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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신약] 요한의 첫째, 둘째, 셋째 서간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09-06-07 조회수3,589 추천수0

[정영식 신부의 신약 성경 읽기] 42. 요한의 첫째, 둘째, 셋째 서간 (상)

 

 

요한의 첫째, 둘째, 셋째 서간(이하 요한 1서, 2서, 3서)도 야고보 서간, 베드로 첫째 · 둘째 서간, 유다서간과 함께 ‘가톨릭 서간’으로 분류된다. 하지만 요한 1, 2, 3서는 가톨릭 서간에서 떼어내 요한 묵시록 및 요한복음과 함께 별도로 공부하는 것이 좋다.

 

요한 1, 2, 3서와 요한 묵시록, 요한 복음서를 묶어서 ‘요한계 문헌’이라고 한다. 이름도 같은 ‘요한’이 들어가지 않는가. 물론 내용도 여러 가지 면이 공통되고, 또 한 맥락에서 이해해야 할 내용이 많다.

 

구체적으로 그 내용을 보자. 요한 1, 2, 3서는 얼핏보면 그 주제가 완전히 다름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조금만 주의 깊게 읽다 보면 이 세 서간이 모두 공통된 사상과 문화를 배경으로 하고 있으며 특히 같은 교회 문제를 다루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요한계 문헌에는 독특한 용어들을 계속 반복해서 쓴다는 공통점이 있다. 바로 ‘빛’ ‘의로움’ ‘사랑’ ‘진리’와 같은 것들이다. 이 용어를 사용하는 목적은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중요성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다. 요한 1, 2, 3서에도 이러한 용어와 용법이 많이 나온다.

 

요한 1서는 이단자들의 침투로 인한 교회 분열을 막기 위해 쓴 서간이다. 또 요한 2, 3서는 개인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으로 되어있지만 사실 당시 교회의 지도자들에게 보낸 편지다. 요한 1서는 5장이고 요한 2, 3서는 지난 주 공부한 유다서간과 마찬가지로 1장으로 이뤄진 짧은 ‘쪽지 편지’다.

 

구체적으로 내용에 들어가 보자. 요한 1서는 생명의 말씀으로 시작한다.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 말하고자 합니다. 그 생명이 나타나셨습니다. 우리가 그 생명을 보고 증언합니다. 그리고 여러분에게 그 영원한 생명을 선포합니다”(1요한 1, 1~2).

 

어디서 많이 접한 말씀처럼 느껴지지 않는가. 그렇다. 우리는 요한복음 1장에서 이와 비슷한 말씀을 읽은 기억이 있다. 다시 읽어보자.

 

“한 처음에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는데 말씀은 하느님이셨다. 그분께서는 한 처음에 하느님과 함께 계셨다. 모든 것이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고 그분 없이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다. 그분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요한 1, 1~4).

 

요한복음 1장과 요한1서 1장은 시작부터 그 전하려는 사상은 물론이고 논법과 비유도 비슷하다. 이 두 성경이 전하려는 내용은 오직 하나다. ‘하느님은 빛이시고 하느님께는 어둠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분께서 빛 속에 계신 것처럼 우리도 빛 속에서 살아가면, 우리는 서로 친교를 나누게 되고, 그분의 아드님이신 예수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1요한 1, 7)해 주신다. 우리는 인간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죄를 짓는다. 죄를 짓지 않는다고 말하면 우리 자신을 속이고 진리 안에서 살지 않는다는 증거”(1요한 1, 8 참조)다. 요한 1서의 목적은 바로 “죄를 짓지 않게 하려는 것”(1요한 2, 1)이다.

 

성경구절이 자꾸 나오니까 머리가 어질어질해진다. 그럼 지금까지 살펴본 내용을 간단히 정리해 보자. 하느님은 빛이시고 죄가 없으신 분이다. 더 나아가 그리스도는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기 위해서 제물이 되신 분이다. 우리 죄 뿐만 아니라 온 세상의 모든 죄를 다 용서해 주시기 위해 스스로 제물이 되신 분이다. 반면 인간은 죄인이다. 따라서 하느님께 죄를 용서받아야 할 존재다.

 

자 이제 우리는 하느님이 어떤 존재이고, 우리 또한 어떤 존재인지 알았다. 그럼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겸손해야 한다. 더 나아가 그리스도께서 온 인류의 죄를 위해서 제물이 되신 것처럼 우리도 이웃을 위한 제물이 되어야 한다(1요한 2, 3~29 참조).

 

죄인인 이웃을 만나면 기뻐해야 한다. 나를 제물로 바칠 대상을 만났기 때문이다. 그럼 나를 어떻게 제물로 바쳐야 하나. 물론 상황에 따라 모두 다를 수 있다. 영적으로 기도해 줄 수도 있고, 희생을 바칠 수도 있다.

 

지혜로운 조언을 해 줄 수도 있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한 것은 죄인을 만났을 때 죄인이라고 판단을 내리고, 공동체에서 소외시켜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죄인을 미워해서는 안된다. 나 또한 죄인이다. “형제를 미워하는 사람은 아직도 어둠 속에 있는 자입니다”(1요한 2, 9).

 

죄를 지은 이웃을 위해 희생하며 살아가는 것이 바로 거룩한 그리스도인의 삶이다. 사랑은 다른 것이 아니다. 이웃을 위한 제물이 되는 것, 이것이 바로 사랑이다. [가톨릭신문, 2007년 11월 11, 정영식 신부(수원교구 영통성령본당 주임)]

 

 

[정영식 신부의 신약 성경 읽기] 43. 요한의 첫째, 둘째, 셋째 서간 (중)

 

 

참으로 생동감 있는 요한의 첫째 서간을 읽어 내려가는 중이다.

 

2장 6절을 읽어보자. “그분 안에 머무른다고 말하는 사람은 자기도 그리스도께서 살아가신 것처럼 그렇게 살아가야 합니다.”

 

힘있는 말씀이다. 당시 시대상황을 돌아가 보자. 이 서간이 써진 시기는 약 100년경이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시고 65년쯤 시간이 흘렀다. 아직도 바리사이파와 율법학자들이 판을 치는 세상이다. 구약의 율법이 힘을 잃지 않은 시기다. 동시에 로마의 지배를 받던 시대인 만큼 로마의 사상을 강조하던 때다.

 

과거로의 여행을 떠나보자. 현재 우리는 예수 사후 65년쯤 지난 즉 서기 100년의 시대에 살고 있다. 나는 어떤 사상을 선택해야 할까. 삶의 가치관을 구약의 율법에 둘 것인가. 아니면 로마인들이 강요하던 사상에 둘 것인가. 그것도 아니면 그리스도적 가치관을 가질 것인가.

 

오늘날 신앙인인 우리야 당연히 그리스도적 가치관을 가질 것이라고 말하겠지만. 당시로서는 그 선택이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스도적 가치관은 이제 막 나타난 새로운 가치관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요한 1서는 “그리스도께서 살아가신 것처럼 살아가야 한다”며 단호하게 그리스도적 가치를 설파한다. “내가 여러분에게 써 보내는 것은 새 계명이 아니라, 여러분이 처음부터 지녀 온 옛 계명입니다. 이 옛 계명은 여러분이 들은 그 말씀입니다. 그러면서도 내가 여러분에게 써 보내는 것은 새 계명입니다”(1요한 2, 7~8). 이 그리스도적 가치가 새로운 이유는 바로 “어둠이 지나가고 참 빛이 이미 비치고 있기 때문”(1요한 2, 8)이다.

 

그러면 새로운 가치를 따른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오늘날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사랑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빛 속에 있다고 말하면서 자기 형제를 미워하는 사람은 아직도 어둠 속에 있는 자입니다. 자기 형제를 사랑하는 사람은 빛 속에 머무르고, 그에게는 걸림돌이 없습니다. 그러나 자기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어둠 속에 있습니다. 그는 어둠 속에서 살아가면서 자기가 어디로 가는지 모릅니다. 어둠이 그의 눈을 멀게 하였기 때문입니다”(1요한 2, 9~11).

 

어둠 속에 있는 자는 눈먼 자이다. 지금 만약 어떤 사람을 미워한다면 암흑 속에서 살아가는 것과 다름없다. 그래서 우리는 새로운 가치에 따라 빛 속에서 살아야 한다.

 

그런데 문제는 이 편지를 쓴 당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그리스도의 새로운 가치를 따르는 삶을 방해하는 이들이 많다는 것이다.

 

“지금 많은 ‘그리스도의 적들’이 나타났습니다”(1요한 2, 18). 당시 반대자들이 공동체에 나타났음을 짐작할 수 있다. 심각한 위기가 닥친 것이다.

 

“누가 거짓말쟁이입니까?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는 사람이 아닙니까? 아버지와 아드님을 부인하는 자가 곧 ‘그리스도의 적’입니다”(1요한 2, 22).

 

우리는 그리스도의 적에게 현혹당해선 안된다. 이 편지에서 드러나는 대로 예수님께서 돌아가시고 난 직후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이단들이 끊임없이 나타나고 있다. 특히 예수의 인성을 부정하거나, 혹은 신성을 부정하는 이단들이 많다. 이들은 예수의 한 본성만을 보려고 하는 경향이 있다. 어떤 이는 그리스도를 하느님으로만 보려고 하고, 어떤 이는 그리스도를 인간으로만 보려고 한다.

 

우리는 정신 바짝 차리고, 그리스도의 가르침 대로 살아야 한다. 요한의 첫째 서간에 나타나는 다음 구절은 마치 흔들리는 신앙을 고백하는 우리에게 직접 말하는 듯 생생하게 와 닿는다.

 

“자녀 여러분, 아무에게도 속지 마십시오. 의로운 일을 실천하는 이는 그분께서 의로우신 것처럼 의로운 사람입니다. 죄를 저지르는 자는 악마에게 속한 사람입니다. 악마는 처음부터 죄를 지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악마가 한 일을 없애 버리시려고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나타나셨던 것입니다. 하느님에게서 태어난 사람은 아무도 죄를 저지르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씨가 그 사람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하느님에게서 태어났기 때문에 죄를 지을 수가 없습니다. 하느님의 자녀와 악마의 자녀는 이렇게 뚜렷이 드러납니다. 의로운 일을 실천하지 않는 자는 모두 하느님께 속한 사람이 아닙니다. 자기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자도 그렇습니다”(1요한 3, 7, 10). [가톨릭신문, 2007년 11월 18일, 정영식 신부(수원교구 영통성령본당 주임)]

 

 

[정영식 신부의 신약 성경 읽기] 44. 요한의 첫째, 둘째, 셋째 서간 (하)

 

 

요한의 첫째, 둘째, 셋째 서간이 공통적으로 그리고 일관되게 다루고 있는 주제는 “그리스도인의 삶이란 무엇인가”하는 문제다. 첫째 서간 3장을 보자. 여기선 하느님의 자녀가 누구이고 악마의 자녀가 누구인지 명확히 대비시키고 있다.

 

▲ 하느님의 자녀 :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될지는 아직 드러나지 않았지만, 그분께서 나타나시면 우리도 그분처럼 되리라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 그 분께 이러한 희망을 두는 사람은 모두, 그리스도께서 순결하신 것처럼 자신도 순결하게 합니다”(1요한 3, 2~3).

 

▲ 악마의 자녀 : “죄를 저지르는 자는 악마에게 속한 사람입니다. … 그래서 악마가 한 일을 없애 버리시려고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나타나셨던 것입니다”(1요한 3, 8).

 

우린 하느님의 자녀가 될 것인지 악마의 자식이 될 것인지 선택해야 한다. 하느님에게서 태어난 사람은 죄를 저지르지 않는다. 하느님의 씨가 그 사람 안에 있기 때문이다. 그는 하느님에게서 태어났기 때문에 죄를 지을 수가 없다(1요한 3, 9 참조). 여기서 중요한 것이 ‘사랑의 실천’이다.

 

“우리는 형제들을 사랑하기 때문에 우리가 이미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갔다는 것을 압니다. 사랑하지 않는 자는 죽음 안에 그대로 머물러 있습니다”(1요한 3, 14).

 

이 사랑 실천의 걸림돌이 바로 ‘거짓된 영’이다. “아무 영이나 다 믿지 말고 그 영이 하느님께 속한 것인지 시험해 보십시오. 거짓 예언자들이 세상으로 많이 나갔기 때문입니다”(1요한 4, 1).

 

요즘 하느님의 영을 체험했다는 이들이 많다. 문제는 우리를 속이는 영도 분명히 있다는 점이다. 요한의 첫째 편지는 거짓된 영을 따라 우르르 몰려다니는 신자들에게 단호히 말한다.

 

“우리는 하느님께 속한 사람입니다. 하느님을 아는 사람은 우리의 말을 듣고, 하느님께 속하지 않는 사람은 우리의 말을 듣지 않습니다. 이것으로 우리는 진리의 영을 알고 또 사람을 속이는 영을 압니다”(1요한 4, 6).

 

여기서 말하는 ‘우리’란 바로 ‘교회’다. 요즘 교회의 말을 듣지 않고, 교회를 거슬러 자신의 주장만 펴는 단체나 신자들이 간혹 있다. 진짜 성령을 받은 것인지 거짓 성령을 받은 것인지 잘 분별해야 한다.

 

극히 일부이긴 하지만 성령기도회에서도 이런 경향이 없지 않다. 심지어 성령기도회 회원들이 “00신부님은 성령을 받았고, 00신부님은 성령을 받지 않았다”고 말하는 일도 있다.

 

도대체 성령이 무엇인가.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이 성령이다. 반드시 성령 세미나를 받아야만 성령을 받는 것이 아니다. 세례성사를 받고 그리스도를 전하는 사람은 모두 성령을 받은 것이다. 바짝 정신 차리고 있어야 한다. 거짓된 영은 교묘히 우리 안으로 들어온다.

 

요한의 둘째 편지도 첫째 편지와 마찬가지로 이단자 즉‘속이는 자들’에 대해 말하고 있다.

 

“속이는 자들이 세상으로 많이 나왔습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으로 오셨다고 고백하지 않는 자들입니다. 그런 자는 속이는 자며 ‘그리스도의 적’입니다”(2요한 1, 7).

 

그리스도의 인성을 거부하는 이단을 조심하라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가 일하여 이루어 놓은 것을 잃지 않고 충만한 상을 받을 수 있도록 자신을 살펴야 한다(2요한 1, 8 참조).

 

셋째 편지에서는 공동체에 균열이 나타나는 문제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우두머리 노릇 하기를 좋아하는 디오트레페스가 우리를 받아들이지 않고 있습니다”(3요한 1, 9).

 

야심가가 나타난 것이다. 디오트레페스라는 사람은 교회 사도들이 전하고 있는 가르침을 따르지 않고 교회의 사도들이 세워준 질서 직무 직책을 맡은 자들을 인정하지 않았다. 자기가 마치 신자들을 이끄는 우두머리로 행세했다.

 

게다가 그는 나쁜 말로 원로들을 헐뜯고(요즘 시대로 말하면 교회를 헐뜯고), 그것도 모자라 그 (원로들의) 형제들을 받아들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받아들이려는 이들까지 방해했다(3요한 1, 10 참조).

 

이 모든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인답게 살아가느냐 또는 그렇지 않느냐의 문제로 요약할 수 있다. 우린 그리스도인의 시각으로 세상을 보고, 살아야 한다. 겸손한 마음으로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 그래서 이 세상에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요한의 첫째 서간은 5장, 둘째 셋째 서간은 각각 1장 밖에 안된다. 모두 읽는데 20분이 채 걸리지 않는다. 이 세 서간을 다시 한번 차분히 읽어보자. 그리고 ‘그리스도인’으로 이 세상을 살아간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진지하게 묵상해 보자. [가톨릭신문, 2007년 11월 25일, 정영식 신부(수원교구 영통성령본당 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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