희 하느님 야훼의 백성이 되었다.”(신명 27,9)는 직설법적인 서술문 뒤에 “그런즉 너희는 너희 하느님 야훼의 말씀을 따라 내가 오늘 너희에게 일러주는 그의 계명과 규정을 지켜야 한다.”(l0절)는 명령법이 위치하고 있다.

 

 

십계명(20장 1-17절)

 

대표적인 계명으로는 십계명이 있다. 우선 형식적인 면에서 보면 십계명은 두 가지를 제외하고 “…… 하지 말라.”는 부정의 형식으로 되어 있다. 이렇게 십계명은 기본적인 부정에 국한되어 있으며 적극적인 면은 결여되어 있다. 십계명은 야훼께 속한 사람들이 주의해야 할 넓은 삶의 영역 변두리에 설치된 표시판으로 만족하고 있다. 바로 이러한 부정의 형식이 십계명이나 신명기 27장 15절 이하나 레위기 19장 13절 이하 등에 있어서 특징적이다. 예언서언 에제키엘서에서조차 이러한 종류의 부정적인 규정이 나타나 있다(18,6 이하).

 

부정적으로 되어 있는 이러한 일련의 계명들은 결코 어떤 윤리 같은 것을 소개하려는 의도가 아님이 아주 명백하다. 이들은 야훼 하느님의 최대의 요구들을 포함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십계명은 그 부정적인 경향 때문에 내용에 있어서 크게 제한적이지만 그 목적은 이스라엘의 자유를 축소시키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계약 관계에 있어서 놀랄 만한 자유를 제공하고 있다. 즉 십계명이 절대 금지의 법률 양식으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법률을 집행하는 실제의 방법에 있어서는 상당히 자유로웠으며 또한 적극적인 절차법의 영역으로도 발전될 수 있다.

 

십계명은 하느님이 당신 백성에게 직접 말씀하시는 형태로 되어 있다. 모세는 중재자가 아니다. 십계명의 서두에 붙어 있는 “너희 하느님은 나 야훼다. 바로 내가 너희를 에집트 땅 종살이하던 집에서 이끌어 낸 하느님이다.”(출애 20,2)는 서언은 흔히 망각되기 쉽지만 십계명에 있어서는 본질적으로 중요한 부분이다. 하느님은 자신을 드러내시면서 당신 백성에게 십계명을 주시게 된 전제 요건을 말씀하시고, 그들이 법규에 순종하도록 부르고 계신다. 이 사건이 의미하는 바는 계명의 선포 이전에 구원 행위가 먼저 있었으며 은혜가 법보다 먼저라는 것이다. 즉 십계명은 이스라엘에게 무조건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미 받은 하느님의 구원의 은혜와 관계된다는 것이다. 하느님과 이스라엘이 율법을 주고받는 관계로 맺어진 상황은 바로 하느님의 구원 행위인 것이다.

 

 

계약의 책(계약의 법규 : 출애 20,22-23. 33)

 

십계명 바로 다음에 여러 가지 성격의 율법 조문이 나타나고 있는데 이것은 일반적으로 “계약의 법전” 혹은 “계약의 책”이라 불린다. 이것은 후대에 십계명 뒤에 첨가된 것이다. 이는 문학적 편집의 결과이다. 그 이유는 원래 이 계약의 법전이 시나이 계시 자체와 아무 관계도 없고 전승사적으로 볼 때 전혀 다른 기원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법전이 삽입된 사실은 중요하다. 십계명을 통해 이스라엘에 이미 계시된 하느님의 뜻은 이제 훨씬 더 넓은 바탕을 형성하게 되었고 훨씬 상세화된 것이다. 십계명이 부정적인 형태로 이스라엘의 삶을 보호하기 위해 바깥으로 울타리를 친 것에 불과하다면, 계약의 책은 이 울타리 내부에 위치해 있으면서 십계명을 보충하고 보완해 주며, 여러 다양한 긍정적 및 부정적 계명들로써 하느님의 뜻을 드러내 주고 있다.

 

계약의 법전에서는 약자와 억압받는 자에 대하여 커다란 관심을 보이고 있다(22,20-26 ; 23,1-12) 또한 모든 계층의 종들에게는 - 스스로 종으로 계속 남아 있겠다고 자원하는 경우를 제외하고 - 6년이 지난 후에는 자유를 주어야 한다(21,2-6). 이 같은 규정은 에집트 땅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종살이할 때 하느님이 그들에게 은혜를 베푸셨다는 체험을 전제하고 있다.

 

 

설명 구절과 보충 구절

 

하느님의 계명은 인간에게 합법적이기 위해서 그 어떠한 설명이나 구체화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더욱 자명하다. 그렇지만 인간의 이해와 수락을 위해 보충 및 설명이 주어지기도 한다. 이러한 보충이나 설명 구절은 계약의 책에서보다는 후기의 법률 수집서인 신명기와 성결 법전(聖潔法典 : 레위 17-26장)에 더 흔하게 나타난다.

 

설명 구절의 예를 들어 보면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죽은 짐승의 고기를 먹는 것을 금하는 오래된 계명 뒤에는 “너희는 야훼께 바쳐진 거룩한 백성이기 때문이다.”는 설명 구절이 붙어 있다(신명 14,21). 맷돌을 저당 잡지 말아야 하는데, “그것은 남의 목숨을 저당 잡는 일이기 때문이다”(신명 24,6). 또한 매를 치는 벌인 경우에 사십 대 이상을 넘기지 못하는데, “네 동족이 네 눈앞에서 지나친 천대를 받게 해서는 안되기 때문이다”(신명 25,3). 재판관들은 어떠한 뇌물도 받지 말아야 하는데 “뇌물은 멀쩡한 눈을 가리워 장님으로 만들어 소송을 뒤엎기 때문이다”(출애 23,8). 어떠한 피든지 먹어서는 안되는데, “피 안에 생명이 있기 때문이다”(레위 17,14). 이스라엘 사람들은 안식일에는 종들이나 짐승들에게도 일을 시키지 못하는데, 그들은 “에집트 땅에서 종살이하던 일을 생각”하여야 하기 때문이다(신명 5,15).

 

설명 구절과 비슷한 것으로서, 부정의 계명들을 긍정적인 내용으로 발전시키는 ‘보충 구절’이 있다. 대표적인 예로서 “형제를 미워하는 마음을 품지 말라. (오히려) 이웃의 잘못을 타일러 주어야 한다.”(레위 19,17) : “동족에게 앙심을 품어 원수를 갚지 말라. (오히려)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레위 19,18)는 유명한 내용을 들 수 있다. 여기서 원래의 부정적인 형식이 두 번째의 긍정적인 형태로 대치되어도 좋을 것이다. 십계명에 있어서 부모와 안식일에 대한 긍정적인 형태의 계명은 원래의 부정적인 형식이 완전히 탈락되고 긍정적인 형식인 보충 구절만 남아 있는 셈이다.

 

이러한 설명 구절들은 어떻게 보면 법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구실을 백성에게서 빼앗자는 측면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거기에는 그 이상의 것이 있다. 하느님은 절대적인 순종을 원하신다. 그분은 인간이 당신의 계명들과 규정들을 이해하기를 원하시며, 인간이 법규들에 대해 내적으로 동의하는 것을 원하신다. 하느님이 원하시는 순종은 성숙한 인간으로서의 순종이지 맹목적이거나 마지못해 하는 순종이 아니다. 이렇게 이스라엘은 하느님의 뜻을 아주 융통성 있는 것으로 간주했으며, 그들은 하느님의 법을 종교적, 정치적, 경제적 변동에 적응시켜 나갔다. 법규에 들어 있는 하느님의 뜻은 이스라엘에게 결코 시간을 초월해 절대적으로 군림하는 것이 아니었다. 이스라엘의 각 세대는 하느님의 법 - 자신에게 계속 유효한 것으로서 - 에 새로이 귀기울여야 했고 자신을 위해 그것을 새롭게 적응시켜 나가야 했다. [경향잡지, 1992년 8월호, 박광호 베드로(대구 가톨릭 대학 교수 ·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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