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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신약]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심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09-07-15 조회수2,247 추천수0

[성서의 세계 - 신약]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심

 

 

영광 속의 재림

 

사도들과 초기 그리스도교인들이 그리스도의 재림을 간절히 기다렸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예수께서 승천하신 뒤 사도들의 눈에는 하늘로 오르시는 그리스도의 모습이 선했을 것이고, 따라서 사도행전 1장 11절에 언급된 천사의 말 - “너희 곁을 떠나 승천하신 저 예수께서는 너희가 보는 앞에서 하늘로 올라가시던 그 모양으로 다시 오실 것이다.” - 은 그들 신앙의 근본적인 논거가 되었다. 사도행전에 나타난 이러한 사고 곧 “그리로부터 산 이와 죽은 이를 심판하러 오시리라.”는 것은 그리스도의 영상에 대한 결론이요 성취이다. 바오로는 이러한 기대 속에 살았다. 곧 다마스커스의 영상은 어느 날 그에게 도래해야 할 것에 대한 예고였다.

 

그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자신의 삶을 두 번의 그리스도 출현에서 본다. 곧 주님의 첫 번째 출현으로 그는 인도되었고 고무되었으며 두 번째 출현인 심판 때의 출현을 향해 이끌렸다. 바오로가 “오심과 출현”이라는 말을 거의 배타적으로 마지막 재림에 대해 사용하는 것에 특별히 주의를 기울일 만하다. 그는 단 한 번 하느님의 강생을 “구세주의 오심”(2디모 1,10)이라고 불렀다.

 

바오로가 주님의 재림을 설명하려고 자주 사용하는 말은 그리스어 “파루시아(parousia)”이다. 그의 편지에서 이 말은 다른 어떤 신학적 의미가 없이도 발견된다. 그러한 경우 한두 명의 협력자의 도착을 가리킨다. “실의에 차있는 사람을 위로해 주시는 하느님께서 디도를 보내시어(parousia) 우리를 위로해 주셨습니다”(2고린 7,6).

 

헬레니즘 세계에서 이 말은 고유하게 발전하였다. 처음에는 그것이 어떠한 도착에 대해서도 포괄적으로 사용되었으나 차츰 최근에 즉위한 어떤 왕이나 황제의 장엄한 입장을 가리키는 특별한 용어가 되었다. 잘 알다시피 헬레니즘 세계에서는 그들을 신격화하였고 따라서 “파루시아”란 말은 ‘신적(神的)’인 왕의 도착과 새롭고 더 나은 시대의 시작을 가리킬 수 있었다. 결과적으로 “파루시아”라는 말은 신약성서에서, 특히 바오로의 편지에서 마지막 날 그리스도의 재림을 가리키기 위한 전문용어가 되었다.

 

사목서간이라는 이름이 붙은 바오로의 마지막 편지들에 “파루시아”란 말은 더 이상 등장하지 않으나 그리스도의 재림의 영광스러운 특성을 더욱 분명하게 드러내려고 “출현”을 뜻하는 “에피파니아(epifania)”로 대체된다. 단 하나의 본문에서, 곧 바오로의 가장 오래된 편지 가운데 하나에서 “다시 오실 때에… 그 광채로”(2데살 2,8)라는 유일한 표현으로 나타난다.

 

복음서의 이야기들과 특히 예수의 말씀들은 “재림”과 분명히 연결된다. 따라서 “에피파니아”란 말이 복음서의 어떤 본문에도 등장하지 않고 “파루시아”란 말이 마태오 복음(24장)에 단 한 번 나타나는 것은 거의 이해할 수 없다. 마르코와 루가는 그리스도의 재림에 관한 그러한 전문적인 용어를 모르는 것 같다.

 

바오로는 그것을 자주 사용하지 않는다. 데살로니카에 보내는 두 통의 편지 외에는 고린토 전서 15장 22-23절에 단 한 번 다시 나타난다. “아담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이 모두 죽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이 살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각각 차례가 있습니다. 먼저 그리스도께서 살아나셨고 그 다음에는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이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 살아나게 될 것입니다.” 바오로가 데살로니카인들에게 일시적인 “파루시아”를 언급했음에도 이 용어의 사용은 그만큼 고유하고 정확해서 거기에서 완전한 교의를 뽑아낼 수도 있다. 우선 바오로는 영광스러운 재림을 “주님”께 돌린다. 그러한 말로 그는, 후대의 편지에서 쉽게 드러나듯이, 그리스도의 신성을 지적하고자 한다. 적당한 때에 그는 이러한 칭호에 메시아, 왕이신 “그리스도”(1데살 4,15; 5,23)란 용어를 덧붙인다.

 

우리가 사용하는 현대 언어에서 “그리스도”란 칭호는 더 이상 말할 필요도 없이 고유한 이름이지만 바오로 시대에는 다윗 가문의 이상적인 왕에게 유보되었다. “주님”이란 칭호를 사용하면서 바오로는 그리스도의 재림이 새로운 시대를 이끈다는 것을 이해시키려 한다. “그 다음에는 마지막 날이 올 터인데 그때에는… 그 나라를 하느님 아버지께 바치실 것입니다. …이리하여 모든 것이 그분에게 굴복당할 때에는 아드님 자신도 당신에게 모든 것을 굴복시켜 주신 하느님께 굴복하실 것입니다. 그때에는 하느님께서 만물을 완전히 지배하시게 될 것입니다”(1고린 15,24-28).

 

비록 바오로를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강한 열망 때문에 비난했을지라도 “파루시아”에 관해 그에게서 받은 생각 때문에 그를 비판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어떤 사람들의 해석에 따르면, 데살로니카인들에게 보낸 첫 번째 편지의 표현들은 분명히 정확치 않은 결과로 나타날 수 있다고 한다. 예컨대 아주 오래 전 일은 아니지만 스트라우서(E. Strausser)는 데살로니카 전서 4장 13-17절에 대해 이렇게 썼다. “곧 닥칠 세상의 종말에 대한 선포는 실현되지 않았다. 바오로는 죽었고 그로부터 세상의 종말이 오지 않은 채 19세기가 지났다. 따라서 바오로는 잘못을 저질렀다.”

 

그와 그처럼 생각한 이들은 바오로가 세상의 종말이 아주 가까이 있다고 생각했는지 아닌지 물어볼 수 있다. 그런데 오히려 바오로는 항상 준비된 자로서 있어야 하지 않았겠는가? 데살로니카인들에게 보낸 첫째 편지에 나타나듯이, 그의 생생한 열망으로 미루어볼 때 그는 명백하게 준비되어 있었다. (L’uomo moderno di fronte alla Bibbia에서 박래창 옮김)

 

[경향잡지, 1997년 12월호, 베난시우스 더 레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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