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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구약] 구약에서 신약으로 가는 길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09-07-03 조회수2,535 추천수0

[성서의 세계 - 구약] 구약에서 신약으로 가는 길

 

 

이스라엘의 상승

 

구약성서를 제대로 감상하고 음미할 줄 아는 독자는 그리 많지 않다. 대부분 독자는 구약성서에서 상당한 어려움을 만나고 다음에는 간신히 이해하게 된다. 왜냐하면 구약의 기록들은 신약의 기록들과 함께 놓여 있기 때문이다.

 

하느님은 많은 사람들에게, 구약의 위협적인 계명의 하느님, 재앙, 복수 그리고 죽음의 하느님인 반면에, 신약은 하느님을 자비롭고 사랑 가득하신 분으로 제시한다. 더욱이 구약은 많은 사람들이 우상숭배와 미신 예식, 이른바 성전(聖戰)으로 인한 국가들의 멸망, 냉혹한 복수, 이혼과 일부다처, 불가능한 법적 시효 그리고 희망 없는 고통의 시기로 인식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은 그러한 전망 속에서 어떻게 구약이 예수 그리스도 시대에 대한 준비기라 불릴 수 있는지 당혹스럽게 자문한다. 어쩌면 부정적인 준비기인가? 어떻게 옛집의 붕괴가 같은 장소에 솟아날 새집을 짓기 위한 준비인가? 오늘날의 회의적인 한 해석학자는 구약에서 성취된 악을 폭탄이 폭발할 때 미치는 영향에 비교하였다. 구약의 깊은 구멍은 신약의 건물에 기초를 주기 위한 공간을 창조했다는 것이다. 성취된 분명한 악은 마치 새로운 어떤 것에 대한 파괴적인 초대와도 같았다.

 

이들의 해석은 수차례 예리하게 반복되는, 세기에 걸쳐 이어지는 하나의 교리, 즉 같은 유일하신 하느님이 구약과 신약의 저자라는 것에 이끌린다. 두 경우 모두 같은 하느님이 일련의 기록들의 주님이시다. 따라서 믿는 이는 여러 기록을 통하여 흐르는 중요한 사고를 찾고, 숱한 인간적 나약함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께 헌정되고 인도되는 상승(上昇) 노선을 찾는다.

 

이 상승하는 길의 시작은 하느님께서 특별한 방식으로 인간을 이끄시면서, 즉 아브라함을 부르심으로써 개입하신 최초의 명료한 순간에서 찾아야 한다. 아브라함은 어느 모로 보나 유목민이었다. 떠도는 모든 목자 가정처럼, 그의 “씨족”은 오로지 전쟁과 복수만이 있는 잔인한 광야의 법률로 지탱할 수 있었다. 그러한 분위기에서 여성은 하나의 종보다 더 나을 것이 없었고, 일부 다처는 자연스럽고 피할 수 없는 현상이었다.

 

전능하신 하느님께선 아브라함에게, 말하자면 즉각적으로 풍부한 계시를 전달하기가 불가능하다고 판단하셨다. 그분은 신비로운 계획을 통하여, 유랑하는 부족에게 닫혀 있던 영(靈)을 열고 그들이 더 높은 가치에 접근할 수 있도록 하시는 데 18세기가 걸리셨다. 예컨대 우상을 숭배하는 당시 분위기에서 하느님의 삼위 일체에 대한 계시는 쉽게 다신론적으로 해석될 수 있는 반면에, 선택된 민족은 확고한 일신론으로 교육되어야만 했다. 오로지 그러한 준비가 있은 뒤에야 하느님의 아들은 이스라엘에 자신을 드러내실 수 있었다.

 

광야에 고립된 민족의 편협한 배타주의를 깨부수는 것은 필수적이었다. 여러 민족들과 접촉하는 것은 이스라엘에게 보편적 사고 방식을 가르쳤고, 이러한 접촉을 통해 모든 사람들에 대한 한 분이신 아버지의 사랑이라는 교리를 다른 민족들에게 접목시키기도 하였다.

 

결혼에 대한 평가 절하는 하느님께서 뜻하셨던 높이로 차츰차츰 고양(高揚)되어야 했다. 설제로, 다른 모든 교리보다도 그리스도교적인 결혼에 대한 이상은 시간을 요했다. 첫 세기에, 특히 솔로몬의 영광스러운 시기에 일부 일처제 결혼에 대한 이상은 파멸할 것 같았으나, 호세아에서 말라기에 이르는 예언자들의 준비는 이 민족에게 이상을 상당히 활발하고 명료하게 제시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오신 순간에 일부 일처제 결혼은 모두에게 유일한 규범으로 받아들여졌다. 따라서 복음의 새로운 교리는 단 하나의 요청, 즉 결혼의 해소 불가능성 선언을 알게 될 것이다.

 

우리가 만일 이스라엘 역사를 즉석 사진으로 찍을 수 있다면, 아브라함에서 그리스도까지의 중간 시기 - 기원전 900년경 - 에 이스라엘의 정신 문화가 상당히 크게 발전하였음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 시기에 이스라엘 민족은 아브라함의 유목 환경을 훨씬 넘어서는 도약을 하게 된다. 그리고 두 번째 시기 - 기원전 450년경 - 에 대해서도 그런 사진을 찍을 수 있다면, 훨씬 더 분명하고 동시에 훨씬 더 순수한 발전을 확인하게 될 것이다. 그런데 이민족이 바빌론 유배에서 돌아온 것은 거의 100년 만이었다. 그 정화 시기에 이 민족은 사고와 실천에 있어서 하느님과 훨씬 더 가까워졌다. 이 시기에는 그리스도를 향한 상승, 그 다양한 무대에서 오로지 인간의 업적만으로는 설명될 수 없는 크나큰 진전을 이루었다. 그것은 하느님에 의해 작용되고 이끌리는 상승이며, 이 상승 노선에서 하느님께서 친히 위대한 업적을 드러내시는 상승이다. (L’uomo moderno di fronte alla Bibbia에서 박래창 옮김)

 

* 베난시우스 더 레이유 신부님의 “성서 앞에 선 현대인들” 구약 편이 이번 달로 끝을 맺고, 새해부터는 신약 편이 이어집니다. 좋은 우리 글로 옮겨 주신 박래창 님과 애독해 주신 독자님들께 인사 드리며 새해에도 관심과 격려를 기다립니다.

 

[경향잡지, 1991년 12월호, 베난시우스 더 레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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