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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구약] 소예언서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09-07-03 조회수3,567 추천수0

 

 

[성서의 세계 - 구약] 소예언서 : 준엄한 정의와 무한한 사랑

 

 

“소예언서”라는 이름은 아우구스띠노 성인이 처음으로 사용한 말이다. 그것은 이들 열두 사람의 예언서가 지닌 중요성이 대수롭지 않아서가 아니라, 다만 이사야서나 예레미야서 같은 다른 대예언서들보다 그 길이가 짧아서 붙여진 이름이다 예언자들의 시대가 지난 다음, 서사들이 기원전 3세기경에 그 모든 예언서들을 하나의 두루마리나 한 권의 책으로 모아 묶었을 것이며, 아마 그 연대를 염두에 두고 정리하였을 것이다. 이렇게 해서 유다인들은 이 소예언서들을 “열두 사람의 책”이라고 불렀다. 소예언서들은 거의 500년에 가까운 예언자 시대 전체에 걸쳐 이루어진 것이다.

 

호세아, 아모스, 미가는 이사야 예언자와 같이 기원전 8세기 후반에 살던 사람들이었다. 그때는 아시리아인들이 원정 길에 나서 북부 이스라엘 왕국을 무너뜨리고 그 수도 사마리아를 파괴(기원전 722년)하였던 시절이었다. 나훔, 하바꾹, 스바니야는 기원전 7세기 후반의 예레미야 시대에 살았다. 그 시대는 아시리아가 신흥 바빌로니아 제국에 밀려나는 단계였으며, 그 후 바빌로니아의 느부갓네살은 유다 왕국을 정복하고 예루살렘을 함락시켰다(기원전 586년). 하깨, 즈가리야, 말라기는 바빌로니아 유배 이후 기원전 6세기말과 5세기초에 예언을 하였다. 요엘과 오바디야 예언자의 생애와 시대에 대해서는 별로 알려진 것이 없다.

 

이러한 시대 구분은 단지 기술적인 것일 뿐, 이 열두 예언서는 하나의 내적 통일성을 이루고 있다. 주님의 복음을 선포하던 열두 사도를 생각케 하는 이들 열두 예언자 또한 각기 그 나름대로 “주님의 날”이 도래하고 있음을 선포하였다. 강대한 이교 제국의 세력이 하느님의 영광을 철저하게 퇴색시켜 버린 것 같은 그 시대에 예언자들은 주님의 날을 선포한 것이다. 선택받은 민족에게 있어서 500년의 예언자 시대는 끊임없이 이어지는 재앙과 패배의 시대였다. 유다인들은 정치적 독립을 잃어버리고 조국을 빼앗기고 이교 세계의 “사막”으로 쫓겨났다. 인간적인 폭력이 난무하는 역사 속에서 파멸에 허덕이던 이 시대에, 열두 예언자들은 당신 백성에 대한 하느님 자비의 지붕을 받쳐 올리는 기둥과 같았다.

 

예언자가 미래의 일올 미리 알려 주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예언자란 그 이름은 이들에게 결코 어울리지 않는 것이다. 히브리어로 “예언자”(nabi)는 인간적인 꿈으로 더럽혀지지 않은 명경지수의 순수한 하느님 말씀이 솟아 나오는 샘과 같은 사람을 일컫는다. 하느님의 가슴 속 깊은 곳에서 솟아나오는 예언자의 말은 일상과 시간의 껍질을 파고 들어가 살아 계시는 하느님의 영원한 실재에 귀를 기울이는 영혼과 만나는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죄인들을 심판하시고 회개하는 사람들을 용서해 주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언자들의 메시지에 귀를 기울이며, 날이면 날마다 우리들의 귓전을 울리는 저 경고, “그분 목소리를 오늘 듣게 되거든, 너희 마음을 무디게 가지지 말라.”(시편 95,7-8)는 경고를 가슴 깊이 새겨야 한다.

 

불가따 성서의 순서에 따르자면, 소예언서는 호세아 예언서로 시작하여, 요엘, 아모스, 오바디야, 요나의 예언서로 이어진다.(공동 번역 성서의 순서도 마찬가지다.) 그 메시지의 내용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아모스와 호세아 예언서의 내용이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호세아보다 앞서 아모스는 물질적인 번영의 시대를 구가하던 북부 왕국에서 예언을 하였으며, 호세아는 이스라엘의 몰락을 증언하였다. 아모스는 “양떼를 몰고 다니다가”(7,15) 하느님께 붙잡힌 사람이다. 그는 사제나 직업적인 예언자가 아니라 가난하고 소외당하던 사람들 가운데 하나, 양치는 농민이었다. 아모스는 자기 내면의 절대적인 요구에 따라 행동하였다. “주 야훼께서 말씀하시는데, 그 말씀 전하지 않을 자 있겠느냐?”(3,8). 그는 이스라엘 왕국으로 가서 곧바로 재앙이 닥쳐 온다고 외쳤다. “짐꾼”이라는 그 이름에 걸맞게, 그는 하느님의 준엄한 정의를 외쳐야 할 무거운 짐을 지고 있었다. 민족의 지도자들인 사제들과 귀족들과 왕에게 파멸의 무게가 실린 그 준엄한 정의를 그대로 선포하여야만 했다. 엄청난 용기를 내서, 사회의 죄악상을 고발하여야만 했다. 가난한 사람들을 짓누르는 억압에 대하여 그는 하느님의 심판을 전한다.

 

“그 쌓이고 쌓인 죄 때문에 나는 이스라엘을 벌하고야 말리라. 죄없는 사람을 빚돈에 종으로 팔아 넘기고, 미투리 한 켤레 값에 가난한 사람을 팔아 넘긴 죄 때문이다. 너희는 힘없는 자의 머리를 땅에다 짓이기고 가뜩이나 기를 못 펴는 사람을 길에서 밀쳐낸다.”(2,6-7). 소위 지도 계층과 그 여편네들의 호색 방탕을 그는 이렇게 질책한다. “바산 풀밭의 암소들아, 이 말을 들어라. 남편을 졸라 술을 가져다 마시며 힘없고 가난한 자를 짓밟는 자들아. 주 야훼께서 당신의 거룩하심을 걸고 맹세하신다. 너희를 갈고리로 끌어 내고 너희 자식들을 작살로 찍어낼 날이 이르렀다. 무너진 성 틈으로 하나씩 끌어 내다 거름더미에 던지리라”(4,1-2; 6,1-7 참조). 정부의 비호 아래 예배를 더럽히는 성소 관리들의 위선에 그는 저주를 퍼붓는다. “베델에 가서 죄나 지어라. 길갈에 가서 실컷 죄나 지어라”(4,4). 이러한 상태에서, 이스라엘은 이미 선택받은 백성으로서의 모든 특권을 상실하고 말았다. “주님의 날”, 민족이 대승리를 경축하리라고 기대하던 그날도 오직 심판의 날이 되고야 말 것이다. “야훼께서 오시는 날, 그날이 밝은 날인 줄 아느냐? 아니다. 그날은 다만 깜깜할 뿐 한 가닥 빛도 없으리라”(5,20). 닥쳐 오는 재난을 피하는 길은 오직 하나밖에 없다. “악을 미워하고 선을 사랑하여라. 성문 앞에서 법을 세워라. 그래야 하느님께서 불쌍히 보아 주시리라”(5,15). “하느님께서 불쌍히 보아 주시리라.”는 말은 곧 신약의 아모스라고 불리는 세례자 요한의 이름이 지니고 있는 뜻이다.

 

아모스가 이스라엘 전역을 두루 다니며 예언 활동을 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그가 예고하였던 재앙이 밀어 닥쳤다. 여로보암 2세가 죽은 다음 아시리아가 이스라엘을 침공하여 수도 사마리아를 파괴하고, 그 주민들을 모두 추방해 버렸다. 글자 그대로, 이스라엘은 이 지구상에서 사라져 버렸다. 자만심에 차 멸망의 구렁텅이로 빠져드는 사람들을 일깨우라고 파견된 아모스는 바로 심판의 나팔 소리였다. “저주받아라! 시온을 믿고 안심하는 자들아”(6,1).

 

북부 왕국 이스라엘의 멸망을 목도하였던 예언자의 이름이 구원이라는 뜻의 호세아였으며 그의 예언이 용서하시는 사랑과 희망의 메시지였다는 것은 의미 심장한 일이다. 분노의 먹구름을 헤치고 하느님의 열렬한 사랑의 마음이 나타난다. 호세아는 하느님을 “위대한 연인”으로 인식하고, 하느님 마음의 비밀을 자기 가슴 속에 있는 사랑의 거울로 비쳐 주고 있다(1-3장). 아내에 대한 사랑과 자식에 대한 사랑은 인간적인 사랑의 꽃이다. 하지만 호세아는 부정한 아내와 음란한 아들에 대한 사랑 때문에 깊은 실의에 빠져 든다. 그러나 호세아의 사랑은 너무나 각별하고 또 절절한 것이었다. 그 사랑은 정부와 놀아난 아내를 다시 감싸 주고 음탕한  아들에 대한 연민으로 불타 오른다. 이러한 개인적인 체험을 통하여, 그는 하느님 마음속에 있는 사랑의 비밀을 감지한다. 영원히 분노하시기에는 그 사랑이 너무나 절절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배신에 대한 고발에 이어, 장엄한 약속이 따라 나온다. “너와 나는 약혼한 사이, 우리 사이는 영원히 변할 수 없다. 나의 약혼 선물은 정의와 공평, 한결같은 사랑과 뜨거운 애정이다. 진실도 나의 약혼 선물이다”(2,21-22).

 

하느님께서는 당신 자식들의 불충에 대한 질책을 이러한 감동적인 고백으로 끝맺으신다. “에브라임아, 내가 어찌 너를 버리겠느냐. 이스라엘아, 내가 어찌 너를 남에게 내어 주겠느냐. 네가 너무 불쌍해서 간장이 녹는구나. 아무리 노여운들 내가 다시 분을 터뜨리겠느냐. 에브라임을 다시 멸하겠느냐. 나는 사람이 아니고 신이다 나는 너희를 멸하러 온 것이 아니다. 나는 거룩한 신으로 너희 가운데 와 있다”(11,8-9). 이 말씀은 구약 성서 안에서 하느님께서 밝혀 주시는 자기 계시의 절정을 이루고 있다. 하느님과 인간의 차이는 권능이나 완전성의 문제가 아니다. 증오와 분노를 이기는 무사무욕의 사랑(agape), 이것이 바로 하느님의 본질이다. “하느님은 사랑이시다.”(1요한 4,8)는 성 요한 사도의 저 유명한 말씀, 바로 그리스도교 계시의 본질을 호세아가 전해 주는 것이다.

 

하느님께서 호세아를 통하여 보여주시는 당신 사랑의 계시는 풍요(바알)의 우상들과 놀아나는 이스라엘의 간통, 정부 지도자들이 조장하는 그러한 배신에 대한 응답이다. 소위 풍요의 신 바알이라는 이름은 폭력적이고도 잔혹한 주인을 뜻한다. 그 신들의 표상은 황소다. 그 신들에 대한 예배는 흔히 사람을 제물로 바치는 것이고, 그 어디에서나 비인간적인 퇴폐가 사랑을 휩쓸어 버린다. 하느님의 영광은 이제 짐승의 모습으로 변하고, 인간은 그 짐승의 노예로 전락하고 마는 것이다. 우리는 아직도 사람이 만들어 낸 황소의 우상 앞에 사람을 잡아 바치고, 거기에 입을 맞추고 있지 않은가(13,2 참조).

 

풍요의 우상 숭배로부터 사람들을 해방시키기 위하여,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서 지상의 모든 권력을 빼앗아 발가벗기시어, 귀양살이의 사막으로 데리고 나가셔서 그 가슴에다 대고 말씀을 하신다. 이러한 체험은 백성들의 가슴 속에서 하느님의 참사랑을 새롭게 일깨워 주어, 백성들은 이제 하느님을 주인(바알)이라 부르지 않고 “낭군”이라고 부르게 될 것이다(2,18 참조). 그리하여 비탄의 골짜기는 희망의 문이 될 것이다(2,17 참조). 그러나 역사의 과정은 이스라엘의 유배가 하느님 백성들에게 새로운 마음을 집어 넣고 하느님의 분노를 사랑으로 바꾸어 놓는 최종적인 “세례”가 아니었음을 보여 주고 있다. 하느님 아버지의 분노를 불타게 하는 인류의 죄악을 물리치시고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수난과 죽음의 골짜기를 건너가시는 예수님 안에서 바로 호세아의 예언이 성취되고 있다.

 

호세아서와 아모스서 사이에 요엘 예언서가 끼여 있다. 요엘이라는 이름은 “야훼는 하느님이시다.”는 뜻이다. 가공할 메뚜기의 침범을 계기로 하여 회개를 촉구하는 절박한 호소에 이어, 요엘의 예언은 만민에게 당신의 영을 부어 주시는 하느님의 보편 통치와 타작 골짜기에서의 심판에 대한 선포에서 그 절정에 이른다. 신약 성서 특히 마태오 복음서와 묵시록의 저술에 상당한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이는 이 요엘서는 우리에게 성령에 대한 예언서로 알려져 있다.

 

오바디야서는 21절로 이루어진 예언서로서 구약 성서 가운데서 가장 짧은 책이다. 그 내용은 야곱의 형 에사오의 후손들인 에돔인들에 대한 예언이다. 이스라엘 민족과 에돔인들은 같은 핏줄을 나눈 형제들이면서도, 이 두 민족은 서로를 증오하였다. 선택받은 민족의 역사는 본질적으로 예언적이다. 그 역사에 연루된 민족들과 국가들은 영신적인 원리들을 표현하고 있다. 에돔인들을 신앙심이 결여된 잔인한 사람들로 증오하는 오바디야서를 교부들은 진리를 어지럽히며 증오의 칼부림을 일삼는 이단들에 대한 예언으로 보기도 하였다. 우리는 현대의 이단자들인 나치스나 파쇼의 독재 또는 공산주의자들의 학정을 보고 에돔에 대한 증오를 체험하고 있다. 참 신앙의 불이 검불 같은 그들을 모조리 불살라 버릴 것이다(18절 참조).

 

죄악에 대한 회개의 촉구에 이어, 참 신앙에 전혀 접해 보지 못하였던 이교도들의 회개를 통하여 희망의 메시지가 전해진다. 요나의 예언은 선택받은 민족만이 아니라 온 세상 모든 민족들을 구원하고자 하시는 하느님의 의지를 보여 주고 있다. 비둘기라는 뜻의 요나라는 이름은 대홍수가 끝난 다음 노아에게 올리브 가지를 물어다 준 비둘기, 그 화해의 사자를 연상하게 한다. 이방인들에 대한 회개의 촉구를 거부하고 도망치다가 고래한테 삼켜져 그 뱃속에서 다시 살아난 이방 요나의 이야기에서, 이스라엘은인들을 위한 빛이 되어야 한다고 깨닫는다. 이방인들과 더불어 이러한 화해를 이루는 길은 바로 “요나의 표징” 안에 제시되어 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완전한 요나의 표정이시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온 세상이 구원을 받았다. [경향잡지, 1989년 9월호, 다마수스 빈첸]

 

 

[성서의 세계 - 구약] 소예언서 : 주님의 날을 기다리며

 

 

미가서는 열두 소예언서의 핵심이다. 예로니모 성인의 이야기에 따르면, 이 예언서가 놓여 있는 자리만이 아니라 그 메시지 자체가 소예언서의 핵심을 이루고 있는 까닭이다. 가난한 농사꾼이었던 미가는 지배 계층의 학정과 불의 그리고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착취를 고발하며, 민족의 두 수도 예루살렘과 사마리아를 통렬하게 비난한다. 이스라엘의 오만에 대한 징벌이 그 처절한 굴욕으로 드러날 것이다. 그러나 그 굴욕은 동시에 구세주 왕이 태어나는 요람이 될 것이다. “그의 핏줄을 더듬으면, 까마득한 영원으로 올라 가는” 구세주가 “유다 부족들 가운데서 보잘것없는 베들레헴”으로부터 태어날 것이다(5,2-3). 착한 목자로서, 그분은 “절름발이들을 모아 오리라. 흩어졌던 것들을 모아들이리라. 그 절름발이들, 비틀거리는 것들을 씨앗으로 남기리라”(4,6-7). 그분은 백성들에게 율법의 핵심 곧 “정의를 실천하는 일, 기꺼이 은덕에 보답하는 일, 조심스럽게 하느님과 함께 살아가는 일”(6,8)을 가르쳐 주실 것이다. “한결같은 사랑을 베푸시는”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온갖 죄악을 부수어 깊은 바다에 쓸어 넣어”(7,19) 주실 것이다.

 

스바니야는 비천한 모습으로 태어나시는 구세주께서 하느님의 정의를 사랑으로 바꾸어 주실 것이라는 미가의 예언을 완성시키고 있다. 스바니야란 이름은 “하느님의 다스림을 아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스바니야가 밝혀주는 위대한 비밀은 주님께서 오실 “마지막 날”에 대한 비밀이다. “주님께서는 이미 제물을 마련하시고 손님들을 목욕 재계시키셨다‘’(1,7). 그분은 “절름발이를 고쳐 주시며 길 잃은 자들을 찾아 내시리라”(3,19), “그 사랑도 새삼스러워라”(3,17). “기를 못 펴는 가난한 사람들”(3,12) 이 온 세상 방방곡곡으로부터 부름을 받게 될 것이다. “에디오피아강 저편으로 추방했던 자들도 예물을 가지고 강을 건너 나를 예배하러 오게 하리라”(3,10). “하느님의 신비를 알고 있는” 사람이 십자가의 희생제와 성찬의 기념제를 예언하였던 것이다.

 

성서의 순서를 보면, 미가와 스바니야 사이에 나훔과 하바꾹이 들어있다. 나훔은 구약 성서에서 그 예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생생하고도 강렬한 문체로 아시리아의 수도 니느웨의 패망(기원전 612년)을 예언한다. 아시리아의 사자는 자신이 태어날 때 그러하였듯이 대살륙과 파괴의 아수라장 속에서 멸망하고 만다. “들리느냐? 저 채찍질 소리. 병거 바퀴 돌아가는 저 요란한 소리. 말은 소리치고 병거는 치닫는다. 칼과 창을 번개처럼 번쩍이며 기마병이 말타고 달려든다. 다치는 사람은 수도 없고 주검은 너저분하게 널려 있다. 산더미처럼 쌓인 시체는 가는 곳마다 발에 차인다.”(3,2-3). 지상 권력이 몰락한 폐허 위로 “당신을 바라는 사람이 곤경에 빠졌을 때 잘 보살펴 주시고 당신께 몸을 숨기는 사람이 물결에 휩쓸렸을 때 돌보아 주시는”(1,7-8) 하느님의 위대한 영광이 솟아오르고 있다.

 

하바꾹은 “신앙의 예언자”다. 깊은 회의 속에서 그는 부르짖는다. “주여, 살려 달라고 부르짖는 이 소리, 언제 들어주시렵니까? 호소하는 이 억울한 일, 언제 풀어 주시렵니까?”(1,2). 그의 신앙이 답변을 한다. “주여, 당신께서는 애초부터 나의 하느님, 이 몸은 하느님의 것인데, 죽을 리야 있겠습니까?”(1,12). 신앙은 영혼의 생명이다. “의로운 사람은 그의 신앙으로써 살리라”(2,4). 성 바오로 사도는 이 말씀을 자기 설교의 초석으로 삼았다(로마 1,17; 갈라 3,11; 히브 10,38 참조). 그는 하바꾹의 신앙이 부활하신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다고 보았다. 예언자는 그리스도의 영광을 훌륭한 시(3장)로 노래하고 있다. 그 노래는 말미에서 아름다운 어휘로 신앙의 본질을 요약하고 있다. “비록 무화과는 아니 열리고 목장에는 소떼가 보이지 않아도 나는 주님 안에서 환성을 올리렵니다. 나를 구원하신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뛰렵니다. 주 하느님께서 나의 힘이 되어 주시고 사슴처럼 날랜 다리를 주시어 나로 하여금 산등성이를 마구 치닫게 하십니다”(3,17-19).

 

하깨와 즈가리야, 두 사람은 모두 고레스의 칙령으로 바빌로니아의 유배가 끝났을 때에 거룩한 땅으로 돌아온 사람들이다. 성전의 “상징들”과 다윗 가문이 파괴되었을 때에 이미 폐지된 것처럼 보였던 구세주의 약속이 아직도 살아 있다는 사실을 백성들에게 확신시켜 주는 것이 그들의 사명이었다. 하깨는 두번째로 짓는 소박한 성전이 첫번째 성전보다 더 영화로울 것이라고 예언하였다. 하느님의 아들이 그 어머니의 팔에 안겨 성전에서 봉헌될 때에 참으로 그러하였다(루가 2,22). 하깨는 또한 예루살렘의 총독으로 있었던 다윗의 후손 즈루빠벨에게서 다윗 가문의 부흥을 내다 보았다. 예언자는 즈루빠벨을 하느님의 오른손에 있는 옥새로 보았으나(2,23; 예레 22,24 참조), 예언자의 기대는 오직 그의 후손인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성취되었다(마태 1,13).

 

즈가리야는 교회의 상징인 거룩한 도읍의 예언자다. 그의 예언서는 첫번째 부분의 환시들(1,7-6,15)과 두번째 부분의 설교(7,1-14,21)로 나누어져 있는데, 그 모두가 새로운 예루살렘의 영을 밝혀 주고 있다. 하느님께서 “불이 되시어 담처럼 예루살렘을 둘러쌀 터이고 그 안에서 당신의 영광을 빛내시리라”(2,3). 그 머리는 구세주가 될 것이고, 그 새싹(3,8; 6,12)에서 사제들과 왕들의 권능이 결합될 것이다. 구세주의 사제직이 대사제 여호수아(예수)에게서 드러나고 있다. 그는 더러운 옷을 벗고 백성들의 죄악을 벗겨 주며, “내가 이땅의 죄를 하루 아침에 쓸어 버리겠다.”는 말씀이 새겨진 돌을 받는다(3장). 구세주의 왕다운 존엄성은 등잔과 올리브나무로 상정되고 있으며, “멋지다.” 하며 환성을 올리는 가운데 가져 오는 머릿돌로 상징된다(4장). 구세주이신 왕이 할 일은 이렇다. “‘그것은 권세나 힘으로 될 일이 아니라 내 영을 받아야 될 일이다.’ 만군의 야훼께서 하신 말씀이시다”(4,6). 구세주께서는 “겸비하여 나귀, 어린 새끼 나귀를 타고”(9,9) 당신의 도읍을 찾아오신다. 그는 몸값으로 은 삼십 냥에 팔려갈 것이다(11,12). 목자는 살해당하고 그 양떼는 흩어질 것이다(13,7). 그러나 예루살렘의 성민들은 은총과 기도의 영을 받게 되어 “그들은 내 가슴을 찔러 아프게 한 일을 외아들이나 맏아들이라도 잃은 듯이 슬퍼하며 곡하리라”(12,10). “그날이 오면, 샘이 터져 예루살렘 성민들의 죄와 때를 씻어 주리라”(13,1). 그리고 이스라엘 가문은 뭇 민족에게 욕을 먹는 신세였으나 이제는 축복을 받게 되리라(8,13). 구세주의 엄청난 최후 심판(14,12-15)이 끝난 다음에 살아 남은 민족들은 해마다 예루살렘에 올라 와서 구세주의 평화와 안녕의 상징인 초막절을 지키며 야훼를 만군의 주로, 왕으로 받들어 예배하리라(14,16).

 

열두 소예언서의 마지막이 말라기 예언서다. 유다인들은 올바르게도 말라기를 “예언자들의 봉인”이라고 부른다. 말라기 예언서는 참으로 예언자들의 모든 가르침을 압축시켜 놓은 요지다. 또한 동시에 천사라는 그의 이름이 가리키듯이, 말라기는 주님의 오심을 미리 알려 주는 전령이다. “나 이제 특사를 보내어 나의 행차 길을 닦으리라. 그는 너희가 애타게 기다리는 너희의 상전이다. 그가 곧 자기 궁궐에 나타나리라. 너희는 그가 와서 계약을 맺어 주길 기다리지 않느냐? 보아라. 이제 그가 온다. 만군의 야훼가 말한다”(3,1). 여느 예언자들과 마찬가지로, 말라기는 백성들의 죄악, 특히 혼종혼과 같은 죄(2,11)와 사제들의 나태(2,2)를 통렬히 비난한다. 외적인 형식에 너무 치우친 예식에 분노한 예언자는 구약의 희생 제사에 종언을 고하시는 주님의 목소리를 듣는다. “너희는 내 제단에 공연히 불을 피운다. 그러지 못하도록 아예 문을 닫아 걸었으면 좋겠구나. 너희가 하는 짓이 나는 전혀 마음에 들지 않는다. 만군의 야훼가 말한다. 너희가 바치는 제물이 나는 조금도 달갑지 않다”(1,10). 그러나 그의 시선은 새롭고 순수한 봉헌으로 향한다. “나의 이름은 해뜨는 데서 해지는 데까지 뭇 민족 사이에 크게 떨쳐, 사람들은 내 이름을 부르며 향기롭게 제물을 살라 바치고 깨끗한 곡식 예물을 바치고 있다. 내 이름은 뭇 민족 사이에 크게 떨치고 있다”(1,11). 말라기는 구세주의 새 시대와 그 풍성한 은총을 바라보고 있다. “내가 하늘 창고의 문을 열고 갚아 주는지 갚아 주지 않는지 두고 보아라”(3,10). 그 새 시대는 바로 “정의의 태양이 비쳐와 너희의 병을 고쳐 줄”(4,2) 날이다. 열두 예언서의 열두번째 예언자는 그 손을 들어 장차 오실 열세번째 예언자를 가리키고 있다.

 

열두 소예언서의 메시지들을 모두 합쳐 놓으면, “주님의 날”을 묘사하는 완벽한 그림이 나타난다. 하느님의 정의(아모스)는 겸허한 왕이신 구세주를 통하여(미가, 즈가리야) 사랑으로 바뀌어질 것이다(호세아). 희생 제물로 바쳐지게 될 구세주께서는 당신의 희생적 사랑으로 절름발이들과 버림받은 사람들을 새롭게 하시리라(스바니야). 그리고 그분은 온 세상 모든 곳에서 하느님께 순수한 제물을 바치시리라(말라기). 주님의 영이 모든 사람들에게 내리리라(요엘). 그 영은 의인들이 부활하신 그리스도께 대한 신앙으로 살아가도록 이끌어 주시리라(하바꾹). 그분은 배신과 반역의 지혜를 파멸시키시고(오바디야), 이 세상 군주들의 잔혹한 권세를 무너뜨리실 것이다(나훔). 그러나 그분은 회개하는 사람들을 구원하여 주시리라(요나). 그리하여 성전이 재건되고 ‘다윗의 아들’이 다시 왕좌에 오르고(하깨), 교회를 상징하는 거룩한 도읍이 다시 세워지고 그 주민들은 기쁨과 평화에 넘치리라(즈가리야)한 구세주의 약속이 성취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와 교회 안에서 이루어진 예언의 성취와 이 세계의 상황을 견주어 볼 때 우리는 깨닫게 된다. “이것으로 예언의 말씀이 더욱 확실해졌습니다. 여러분의 마음속에 동이 트고 샛별이 떠오를 때까지는 어둠 속을 밝혀 주는 등불을 바라보듯이 그 말씀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좋겠습니다”(2베드 1,19). (Pathways in Scripture에서 강대인 옮김) [경향잡지, 1989년 10월호, 다마수스 빈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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