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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신약] 일곱 가지 표징의 요한 복음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09-07-05 조회수6,491 추천수1

[성서의 세계 - 신약] 일곱 가지 표징의 요한 복음

 

 

예수는 주님이시다

 

구약 성서에서는 언제나 하느님이 지배적인 논제(論題)이다. 그러나 하느님은 여러 가지 양상으로 묘사된다. 어떤 때는 더욱 분명한 특성에 따라 이름 지어지지만, 흔히는 하느님과 야훼라고 한다. 전능하신 분, 지극히 높으신 분, 창조주, 아버지 같은 이름은 그 의도와 기원을 분명히 표시한다. ‘하느님’(Deus)이라는 말에 대해서는 기원과 의미를 분명히 모른다. 아마도 최상 존재의 본질 자체를 지극히 짤막하게 종합하는 표현일지도 모른다. 하느님이라는 말이 정말로 고유한 이름이 아니기 때문에 어떤 성서 번역들은 이 말을 소문자(deus)로 적고 있다. 그러나 야훼라는 이름은 엄밀한 의미에서 고유한 이름이고, 성서 이야기에 따르면, 그것은 하느님의 계시에 따라 지상에 전해진 것이다.

 

히브리인한테는 이름의 인식과 용법에 대한 그들 고유의 생각에 따라 하느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금지되었다. 따라서 성서가 야훼라는 고유한 이름을 쓸 때 히브리인은 ‘주님’을 뜻하는 아도나이(Adonai)로 읽었다. 그래서 이 이름은 대부분의 구약 성서 번역에서 하느님의 고유한 이름이 되었다. ‘주님’은 구약 성서에서 신(神) 자체를 가리킨다.

 

신약 성서에서 구약의 전통은 부분적으로 계속된다. 그래서 흔히 우리가 ‘아버지’라는 이름을 만난다 하더라도, 마찬가지로 흔히 ‘하느님’이라는 이름을 아무런 어려움 없이 만난다.

 

그러나 신약 성서에서는 이러한 용법에 곁들여 믿기 힘든 사고(思考)의 도약, 지극히 중대한 진전에 마주치게 된다. 복음서 이야기의 주인공인 나자렛의 예수, 주로 자신을 사람의 아들로 소개하시는 예수는 하느님과 동화(同化)되신다. 이렇게 그런 일이 이루어지고, 무엇보다도 언제 이루어졌는지 고찰해 보는 것이 극히 중요한 일이다.

 

사도 행전에 따르면, 베드로는 성령 강림날 설교 중에 성령의 인도를 받아 두 가지 중대한 결론을 발전시킨다. 그것은 예수의 삶과 특히 그분의 부활에서 쉽게 추론된 것이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온 백성은 분명히 알아 두시오. 여러분이 십자가에 못박아 죽인 이 예수를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주님이 되게 하셨고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습니다”(사도 2,36). 여기서 베드로는 예수가 메시아일 뿐 아니라 주님이시라고 선언한다. 그리고 이것은 구약 성서에서 하느님께만 부여된 칭호를 환기시킨다.

 

바오로는 종종 예수를 ‘주님’이라 부르고 그것이 다음과 같은 의미를 갖는 것임을 분명히 지적한다. “그분은 당신 자신을 낮추셔서 죽기까지, 아니, 십자가에 달려서 죽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도 그분을 높이 올리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하늘과 땅 위와 땅 아래 있는 모든 것이 예수의 이름을 받들어 무릎을 꿇고 모두가 입을 모아 예수 그리스도가 주님이시라 찬미하며 하느님 아버지를 찬양하게 되었습니다”(필립 2,8-11).

 

‘주님’이라는 보통 명사로 예수는 무엇보다도 뛰어난 칭호를 받는다. 그리고 구약의 선상에서 숙고를 계속해보면, 그것이 초인간적인 이름이요, 신적이고 배타적인 칭호라는 사실을 추정할 수 있다. 바오로에 따르면, 이러한 식별의 분명한 증거는 예수께서 죽음에서 부활하신 것이다. 그는 예수 안에서 인간적인 것과 신적인 것을 구별한다. “그분은 인성으로 말하면 다윗의 후손으로 태어나신 분이며……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써…… 하느님의 아들로 확인되신 분입니다. 그분이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로마 1,3-4). 이 복잡하고 치밀한 사고의 구분으로, 바오로는 아버지이신 하느님께서 예수의 부활로 예수가 당신의 아들이요 주라는 것을 확신 있게 드러내 보이셨음을 지적한다. 우리의 말로 표현하자면 예수가 하느님의 아들이요 또한 하느님이라고 할 수 있겠다.

 

부활이 신빙성 있는 사실이었다면, 사도들이 부활 이후에야 이런 결론에 이르렀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어떤 저자들은 더 나아가, 무엇보다도 바오로가 그러한 결론을 이끌어 내고 예수께 ‘주님’이라는 칭호를 부여하는 데 특별한 영향을 미쳤다고 단언한다. 어쨌든 루가는 바오로의 제자로서 정당하게 예수께 이 칭호를 부여한다. 그리고 모든 복음서에서 여러 사람들이 예수께 와서 ‘나의 주님’이라고 부르면서 간청하는 내용을 읽을지라도, 그러한 정식이 총칭적이고 덜 의미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반면에 루가는 한 보고에서 예수 대신 ‘주님’이라고 쓸 때 예수의 신성에 대한 자신의 신앙을 의도적으로 고백하고 설교한다. 그래서 그는 나인의 장례 행렬에 대한 묘사에서 ‘주’께서 우는 어머니를 보신다고 말할 때(루가 7,13), 또는 마리아가 주님 발치에 앉아 있었다고 말할 때(10,39), 그리고 주님이 마르타한테 아주 유명한 훈계를 해주셨다고 말할 때(10,41), 그러한 의도를 드러내고 있다. 또한 그의 복음서 다른 데서 루가는 예수께서 아직 죽음으로부터 부활하시지 않았는데도 예수를 ‘주님’이라고 부른다. 바오로한테 훈련받은 그는 그분이 부활 때 주님으로 나타나셨음을 알고 있다. 그러나 또한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시기 전에도 주님이셨음을 알고 있다.

 

바오로의 정식은 다만 루가한테만 건너가지 않았고 전(全)교회의 공통된 유산이 되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전례서 본문에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라는 정식이 지배적이고, 통상적인 용법상 우리는 예수를 “우리 주”라고 부른다.

 

 

요한 복음 또는 일곱 가지 표징의 복음

 

네 번째 복음서는 많은 이들한테 신비스러운 복음서다. 얼마 전 시대까지만 해도 미사 끝마다 그 서문을 읽도록 했는데도 이 복음서의 대부분은 많은 이들한테 닫혀 있다.

 

그것을 탐구하고 이해하기 위하여 더욱 나은 방법은 결론으로부터, 정확히 말해서 21장의 마지막 절이 아니라 바로 그 앞 장에 있는 원래의 결론에서 출발하는 것이라고 본다. “예수께서는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않은 다른 기적들도 수없이 행하였다. 이 책을 쓴 목적은 다만 사람들이 예수는 그리스도이시며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믿고, 또 그렇게 믿어서 그분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20,31). 보다시피 여기에는 책의 목적과 저자가 성취하기에 가장 적합하다고 판단하는 수단들이 드러나 있다.

 

네 번째 복음서는 믿음, 또는 그리스 본문을 글자 그대로 옮긴다면, “믿음을 지속시킬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믿음에 대한 인내심을 불러일으키고자 한다. 이러한 믿음에는 “그분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음” 즉 영적 생명을 얻음이 부합한다. 바로 이 생명이 네 번째 복음서의 으뜸 주제다.

 

서문의 찬란하고 깊이 있는 페이지는 이미 “말씀 안에 생명이 있었다.” 그리고 이 생명이 모든 사람들과 “하느님께로부터 생겨났음”을 받아들이는 모든 이를 위해 빛이었다고 말하고 있다. 그런데 이 복음서의 거의 모든 페이지에서 생명과 빛이 죽음과 어둠을 상대로 싸움을 하게 되고 마침내 생명이 빛나는 부활로 승리를 거두게 된다.

 

살아 있는 믿음을 강화하기 위해 또 더 낫게는 확산시키기 위해 저자는 예수께서 그분의 공생활 중에 이루신 기적들 가운데서 선택을 한다. 예수께서 다른 많은 기적들을 행하셨다고 분명하게 언급하면서도, 그는 폭 넓게 묘사되고 신중하게 ‘표징’이라고 불리는 몇 가지 기적에만 머무른다. 그리고 그는 이 표정이 놀라운 일을 불러일으키는 데가 아니라, 무언가 다른 것을 ‘의미하는’ 데에 이용된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그러한 기적들은 표징과 이미지로서 더욱 심오한 의미를 지니고 있고 믿음과 생명의 성장에 이용된다. 사실 모든 표징에서는 발전하는 이 믿음, 더욱더 확장되는 이 생명이 암시된다.

 

네 번째 복음서를 펼치면 요한이 가장 웅변적이고 의미 있는 것으로 선택한 기적을 분별하기가 쉽다. 시리즈는 물이 포도주로 바뀌는 가나의 혼인 잔치로 시작된다. 그 묘사는 “그리하여 제자들은 믿게 되었다.”(요한 2,11)는 믿음에 대한 특별한 암시로 끝난다.

 

마찬가지로 가나에서 있은 두 번째 표징에서는 죽어 가는 고관의 아들을 고쳐 주신다. 이야기는 어떻게 예수께서 생명을 능가하는 힘을 지니셨는지 보게 하고, “그와 그의 온 집안이 예수를 믿었다.”(요한 4,53)는 고관의 믿음으로 끝난다. 생명을 능가하는 예수의 권능은 중풍 환자한테 행하신 기적에서 더욱더 확산되어 부각된다. 행각 다섯이 서 있는 못에서 그는 즉각 치유되어 어깨에 자신의 요를 메고 도시를 가로질러 간다. 그 뒤에 나오는 논쟁에서(요한 5,10-17) 예수께서는 그분한테서 나오는 생명을 주는 힘을 분명히 천명하신다. “아버지께서 죽은 이들을 일으켜 다시 살리시듯이, 아들도 살리고 싶은 사람들을 살릴 것이다”(요한 5,21).

 

그 다음은 빵과 물고기를 가진 소년의 차례인데, 그것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배를 채우게 된다. 예수께서 얼마나 생명에 관심을 기울이시는지 이보다 더 구체적으로 상상할 수 있겠는가? 이어지는 밤에 예수께서는 물 위를 걸으셨다. 이 두 표징은 그분이 어째서 모든 요소들 위에 주님이신지를 지적한다. 또 두 표징의 결론은 생명의 빵에 관한 담화와 함께 예수와 생명의 직접적인 관계를 지적한다(요한 6,22-71).

 

태생 소경의 치유(요한 9,1-12)는 예수의 다른 말씀, “나는 세상의 빛이다.”(8,12)를 조명한다. 따라서 마지막에 묘사되어 있는 라자로의 부활은 예수께서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11,25)고 말씀하실 수 있다는 것을 효과적으로 보게 해준다. 소경은 예수 앞에 존경하는 마음으로 꿇어 엎드렸고(9,38), 라자로의 부활 뒤에는 많은 유다인들이 그분을 믿게 되었다(11,45), 이러한 일곱 표징을 바탕으로 하여 네 번째 복음서는 예수께서 생명을 능가하는 힘을 지니셨고, 믿음을 통하여 그분이 전해 주시는 생명을 얻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L’uomo moderno di fronte alla Bibbia에서 박래창 옮김)

 

[경향잡지, 1994년 7월호, 베난시우스 더 레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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