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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루터는 진정 어떠한 인물이었나? - 역사적 진실을 말한다. 카테고리 | 천주교
작성자오성훈 쪽지 캡슐 작성일1999-01-25 조회수1,901 추천수6 신고

 

[루터의 배후인물들]

 

 독일 각 지방에서 노략질을 일삼던 해적과 도적의 혁명기사단의 군사지도

자 프란츠 폰 직킨켄(Franz von Sickingen)과 비인격적이며 반성직적 인문

주의자 훗텐과 루터는 동맹을 맺고 있었다. 로마와의 분리를 마음먹은 루터

의 공격은 나날이 격심해 갈 뿐이었다. 한편, 그는 교회재산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던 세속군주들의 후원을 받기 위해서 온갖 노력을 다하였다.

 

 독일의 왕공들은 루터를 후원함으로써 교회의 분열을 조장하고 그 틈을 이

용하여 교회를 자기네 손아귀에 넣고자 하였던 것이다.

 그를 지지한 제후들 중 가장 열심이었던 자가 작센후 프리드리히였다. 루터

는 이러한 배후가 있었기에 로마에 대한 반항을 결심할 수 있었던 것이다.

 

 

[루터의 새로운 신앙]

 

 

 루터의 새 교리 새 신조

 

 

  (1) 신앙의 유일 규범은 오직 성서이다. - 누구나 자유롭게 해석할 수 있다.

 

  (2) 사람은 원죄로 완전히 타락하였다. 자유의지를 빼앗긴 인간의 행위

     는 그것이 선이든 악이든 천주의 행위다.

 

  (3) 사람이 구령을 받는 것은 천주께서 죄를 사해주었다고 확신하는 신앙

     만 있으면 된다.

 

 

 

 루터는 그의 저서 ’바빌론 포로 생활(De Captivitate Babilonica)’에서 다음

과 같이 말했다.

 

 

 "보는 바와 같이 영세를 받은 크리스챤은 얼마나 행복한가! 그는 비록 구

 

 령을 원치 않는다 하더라도, 그가 신앙을 거부하기 전에는 얼마든지 죄를

 

 범하든 간에 구령을 잃어버릴 수는 없다. 왜냐하면 불신앙만 빼고는 어떠

 

 한 죄도 그를 지옥에로 떨어뜨릴 수는 없는 것이다."

 

 

 선행도 덕행도 필요없이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다는 루터의 새 교리는 모

든 구속에서 벗어나 욕정대로만 행동하려는 거리의 탕아에게는 가장 반가

운 위안의 메시지였던 것이다.

 

 

[동정 허원의 부정]

 

 

 사실 자연법과 신법 위에 세워진 그리스도교적 도덕규범은 루터의 새 주장

으로 무너져갔다. 루터는 먼저 인간의 육체적 본능은 억제할 수 없는 것이

며, 성적 충동은 인간의 필연적이며 본성적인 것으로 따라서 동정허원은

마귀의 짓이니 폐지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하여 성직자의 독신생활

제도의 폐지와 인간의 자연적 성욕을 억제하는 모든  것을 제거해야한다고

주장했다.  

 

 그의 동지 수사인 칼스탈은 41세의 나이로 허원을 깨뜨리고  루터의 찬성

으로 15세의 소녀와 결혼했고, 그 뒤에 많은 수사들이 그 뒤를 이어 결혼

했다. 1525년 6월 14일 루터가 42세때  이미 수녀원을 탈출해 나온 27세의

수녀이었던 카타리나 폰 보라와 결혼하였다.

 

 

 

[필립 백작의 중혼허가]

 

 

 루터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패륜아 루터는 뿐만 아니라 자기의 지지

자의 한 사람인 헷센의 백작 필립의 중혼을 허락함으로써 일부일처제에 대

한 그리스도의 교훈을 내버렸다. 필립은 8명의 자녀를 둔 본처와 여전히

결혼 생활을 하면서 묘령 17세의 처녀 마르가리타 폰 델 사일과 결혼코자

루터에게 청원서를 보냈다. 루터는 처녀를 첩으로 두는 것을 다만 비밀로

한다는 조건 밑에 허락하였다. 그러나 필립  백작은 목사의 주례로 공공연

하게 결혼식을 올려버렸다.  자세한 것은 아래의 필자의 글 중 ’루터는 진

정한 개혁자인가? (1) (2) (3)’ 를 참조하라.

 

 

 희대의 탕아인 루터는 그것을 질책하거나 제지하지 않고 오히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혼인의 단일성과 영속성을 믿는 그리스도교 신앙을 뿌

리부터 파괴하는 것을 중지하지 않았다.

 

 

 이는 그가 ’혼인은 그저 세속적인 일’이라고 공식적으로 선언함으로써

비롯된다.(Dr.Martin Luther’s Saemitliche Werke, Vol, XVI, p. 518-519).

 

 그 때 그는 설교단에서 자기 배우자에 만족하지 못하는 모든 남편은 아시리

아 왕의 본을 따라 와스디를 에스델로 갈아치우고, 종을 주부(主婦)자리에

올려놓으라고 이혼을 선동했다.(Sermon on Marriage, Vol. XX) (에스델과 와

스디에 관한 것은 구약성서 에스델서를 참조)  

 

 그러면 이것이 또한 루터의 잘못이라고 볼 수 없다는 궤변론자들에게 다시

한번 더 이야기한다.

 

 루터는 위의 것으로도 그리스도께서 정하신 혼인의 신성함을 파괴한 것에

만족하지 못했는지 다처제(多妻制)를 인정하는 다음의 망발을 한다.

 

 

 ’모세의 첫째 권에 관한 설교’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비록 내가 오늘

 날 권장할 수는 없지만 남자가 한 명 이상의 아내를 취함은 금지되어 있지

 않다."

 

 

 

[밀짚과 같은 사도 서간]

 

 

 그러나 이러한 터무니 없는 새 주장은 루터가 신앙의 유일한 규범이라고

한 성서의 교훈과 일치될 리 만무했다. 그래서 루터는 그의 성서의 루터

적 번역을 감행함으로써 자기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하여 ’신앙만’이라든가

’단지’라는 말을 써 넣고 멋대로 번역하였다. ’의’를 ’신앙’으로 ’교회’를

항상 ’신도’로 하고 ’사제’를 ’장로’라고 바꾸어 놓았다.

 

 루터는 이와 같이 자신의 주장을 마치 그리스도교의 교리인양 성서의 교훈

보다 앞세웠던 것이다. 그는 이제 전통적인 교회를 대신하였고, 사실상 교황

을 대신하였다. 좀 더 자세히 말해서 그 당시 그의 이런 행동이 후세에 알려

지게 된 것은 아니다. 그 당시 그의 이러한 독성죄에 대해 여기저기서 비난의

화살이 쏟아졌다.

 

 그 당시 역사가 엠서(Emser)가 썻듯이, "그는 그리스도 교회의 옛스러운 믿

음직한 원본을 여러 군데 뒤범벅을 만들어 놓고 미련하게 보이게 하고 뒤바꾸

고 해서 교회에 아주 불리하게 했을 뿐더러, 열교식으로 주해하고 서문을 덧

붙여 이를 해석하였다. 그는 신앙과 선행의 문제에 관해서는 닥치는 대로 족

족 제멋대로 고쳐 놓았으며, 신앙과 선행의 문제에 관계없는 것까지도 이 짓

을 해 놓았다." (Janssen, History of the German people XIV. p.425)

 

 엠서는 그릇된 곳을 자그마치 1천 4백군데나 지적했으며, 또 다른 개신교

사학자 분젠(Bunsen)은 실로 3천 군데를 꼬집어 냈다.

 

 

 또한 루터는 신앙만으로 구원을 얻는다 했는데 야고보서 1장 26절에는

"육신이 영혼 없이는 죽은 것과 같이 선행이 없이는 신앙 또한 죽은 것이

다"고 뚜렷이 선행을 요구하고  있지 않은가! 그래서 그는 이 야고보서를

’밀짚같이 무가치한 서간’ - ’검불 성서’ 라고 취급하여 자기가 번역한

루터역 성경에서는 아예 빼어 버렸던 것이다.

 

 

 그것은 루터가 내세운 원리에 의하여 즉 뜻에 맞으면 믿을 것이요, 맞지

않으면 배척해야 한다. 이래서 그가 야고보서를 읽고 즉시 ’검불성서’라 하

여 불태워 버린 이유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믿음만으로’ 구원된다는 자기

의 교리만큼 그의 마음을 당기지 못했기 때문이다.

 

 

 같은 이유로 바오로 서간의 "사람은 율법을 지키는 것과는 관계없이 믿음을  

통해서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는다고 우리는 확신합니다."(로마 3, 28)에

서 믿음이라는 말 다음에 일부러 ’’이라는 글자를 보태서 자기 뜻에 맞는

교리로 삼았다.루터는 이에 대해서 주위의 학자들로부터 비난을 받게 되자 그

자신의 뜻과 원의(願意)가 그렇게 했다는 말로써 끝까지 버티었다.

 

 

 루터가 하지않은 말을 필자가 꾸며낸다고 오해할까봐 여기에서 루터 자신의

글을 소개한다.

 

 

 

 "그대들은 ’뿐’이라는 말이 바오로의 서간에 없다고 해서 교황주의자들이

 법석을 떨고 있다고 말한다. 그대들이 알고 있는 교황주의자들이 그 ’뿐’

 때문에 반대하거든 이렇게 말하라. ’마르틴 루터 박사가 그렇게 원한다’ 또

 ’교황주의자란 밥통이라는 말이다.’ 내가 그렇게 원한다. 그러니까 그래야

 된다고 내가 명령한다. 이 내 뜻이 충분한 이유다."

 

 (J. L. Stoddard, Rebuilding a Lost Faith, p.101-102).

 

 

 루터의 이같은 생각은 요즈음의 종교 무차별론자들의 생각 -종교란 다 좋

고 아무 차이도 없다고 주장하는 현대의 불가지론자(不可知論者)들- 과는

정반대였다. 올바르기만 하면 무엇을 믿든지 상관없다가 아니라, 믿기만 하

면 무슨 짓을 하든지 상관없다는 말이다.

 

 

 그는 심지어 자기의 주장을 하느님의 가르침과 동격에 놓기까지 했다.

루터는 종교사에 있어 최고의 판관으로 자처하며 자기와 의견을 달리하는

모든 이를 이단자로 처벌하고 저속한 욕설을 마구 퍼부었다.

 

 

 "내가 가르치는 것과 달리 가르치는 자는 누구든지 하느님의 처벌을 받을

 것이며 또한 지옥의 자식으로 머물러 있어야 할 것이다."

 

 또한 "내 가르침을 어기는 것은 무엇이든지 용서할 수 없다."고 고집했다.

 

 

 종교의식도 마음대로 고쳤다. 종교상의 성무에서 라틴어를 추방하고 독일

어를 사용했으며 미사성제를 폐지하고 고해성사를 배척했다. 성체는 면병

과 포도주의 두 형식으로 주었다. 제단과 성화상을 파괴하는 등 극단에서

극단으로 흘러갔다.

 

 

 루터는 1517년 10월 31일 모든 성인의 날에 비텐베르크 성당문에 95개조의

반항 성명을 붙임으로써 스스로의 인조(人造) 종교를 세우게 되었다. 그는

그 자신이나 그 동료 혁명가들이 예기치 못했던 여러 가지결과를 초래한

하나의 원리를 주창했으니 이것이 바로 성서 해석과 종교 생활에 있어 사

실은 모든 윤리 생활까지도 사적(私的)자유 해석이 우월하다는 주장이다.

 

 그렇지만 루터나 칼뱅이나 츠빙글리나 그밖의 이른바 혁명가들은 이것이

장차 어떤 결과를 낳으리라는 것은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누구든지 새로

운 교파를 세우는 자는 이 원리를 내세우게 된 사실이다. 실은 루터는 그

자신의 해석만이 옳고 다른 이의 해석은 다 그릇되다고 믿었고, 칼뱅도 츠

빙글리도 멜란히톤도 그러했다.

 

 

 이들 종교 혁명가들은 종교 무차별론자들이 아니라 광신자들이었다. 이들

은 자기의 것만 옳다고 고집한 나머지 이를 반대하는 사람이면 여지없이

죽여버렸다. 자유 해석이기는커녕 그야말로 독선이요, 잔인한 독재자요, 일

찍이 그리스도교 사상사에서 그 유래를 볼 수 없는 잔인무도한 광신자들이

었다.  

 

 농민들이 성서 자유 해석의 본을 따라 제멋대로 해석하려 하고, 이리하여

농민전쟁이 일어났을 때 루터는 귀족들을 충동하여 이 ’마귀의 자식들’을

사정없이 개돼지처럼 학살하게 했다. 귀족들은 이 반가운 충고를 충실히

따랐다. 이리하여 무수한 농민들이 잔인한 살육을 면치 못했다. 에라스무스

의 편지에는 그 당시 10만 명이 학살되었다고 쓰여 있다.

 

 루터는 이 피비린내 나는 살육을 개탄하기는 고사하고 큰 자랑으로 여겼다.

 

그는 "나 마르틴 루터는 죽이라고 명령한 그대로 모든 반란 농민을 모조리

학살했다. 그들의 피는 모두 내 머리 위에 뿌려졌다. 그렇지만 나는 그 피를

신에게 던진다. 그분이 나에게 이것을 명했기 때문에."

 

 

 루터는 늙어감에 따라 너그러워지기는커녕 점점 더 모질게 되어갔다.

그는 죽기 조금 전에 몸서리치는 욕설로 가득찬 팜플렛 두 권을 썼다.

 

 하나는 ’마귀가 로마에 세운 교황청을 욕한다’이고 또 하나는 유다인을 욕하

는 글이다.

 

 전자는 겉장에 그 내용을 묘사한 소름이 끼치도록 야비한 그림을 직접 그려

넣었다. 정말 과거 신부였던 사람이 직접 그린 것이라고는 믿어지지 않는 그

그림의 내용은 이미 앞의 글 -「아래 박철순님의 글을 잘 읽었습니다. 그러

나...」- 에서 말했으니 여기서는 더 이상 이야기하지 않겠다.

 

 

 독일의 개신교 역사가 될링거(Dollinger)는 이를 평하여 "루터가 이 글을

썼을 때 독한 술에 만취되어 있었다고 생각하지 않고서는 도저히 알아들을

수 없는 글이다"라고까지 말했다.

 

 

 그는 개신교의 그 오랜 전통 - 유다인에 대한 박해 - 을 수립하는 데도

일조를 담당한 바가 크다. 그는 유다인에 대해서도 ’저주받은 지옥의 새끼

마귀들’ 이라는 듣기에도 망측한 욕을 퍼부었다. 그는 독일에 있는 동지를

규합하여 "유다인의 학교와 회당을 불지르고 그 불꽃 속에 기름과 유황을

던져 넣어라. 그래도 안 되면 국외로 추방하라" 고 외쳤다.

 

 

 루터는 마지막 숨을 거둘 때까지 이와 같이 자기와 조금이라도 다른 신학

사상을 지닌 사람을 마구 욕했다.

 

 

 공정한 개신교 역사가 스토다드 (John L. Stoddard)는 이 혁명가의 생애

와 저서를 고심하여 연구한 끝에 양심의 자유에 관한 루터의 태도를 이렇

게 결론지었다.

 

"흔히 루터가 연구의 자유권을 창시했다고들 말하지만 이보다 틀린 생각은

없다. 그는 이것을 교회의 전통을 배척하는 핑계로 내세웠지만 실은 성서를

자기가 해석하는 대로만 믿으라고 고집 부리는 데 죽을 힘을 기울였다. 그

래서 그는 살과 피를 지닌 교황 대신 종이로 된 교황을 마련했다. 뿐만 아니

라 스스로 권위 있는 성서 해석자로 자처함으로써 실제로 스스로의 무류성

(無謬性)을 주장했다. 루터와 같은 시대에 살던 세바스찬 프랭크(Sebastian

Frank)는 ’교황 밑에서도 지금보다는 자유로웠다’고 한탄했다."

 

 

 양심에 관해서 이러한 폭군의 태도를 고집한 자는 루터만이 아니었다. 그

의 발자취를 따르는 모든 혁명가가 다 그랬다. 이것은 그들로서는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왜냐하면 혁명가들이 자기의 발판을 튼튼히 하려면 불가

불 자기의 성서 해석이 최고이고 절대적인 것이라고 우김으로써 이를 따르

는 자들에게 자기 생각을 강요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으면 조직체

가 이루어질 수 없고 따라서 머리 수효만큼 교파가 생겨날 것이기 때문이다.

 

 

 칼뱅은 이점에 있어 소위 루터를 따르는 모든 혁명가들의 본보기라고 볼 수

있기에 여기서는 그를 예로 들겠다. 그는 오베레렛에게 보낸 편지에서 스스로

가 하느님의 대변자로서 무류성을 주장하며 "하느님은 내게 선과 악을 선언할

권리를 주었다"라고 폭언했다.

 

 이와 동시에 그는 자기를 배반하는 모든 이에게 화형 또는 참수형을 선언했다.

그는 신학상의 논적(論敵)인 셀베토를 오랫동안 감금한 끝에 불에 태워 죽였다.

 

 이것이 혁명가들이 세상에 가져온 소위 종교적 자유라는 찬란한 빛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다시 한번 말해둘 것은 성서의 자유해석과 종교 생활과 윤리 생활

의 최고 규범이 개인의 사적(私的) 자유 해석이라는 루터의 망동이 개신교

의 저 처참한 분열상의 원인이라는 것을 그들 혁명가들의 입을 통해 들어보

기로 하겠다.

 

 백날 필자가 입 아프게 떠들어 봐야 손해라는 것을 잘 알기에 그들의 말을

빌려서 즉 개신교의 개조(開祖)라 할 루터와 칼뱅의 말을 빌려 그들 스스로

가 벌려 놓은 이 경거망동에 대해 뭐라 하는지 들어본다면 필자의 의견인지

아닌지에 대해 분명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방금 말한대로 개신교의 교파 분열에 대해서는 20세기의 일로만 착각하는

이가 많으나 이는 옳은 견해가 아니다. 아직도 앞의 글에서 말한 모든 역

사적 사실 앞에서 모든 것이 조작이라고 허위라고 생각하는 사람 모두  -

그 사람이 가톨릭 신자이건 개신교인이건 비신자이건 간에 - 에게 말한다.

 

 

 아직도 의심이 나거든, 그렇다면 종교 혁명가 칼빈이 루터의 동지 멜란히

톤에게 보낸 다음의 편지를 보고서 필자가 위에서 기술한 역사적 진실을

믿을지 안 믿을지는 독자들이 알아서 판단하기 바란다.

 

 

 

 "우리 안에 일어나고 있는 이 심각한 분열이 후세에 알려지면 큰일이다.

세계로부터 동떨어지지 않을 수 없었던 우리가 애당초 종교 혁명 때부터

이다지도 의견이 대립되고 있다는 사실보다 더 망측한 것이 있을 수 없겠

다."

 

 

 

 여기서도 불만족스러운 이들을 위해 루터가 말한 것을 다음의 글에서 확

인해 보기로 하자.

 

 

1525년 루터는 그가 세운 새로운 이 인조(人造) 종교 안의 상황에 대해 멜

란히톤에게 이렇게 탄식했다.

 

 

 

 "이제 사람의 머리 수효만큼 교파가 생기게 되었다. 어떤 자는 세례를 헌

신짝으로 여긴다. 어떤 자는 성사를 부인한다. 어떤 자는 이 세상과 세말

사이에 또 하나의 세상이 있다고 말한다. 어떤 자는 그리스도는 하느님이

아니라고 한다. 어떤 자는 이렇다 하고, 어떤 자는 저렇다고 한다. 꿈을 꾸

거나 환상을 보아도 성령의 속삭임이라고 떠들고 스스로 예언자로 자처할

지경으로 야단 법석이다."

 

 

 

 이 정도에서 필자의 글을 마치려고 한다. 사실 더 할 이야기- 이것도 들어

보면 그다지 좋은 인상을 줄 이야기는 아닌 관계로 다음 기회로 미루겠다

- 는 많지만 오늘은 여기서 줄이는 것이 나을 듯해서이다. 솔직한 필자의

심정은 이런 지경에까지 이른 개신교의 개조(開祖) 루터와 칼빈에 대해서

말하는 것을 즐기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들의 역사를 파고 들어가면 갈수록

답답하고 한심하며 그 분열 과정과 그들의 인간성에 역겨움이 진동하기 때문

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개신교 형제들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가 그렇게 되어서

는 안 될 것이다. 그들은 과거의 분열이 그렇게 된 데 대한 직접적인 책임을

지울 수는 없기에 그렇다. 그리고 과거 수많은 이단과 이교가 나타났었지만

그 해결 방법은 전쟁에 있지 않았다. 우리의 꾸준한 기도와 신앙의 모범만이

오로지 그들을 참된 그리스도의 교회 안에 돌아오게 했던 것이다.

 

 

 

 오늘도 원죄없으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께서는 우리의 묵주 기도를 원하신

다.

 

 

그것만이 원수를 쳐부수고 지옥의 마귀를 떨게하며 우리를 떠났던 모든 이

 

를 돌아오게 하는 희망의 참된 길이기에 그렇다.

 

 

 

 마지막으로 비오 11세 교황의 회칙 ’참된 종교적 일치’를 통해 우리 그리

스도교의 일치를 위한 간절한 기도를 대신하려고 한다.

 

 

 

"길 잃은 자녀들을 사도들의 으뜸인 베드로, 바오로가 그들의 피로써 봉헌

한 이 성좌(聖座)로 돌아오게 해야 한다. 이 성좌야말로 ’가톨릭 교회의 뿌

리요 모체(母體)’이다. 진실로 ’살아계신 하느님의 교회이며 진리의 기둥이

요 기초’인 교회가 신앙의 순결을 잃고 오류를 지니고 있다는 의구심은 버

리고, 교회가 가르치는 권위와 통치를 섬기겠다는 지향으로써 돌아오게 해

야 한다.  내 선임자들에게 허락하지 않은 바가 내게 허락되어 죄스러운

불화(不和)로 나를 배반한 저 자녀들이 애통히 여기는 내 사랑의 품에 되

돌아오기를 바란다. 원컨대 ’모든 사람이 구원함을 받고 진리를 완전히 알기

를 원하시는’ 주여, 내 간절한 기도를 들어 허락하시어, 저 길 잃은 모든

무리를 교회의 품에 돌아오게 하소서.

 

 그 높으신 뜻을 받들어 하느님 은총의 어머니시며 모든 이단의 정복자시

며 그리스도인들의 모친이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전달로써 모든 이가 하

루빨리 성자의 목소리를 듣게 되어 ’평화로써 서로 결합되어 정신의 일치

를 보존하게’ 되기를 기원한다. 그대들은 내가 얼마나 간절히 그들이 돌아

옴을 고대하는지 알고 있다. 또한 가톨릭의 세계에 살든 나를 떠났든, 모든

자녀들이 이를 알기를 원한다. 그들이 나를 떠났을지라도 겸손되이 하느님

의 은총을 구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한 참교회를 깨닫고 드디어는 완전

한 사랑 속에 나와 일치될 것을 의심치 않는다."

 

 

 

 

 

 

 

 

 

 

 

 

 

갈현동에서

 

catholic knight 안젤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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