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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신약] 마르코 복음의 예수 이야기 (6)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08-01-11 조회수4,106 추천수1

[성서의 세계] 마르코 복음의 예수 이야기 (6)



둘째 마당 : 십자가 (마르 8,31-15,37)


사람의 아들의 길 (마르8,31-9,1)

 

필립보의 가이사리아는 전환점이었다. 그곳은 일찍이 내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갈 때나 갈릴래아 지역의 고향으로 돌아갈 때나 그 도중에 한숨 돌리고 쉬어 가기에 적합한 곳이었다. 황량한 유다 시골 지역이 주는 어려움도 있었지만 시골 출신인 나에게는 부산스런 도시도 결코 쉬운 곳이 아니었다. 물론 예루살렘 도시에 있는 성전 자체에도 문제가 있었다. 아빠께서 정말 그렇게 정교하고 복잡한 종교를 원하시겠는가? 당신은 형식적·특권적 사제 제도를 필요로 하시겠는가? 당신이 바라시는 예식과 봉사는 그렇게 복잡하지 않으며 한결 더 인간적일 것이다. 하지만 분명 이 도시는 내 운명을 판가름할 곳이었다. 이 도시는 내 민족의 종교 중심지로, 거기에는 내 하느님의 집이 있었다.

 

이제 나는 예루살렘으로 갈 것이다. 그리고 계속 가르칠 것이다. 나의 가르침은 고리타분한 것과는 달리 새로운 것으로 비쳐졌다. 필립보의 가이사리아에서 내가 가르쳤을 때, 베드로는 반발했다. 제자로서 불림을 받았을 때 갖추어야 할 처신에 대해 내가 일러주었다. 누구든 나의 뒤를 따르려면 내가 가는 길에 익숙해야 한다. 충실한 제자는 개인 이익을 따지지 않고, 나를 믿고 따를 것이다. 제자의 길은 쉬운 것이 아니며, 그 길에 수반되어 위축시키는 유혹들 또한 많을 것이다. 이렇게 위험을 피하고 생명을 얻는 길은 잘못된 자아를 포기하는 고통이 수반된다. 특히 나와 복음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포기하는 이는 진정한 자아를 얻게 될 것이다.

 

인간 생명이 참으로 세상 어떤 것보다도 소중하고 값으로 따질 수 없다면 충직한 제자들이 얻게 되는 영원한 생명은 더할 나위 없는 큰 가치를 지닐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또 하나의 도전이 있었고, 나는 그 점을 경고했다. 이로부터 나의 가르침을 듣기는 하지만 따르지 않는 이들이 있었다. 또 나의 길을 버리고 부끄럽게 여기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면 나 역시 그런 이를 부끄럽게 여길 것이라고 경고했다. 내가 끝날 영광 중에 다시 나타날 때 나는 그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 그때 나는 끝날이 그리 멀지 않았다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이미 이 세대가 가기 전에 하느님의 엄위로운 통치가 나타날 것으로 여겨졌다. 나는 그렇게 그들에게 말했다.

 

 

변모 (마르9,2-13)

 

기도의 필요성을 느꼈다. 아빠의 목소리를 들어야했다. 그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따로 불러내어 헤르몬 산을 올라 거기서 기도했다. 내가 기도할 때 엘리야와 모세의 모습을 보았다. 기도를 하면서 하느님의 말씀인 율법과 예언서에 대한 깊은 깨달음을 얻었다. 다가올 나의 미래가 눈에 들어오듯 분명하게 여겨졌다. 세 명의 제자들은 변화되어 빛나는 나의 모습을 보았다. 그리고 그들은 두 천상 인물인 모세와 엘리야도 보았다. 어찌할 바를 모르던 베드로는 가능하다면 아주 산에서 머물자고 제안하면서,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모세에게 하나는 엘리야에게 드리고 싶다고 했다. 나는 위대한 인물들과 함께 하는 격에 맞게 그의 평가로 한층 더 고양되었고, 그에 걸맞는 목소리도 들려왔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이는 내가 요한에게 세례를 받을 때 들었던 바로 그 목소리였다. 이제 베드로도 내가 정말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들었다. 그는 율법과 예언서를 능가하는 말씀을 들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 말씀은 한 순간에 떨어졌고, 그 천상인물의 모습들도 사라졌다. 그 산정에는 나와 제자들만 동그라니 남아 있었다.

 

산을 내려오면서 나는 제자들에게 일어난 일을 비밀에 붙이라고 강조했다. 내가 죽기 전에는 그 일의 의미를 그들이 알아듣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나는 “죽은 이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날 때까지”라고 말했다. 이는 제자들에게 알아듣기 힘든 수수께끼와 같은 말이겠지만, 그들은 인내하며 비밀에 붙여야 했다. 결국에는 내가 바라는 대로 모두 다 이해하게 될 것이다. 이 모든 이야기와 엘리야의 모습은 제자들에게 생각할 거리를 주었다. 분명 이 모든 것은 메시아 시대의 여명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러나 전승에 따르면 엘리야는 메시아가 오기 전에 준비하러 와야 하는 인물로 알려져 있었다. 엘리야는 어디에 왔느냐? 나는 엘리야는 이미 왔으며, 멸시를 당하다가 죽임을 당했다고 확신했다. 만일 이것이 전통적인 엘리야 상으로 예견된 운명이 아니라면 참 메시아의 운명의 조짐으로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나는 제자들이 나 자신과 세례자 요한을 두고 한 내 말을 모두 이해했다고는 보지 않았다. 그것은 아직 그들에게 무리였다. 그들은 점차 배우게 될 것이다.

 

 

기도만으로 가능한 것 (마르9,14-29)

 

우리 넷은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가게 되었는데, 그곳에 제자들과 율사들이 있었다. 율사들은 내가 없는 틈을 타서 제자들과 시비를 벌이고 있었다. 나의 백성들은 전문적 율사가 아닐 뿐더러 율사들의 학문적 난해함 속에서 헤매기까지 하고 있었다. 내가 율사들에게 “여러분들은 무슨 이유로 시비를 벌이고 있습니까?”라며 도전하고 있는데, 어떤 사람이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곧장 달려왔다. 그는 간질병에 걸린 아들을 제자들에게 데리고 와서 고쳐달라고 했지만 제자들은 고치지 못했다. 그곳에 모인 이들은 모든 면에서 믿음의 부족함이 역력했다. 불만스러웠다. 아버지의 믿음도 그저 그랬다. 그는 할 수만 있다면 아들을 고쳐 달라고 애걸했다.

 

소년이 발작을 일으킨 뒤 잠잠해지자 사람들은 이미 죽었다고 단정했다. 내가 소년의 손을 잡아 일으키자 그는 일어났다. 그 뒤 우리만 남았을 때 제자들은 왜 자신들은 소년을 고치지 못하였는지 그 이유를 알고 싶어 했다. 나는 그들에게 부족한 것은 바로 하느님의 권능에 전적으로 신뢰하는 기도라고 설명했다. 내가 없으면 제자들이 율사들과의 논쟁에서 반박도 할 수 없고 치유도 할 수 없다고 일일이 언급하지 않았던 이유는 제자들이 스스로 그런 점을 깨닫게 하기 위함이었다. 나는 그들이 결국 그 모든 것을 이해하기를 바랐다. 그러면 그들은 기도 중에 나의 현존을 발견하면서 나의 능력을 함께 나누게 될 것이다.

 

 

수난과 동상이몽의 제자들 (마르9,30-49)

 

우리는 갈릴래아를 지나갔다. 필립보의 가이사리아에서 “이제 곧 하느님께서는 사람의 아들을 사람들의 손에 넘겨지게 하실 것이다.”라고 말한 것을 제자들에게 상기시켰다. 이어서  죽음을 초월한 생명에 대해서 그들에게 말했다. 나는 그것을 알 수 있었지만 제자들은 그렇지 못했다. 그들은 묻기조차 두려워했으며, 당혹스러움과 근심을 감추지 못했다. 하지만 그 분위기는 이내 사라지고 그들은 다른 문제를 두고 옥신각신했다. 가파르나움에 들어가서 숙식지를 정한 후 나는 무슨 문제로 그렇게 다투었느냐고 물었다. 여전히 당혹스러운 듯한 침묵이 흘렀다. 그 당시 그들은 서로 다투는 이야기를 내가 엿들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일부러 귀를 기울일 필요는 없었다. 그들이 너무 법석을 떨며 다투었기 때문에 저절로 알게 되었다. 사실 그들은 자기들 중에 누가 가장 높으냐는 문제로 다투고 있었다. 이는 나의 어두운 수난예고를 거의 깨닫지 못했음을 잘 드러내는 장면이기도 하다. 시련의 시간은 다시 시작되었다. 그들은 가장 높은 이가 그들 중에 있을 것으로 짐작했을 것이다. 나는 열두 제자를 불러 누구든지 가장 높이 되려고 한다면 가장 낮은 이가 되어야 하고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나는 예언자와 같은 처신으로 분명히 말했다.

 

한 어린이가 호기심어린 눈망울을 굴리며 문 앞에 서 있었다. 두 팔을 펼치며 부르자 그 어린이는 내 품안으로 달려들었다. 나는 조용히 그 아이를 곧추 세우고 열두 제자들을 둘러보면서 이렇게 말했다.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이들 가운데 하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요,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파견하신 아빠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가장 미약한 이에게 베푸는 사랑의 봉사는 나와 아빠에 대해 봉사하는 것이다. 이를 제자들이 제대로 알아듣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이 걱정이었다. 직책이나 명망이나 권력에 대한 제자들의 욕망이 얼마나 큰가를 알 수 있었다. 안타까운 일이었다!

 

요한은 제자단에 속하지 아니한 어떤 사람이 내 이름으로 병자를 치유한다고 화를 내면서 불평을 털어놓았다. 쓸데없는 짓이었다. 제자들이 마음 씀씀이를 좀더 폭넓게 하면 좋으련만! 실제로 그가 내 이름으로 치유했다면 적어도 우리를 반대하는 입장을 취하지 않은 이상, 수용할 수 있어야 한다고 나는 충고했다. 언제 어디서건 우리가 발견한 선은 공동선이며, 함께 기뻐해 주어야 할 것이다. 누구라도 나와 관련이 있다고 해서 작은 친절이라도 베풀면 상을 받을 것이라고 말했다. 자비로우신 하느님은 아무리 작은 선행이라도 그냥 지나치지 않으실 것이다.

 

그 어린이는 여전히 나의 무릎에 편안히 기대어 있었다. 나는 계속해서 죄인의 부류로 통하며 쉽게 상처받을 수 있는 다른 ‘미소한 이들’에 대해 말했다. 이 때 나는 강력한 어투로 힘주어 말했다. 나는 미약한 이를 죄짓게 하는 이들을 두고 경고했다. 어쩌면 우리 자신이 가장 나쁜 이가 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당신의 손이나 발, 눈이 타락하게 만들면 그것들을 잘라 버려라! 그것을 가지고 지옥에 가서 끝장을 보는 것보다 불구가 되더라도 생명을 얻는 것이 더 낫다. 나는 준엄한 어조로 마치 세례자 요한과 같은 소리로 경고했다. 야욕이나 투쟁을 버리고 평화와 조화 속에서 살아가야 할 것이다.

 

 

결혼과 어린이 (마르10,1-16)

 

이제 유다를 거쳐 요르단 강 동편인 페레아 지역으로 갔다. 그곳은 세례자 요한이 자신의 사명을 시작한 곳이었다. 그곳에서도 사람들은 나에게로 몰려왔다. 언제나 그렇듯 나는 열심히 그들을 가르쳤다. 물론 그곳에서도 바리사이들이 무서운 적개심을 품고 도사리고 있었다. 그들은 이혼 문제를 들고 나와 나에게 도전했다. 남편이 아내를 법적으로 버릴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이혼이 일반적이었기에 충분히 토론의 여지가 있는 물음이었다. 그들은 분명 율사들의 입장을 요구했다. 즉 이혼의 합법적인 사유들을 열거해 보라는 것이었다.

 

나는 그들을 뒤흔들어 놓을 것이다. 신명기의 이혼 인정에 관한 율법 대목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그것이 이스라엘의 완고함 때문에 그런 허락이나 관면이 주어진 것이라고 말했다. 이혼은 하느님의 뜻이 아니다. 하느님이 남녀를 창조하신 것은 둘이 ‘한 몸’이 되게 하심으로써 갈릴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이 결합은 둘이 하나가 된 것이기도 할 뿐더러 하느님이 둘을 짝지어 하나로 이루어주신 제정자이시기 때문에 갈릴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하느님이 결합시킨 것을 인간이 해소시킬 수 없다는 결론이 나온다. 더 이상 바리사이들에게 할 말이 없었다. 뒤에 우리만이 남았을 때 제자들은 궁금한 것을 좀더 물었다. 우선 내 생각을 다시 분명히 정리했다. “이혼하고 재혼하는 것은 간음죄를 짓는 것이다.” 결혼의 신성함과 영속성에 대해 나는 분명히 못 박았다. ‘둘이 하나가 된다.’는 것은 남편과 아내를 서로 성숙시키는 사랑의 유대이다. 나는 하느님의 뜻을 헤아리면서 영감을 받을 것을 그 이상(理想)으로 제시했던 것이다. 완고한 율법을 주장하지는 않았다. 나의 길이 그런 법에 얽매여 있지 않았기 때문에.

 

제자들이 어떤 문제에 대해 또다시 옥신각신하고 있음을 알았다. 그리고 여인들의 큰 목소리도 들었다. 그것은 어머니들이 아이들이 나를 만지게끔 실랑이를 벌였던 것이다. 제자들은 어머니들을 막으며 “개구쟁이들을 다른 곳으로 데리고 가라.”고 말하고 있었다. 어머니들은 아이들을 보호하며 그 말을 곧이들으려 하지 않았다. 그들은 내가 어린 아이들을 무시하는 당시의 경향에 동조하지 않는다는 것을 눈치 챈 것 같았다. 나는 즉시 이 어린이들이 천국의 가장 이상적인 시민권자라고 말하면서, 그냥 내버려두라고 제자들에게 엄하게 명했다. 어린이들이야말로 어떤 이들보다도 천국에 가장 적합한 이들이다. 천국이야말로 이 어린이들처럼 단순하고 부모에게 전적으로 신뢰하며 살아가는 이들에게 주어지는 하나의 선물이다. 그리고 그 선물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열린 마음을 가지지 못한다면 하느님 나라의 다스림의 축복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여기서 하느님의 다스림은 내 안에, 나를 통해서 현존하고 있었다.

 

이 미약한 어린이들은 나에게 올 수 있는 특권이 있었다. 그들을 부르자 그들은 나에게 달려 왔다. 그리고 나는 어른들에게 불가능한 것이 어린이들에게는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나는 어린이들을 팔로 안고 머리를 토닥이며 미소 짓고 키득거리는 그들을 축복해 주었다. 그 모습에 제자들은 멍하니 당혹스러워 하는 것 같았고, 어머니들은 크게 기뻐했다. 여인들은 눈치와 직감이 참 빠른 것 같았다. 게다가 여자 제자들이 남자 제자들보다 훨씬 더 항구하다고 입증하고 싶었다.

 

[월간 빛, 2004년 4월호, 이재수 시몬 신부(큰고개성당 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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