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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신약] 그리스도의 사명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09-07-15 조회수2,605 추천수0

[성서의 세계 - 신약] 그리스도의 사명

 

 

땅 끝에 이르기까지

 

멜리데 섬 근처에서 파선과 나폴리 근처 보디올리의 상륙을 상세하고도 생생하게 묘사한 바오로의 바다 여행 이야기는 실망 어린 사도행전의 짧은 결론과는 명백하게 대조된다. 이 짧은 결론은 바오로가 자신의 감옥생활에 대해 폭 넓고 예술적으로 묘사했듯이 그만큼 적절한 조화를 이루리라는 기대에서 사뭇 어긋난다.

 

“바오로는 셋집을 얻어 거기에서 만 이 년 동안 지내면서 자기를 찾아오는 사람을 모두 맞아들이고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하느님 나라를 아주 대담하게 선포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하여 가르쳤다”(사도 28,30-31).

 

바오로가 로마에 도착하는 순간은 언급조차 되지 않는다. 아피오 광장에서 형제들과 만났다는 이야기 뒤에 숙소의 상황에 대해 딱 한 구절만 나올 뿐이다. “우리가 로마에 들어갔을 때에 바오로는 경비병 한 사람의 감시를 받으면서 따로 지내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다”(사도 28,16). 바오로가 감옥에서 살았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비록 감시 아래이긴 하지만 그가 사택(개인 저택)에 머무르는 것은 용인되었다.

 

이러한 반(半) 자유로운 상황에서 바오로가 유다인과 이방인을 맞아들이는 일이 가능했다. 그들 앞에서 자신의 정당함을 증명하기 위해 “사흘 뒤에 바오로는 그곳 유다인 지도자들을 불렀다”(사도 28,17). “그들은 날을 정해두었다가 그날이 되자 여럿이 바오로의 숙소로 찾아왔다. 바오로는 그들에게 긴 논리로 하느님의 나라를 설명하였다”(사도 28,23).

 

바오로의 손님이 얼마나 되었는지는 말하지 않고 있다. 또한 그들이 얼마나 자주 바오로에게 갈 수 있었는지도 우리는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수인(囚人)인 바오로가 신앙을 자유롭게 설교하고 선포할 수 있었음을 안다.

 

이 설교에서 우리는 사도행전 전반에 걸쳐 나타나며 복음서에서 개별적으로 고려될 수 있는 오래되고 잘 알려진 주제를 찾을 수 있다. 첫 번째로 말씀이 유다인들에게 전해졌다는 점이다. “바오로는 모세의 율법과 예언자들의 글을 들어 예수에 관해서 그들을 설득시키려고 노력하였다. 바오로의 말을 듣고 믿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끝내 믿으려 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었다”(사도 28,23-24).

 

그리고 예수께서 유다인들의 완고함을 단죄하신 것(마태 13,14)과 같은 말로 바오로도 그들을 단죄한다. “성령께서 예언자 이사야를 시켜 당신들의 조상에게 하신 말씀은 지당합니다. … ‘이 백성에게 가서 말하여라. 너희가 듣고 또 들어도 알아듣지 못하고 보고 또 보아도 알아보지 못함은 이 백성이 마음의 문을 닫고 귀를 막고 눈을 감은 탓이니, 그렇지 않았더라면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게 되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아서서 마침내 나한테 온전하게 고침을 받으리라’”(사도 28,25-27).

 

이는 이스라엘의 운명과 부인(否認)에 대해 되풀이되는 불가사의다. 선택된 백성의 머리와 눈에 남아있는 이해할 수 없는 장막이다. 이 불신앙의 증거는 로마 페스케리아의 성 안젤로 성당 - 시나고가 앞에 있다. - 정면에 새겨져 있다. 엄하게 선언하는 중세기의 명문이다. “나는 온종일 내 팔을 벌려 이 백성을 기다렸으나 그들은 순종하지 않고 오히려 나를 거역하고 있다”(이사 65,2; 로마 10,21). “믿지 않고 반대하는 백성에게.”

 

바오로의 설교는 이 말로 요약된다. “그러니 하느님의 이 구원의 말씀이 이방인들에게로 돌아가게 되었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합니다. 이방인들은 이 구원의 말씀을 들을 것입니다”(사도 28,28). 그리고 설교의 이러한 결론은 또한 사도행전의 결론이다.

 

시대가 지나면서 사도행전의 이 거친 결론은 우리를 놀라게 하고 있으나 그에 대한 충분한 설명은 발견되지 않는다. 통상 루가는 바오로가 2년 동안의 미결구류가 끝나자마자 즉시 자신의 작품을 출간했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다. 그 뒤 아주 빠르게 실현되었을 바오로의 자유에 대해 루가는 잘 몰랐을지도 모른다.

 

확실히 저자는 자신의 작품을 “존경하는 테오필로”에게, 즉 로마 사법부에 다소 호교론적이고 공식적인 하나의 방어로 제출하기 위하여(사도 1,1) 서두른 듯하다. 그러한 경우 사도행전을 기록한 날짜를 정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바오로는 61년에 로마에 도착했고, 2년 뒤에 루가는 작업을 완결한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루가가 다른 목적을 가졌다는 가설이 더욱 크게 제기되고 있다. 말하자면 그의 의도는 바오로의 전기를 쓰는 것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즉 수인이 된 바오로의 운명에 큰 관심을 두었던 게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그는 그리스도의 말씀이 “예루살렘과 온 유다와 사마리아뿐만 아니라 땅 끝에 이르기까지 어디에서나”(사도 1,8) 설교되었다는 것을 드러내고자 하였다.

 

바오로는 로마에 도착했을 때 통상 그랬듯이, 우선 그곳에 사는 유다인들 가운데서 설교를 하였다. 그들이 반발하는 태도를 보이자 바오로는 이방인들에게 가서 설교를 하였다. 이러한 이행으로 루가는 그리스도의 사명이 실현되는 것을 보았다.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이상이 이루어졌고 바로 이 점에 대해 말해야 했던 루가는 그의 책을 끝낸다. 다음에 계속되는 사건들은 그에게 더 이상 흥미를 주지 못했다. 복음 설교자들의 발은 이제 로마에 다다랐고, 거기서부터 아주 빠르게 그리고 한층 쉽게 모든 곳으로 옮겨지게 된다.

 

루가의 이러한 설계는 63년과 연결되지 않는다. 그는 몇 년 뒤에도 그것을 쓸 수 있었다. 석방 뒤 그리스와 소아시아를 거쳐 이루어진 바오로의 여행들과 네로 치하에서 사도의 순교조차 이미 묘사된 어떤 수준에 다다를 수 없었다. 책은 바오로의 로마 도착으로 잘 마무리될 수 있었다. 예루살렘의 오순절 사건은 이미 세계적인 영역에, “땅 끝에 이르기까지” 도달한 것이다. (L’uomo moderno di fronte alla Bibbia에서 박래창 옮김)

 

[경향잡지, 1997년 8월호, 베난시우스 더 레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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