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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구약] 너무나도 인간적인 책, 사무엘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09-07-03 조회수2,543 추천수0

[성서의 세계 - 구약] 너무나도 인간적인 책, 사무엘

 

 

하느님의 선택에 있어서의 극적인 대조

 

사무엘서에 대해서 말하거나 설교하는 것을 들을 때 다음과 같은 반성은 우리에게 자연스럽고 공통된 것이다. “이것은 성전에서 봉사하고 한밤중에 사무엘아, 사무엘아 하고 자기 이름을 부르는 것을 들은 저 소년의 책이다!” 침대에서 무릎을 꿇고 하느님의 목소리에 귀기울이는 어린 사무엘을 누구나 눈앞에 회상해 보게 된다.

 

사무엘의 성소에 대한 이러한 묘사로부터 두 권의 책은 그 이름을 받게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안에서는 그에 대해서만 다루는 것이 아니라 다른 많은 일들에 대해서 다룬다. 물론 사무엘의 선택은 폭 넓게 다루어진다. 그러나 저자가 훨씬 더 큰 배려를 갖고 묘사하고 있는 다윗 왕에 대한 하느님의 특별한 편애도 다루어지고 있다.

 

확실히 성서 전체는 하느님의 편애에 대한 책이고 모두가 선택된 백성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그리고 거의 도처에서 그분이 어떻게 당신 백성의인도자들을 선택하셨고 돌보셨는지를 드러내고 있다. 그러나 사무엘서에서는 성서의 다른 모든 책에서보다 더 하느님의 편애하시는 업적이 발견된다. 모든 선택은 여기서 지정되고 나아가 거의 특별한 배려로 채색된다. 그리고 모든 새로운 선택에는 하나의 부인(否認)이 선행되고, 둘 다 예리한 대조로 묘사되기 때문에, 하느님의 행위는 극적인 영역에서 예술적으로 제시된다. 그것은 선택과 부인의 극적인 반복이다.

 

사무엘의 성소는 실로의 엘리 사제 가문의 단죄와 연결된다. “야훼여, 말씀하십시오. 당신 종이 듣고 있습니다.”는 말 뒤에 사무엘은 겁에 질린 채 엘리에 대한 부인을 듣는다. “내가 엘리와 그 집안을 두고 말한 일들이 처음부터 끝까지 이루어지리라”(1사무 3,12). 위협은 앞에서 더 강한 말로 표현된 바 있다. “내가 일찍이 네 집과 네 가문이 영원히 나를 섬기리라고 했지만 이제 분명히 말해 두거니와 나는 그 약속을 철회한다. 나를 존대하는 자는 소중히 여겨 주겠지만, 나를 멸시하는 자는 천대하리라 …… 나는 충성스러운 사제를 세워 그로 하여금 내 마음 내 뜻을 그대로 이루게 하리라. 그의 가문을 일으켜……”(1사무 2,30-35).

 

그러나 사무엘 역시 그의 영광이 절정에 이르고, 모든 이로부터 영웅으로 환호를 받고, 손에 칼을 든 판관으로 그리고 열정적이고 신적인 말을 지닌 하느님의 예언자로 환호를 받게 될 때 그 생애에서 부인을 겪게 될 것이다. “모든 이스라엘 장로들이 한곳에 모여 라마로 사무엘을 찾아가 건의하였다. ‘당신은 이제 늙고 아드님들은 당신의 길을 따르지 않으니 다른 모든 나라처럼 왕을 세워 우리를 다스리게 해주십시오’”(1사무 8,4-5).

 

하느님 친히 이렇게 말하면서 그를 위로하러 오실 것이다. “그들은 너를 배척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배척하는 것이다.” 그러나 마찬가지로 그는, 위대한 사무엘은 그늘 속으로 사라지고, 무대에는 새로이 편애받는 자, 사울 왕이 나타난다.

 

그리고 바로 늙은 사무엘에게 사울을 인도하는 일이 맡겨진다. 사무엘은 사울의 머리에 기름 병을 붓고 외친다. “야훼께서 그대에게 기름을 부어 당신의 백성 이스라엘의 수령으로 성별해 세우시는 것이오”(1사무 10,1). 그러므로 그는 사울을 모여 있는 백성에게 추천한다. “야훼께서 뽑으신 이를 보아라. 이 나라에는 이만한 인물이 없다”(1사무 10,24).

 

그러나 얼마 안 있어, 바로 사울이 첫 번째 승리를 거두고 영예에 오를 때 등이 굽고 노쇠한 사무엘은 그에게 부인을 선포하기 위해 되돌아온다. “그대는 어리석은 짓을 하였소. 어찌하여 그대의 하느님 야훼께서 내리신 분부를 지키지 않았소? 지키기만 했더라면 야훼께서 이스라엘을 다스릴 그대의 왕조를 길이길이 세워 주실 터인데, 이제 그대의 대는 더 이어가지 못할 것이오 그대가 야훼의 분부를 지키지 않았으니, 야훼께서는 당신의 마음에 드는 사람을 다시 찾아 당신의 백성을 다스릴 수령으로 세우실 것이오”(1사무 13, 13-14). 또다시 가문에 대한 부인 속에 밖에서 다른 가문이 오게 된다. 새로운 왕가가 빈자리를 차지할 것이다.

 

이러한 마지막 선포로 저자는 하느님의 선택의 절정, 즉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사람, 모든 미래 세대의 우상, 다윗에 도달했다. 저자는 엘리 사제 집안의 축복과 사울의 선택에 대해서 말할 때 자신의 눈앞에 이미 다윗을 그리고 있었다. “내가 일찍이 사울에게서 내 사랑을 거두었지만 그에게서도 그처럼 내 사랑을 거두지는 않으리라. 네 왕조, 네 나라는 내 앞에서 길이 뻗어 나갈 것이며 네 왕위는 영원히 흔들리지 않으리라”(2사무 7,15 이하).

 

사무엘서는 그 극적인 대조로 몹시 인간적인 책이다. 그 부인과 선택으로, 그리고 무엇보다 그 영원한 편애로 이해할 수 없을 정도의 신적인 책이다. 하느님의 은총의 책이다.

 

 

도식화된 역사

 

다윗 이후 선택된 민족을 다스렸던 많은 왕들은 두 권의 열왕기에 예외 없이 모두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성서 저자는 솔로몬의 모습에 관해서 오래도록 머무는 반면에 그의 뒤를 이어 예루살렘에 자리잡았던 열아홉 명의 왕에 대해서는, 여로보암을 선두로 북왕조의 지파를 다스렸던 열아홉 명의 왕에 대해서와 마찬가지로 신속히 다룬다. 이로써 저자가 도식화하려 했다는 것이 드러난다. 이 노작(勞作)은 역사적인 사건을 거의 수학적인 도식으로 우리에게 제시하려는 의도가 그에게 있었다고 말할 수 있는 확인이 된다.

 

반복되는 도식은 대체로 연대기적인 지적, 도덕적인 평가, 출처를 밝힘 그리고 왕의 죽음과 그 후계자의 이름에 대한 언급으로 요약된다. 드물게만 어머니의 이름과 무덤의 위치가 언급된다. 이러한 도식의 예는 거의 모든 페이지에서 발견된다.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 왕 십팔년에 아비얌이 유다 왕위에 올랐다. 그가 예루살렘에서 다스린 기간은 삼 년밖에 되지 않았다. 왕의 어머니는 압살롬의 딸인 마아가였다. 그런데 왕은 자기의 부친을 본받아 모든 일에 같은 죄를 지었다. 왕의 선조 다윗은 야훼 하느님께 신실하였으나 아비얌 왕은 전혀 신실하지 못하였다……. 아비얌 왕의 나머지 행적과 치적은 유다 왕조 실록에 기록되어 있다. 아비얌과 여로보암 사이에도 전쟁이 있었다. 아비얌이 열조들과 함께 잠이 들어 다윗성에 매장되자 그의 아들 아사가 왕위를 계승하였다”(1열왕 15,1-3.7-8).

 

이 불변의 도식을 따라서 북왕조든 남왕조든 열아홉 명의 왕이 기록되어 있다(이스라엘 왕국의 분열은 솔로몬의 죽음 이후에 이루어졌다}. 그러한 틀에 박힌 기록은 아무런 변화도 없이 동일한 틀에 넣어져 벽에 죽 걸려 있는 초상화를 보는 것 같은 인상을 준다. 다행스럽게도 액자를 짜맞추는 사람은 여러 차례에 걸쳐 틀의 크기를 확대하였다. 왜냐하면 초상화든 “주제”든 증간 크기를 넘어섰기 때문이다. 어떤 왕이 중대한 위반 때문에 특별한 인상을 풍겼을 때 저자는 하느님으로부터의 질책과 처벌을 암시한다. 반면에 어떤 왕이 유덕한 삶을 통해 눈에 띄게 되었다면 저자는 커다란 찬사를 보내고 하느님께서 눈으로 볼 수 있게 선을 보상하신다는 것을 독자들에게 환기시킨다.

 

각각의 왕에 대한 도덕적인 판단에서도, 비록 다른 방식이긴 하지만 똑같이 분명하게, 도식에 대한 저자의 선호가 새롭게 드러난다. 모든 왕들은 같은 시각으로 판단되고 같은 방식으로 다루어진다. 예루살렘에서의 의식과 제단은 도덕적인 행동 규범의 척도이다. 왕이 예루살렘의 성전을 의식의 유일한 중심지로 삼을 때 그는 이상적이고 탁월한 종교적인 왕이다. 반면에 성전을 무시하고 예루살렘 주변에 있는 산당(山堂)을 성소(聖所)로 공식화할 때 그는 죄인이고 하느님께서는 그를 돌이킬 수 없게 벌하실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더욱 나쁜 것은 북왕조의 왕들이 행한 것이다. 그들은 백성들을 예루살렘으로부터 벌어지게 하기 위하여 암송아지 숭배를 시작했다. 저자는 이를 예루살렘 성전과 제단에 대한 범죄로 간주한다.

 

그렇기 때문에 베델과 단에 제단을 설립한 북왕조의 첫 번째 왕 여로보암에 대한 저자의 판단은 가장 가혹한 것이다. “여로보암 왕가는 이런 일로 죄를 얻어 결국 지상에서 자취도 없이 사라지게 된 것이다”(1열왕13,34). 오므리 왕가에 대한 판결 역사 완강하다. “오므리는 어떤 선왕들보다 훨씬 더 야훼의 눈에 거슬리는 일을 하였다. 그는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이 걸었던 길을 그대로 밟아 같은 죄를 지었고, 그리하여 이스라엘 백성까지 죄에 빠뜨려 우상을 섬기게 하였으므로 야훼를 크게 노하시게 하였다”(1열왕 16,25-26). 사마리아의 한 왕이 할 수 있었던 유일한 선은 저주받은 그의 선조를 제거한 일이었다. “야훼께서 예후에게 말씀하였다. ‘너는 내 마음에 들도록 일을 잘하였다. 나의 뜻대로 아합 가문을 잘 처치하였다. 그러므로 네 후손이 사대에 이르기까지 이스라엘 왕위에 오르리라’”(2열왕 10,30).

 

어떤 착한 왕에게 보낼 수 있었던 가장 큰 찬사는 이러하다. “그는 그의 선조 다윗이 그러하였던 것같이 야훼 보시기에 곧바른 일을 하였다. 그는 산당들을 철거하고 석상들을 부수고 아세라 목상들을 찍어 버렸다…… 그는 야훼를 배반하지 아니하고 충성을 다하여 야훼께서 모세에게 주신 계명들을 준수하였다. 야훼께서는 그와 함께 계시며 그가 하는 모든 일을 이루어주셨다”(2열왕 18,3-7).

 

도식적이고 공평한 열왕기의 저자는 따라서 모든 일을 직선상에서 계산하고자 한다는 인상을 준다. 그에게는 모든 역사가 수학의 단순한 문제인 것처럼 보인다. 그에게는 참된 하느님께 대한 합법적인 의식이 분모(分母)가 된다. 비록 하느님의 경륜이 그렇듯 단순하지는 않다 하더라도, 그만큼 의식을 염려하는 이 저자는 하느님의 계획의 상당한 부분, 그분의 섭리의 신비 안에서 우위를 차지하는 규범을 우리에게 설명하는 데 성공하고 있다. (L’uomo moderno di fronte alla Bibbia에서 박래창 옮김)

 

[경향잡지, 1991년 4월호, 베난시우스 더 레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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