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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구약] 메시아를 기다리는 예언자들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09-07-03 조회수2,605 추천수0

[성서의 세계 - 구약] 메시아를 기다리는 예언자들

 

 

예언 메시지의 발전

 

이스라엘에 최초의 예언자가 출현하여 마지막 예언서가 출간되는 사이에 종교적으로 선택된 민족에게는 많은 변화가 있었다. 우리는, 시대를 거치면서 솔로몬의 성전으로 그리고 유배 뒤에는 제2의 성전으로 대체된 성궤 위에 쳐 있는 장막의 천처럼 오로지 외적인 사실들, 즉 전적으로 예루살렘에 집중된 봉헌과 순례의 장소들만을 떠올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가 그들의 업적을 단지 외적인 일만으로 제한한다면 모든 예언자가 항의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 모두는 종교의 내적인 예식, 영적인 확신 그리고 그들에게 예언 사명을 주신 볼 수 없는 분의 법률을 위해서 끊임없이 싸웠기 때문이다. 그들은 시나이산에서 돌판에 새겨진 하느님의 계명을 사람들의 마음속에 뚜렷하고도 깊게 새겨 주고자 하였고, 종교의 참된 실현을 위해 살고 일했으며, 바로 참된 이스라엘의 건설자들로 불리었다.

 

우리가 만일 어떤 일이 예언자들의 업적으로 효력을 내게 되었는지 조사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외적인 옷을 통해서 그들이 전한 메시지의 내용과 교리의 핵심을 꿰뚫어보려고 애써야 한다. 그러므로 세기를 거쳐 오면서 결정적인 요소들이 마침내 위대하고 조화 있는 종합을 이룰 만큼 어떻게 성장해 왔는지, 겨우 암시된 일이 어떻게 나중에는 분명하게 작성되고 여러 세기가 지난 뒤 여전히 정확하게 기록되고 수호되었는지 확인하는 것은 값진 발견이다.

 

더욱 눈에 띄는 논점 가운데 하나는 참된 하느님에 관한 교리다. 시나이산 위에서 하느님의 목소리는 번갯불과 천둥의 위력으로 다시 울려 왔다. “너희 하느님은 나 야훼다 …… 너희는 내 앞에서 다른 신을 모시지 못한다”(출애 20,2-3). 우상 숭배를 금하는 것은 자연스런 일이었으나, 금지하는 방법은 몹시 원시적인 형식으로 주어졌다. “나 야훼 너희의 하느님은 질투하는 신이다”(출애 20,5).

 

이스라엘이 가나안의 이교도 땅에 정착했을 때, 이스라엘 민족은 그 땅의 신들과 접촉했고 야훼 곁에서 그들을 경배하는 일에 매력을 느꼈다. 사무엘과 우리가 그 이름을 알지 못하는 다른 예언자들은 이러한 우상 숭배에 대하여 그침 없는 전쟁을 선포하였다. 그리고 또한 시나이 사건으로부터 350년이 지난 뒤 아합 왕이 여러 형태의 바알 숭배를 허용했을 때, 매우 열정있는 엘리야는 새로운 논거 없이 개입했다. 이미 그의 이름은 야훼는 하느님이시라는 오래된 진리의 선언이었고, 그의 출현은 이 공포에 휩싸인 투쟁의 외침, 즉 우상숭배는 용서없이 뿌리째 뽑혀야 한다는 것을 드러냈다. 이러한 상황에서 백성들은 계속 야훼를 숭배했으나 애석하게도 여러 동기에서 다른 신들도 여전히 숭배하였다.

 

수세기에 걸친 우상 숭배에 대한 형벌로 백성은 600년경에 유배지로 끌려갔고, 바빌론에서는 이교도들 가운데서 우상의 대열뿐만 아니라 우상 숭배자들의 맹목과 숭배받는 우상들의 무력함을 어쩔 수 없이 보게 되었다. 그러자 ‘귀환의 예언자’는 확신을 주는 논거로 우상이 아무것도 아니며 아무것도 될 수 없다는 것을 드러냈다. 우상이 아무것도 아닌 것은 사람들이 만들어 낸 것이기 때문이다. 우상들보다 훨씬 더 높은 곳에 유일하신 하느님, 미래를 선포하실 수 있고 모든 것 전부를 가져오며 우주를 창조하신 하느님께서 계시다. 따라서 하느님만이 계시고 다른 신은 존재할 수 없다는 공식을 따라라. 6세기 뒤에 일신론은 입증되었다. 그러한 교리가 이미 이스라엘 민족에게 잘 주입되어 있었다는 입증은 이 민족이 유배에서 완전하게 일신론자가 되어 돌아왔고 더 이상 우상 숭배에 오염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다른 관념들도 예언자들의 활동을 통하여 같은 방식으로 발전되었다. 예를 들면 처음에 이스라엘은 제한적이고 배타주의적인 방식으로 생각했고, 선택된 민족으로 하느님의 유일한 백성이라고 믿었다. 800년경에 “세상 많은 민족들 가운데서 내가 너희만을 골라냈다.”(아모 3,2)는 하느님의 말씀은 이 민족의 귀에는 이미 익숙한 것이었다. 600년경에 예레미야는 귀를 기울이려 하지 않고 회개하려 하지 않는 이스라엘의 적들을 멸망시켜 달라고 여전히 하느님께 기도할 수 있었다. 반면에 유배지에서 이 민족의 눈은 새로운 고려(考慮)에 눈뜨게 되었다. 즉 이스라엘은 이교도들도 선(善)에 개방되어 있으며 그들 역시 한 분이신 창조주의 자녀들이라는 것을 발견했다. 따라서 귀환의 예언자는 이스라엘로부터 하나의 빛이 나와 온 민족을 비추리라고 말한다. 다시 말해 서서히 배타주의를 극복한다. 요나서는 하느님께서 니느웨도 사랑하신다는 것, 보편주의를 더욱더 시인한다는 것을 드러낸다.

 

그 뒤 예언 메시지는 더욱 분명하고 더욱 훌륭하게 메시아 사상, 즉 세상의 구세주이신 메시아에 대한 기대와 교리를 증진시키고 발전시켰다.

 

 

메시아 기대 사상의 발전

 

모든 사람에게는 개선에 대한 바람이 있다. 그것은 더 나은 임무, 봉급의 인상이나 더욱 편리한 거주에 대한 문제라고 할 수 있으나, 그것은 언제나 개선으로 남는다. 그리고 사람은 무엇보다도 내적으로, 정신의 문화를 통하여 자기 자신을 고치고 완성시키려고 애쓴다.

 

고귀하고 중대한 지위에 올랐을 때에도 사람은 더 훌륭하고 높은 어떤 것에 대한 바람을 갖는다. 그런데 몹시 불행한 시기, 예컨대 전쟁 시기에는 개인뿐만 아니라 전국민이 해방과 구원의 크나큰 바람을 갖고 찾는다는 것은 분명 한 일이다.

 

그런데 이러한 바람이 지극히 자연스럽고 널리 인간적인 일이라면, 고대 이스라엘에서는, 특히 구약의 성서들 안에서는 더욱 독특한 어떤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즉 거기서는 이상(理想)에 대한 바람이 하나의 기대와 확신으로 나타난다. 우리는 이것을 구약의 메시아 기대라고 부른다. 그것으로 이스라엘은 고대의 모든 민족 가운데 진정한 예외이며, 그것은 이스라엘의 불가사의라 할 수 있겠다. 우리 믿는 이들은 이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을 하느님의 계시와 관련시킨다.

 

그러한 기다림에 대한 명료하고 정확한 묘사를 우리는 예언자들의 설교와 저술에서 발견한다. 그들은 하느님의 사절로서 무엇보다도 크나큰 역경의 시기에 메시아 기대 사상을 분발시켰고 생생하게 지속시켰다. 그들은 원래의 자료를 깊고 생생한 의미에서 발전시켰으며, 거기서 이스라엘 종교의 중요한 기둥 가운데 하나를 세웠다.

 

메시아 기대 사상의 이러한 발전은 또한 성서의 많은 책들 안에서 분명하게 그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처음에는 단지 불명료하고 혼란스럽게 선포된 구원에 대한 기대, 즉 장차 있을 해방에 대한 확신이 있었다고 생각할만한 동기들이 있다. 그러나 전개될 방식은 전적으로 감추어져 있었다. 이 포괄적인 선포는, 성조들의 이야기에 따르면, 하느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에게 하신 말씀 안에 포함되어 있다. 그 말씀 안에는 아브라함의 번영에서 기원하는 보편적인 축복에 대한 문제만이 나타난다.

 

이스라엘이 약속된 땅으로 들어감으로써, 기대되던 기원은 결정된 어떤 인물의 출현과 어느 정도 연결된다. 그때부터 단지 보편적인 구원만이 아니라, 비록 그 시대에 메시아 기대에 대해 엄밀한 개념을 갖기가 쉽지는 않았지만, 인격적인 구세주에 대한 기다림이 시작된다. 그에 대해서 다루는 문헌들은 아마도 수세기 동안 구두로만 전달되었다가 그 뒤 몹시 늦은 시대에 기록으로 고정되었을 것이다. 나아가 후대의 자료들이 고대의 정식에 삽입되었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 아니다.

 

마침내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정착했을 때, 메시아 기대에 대한 자료들은 더욱 발전된 역사 편찬 덕분에 훨씬 더 분명하게 강조될 수 있었다. 그래서 이스라엘에 왕이 출현한 뒤로 구원에 대한 기다림은 형상화되었고, 직접적으로 왕의 형상과 연결되었다는 것이 확인된다. 이 시대부터 구세주는 손에 왕홀을 들고 왕좌에 앉아 있는 것으로 묘사되었다.

 

이미 다윗이 살아 있을 때 예언자 나단은 구세주가 다윗의 가문에서 나올 것이며, 결정적으로 다윗의 아들이 메시아 왕국을 다스리게 될 것이라고 선포했다. 그러므로 이러한 예언 이후 다윗의 형상은 모든 메시아를 묘사하는 이상이 된다. 메시아의 왕국은, 다윗 시대에 이스라엘이 강했듯이, 강할 것이다. 시온은 그 새로운 왕국의 중심이 될 것이다. 다윗 시대처럼, 예루살렘으로부터 국경을 넘어 크게 신장될 권능이 나올 것이며, 백성들은 이미 다윗 왕을 위해 발판이 되었던 것처럼 새로운 왕의 발판이 되어 시중들 것이다.

 

다윗의 날들에 대한 이상적인 상상은 여러 세기에 걸쳐 메시아적 예언을 지배했다. 대예언자들은 메시아를 이새의 아들, 다윗의 후손 혹은 미래의 다윗이라고 말했다. 시편은 풍부한 상상력으로 이 새로운 다윗의 왕국, 특별한 능력과 영화와 평화를 가진 왕국을 노래한다.

 

그러나 바빌론 유배 동안에 다윗의 거처는 폐허가 되었고, 백성은 죄가 있다고 느꼈다. 그들은 더 이상 세상의 왕국을 꿈꾸지 않았고 단지 바람만을 가졌다. 자신들을 해방시켜 줄 수 있고 하느님과 화해시켜 줄 수 있는 누군가가 오리라는 바람이었다. 수세기 동안 기다리던 구세주는 그의 백성을 위해 용서를 청해 줄 수 없다면 참된 구세주가 아닐 것이다. 그러자 ‘귀환의 예언자’는 메시아 왕에 대한 이전의 이상을 변형시켰다. 일년에 한 번 그 백성을 하느님과 화해시켜 주었던 바빌론 왕의 예를 따라, 새로운 이스라엘의 왕도 그 백성을 고난을 통하여 하느님과 화해시켜 줄 것이다. 눈 앞에 이러한 이상을 그리면서 예언자는 하느님의 ‘고통받는 종’의 구절들을 기록했다. 즉 자신의 수난과 피의 대가로 백성을 구원해 줄 새로운 왕에 대해 기록했다.

 

마음속에 이러한 기대를 갖고 이스라엘은 유배지에서 다윗의 도시로 돌아왔다. 거기서 이스라엘은 예언자들의 약속대로 자기들의 왕답고 고난받는 구세주를 고뇌 속에 기다렸다. (L’uomo moderno di fronte alla Bibbia에서 박래창 옮김)

 

[경향잡지, 1991년 10월호, 베난시우스 더 레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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