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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신약] 우물가에서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09-07-05 조회수2,656 추천수0

[성서의 세계 - 신약] 우물가에서

 

 

우물가에서

 

그리짐산 기숨에 있는 수천 년도 더 된 야곱의 우물은 오늘날 이상하고 자연스럽지 않은 인상을 준다. 두터운 수도원 벽으로 둘러싸여 있는 그 우물은 물을 원하는 목마른 사람이 접근하기 힘든 곳이다. 게다가 오랜 세기에 걸쳐 다양하고 무질서한 건축물들이 쌓아 올려져서 장소 전체가 성소처럼 보이고, 우물은 잘 설계되어 적절하게 실현된 지하실의 일부인 듯하다. 한때 양떼가 모여들었던 야곱의 옛 우물은 예수께서 그곳에서 취하신 휴식 때문에 순례지가 되었다.

 

임시로 만든 협소한 계단을 통해 위에서 말한 지하실로 내려가니, 멀리서도 우물을 알아볼 수 있었고 그 신기하고 이상한 인상이 절정에 달했다. 우물가에서 한 그리스 정교회 사제가 두레박을 손에 든 채 작은 집단의 레바논 아이들한테 아랍어로 정신없이 지껄이며 욕설을 퍼부어 댔다. 그 아이들은 한 수녀의 인도로 우물 입구 근처에 모여 있었다. 악담은 레바논 순례객들이 가톨릭 신자들이었기 때문에 나온 것이었을까? 이것이 우리가 받은 인상이었다. 어쨌든 그 정교회 사제의 조금은 미묘한 그러한 태도는 약 2천 년 전에 같은 이 장소에서 이방 사마리아 여자와 예수의 만남과는 아주 반대였다.

 

성 요한은 우물가의 이러한 만남을 아주 생생하고 상세하게 묘사한다. 예수께서는 유다로부터 북쪽을 향해 여행 중이셨고, 오늘날도 유다와 사마리아를 연결하는 대로(大路)를 걸으시다가 야곱의 옛 우물 가까이 지나가셨다. 당시에 우물은 그 주위에 지금의 수도원 벽도 없었을 뿐 아니라, 야외에 있었다. 진정한 근동의 우물, 시골의 우물이었다. 때는 한낮이었다. 예수께서는 여행과 강렬한 태양에 지치셨다. 따라서 복음서 저자는 그분이 그 우물가에 그저, 단순히 앉으셨다고 말한다. 여기에는 예수님 편에서 볼 때 아무것도 신기하고 이상할 것이 없다.

 

그러나 이상하고 신기한 것은 한낮의 그 시간에 한 여자가 물을 길으러 왔다는 점이다. 통상적으로 물 긷는 일은 아침이나 저녁 때 했고, 오늘날도 이것은 근동 여자들의 관습이다. 어쨌든 혼자 사는 사마리아 여자가 우물에 다가왔을 때 예수께서는 그 여자한테 “물을 좀 달라.”(요한 4,7)고 청하셨다. 그러한 청에 여자는 손에 두레박을 든 채 극도로 놀라워서 예수께 거의 욕설을 할 태세였다. “당신은 유다인이고 저는 사마리아 여자인데 어떻게 저더러 물을 달라고 하십니까?”(4,9) 그러나 예수께서 여자한테 대답하셨을 때, 여자의 놀라움은 사라졌다. 아니, 더 좋게 말해서 그녀의 당당한 태도는, 처음에는 예수께서 설명하기 시작하신 초자연적 논지에 대한 이해로, 나중에는 그에 대한 경탄으로 바뀌었다.

 

복음서 저자가 모든 일을 아주 작은 것에 이르기까지 묘사한 것은 이유가 없지 않다. 그것은 샘솟는 우물 근처에서 일어났다. 그 물은 물통에 담겨 있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우물을 보충하는 지하 수맥과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인접한 땅과 함께 우물은 야곱이 그의 아들 요셉한테 준 선물이었고, 그는 그의 아들들과 그의 가축들과 함께 그 물을 마셨다. 우물은 긴 줄과 두레박이 없이는 물에 닿기가 불가능할 만큼 이례적으로 깊었다. 오늘날도 그것은 여전히 깊다.

 

어쨌든 여자의 말은 그러한 구체적 자료를 통해 정당해졌다. 그런데도 그녀의 방어하는 태도에 예수께서는 신비스러운 말씀으로 마주치셨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선물이 무엇인지, 또 너에게 물을 청하는 내가 누구인지 알았더라면 오히려 네가 나에게 청했을 것이다. 그러면 내가 너에게 샘솟는 물을 주었을 것이다”(4,10). 여자는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했고, 이해할 수 없었다. “선생님, 우물이 이렇게 깊은데다 선생님께서는 두레박도 없으시면서 어디서 그 샘솟는 물을 떠다 주시겠다는 말씀입니까? 선생님께서는 이러한 우물을 우리에게 주신 야곱보다 더 훌륭하시다는 말씀입니까?”(4,11-12). 그것은 여자가 “아니다” 혹은 “불가능하다”를 확실히 예기하는 논리적 물음이요 강한 의심이다. 그러나 바로 그러한 형식 속에 그녀의 장차의 신앙이 암시된다.

 

그러한 질문 방식은 요한한테는 독특한 것이다. 예수께서 니고데모와 대화 중에 “새로 난다”는 말씀을 선포하셨을 때, 니고데모는 “어떻게”라고 묻는다(요한 3,4). 그리고 그는 질문 방식에 따라 답이 거의 자연스럽게 선행될 만큼 구체적으로 그것을 묻는다. 빵을 기적적으로 많게 한 뒤, 성체성사에 대한 담화에서도 유다인들은 그들의 미천한 질문으로(요한 6,42) 예수와 빵의 관계를, 나중에 담화의 마지막 부분에서 더욱 심오하게 설명되는 관계를 이해하지 못했다.

 

사마리아 여자와 나눈 대화에서 예수께서는 계속해서 당신이 야곱의 우물물을 언급하려는 것이 아님을 그녀가 이해하도록 하신다. “이 우물물을 마시는 사람은 다시 목마르겠지만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사람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4,13-14). 그리고 예수께서는 당신이 그의 가족에게 샘솟는 물을 준 성조 야곱보다 더 위대하시다는 것도 분명히 드러내신다. 그 여자는 마침내 그것을 이해했다. “과연 선생님은 대예언자이십니다”(4,19). 그 뒤 여자는 재치 있게 유다인과 사마리아인 사이의 예식에 관한 판단과 메시아 대망의 성취에 대해 묻는다. “저는 그리스도라 하는 메시아가 오실 것을 알고 있습니다”(4,25). 그러자 예수께서 그녀에게 말씀하신다. “너와 말하고 있는 내가 바로 그 사람이다”(4,26). 이러한 선언과 함께 물을 청하는 데 대한 놀라움은 메시아에 대한 믿음으로 충만한 경탄 속에 꽃봉오리를 터뜨린다.

 

이 일화와 대화의 다양한 양상들은 최근에 폭 넓은 토론의 대상이 되었다. 복음서 저자가 이야기와 대화 전체를 꾸며 낸 장본인은 아니지 않은가 하고 묻는다. 사마리아 여자처럼 같은 우물가에 머물렀던 의심 많은 르낭(Renan)은 이 이야기가 진정한 역사라고 선언했다. 그리고 우리 신자들한테 이것은 유쾌한 확증이다. 야곱의 우물은 잘 알려진 진정한 장소들 중 하나다. 그곳은 예수의 생애 가운데서 한 사실이 비롯된 장소라 할 수 있다. 그런데도 복음서 저자가, 자신이 보존했던 예수의 이야기를 우리한테 그만큼 자유로운 보고서로 전해 주기 위해, 그 대화를 그의 방식대로 안배하고 손질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어쨌든 복음서에 있는 그대로 사마리아 여자의 일화가 착한 목자의 주의 깊은 자비, 그분의 섬세한 교육학, 회심시키고 변화시키는 그분의 은총의 신비로운 효능을 드러내는 값진 보석임을 부정할 수 없다.

 

 

못에 내려오는 천사

 

우리는 네 번째 복음서에서 모두 각기 상징적 가치를 지니는 일곱 개의 의미 있는 기적을 발견한다고 이미 암시했다. 최종적인 결론을 이끌어 내기 전에 다른 ‘표징들’과 아주 다르고 따라서 직설적인 다른 기적 이야기를 특별한 관심을 갖고 살펴보자.

 

이 기적은 요한 5장 2절부터 4절에 있다. “예루살렘 양의 문 곁에는 히브리 말로 베짜타라는 못이 있었고 그 둘레에는 행각 다섯이 서 있었다.” 여기에는 소경과 절름발이와 중풍병자 등 수많은 병자들이 누워 있었는데, 그들은 물이 움직이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주님의 천사가 그 못에 내려와 물을 휘젓곤 하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물이 움직인 뒤 거기에 맨 먼저 들어가는 사람은 “무슨 병이라도 다 나았던 것이다.” 그 다음에 나오는 말은 유명하다. 예수께서 거기 있는 병자들 중 하나에게 “낫기를 원하느냐?” 하고 물으셨다. 병자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선생님, 그렇지만 저에겐 물이 움직여도 물에 넣어 줄 사람이 없습니다. 그래서 저 혼자 가는 동안에 딴 사람이 먼저 물에 들어갑니다”(5,6-7).

 

이 기적은 많은 이들한테 경이적인 어떤 현상에 대해 다룬다는 것을 논리적으로 생각하게 한다. 볼 수 없게 못에 내려오는 천사는 어떤 순간에 역시 볼 수 없게 물을 건드린다. 그리고 파문이 못의 수변에 일 때 원주에는 사람들이 몰리고, 누구나 아직 파문이 이는 동안 먼저 물에 다다르기 위해 소동을 일으킨다. 모든 병자가 자신이 치유되기를 얼마나 간절히 원하는지 상상하기 쉽다. 따라서 물의 출렁거림에 따라 실현되는 혼동, 즉 모두보다 앞서서 기적을 붙잡기 위해 돌격하고, 밀치고, 외치고, 숨가쁘게 달리는 것을 쉽게 상상할 수 있다. 모든 것은 중풍병자의 말로 잘 묘사된다. “저 혼자 가는 동안에 딴 사람이 먼저 물에 들어갑니다”(5,7).

 

복음서 밖에서 그 경이적인 연못과 거기에서 일어난 기적들에 대한 어떤 보고도 전승된 바 없다고 말하는 것은 필요하지 않다. 그리고 또 놀라운 일은 다섯 행각(고고학의 증명으로 확실히 있었다)에 둘러싸인 못가의 중풍병자한테 일어난 이 기적에서 기적 뒤가 아니라 전에 중풍병자의 믿음과 그리스도의 개인적인 만남을 찾는 것은 헛일이라는 점이다. 공관 복음서에서 모든 기적이 지니는 결말(구세주의 권능, 선, 자비, 권한을 드러냄)에 대해서조차 아무런 암시가 없다. 그리고 네 번째 복음서가 우리한테 소개하는 일련의 일곱 표징 가운데 그 못가에서 일어난 일은 이상하게 예외이다. 이것은 요한 복음 전체에 어떤 식으로든 부합되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한테 보여 주는 것같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물의 움직임과 결과적으로 계속되는 기적들에 대해서 말하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고 받아들이기 어렵다.

 

그러면 우리가 주목할 것은 무엇인가? 통상적으로 인용된 본문의 두 번째 부분에 첨부되는 삽입구는 오래 되고 제대로 설정된 불확실함을 가리킨다. 삽입구 사이의 그러한 말들은 몇몇 옛 사본에서는 발견되지 않는다. 인쇄술이 발명되기 이전에 책들은 손으로 베껴서 불어났고, 따라서 옛 수사본은 오늘날의 출판물과 거의 같은 가치를 지닌다. 그런데 옛날의 여러 출판물에 이 이상한 기적이 언급되어 있지 않다. 심지어 가톨릭 교회 안에서 세속적 이유로 쓰였고, 성서의 외연(外延)을 판단하는 기준이던 불가타의 옛 판에서조차 찾아보는 것은 헛일이다. 따라서 거의 모든 해석학자들은 못에 내려오는 천사에 대한 묘사와 물이 움직이기를 기다림에 대한 언급(요한 5,3b-4)은 진정하지 않은 것으로 간주하고, 결과적으로 그 구절을 복음서에 속하지 않는 것으로 포기해야 한다는 것을 거의 이의 없이 지지한다.

 

그렇다면, 중풍병자의 말, “선생님, 그렇지만 저에겐 물이 움직여도 물에 넣어 줄 사람이 없습니다. 그래서 저 혼자 가는 동안에 딴 사람이 먼저 물에 들어갑니다.”(5,7)는 어떻게 정당화하느냐 하고 물을 것이다. 이 말들은 진정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비록 이상하게 들릴지라도 중풍병자의 38년 간의 기다림을 훌륭하게 조명하기 위해서는 유익하다. 그러면 독자들과 만나기 위하여 어쩌면 알려지지 않은 손이 페이지에 난외(欄外)의 주(註), 그 기원이 물의 중개적인 출렁거림을 천사의 탓으로 돌리는 대중적 환상 안에 있을 수도 있는 주를 자리잡았다고 생각하게 된다. 어쨌든 그러한 출렁임은, 또는 기적적인 것으로 또는 자연히 건강에 유익한 것으로 간주되기 때문에 계속해서 수많은 병자들을 그리로 끌어당겼다.

 

뒤에 본문을 베끼는 이는 그러한 난외의 관찰을 본문의 진정한 부분으로 간주해 그것을 삽입시켰으며, 그렇기 때문에 그 이상한 설명은 어떤 옛 수사본에서 이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더 오래 되고 더 훌륭한 원전들이 그 구절들을 담고 있지 않기 때문에 그것을 보존하는 것은 정당하지 않다.

 

덜 복음적인 기적, 즉 물의 움직임은 복음에 속하는 것이 아니다. 그와 함께 요한의 복음은 일곱 개의 풍부한 상징적 표징의 복음으로 더 순수하고 조리 있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L’uomo moderno di fronte alla Bibbia에서 박래창 옮김)

 

[경향잡지, 1994년 11월호, 베난시우스 더 레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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