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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신약] 유골단지와 부활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09-07-08 조회수2,630 추천수0

[성서의 세계 - 신약] 유골단지와 부활

 

 

“예수여, 부활을 주소서”

 

해마다 파스카가 돌아올 때마다 우리가 축제 기분으로 상기하는 그리스도의 부활은 현대인에게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엄청난 기적이다. 예수의 생애 중에 일어난 대부분의 기적(병을 고쳐주신 일, 악령들린 사람을 해방시켜 주신 일)은 현대인이 자연스럽고 만족스럽게 설명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부활 사실에 직면해서는 그의 지성이 혼란스러워 진다.

 

믿는 이에게는 이 초자연적 기적이 성 바오로의 말대로 그의 신앙의 토대가 된다.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우리가 전한 것도 헛된 것이요 여러분의 믿음도 헛된 것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1고린 15,14). 믿지 않는 이, 믿을 수 없거나 믿기를 원하지 않는 이에게는 이 기적이 인간적으로 설명되어야만 한다. 합리주의적인 비평가들은 훌륭한 방법론의 도움으로도 사실을 직접적으로 끄집어내는 데 성공하지 못하고 다만 그 사실에 대한 보고, 즉 복음서, 사도행전 그리고 성 바오로 서간들의 신약성서 본문들만을 끄집어낼 뿐이다. 그들은 이 모든 통보들이 신자들 집단에서 유래했고 아주 늦은 시기에 편집되었다는 속단을 내림으로써 시작한다.

 

실제로 비평가들은 일반적으로 신약성서의 저술연대를 가능한 한 가장 늦은 시기로 정하는 경향이 있다. 이 통보들이 기록되기 전에 시간이 많이 흐르면 흐를수록 그만큼 믿는 이들의 환상이 그러한 통보들을 지어낼 가능성 - 그렇게 그들은 합리화한다 - 이 크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부활에 관한 통보들도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환상에서 생겨났다고 본다. 그래서 고대 진리는 이렇게 뒤집어진다. 즉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이 그리스도의 부활에 토대를 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부활이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에 토대를 둔 것이다.

 

믿는 이들의 입장에서는 신약의 작품들이 아주 오래되었고 그래서 이야기하고 있는 사실들과 연대적으로 가깝다는 것을 모든 방법으로 드러내려고 애쓴다. 거기에는 자연히 상상을 하기 위한 시간은 상당히 부족하다는 사실이 따른다. 사실과 기록 사이의 시간적 간격이 짧다는 것을 강조함으로써 같은 진술의 가치가 자동적으로 커진다. 진술이 참되다면 구원업적의 사실 자체가 신앙을 앞서 간다.

 

신자들 편에서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통보의 진실성을 드러내기 위해 논거를 찾는 동안에 고고학적 발견은 뜻하지 않은 증거를 밝혀냈다. 1945년 9월에 탈피오트(Talpiot : 이스라엘 영토에 속한 현대 예루살렘의 한 부락)에서 많은 수의 ‘유골단지’와 함께 잘 보존된 무덤이 발견되었다. 히브리인들은 죽은 이들을 관에 넣어 파묻지 않았고, 아마포로 싸서 일반적으로 바위를 파서 만든 무덤의 시체실에 안치하였다. 그러한 무덤의 입구에는 그곳을 닫는 데 이용되는 커다란 돌이 있었다. 일정한 시대가 지난 뒤에 시체실은 대개 친척인 다른 시체를 안치하기 위해 새롭게 준비되었다. 그런 경우에 남아있는 뼈들은 돌로 된 일종의 작은 시체 ‘함’에 넣어두었다. 이 돌로 된 ‘작은 함’을 ‘유골단지’라 하였고, 무덤에 정돈되었으며, 벽에는 그와 관련된 사람들의 이름을 새겨두도록 배려되었다. 팔레스티나에서는 일반적으로 신약성서의 페이지를 통해 이름이 알려져 있는 이들을 상기시키는 이름이 새겨있는 수많은 유골단지가 발견되었다.

 

탈피오트의 무덤에는 흥미있는 비명이 새겨진 다양한 유골단지가 보관되어 있다. 정밀한 조사 결과 그 영안실은 대략 기원 50년까지인 1세기 초반에 사용되었고, 유골단지에는 그리스도인들이 안장되어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예수’라는 이름은 분명히 두 개의 유골단지에 새겨있다. 게다가 그 둘 가운데 하나에는 네 개의 십자가가 짝지어 그려져 있다. ‘예수’라는 의미있는 이름은 거기에 안장된 사람의 이름이 아니다. 실제로 그 이름은 흔히 그러하듯이 부친의 이름(성)에 동반되어 나오는 것이 아니라 기도에 따라 나오는 이름이다.

 

첫 번째 유골단지에서 우리는 이름 뒤에 그리스 문자로 된 “예수, 아!”라는 탄식을 읽을 수 있다. 이는 예수의 죽음에 대한 탄식이 아니라 유골단지에 안장된 죽은 이를 위해 예수께 호소하는 탄원의 소리이다. 즉 예수께 올리는 기도이다.

 

두 번째 유골단지에서도 그리스 문자로 “Jesus Aloth”라는 다른 기도가 발견된다. 무덤을 맨 처음 조사한 히브리 고고학자 수케니크(Sukenik) 교수는 이것이 죽은 이의 고유한 이름을 말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 무의미한 해석을 주도면밀한 미국인 구스타프슨(Gustafsson)이 아주 훌륭하게 수정하였다. 그는 “일어나다” 또는 “다시 일어나다”를 뜻하는 동사 alah에서 Aloth라는 말을 끌어낸다. 에제키엘 예언서에서 이 말은 무덤과 관련되어 두 번 나오고(에제 37,12 이하) 그 경우에 “다시 일어나다”를 뜻한다. 그러므로 예수께 대한 이 기도로 부활을 간절히 바라는 것이다. 이렇게 번역할 수도 있겠다. 이 죽은 이를 “예수여, 다시 일어나게 하소서.” 또는 “예수여, 그에게 부활을 주소서.”

 

이로써 우리는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아주 출중한 기도를 알게 되었다. 그것은 실제로 40~45년으로 거슬러 올라갈 정도로 오래된 것이기에 의미있다. 더 나아가 그리스도께 기도했다는 것뿐만 아니라, 그분이 부활을 주실 수 있는 것처럼 죽음으로부터 부활하신 구세주로 인식되었다는 것을 드러내기 때문에 의미심장하다. 이 오래된 증언은 예수의 죽음 이후 대략 10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거기에서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뒤 한두 세대 뒤에 그리스도의 부활이라는 생각을 꾸며내지 않았다는 결과가 나온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은 예수의 부활을 앞에 일어난 사건으로 지니고 있다. 탈피오트의 명문 덕분에 우리는 우리의 신앙이 근거없지 않다는 것과 그리스도께서 참으로 부활하셨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부활의 증인들

 

예수의 승천 뒤에 사도들이 유다의 빈자리를 채울 다른 하나를 뽑기 위하여 최후의 만찬 방에 모여있을 때 베드로는 짧고 간결하게 대리인과 각 사도의 과제를 다음과 같은 말로 묘사하였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주 예수께서 우리와 함께 지내오시는 동안, 곧 요한이 세례를 주던 때부터 예수께서 우리 곁을 떠나 승천하신 날까지 줄곧 우리와 같이 있던 사람 중에서 하나를 뽑아 우리와 더불어 주 예수의 부활의 증인이 되게 해야 하겠습니다”(사도 1,21-22).

 

사도행전은 실제로 사도적 과제를 무엇보다도 “부활의 증인들이 되는 것”으로 묘사한다. 사도행전의 저자 루가는 이 작업을 착수하기 전에 이미 예수의 생애를 기록하였다. 그것은 우리의 감정에 잘 맞는 것으로, 진정하고 잘 정리된 전기이다. 루가 자신은 사실 이 전기를 위해 그보다 먼저 예수의 전기를 우리에게 제공하고자 애쓴 이들의 기록들을 포함하여 모든 일들을 주의깊게 조사하였다고 말한다. 그 자신은 이 전기를 선포, 기쁜 메시지, 복음으로 이해하였다. 즉 그는 예수의 말씀이나 비유의 이야기가 다만 그것을 읽은 이들이나 읽으려는 이들에게도 인상을 줄 것이며, 예수의 행적에 대한 보고나 그분의 수난에 대한 묘사가 은총의 업적을 의미하리라는 것을 확신하였다. 나아가 그는 무엇보다도 부활에 대한 이야기에 중점을 두고자 하였다. 왜냐하면 그것이 그에게는 다만 예수의 생애의 마감이요 등극일 뿐만 아니라, 기쁜 메시지 전체의 요점이요 절정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예수 생애의 모든 사건들 가운데 부활이 첫 설교를 위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루가는 그의 두 번째 작품인 사도행전에서 더욱더 드러낸다. 오순절 날 성령강림 후 즉시 있었던 베드로의 첫 번째 담화는 기적적인 성령강림 사건을 부활하신 주님 덕분으로 돌린다(사도 2,22-23. 32-33 참조).

 

그러므로 베드로는 사도들이 성취해야 할 과제를 지적한다. 그것은 바로 부활의 증인이 되는 것이다.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생명으로 돌아오신 것을 보았다. 그들은 공적으로 이를 선포하고 청중에게 그들의 증언과 함께 이 진리를 받아들이라고 초대한다. 게다가 열둘의 그러한 증언은 참석한 사람들 모두가 개별적으로 확인할 수 있던 언어의 기적과 그러한 메시아의 부활을 선포한 구약의 예언들로 지지받았다.

 

사도행전의 다른 담화들도 같은 방식으로 제기되었다. 즉 설교자는 그리스도의 부활을 증언하고 이 증언을 개인적으로 본 것과 구약의 예언으로 입증하는 것이다.

 

다른 사도들처럼 그리스도의 제자단에 속해 있지 않았던 사도 바오로는 부활의 증인과 마찬가지로 다마스커스 문 앞의 예수의 발현에 의지하게 된다. 따라서 그 역시 부활하신 주님을 보았고,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부활의 증인이 된다.

 

그러므로 주로 베드로와 바오로의 행적을 말하는 사도행전은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증인들의 책이라고 이름붙일 수 있을 것이다. 예수께서 그분의 사도들에게 “너희는 예루살렘과 온 유다와 사마리아뿐만 아니라 땅끝에 이르기까지 어디에서나 나의 증인이 될 것”(사도 1,8)이라며 부여하신 임무를 루가가 서문에서 부각시키는 것도 그 이유가 없지 않다. 부활하신 주님의 이 말씀들은 사도들에게 부여된 임무일 뿐 아니라 동시에 젊은 교회가 예루살렘에서 비롯하여 유다와 사마리아를 거쳐 땅끝에 이르기까지 취할 날개를 달아주는 것이다. 같은 말씀들은 또한 예루살렘에서 베드로가 출현한 것(사도 2,1-8; 3)과 유다와 사마리아의 신앙의 확장(8,4-11. 18) 그리고 땅끝, 로마에 이르기까지 바오로의 사도 여행(11,19-28,31)을 성공적으로 다루는 기록 이상을 제공한다. 부활에 대한 증언은 그 책의 핵심이다.

 

즉 팔레스티나의 핵심부에서 시작한 이 신앙은 로마 제국의 수도에 이르기까지 고대 세계에 성공적으로 널리 퍼진다. 그리고 이미 그 시대부터 로마로부터 전세계에 빛을 발산한다. (L’uomo moderno di fronte alla Bibbia에서 박래창 옮김)

 

[경향잡지, 1995년 10월호, 베난시우스 더 레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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