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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신약] 코린토 신자들에게 보낸 첫째 서간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09-06-06 조회수3,586 추천수0

[정영식 신부의 신약 성경 읽기] 19. 코린토 신자들에게 보낸 첫째 서간 (1)

 

 

성경을 두고 재미있다고 말하는 것은 좀 어색하게 들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코린토 신자들에게 보내는 서간만큼은 정말 재미있다. 일단 “재미있는 서간이라니까 한번 관심을 가져볼까”하고 생각해도 좋다. 그만큼 얻는 것도 많을 것이다.

 

코린토 서간은 굉장히 긴 편지다. 게다가 원래는 4개의 편지가 있었지만 2편이 없어지고 현재는 첫째 서간과 둘째 서간, 2편만 남아있다.

 

바오로 사도가 코린토 신자들에게 이렇게 많은 편지를, 그리고 편지마다 길게 썼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여기서 조금 센스가 있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코린토 신앙 공동체에 문제가 많았다는 점을 지적해 낼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 코린토 교회에는 해결해야 할 문제가 너무 많았다.

 

이 문제를 살펴보기 위해선 먼저 코린토의 지리적 특성부터 알아야 한다. 코린토는 그리스의 항구도시다.

 

항구도시는 우선 인구이동이 많다. 수많은 나라의 사람들이 ‘들락날락’하는 곳이다. 인파로 붐비는 유흥가도 형성돼 있다. 시끌벅적하고, 활기가 넘치고, 많은 사상과 문화가 한자리에서 만나는 곳이 바로 항구다.

 

코린토가 그랬다. 조용하고 안정된 공동체가 아니라 늘 외부의 다양한 문제들과 직면해야 하는 공동체였다.

 

따라서 코린토 서간을 읽다보면 오늘날 현대문명을 살아가는 우리도 많은 동질감을 느낄 수 있다. 코린토 서간 자체가 산 속의 조용한 마을에 보낸 글이 아니라, 다양한 문제를 안고 있는 시끌벅적한 문명 사회에 던지는 메시지이기 때문이다.

 

자 그럼, 코린토 서간의 그 메시지를 알아보자. 당시 코린토의 가장 큰 문제는 교회의 분열이었다. 이 분열은 그런데 갈라티아 교회의 분열과는 조금 성질이 다르다.

 

갈라티아 교회의 분열은 바오로 사도가 세운 공동체에 유다계 그리스도인들이 들어와 그리스도인들도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하면서 생긴 혼란이었다. 그리스도교 신앙인으로서의 정체성에 대한 혼란이 갈라티아 교회의 고민이었다면 코린토 교회의 문제는 ‘파벌’에 의한 분열이었다.

 

“여러분은 저마다 ‘나는 바울로파다.’ ‘나는 아폴로파다.’ ‘나는 베드로파다.’ ‘나는 그리스도파다.’ 하며 떠들고 다닌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가 갈라졌다는 말입니까? 여러분을 위하여 십자가에 달린 것이 바울로였습니까? 또 여러분이 바울로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단 말입니까?” (1코린 1, 12~13)

 

코린토 신자들은 각자 추종하는 사도와 설교자들을 중심으로 파벌을 형성하고 있었다. 바오로 사도가 코린토 교회에 서간을 쓴 이유도 바로 이 교회 내 파벌을 막기 위한 것이었다.

 

오늘날에도 우리는 많은 ‘분열’을 목격한다. 이런 분열은 대부분 ‘조금 신앙생활 해 봤다’는 사람들에 의해 조장된다.

 

이런 사람들은 특히 자신을 중심으로 놓고 교회와 신앙을 말하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이런 사람들이 많으면 어떻게 되겠는가. 개신교 교회에서 볼 수 있듯이 가톨릭교회는 이미 수천 수만의 종파로 분열되었을 것이다.

 

우리는 ‘한 뜻’으로 모아져야 한다. 그 한 뜻의 중심은 ‘교구장’이다. 가톨릭교회는 지역교회다. 원칙은 자기 생각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의 뜻, 교구장의 뜻을 말해야 한다.

 

의외로 구역장 반장, 레지오 마리애 단원 등 각종 교회 내 단체 봉사자들이 자신이 속한 교구의 교구장 뜻에 대해 숙지하지 못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이번 주는 교구 홈페이지를 방문해 보자.

 

그리고 올해 초 교구장께서 발표하신 사목교서를 읽어보자. 이제는 ‘내 말이 옳다’‘내 묵상이 절대 진리다’라고 말하지 말고, ‘공동체의 말’‘공동체의 묵상’에 대해 관심을 가져보자.

 

우리는 늘 겸손에 대한 마음을 갖고 있어야 한다. 이제는 본당에 성령쇄신파, 레지오 마리애파, 엠이(ME)파, 꾸르실료파가 없어져야 한다. 다 쓸데없는 짓이다. 오직 그리스도 십자가밖에 없다.

 

“유다인들은 표징을 요구하고 그리스인들은 지혜를 찾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를 선포합니다.”(1코린 1, 22~23)

 

여러 파벌로 쪼개진 코린토 교회를 바라보는 바오로 사도의 심정은 참담했을 것이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렇게 호소한다.

 

“모두 합심하여 여러분 가운데에 분열이 일어나지 않게 하십시오. 오히려 같은 생각과 같은 뜻으로 하나가 되십시오.” (1코린 1, 10) [가톨릭신문, 2007년 5월 20일, 정영식 신부(수원교구 영통성령본당 주임)]

 

 

[정영식 신부의 신약 성경 읽기] 20. 코린토 신자들에게 보낸 첫째 서간 (2)

 

 

지난 시간에 살펴보았던 코린토 교회의 분열상에 대해 좀 더 깊이 들어가 보자. 바오로 사도가 코린토 신자들에게 서간을 첫째로 보낸 것은 바로 교회의 분열 때문이었다.

 

당시 코린토 교회에는 여러 파벌이 생겼는데 그것을 살펴보면, 우선 바오로가 코린토 교회를 세웠다고 해서 바오로를 따르는 파가 있었다.

 

그리고 베드로가 교회의 수장이라고 해서 베드로를 따르는 베드로파가 있었고, 당시 설교를 잘하는 사람이었던 아폴로를 따라 다니던 아폴로파가 있었다.

 

또 “바오로 베드로 아폴로 이런 파가 무슨 소용이 있느냐. 우리는 오로지 그리스도만 믿고 따른다”며 그리스도를 중심에 놓는 예수파도 있었다. 문제는 이 네 파벌이 서로 자신들만을 내세우며 다툼을 벌였다는 것이다.

 

조선시대에도 이런 현상이 있었다. 동인, 서인, 남인, 북인 등 사색당파로 분열이 그치지 않았다. 오늘날 정치권도 마찬가지다. 의견이 옳고 그르고를 떠나 오직 나와 다른 당이라고 해서 반대하는 경우가 많다. 부끄러운 점은 이러한 세속적 욕심에서 벗어나야 하는 종교 내에서도 이런 당파 싸움이 있다는 것이다.

 

내가 대부를 섰다고 해서 대자 대녀파가 있다. 또 우리 단체 내 단체니까 무슨 무슨 단체파가 생긴다. 본당에는 레지오파가 있고, 성령기도회파, 꾸르실료파가 있다. 이 모든 것은 예수님의 도구들일 분이다. 이 도구들이 예수님 보다도 높다면 말이 되는가.

 

베드로, 바오로, 아폴로는 그렇게 하라고 하지 않았다. 그런데 사람들이 스스로 그런다. 괜히 사람하나 높여 세우고, 파를 만드는 것이다. 베드로, 바오로, 아폴로는 “내가 두목이다”라고 한 일이 없다. 나도 “나 정영식 신부가 최고”라고 말하거나 생각한 일이 없다. 그런데 나를 두목으로 모시려는 사람들이 있다. 대부를 두목으로 모시려하고, 레지오 단장을 두목으로 모시려고 한다.

 

다 세속적인 정신이고 쓸데없는 짓이다. 가족 내에도 파가 있다. 장남을 사랑하는 장남파, 둘째 아들을 편애하는 차남파, 큰아버지를 따르는 큰아버지파, 삼촌을 따르는 삼촌파가 있다. 세상에 가장 무서운 병중에 하나가 있는데 그것이 ‘파’다. 먹는 파가 아니라 파벌의 그 파다.

 

이런 우리들에게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한다.

 

“형제 여러분, 나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여러분에게 권고합니다. 모두 합심하여 여러분 가운데에 분열이 일어나지 않게 하십시오. 오히려 같은 생각과 같은 뜻으로 하나가 되십시오.… 여러분은 저마다 ‘나는 바울로파다.’ ‘나는 아폴로파다.’ ‘나는 베드로파다.’ ‘나는 그리스도파다.’ 하며 떠들고 다닌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가 갈라졌다는 말입니까? 여러분을 위하여 십자가에 달린 것이 바울로였습니까? 또 여러분이 바울로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단 말입니까?” (1코린 1, 10~13)

 

우리는 세례 받을 때 정영식 신부의 이름으로, 대부 대모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은 것이 아니다. 우리는 신발 끈을 풀어드릴 자격조차도 없는 사람들이다. 시편에 나오는 것처럼 티끌만도 못한 사람, 먼지만도 못한 존재다.

 

내가 누구이냐를 정확히 알지 못하면 우리는 즉시 교만해 진다. 사실 사람은 하느님보다 더 높은 자리에 즉시 올라갈 수 있다. 인간은 ‘나’에 대해 정확히 알아야 한다. 내가 누군지 깨닫기 어렵고 내가 누군지 모르는데 상대방이 누군지 인간이 누군지 안다는 것은 더더욱 어렵다.

 

이 아무것도 모르는 인간을 중심에 세우고 나는 정영식 신부파다, 나는 000신부 파다 하는 것이다. 두목은 누구인가. 우리가 두목으로 모시는 분은 당연히 삼위일체의 하느님이다. 우리는 사실 예수님 안에서 졸개도 안된다. 졸개로 부림 받은것도 하나의 큰 은혜다. 그런 우리들이 스스로 ‘파’를 만들고 그 작은 파 안에서 두목한다고 으스댄다.

 

아직도 많은 이들이 교회 안에서 ‘내 파’를 만든다. 우리들은 이제 ‘파벌’장사를 그만두어야 한다. 우리 스스로 파를 만들려고 하지 말아야 한다.

 

머지않아 하느님 대전에 가면 하느님께서 물으실 것이다.

 

“너는 파가 있었냐, 없었냐?”

 

이렇게 대답하자.

 

“저는 오직 그리스도를 중심에 모시고 생활했습니다.” [가톨릭신문, 2007년 5월 27일, 정영식 신부(수원교구 영통성령본당 주임)]

 

 

[정영식 신부의 신약 성경 읽기] 21. 코린토 신자들에게 보낸 첫째 서간 (3)

 

 

지난주에 코린토 서간의 첫 번째 집필 목적이 교회의 분열이라고 배웠다. 이제 또 다른 집필 이유에 대해 알아보자.

 

6장의 말씀이다. “여러분 가운데 누가 다른 사람과 문제가 있을 때, 어찌 성도들에게 가지 않고 이교도들에게 가서 심판을 받으려고 한다는 말입니까? … 나는 여러분을 부끄럽게 하려고 이 말을 합니다. 여러분 가운데에는 형제들 사이에서 시비를 가려 줄만큼 지혜로운 이가 하나도 없습니까?”(1코린 6, 1~5)

 

이번에는 파벌간, 당파간 싸움이 아니라 개인과 개인의 다툼에 대한 이야기다. 사람들이 모이면 개인 간 다툼이 있기 마련이다. 그리스도교 공동체도 인간이 모인 공동체인 탓에 ‘싸움’이 없을리 없다.

 

실제로 본당 공동체는 많은 신자들이 모인 공동체이다 보니, 예상하지 못한 많은 문제가 생길 수 있다. 악의적인 의도에서든 그렇지 않든 다른 신자에게 피해를 주는 신자가 있을 수 있다.

 

문제는 이러한 문제들을 풀어나가는 방식이다. 코린토 신자들은 교우들 사이에 문제가 생겼을 때 사회 법정에 가서 호소했다.

 

오늘날에도 이런 경우가 많다. 교우들 간에 돈 문제가 생기면 법으로 해결하는 경우가 있다. 정치인들도 마찬가지다. 같은 교우인데도 당이 다르다는 이유로, 신념이 다르다는 이유로, 상대방을 공격하고 법정에 고소장을 낸다.

 

고소를 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얼마나 억울하면 이렇게까지 하겠느냐’며 항변할 수 있다. 실제로, 도저히 법에 호소해야만 해결할 수 있는 일이 있을 수 있다.

 

그런데 바오로 사도는 법정에 고소하는 이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여러분이 서로 고소한다는 것부터가 이미 그릇된 일입니다. 왜 차라리 불의를 그냥 받아들이지 않습니까? 왜 차라리 그냥 속아 주지 않습니까?”(1 코린 6, 7)

 

바오로 사도는 “차라리 억울한 일을 그대로 당하는 것이 어떻습니까. 또 사기를 그대로 당하는 것이 어떻습니까. 왜 그렇게 하지 못합니까”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받아들이기 참으로 어려운 말씀이다. 억울하고 하소연할 곳은 법정 밖에 없는데, 당하면서 살라는 말인가? 하느님의 정의를 실현하지 말라는 말인가? 속시원한 해결책은 없을까.

 

본당 공동체의 다양한 문제를 풀어나가는 단초는 소공동체에 있다고 믿는다. 물론 가장 중요한 공동체는 가정 공동체이지만,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사회생활을 해야 하니까 가정과 가정이 만나야 한다. 이렇게 가정과 가정이 만나면서 부딪히는 다양한 문제들을 해결하는 장이 바로 소공동체다.

 

소공동체에서 우리는 기도를 한다. 그러면 영적인 힘이 생기고 지혜가 생긴다. 이 세상의 각종 반목들을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힘은 하느님이고, 그 하느님으로 나오는 영적인 에너지가 우리에게 지혜를 준다. 이 영적인 힘을 얻을 수 있는 원동력이 공동체 기도다.

 

조금만 생각해 보면 ‘법’과 ‘사랑’중에 무엇이 우리를 자유롭게 하고 행복하게 하는지 깨달을 수 있다. 법은 마지막 수단이 되어야 한다. 법은 하한선이고 사랑은 상한선이다.

 

자녀가 부모에게 회초리 한 대 맞았다고 해서 법정에 고소한다고 생각해 보라. 물론 자녀를 심하게 체벌하는 것은 나쁜 일이지만 모든 체벌에 고소가 따른다면 그 가정, 그 사회는 얼마나 삭막해 질까.

 

형제 자매를 법정에 세우는 것은 ‘진정한 지혜’가 없기 때문이다. 지혜가 없는 사람(여기서 지혜는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지혜를 말한다)은 마음이 평온하지 못하다. 사랑이 없기에 늘 얼굴에 근심이 가득하다. 매일 매일이 지옥이다. 마음속 응어리를 풀지 않기 때문에 늘 무엇엔가 매여 살아간다.

 

억울한 일을 당하면 교회안의 지혜로운 이를 찾아가자. 그리고 소공동체 안에서, 함께 기도하며 해결하도록 노력하자. 신앙인들만이라도 이제 지혜롭게 사는 법을 터득해야 한다. 그 모범이 사회를 변화시킬 것이다.

 

바오로 사도는 개인간 다툼 문제를 거론한 후 불륜과 혼인 등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리고 8장에서 ‘우상’에 대해 말한다. 개인간 다툼은 모두 우리들 각자가 가지고 있는 우상 때문에 생기는 것인지도 모른다.

 

다음 주에는 우리를 망치는, 우리를 반목시키는, 공동체를 깨트리는 그 우상에 대해 알아보기로 한다. [가톨릭신문, 2007년 6월 3일, 정영식 신부(수원교구 영통성령본당 주임)]

 

 

[정영식 신부의 신약 성경 읽기] 22. 코린토 신자들에게 보낸 첫째 서간 (4)

 

 

이번에는 우상(偶像)이 문제다. 오늘날 미사 때 봉헌은 ‘돈’으로 한다. 하지만 초기 교회 당시에는 양, 염소, 비둘기 등으로 봉헌을 했다.

 

코린토 교회를 들여다보자. 한 가장이 돼지를 잡았다. 당시 풍습대로 이 고기를 시장에 바로 내다 팔지 않고 신전 혹은 우상 앞에 바쳤다.

 

오늘 날 무당이 굿을 할 때, 돼지 머리를 앞에 놓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보면 된다. 제사를 마친 후 그 가장은 신전 혹은 우상에 바친 그 고기를 다시 집에 가져와 일부는 먹고, 일부는 시장에 내다 팔았다.

 

문제는 이제부터다. 신자들이 우상에 바쳐졌던 그 고기를 시장에서 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신자가 과연 우상에게 바쳐졌던 이 고기를 먹을 수 있을까. 이 고기를 사서 성당에 와서 먹어도 될까. 먹으면 죄를 짓는 것이 아닐까.

 

이 같은 일은 오늘날에도 그대로 재현되고 있다. 등산길에 들른 한 불교 사찰에서 나눠주는 점심을 먹을 것인가 말 것인가. 할아버지 할머니 제사상에 올려진 밥을 먹을 것인가 말 것인가. 굿하는 곳에 가서 남은 음식을 먹을 것인가 말 것인가. 이 문제에 대해 매우 민감하게 받아들이는 일부 개신교 신자들이 있다.

 

하지만 나 자신은 개인적으로 이런 고기나 음식을 먹는 것에 별다른 의미를 둘 필요가 없다고 본다. 실제로 많은 신심 깊은 신자들은 별다른 의미 없이 이런 음식을 먹는다.

 

자 그럼 이제 이 문제에 대한 바오로 사도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바오로 사도도 일단 우상 앞에 바쳐진 음식 자체가 우리의 구원 전체에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고 본다.

 

“음식이 우리를 하느님께 가까이 데려다 주지 않습니다. 그것을 먹지 않는다고 우리의 형편이 나빠지는 것도 아니고, 그것을 먹는다고 우리의 형편이 나아지는 것도 아닙니다.”(1코린 8, 8) 

 

런데 그 다음 이야기가 묘하다.

 

“다만 여러분의 이 자유가 믿음이 약한 이들에게 장애물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 지식이 있다는 그대가 우상의 신전에 앉아 먹는 것을 누가 본다면, 그의 약한 양심도 우상에게 바쳤던 제물을 먹을 수 있게끔 용기를 얻지 않겠습니까?”(1코린 8, 9~10)

 

우상 앞에 바쳐졌던 음식을 먹는 그 행동이 끼칠 영향에 대해서는 주의하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바오로 사도는 “나는 신심이 깊고, 교리를 많이 알기 때문에 이런 음식을 먹는 것은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어”라고 생각하는 신자들에게 경고한다.

 

바오로 사도가 볼 때 이런 행동은 세례 성사 받은지 얼마 되지 않는 믿음 약한 사람들을 넘어트릴 수 있는 위험한 행동이다. 신심 깊다고 자부하는 사람들 때문에, 신앙의 연륜이 깊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때문에 믿음 약한 사람들이 나쁜 길로 들어설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한다. “그리스도께서는 그 형제를 위해서도 돌아가셨습니다. 여러분이 이렇게 형제들에게 죄를 짓고 약한 그들의 양심에 상처를 입히는 것은 그리스도께 죄를 짓는 것입니다.”(1코린 8, 11~12)

 

굉장히 무서운 말이다. 믿음이 약한 사람, 신앙의 연륜이 짧은 사람들을 넘어뜨리게 하고, 그런 사람의 양심에 자꾸 상처를 주면 죄를 짓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것도 자신의 양심에 짓는 죄가 아니라 그리스도께 직접 죄를 짓는 것이라고 한다.

 

여기에서 발견되는 중요한 개념이 바로 “그리스도께서는 믿음이 약한 사람을 위해서도 돌아가셨다”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믿음이 강한 사람만 아니라 믿음이 약한 이들 안에서도 늘 함께 하신다.

 

우리는 얕은 신앙과 지식에 우쭐해 한 일은 없는가. 진정으로 믿음이 약한 이들을 배려하고 있는가. 믿음이 약한 이들을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하는가. 신앙의 연륜이 짧은 이들을 위해 우리가 해 줄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바오로 사도의 이 같은 아래를 향한 가르침은 주님의 만찬(11장)과 사랑에 대한 계명(13장) 등을 설명하는 대목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이 두 부분은 상당히 중요한 대목이지만 많은 신학자와 영성가들이 다룬 부분인 만큼 이 지면에서는 설명하지 않고 넘어가려 한다.

 

실제로 가장 중요한 바오로 사도의 사상과 영성은 나중에 로마서 부분에서 자세하게 다룰 것이다. [가톨릭신문, 2007년 6월 10일, 정영식 신부(수원교구 영통성령본당 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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