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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구약] 이사야: 주님의 길을 닦으라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09-07-03 조회수3,029 추천수0

[성서의 세계 -구약] 이사야 : 주님의 길을 닦으라

 

 

“대림”(待臨) 곧 기다림이란 고대인들에게 있어서 극히 매혹적인 말이다. 적을 물리치고 개선하는 왕을 기다리는 것이다. 승리의 금관을 쓴 왕이 온갖 전리품과 수많은 포로들을 이끌고 돌아올 때 성읍은 온통 환희의 도가니로 변하고, 거리는 축제의 물결에 휩싸여 환호와 노래로 뒤덮인다. 밤이면 문마다 창마다 불을 밝혀, 왕의 영광이 온 성읍을 비추게 한다.

 

그러나 교회 전례력의 대림 시기는 이 지상의 승전을 기다리지 않는다. 우리는 왕 중 왕을 기다린다. 그분은 세상의 죄 때문에 죽임을 당하시고 이 세상의 죄를 없애시어 평화의 나라를 세워 주신다. 이것은 곧 하느님의 구원 활동이며 진정한 의미의 역사이다. 베들레헴의 비천한 마굿간에서 태어난 저 아기의 탄생은 바로 이 영광스러운 기다림의 시작이다. 예언자들은 인간의 비천한 모습 속에서 하느님의 영광을 볼 수 있도록 우리의 시야를 열어 주고 있다. 예언자들은 서로 관통하고 있는 “상징”과 “실재”, 인간성과 신성, 현재와 미래를 통찰하고 있다.

 

당신 도읍에 오시는 주님의 내림에 대한 기쁨을 이사야보다 더 절절하게 체험한 예언자는 없다. 이사야는 예루살렘에서 태어나고 자라난 예루살렘의 진정한 아들로서 왕들의 자문역을 맡은 귀족이었다. 다윗의 도읍은 이사야에게 있어서 역사의 돌쩌귀였으며 고난을 거쳐 미래에 찬란히 빛날 희망봉이었다. 그의 모든 예언은 예루살렘의 새로운 탄생을 위한 고뇌에 찬 노작이었다.

 

이사야는 한 나라가 세계 정복을 시도했던 시대에 살았다. 아시리아 왕 디글랏빌레셀이 니느웨에서 기원전 745년 왕좌에 오른 후 권력 기반을 다지고 군대를 조직하여 아시아 민족들을 한 세기 이상 지배하였다. 기계 병기를 개발한 아시리아인들은 전 근동을 약탈하고, 점령지의 주민들을 제국의 다른 지역으로 강제 이주시켰다. 여러 민족과 나라가 지닌 지방 신(神)들을 척결하고. 뿌리가 뽑혀 버린 힘없는 대중들 위에 그들의 신 아수르의 주권을 확립시키고자 하였다. 기원전 738년에 디글랏빌레셀이 시리아와 팔레스티나를 침공하자, 다마스커스와 사마리아는 동맹을 맺고 이에 대항하였다. 유다 왕 아하즈가 이 동맹 가입을 거부하자, 다마스커스와 사마리아 왕들은 아하스를 제거하기 위하여 예루살렘을 향해 공격해 왔다. 바로 이때 이사야는 아하즈 왕에게 “동정녀와 아기”라는 징표를 준다. “동정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이사 7,14). 아시리아가 다마스커스와 이스라엘을 정복하여, 예루살렘과 아하즈는 구원을 받았다. 그러나 이스라엘 북부는 아시리아의 영토가 되어, 역사상 최초로 ‘약속된 땅’의 일부가 외세의 지배 아래 들어갔다. 이사야는 그 주민들이 먼저 구세주를 보게 되리라고 예언한다(9,1).

 

디글랏빌레셀이 기원전 727년에 죽자 이스라엘은 아시리아의 지배에 항거하여 반란을 일으키지만, 새로운 왕 사르곤이 다시 침공, 사마리아를 점령하고 그 주민들을 아시리아로 강제 이주시켰다(28,1-4). 사르곤의 후계자 산헤립 시대에 아시리아의 물결은 유다 왕국의 남부에까지 밀려들었다. 이사야는 예루살렘이 포위당한 채 항복을 요구당하는 수모를 기술하고 있다(36장). 당시의 유다 왕 히즈키야가 아하즈에게는 없던 신앙을 지녔기에 하느님께서 예루살렘을 구원하셨다(2열왕 19,34). 살아남은 사람들은 경건한 왕 요시아 밑에서 개혁을 서두르지만 아시리아의 쇠퇴기에 주어진 평온은 잠시뿐이었다. 갈대아인 느부갓네살이 아시리아의 영토를 확보한 다음 곧바로 유다를 침공하였다. 기원전 597년에 예루살렘이 최초로 함락당하고 마는 것이다. 이제 바빌론 유배 생활이 시작되어, 60여 년 후 페르시아 왕 고레스가 바빌론을 점령하고 예루살렘 귀환령을 내릴 때까지 계속된다. 이러한 사건들이 모두 이사야서의 역사적인 배경을 이루고 있다.

 

이사야서를 읽으며 우리는 예언자의 여러 가지 설교와 발언들을 그 제자들이 후대에 수집, 정리, 편찬해 놓은 것이라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우리가 읽고 있는 이 예언서의 장절 구분은 그보다 더 후대에 정리된 것으로 그 내용이 서로 맞지 않는 경우가 흔히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사야서를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 부분(1-35장)은 “경고의 책”이라 불리는 것으로서 주로 아시리아에 대한 투쟁을 그 역사적 배경으로 하는 예언들을 담고 있다. 막간에 해당되는 둘째 부분(36-39장)은 산헤립의 예루살렘 포위를 기술하는 내용으로서 주로 열왕기 하권 18-20장의 내용을 옮겨 놓은 것으로 보인다. 셋째 부분(40-66장)은 소위 “위로의 책”으로서 바빌론 유배 생활과 ‘남은 자’들의 예루살렘 귀환에 관련된 내용이다. 이 부분은 이사야 예언자 자신이 썼다고 볼 수 없어, ‘제2 이사야’서라고도 한다.

 

이사야는 그 모든 역사적 사건들을 계시의 빛 속에서 보고 있다. 밀려드는 아시리아 군대에 위협을 당하고 있는 유다 백성은 홍해에 가로막힌 채 파라오 군대의 추격을 받았던 조상들의 처지와 같았다. 그때 모세가 소리쳤다. “야훼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워주실 터이니 모두들 진정하여라”(출애 14,14). 이사야도 자기 세대에 이렇게 권고하였다. “마음을 돌려(회개하고) 진정하는 것이 구원받는 길이다. 고요히 믿고 의지하는 것이 힘을 얻는 길이다”(이사 30,15). 그 절박한 운명의 순간에 이사야는 왕에게 경고한다. “너희가 굳게 믿지 아니하면 결코 굳건히 서지 못하리라”(7,9). 이 말씀이 바로 이사야 메시지의 핵심이다. 오로지 신앙만이 선택된 백성을 세상의 탁류에 휩쓸리지 않는 견고한 반석으로 만들어 줄 수 있다.

 

예언자 자신이 바로 이러한 신앙의 살아 있는 “표징”이다. 바로 예언자의 이름 예사야후는 “오직 주님만이 구원자”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백성에게 커다란 두 가지 “표징”을 보여 주시고자 이사야 예언자를 보내셨다. 구원자이신 하느님께 대한 신앙을 토대로 한 그 표징은 곧 “동정녀와 아들 임마누엘” 그리고 “고난받는 종”이다. 어두운 하늘에서 고요히 빛나는 별처럼 아시리아의 성난 물결 위에 드높이 “동정녀와 아들 임마누엘”의 표징이 찬연히 빛나고 있다. 또한 바빌론 유배의 무덤을 뚫고 일어서는 새로운 생명의 확실한 희망으로서 “고난받는 종”의 표징이 세워진다.

 

아시리아 군대의 잔인한 정복과 학정에 날카롭게 대비되어, 어머니와 아기의 모습 그 자체는 자비와 사랑의 아름다운 표정이다. 인류 역사의 모든 국변에서 그리고 20세기에 들어서도 전횡적인 군사 통치가 난무하는 이 세상이 결코 줄 수 없는 평화의 상징인 것이다. 어머니와 아기의 표징은 남정네들이 인류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시도하는 잔혹한 방법에 대한 결정적인 심판이다. 모자상은 언제나 사랑이 폭력보다 더 강하다는 진리를 남자들에게 일깨워 주고 있다. 이사야의 표징에 있어서 그 어머니는 동정녀이다. 동정녀인 어머니는 “오직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구원”을 드러내고 있다. 동정녀가 잉태하여 낳을 아기는 육정이나 인간의 의지가 아니라 바로 하느님의 뜻으로 태어나는 까닭이다.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8,10)는 임마누엘 아기는 “오직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구원”이다. 그 아들 안에서 하느님과 인간이 만나고 완전한 화해를 이룬다. 다윗의 아버지 이새의 그루터기에서 나오는 햇순처럼 그는 태어나고, 하느님의 영이 그 위에 내린다(11,1). “우리를 위하여 태어날 한 아기, 그 이름은 탁월한 경륜가, 용사이신 하느님, 영원한 아버지, 평화의 왕이라 불릴 것입니다”(9,5). 임마누엘에 대한 이러한 예언은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태어난 하느님의 아들 안에서 완전히 성취된다.

 

아시리아 군대가 홍수처럼 밀려들 때에, 예루살렘은 다윗 가문의 왕 히즈키야의 신앙으로 구원을 받았다. 그러나 1백여 년 뒤 갈대아인들이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성전을 파괴하였다. 유다의 왕과 그 백성들은 포로로 사로잡혀 유배 생활을 하게 되었다. 바빌론 포로 생활의 그 암울한 처지에서 구원자이신 하느님께 대한 신앙의 또 다른 표징이 드러난다. 죽임을 당하고 다시 살아날 고난받는 종의 모습이 바로 그 표징이다. 동정녀의 해산과 마찬가지로. 부활은 “오직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구원”의 표징이다. 오로지 하느님께서만 “사람의 생사를 쥐고 계시어 지하에 떨어뜨리기도 하시며 끌어 올리기도 하시는”(1사무 2,6) 까닭이다. 하느님께서 선택하신 고난받는 종은 우리의 반역죄로 상처를 입고 우리의 악행으로 으스러뜨려졌으며, 하느님께서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지우셨다(이사 53,5-6). 고난받는 종의 모습은 멸망의 길에 접어든 사람들에게는 부질없는 것일 테지만, 구원받을 사람들에게 있어서 그것은 바로 하느님의 권능을 뜻하는 것이다. 인류의 죄악을 대신하여 받는 그 종의 고통은 마침내 부활로 끝난다. “그 극심하던 고통이 말끔히 가시고 떠오르는 빛을 보리라. 나의 종은 많은 사람의 죄악을 스스로 짊어짐으로써 그들이 떳떳한 시민으로 살게 될 줄을 알고 마음 흐뭇해 하리라”(53,11).

 

고난받는 종에 대한 이러한 예언은 다윗 가문의 마지막 왕 여호야긴을 가리키는 것일 수 있다. 그는 여러 해 동안 바빌론의 감옥에서 고생을 하다가 풀려나 “바빌론에 있던 다른 왕들보다 높은 자리에 앉았다”(2열왕 25,28). 이 예언은 또한 바빌론의 포로 생활에서 풀려난 민족의 해방을 가리킬 수도 있다. 그러나 고난받는 종에 대한 이 표징은 오로지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 안에서만 성취되는 것이다. “구약의 복음사가”가 생생하게 기록한 메시아의 강생과 수난과 부활의 목적은 곧 교회의 표상인 예루살렘의 새로운 탄생이다. 이사야의 예언은 예루살렘의 영광에 대한 묘사에서 그 절정에 달한다. 유다와 예루살렘의 미래를 보았던 이사야의 통찰력은 그리스도의 성령께서 시대의 징표를 보도록 눈을 열어 주신 모든 사람들이 내다 보는 전망이다.

 

영원한 계약을 저버린 백성의 저 비참한 참상은 오늘도 온갖 갈등과 증오로 찢겨진 분쟁 지역에서 이사야가 보았던 그대로 볼 수 있다. “그들은 곤경에 빠지고 허기가 져서 헤맬 것이다. 위를 쳐다 보나 땅을 굽어 보나 보이는 것은 고통과 암흑, 답답한 어둠뿐, 마침내 그 어둠 속으로 빠져들어 가리라”(8,21-22). 예루살렘 위에 다시 떠오르는 빛을 볼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하느님과 우리 사이를 갈라놓는 장벽을 없애는 것이다. 이사야가 가르친 대로, 우리 구세주이신 임마누엘의 강생과 부활을 통하여 하느님을 믿는 신앙의 다리를 세우는 것이다. 모든 골짜기를 메우고, 산과 언덕을 깎아 내려 우리의 하느님께서 오시는 큰 길을 닦는 일이다. 그것은 곧 회개다. (Pathways in Scripture에서 강대인 편역)

 

[경향잡지, 1989년 5월호, 다마수스 빈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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