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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구약] 지혜문학: 욥기 - 고통가운데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찾아가는 욥의 체험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08-01-11 조회수5,637 추천수1

[성서의 세계] 구약성서의 지혜문학 3 : 욥기- 고통 가운데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찾아가는 욥의 체험

 

 

1. 욥기에 들어가면서

 

구약성서의 ‘욥기’하면 가장 먼저 연상되는 주제가 ‘고통’이다. 실상 욥기에는 주인공인 욥이 아무런 까닭 없이 겪게 되는 극심한 고통이 이야기 전반에 걸쳐 배경을 이루고 있다. 평소 의롭게 살아오던 욥, 그는 어느 날 불시에 찾아온 불행의 깊은 수렁에 빠지게 된다. 넉넉하던 재산과 많은 자식들을 모두 잃어버리고, 그 자신도 육체의 병마에 시달리게 되어 결국 마지막까지 믿고 매달렸던 하느님마저도 그에게 갈등과 불평의 대상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이러한 욥의 모습은 오늘날에도 인간적인 생각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고통과 시련을 겪고 있는 많은 이들에게 공감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하지만 욥기가 제시하고자 하는 가르침은 인간이 겪는 고통의 문제나 공정하지 못한 것으로 보여지는 사회현상에 대한 답이 아니라, ‘인간이 하느님과의 관계 안에서 근본적으로 가져야 할 신앙의 자세’, 바로 그것이다. 특히 육체적, 내면적 고통 가운데 하느님의 부재(不在)를 느끼며 신앙의 위기에 빠져들기도 하는 우리 모두에게 신앙의 참된 본질을 밝혀주는 가르침이 담겨 있다.

 

 

2. 저자와 저술 시기

 

욥기는 구약성서 가운데 작품의 대부분이 대화 형식의 운문으로 구성되어 있는 유일한 책이다. 문학적으로 볼 때 전체의 틀을 이루는 짧은 ‘산문 부분’, 즉 머리말(1-2장)과 맺음말(42,7-17)이 가장 오래된 부분이다. 욥이 불의에 닥친 엄청난 고통을 어떻게 감수하였고, 결국 어떻게 행복을 다시 찾았는지 이야기하고 있는 산문 부분은 본래 기원전 2천년대 말기 근동지방에 널리 알려져 있던 민간 설화로써, 기원전 1,000년 이후 이스라엘에 전해진 것으로 추정된다.

 

이 이야기는 유배 시대(기원전 587-538년)이후 한 유다인에 의해 재구성되었고, 그 줄거리를 바탕으로 대화로 이루어진 운문 부분(3-31장; 38,1-42,6)이 작성된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는 사건의 전개 없이 ‘욥의 독백’(3장; 29-31장), ‘욥과 세 친구들의 대화’(4-27장), ‘욥과 주님 사이의 대화’(38,1-42,6) 등 욥기의 핵심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그 후 욥기 전통에 속하는 제자에 의해 ‘지혜 찬가’(28장)와 호교론적인 목적으로 작성된 엘리후의 담론(32-37장)이 첨가되었다. 이처럼 욥기 전체가 하나의 작품으로 형성된 것은 대개 기원전 6-4세기경으로 여겨진다.

 

 

3. 전체 구조

 

욥기는 전체적으로 볼 때 산문과 운문 부분으로 구분되어지며, 내용에 따라 다음과 같은 구조를 띠고 있다.

 

 

4. 주요 내용

 

욥기에 있어 문학 형식적으로 구분되는 산문과 운문 부분은 내용 면에 있어서도 주인공 욥의 상반된 태도와 서로 다른 신학적 관점을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까닭 없는 믿음’이란 핵심 주제를 중심으로 전체 이야기의 흐름이 전개되고 있다.

 

1) 산문 부분(머리말과 맺음말)

 

‘우스’라는 땅에 살고 있던 욥은 “흠없고 올바르며 하느님을 경외하고 악을 멀리하는”(1,1) 경건한 이로서 많은 자녀와 큰 재산을 가진 부자였다. 그러나 어느 날 천상 어전에서 벌어진 하느님과 사탄의 내기(1,6-12; 2,1-6)는 그에게 엄청난 불행을 초래하게 된다. 욥의 경건한 생활을 가상하게 여기시는 하느님께 “욥이 까닭 없이 하느님을 경외하겠습니까?”(1,9)라고 사탄이 반론을 제기함으로써 내기가 시작되었던 것이다. 하느님께서 복을 많이 내려주셨기 때문에 욥이 하느님을 경외할 뿐이지, 만약 그의 소유를 빼앗아 버린다면 틀림없이 하느님에게 등을 돌리고 말 것이라는 것이 사탄의 주장이다.

 

결국 욥에 대한 신뢰를 가지셨던 하느님은 시련을 통해 욥의 진심을 알아보자는 사탄의 내기를 받아들이신다. 여기서 ‘내기’는 고통을 겪으면서도 인내를 가지고 하느님께 대한 굳건한 신앙을 견지하는 욥의 모습을 부각시키기 위한 하나의 문학적 도구로 사용되고 있다. 그 결과 욥은 많은 재산과 자식들을 잃는 혹독한 시련을 겪게 된다. 그러나 갑자기 닥친 불행을 당하면서도 욥은 흔들림 없이 하느님께 대한 굳건한 믿음을 고백한다. : “알몸으로 어머니 배에서 나온 이 몸, 알몸으로 그리 돌아가리라. 주님께서 주셨다가 주님께서 가져가시니 주님의 이름은 찬미 받으실지어다.”(1,21)

 

이러한 욥의 인내와 신앙에도 불구하고 사탄은 하느님께 이제 욥 자신을 직접 병마로 친다면 틀림없이 하느님을 저주하게 될 것이라고 재차 내기를 제안한다. 그리하여 욥은 온 몸에 고약한 부스럼이 나는 극심한 고통을 당하게 된다. 그러나 그는 그 일을 당하면서도 “우리가 하느님에게서 좋은 것을 받는다면, 나쁜 것도 받아들여야 하지 않겠소?”(2,10)라는 말로 하느님께 대한 그의 ‘흠없는 마음’을 고백하고 있다.

 

머리말은 욥을 위로하러 찾아온 세 친구, 엘리바즈와 빌닷 그리고 소바르를 소개하면서 끝을 맺는다. 한편 욥기의 마지막 부분에 위치한 산문 형식의 맺음말에는 고통 가운데에서도 굳건한 믿음을 견지한 욥이 다시 행복한 삶을 회복하게 된다는 전통적인 인과응보 사상이 제시되고 있다.

 

2) 운문 부분(3,1-42,6)

 

대화 형식으로 구성된 운문 부분에서는 산문 부분과는 달리 먼저 고통 가운데에서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는 욥의 처절한 독백으로부터 시작된다. 이어 전통적인 인과응보 사상에 입각해 욥의 잘못을 추궁하는 세 친구들과 자신의 무죄함을 강변하는 욥 사이의 대화가 제시되며, 마침내 욥은 하느님의 현존을 체험함으로써 신앙의 참된 자세를 발견하게 된다.

 

① 욥의 독백(3장; 29-31장)

 

욥은 자신이 겪고 있는 혹독한 고통으로 인해 삶 자체에 대한 근원적인 회의를 토로한다.(3,1-19)

 

자신이 태어난 날을 저주하는 그는 “어찌하여 내가 태중에서 죽지 않았던가? 내가 모태에서 나올 때 숨지지 않았던가?”(3,11)라며 고통스러운 삶보다는 차라리 죽음을 바란다. 이러한 실존에 대한 의문 제기는 결국 생명을 주신 창조주 하느님께 대한 질문으로 귀착된다. : “어찌하여 그분께서는 고생하는 이에게 빛을 주시고, 영혼이 쓰라린 이에게 생명을 주시는가?”(3,20)

 

② 욥과 세 친구사이의 대화(4-27장)

 

욥을 찾아온 세 친구의 이야기는 전통적 교의인 ‘하느님의 정의에 의한 인과응보 사상’을 토대로 전개된다. 즉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선과 악에 상응하는 복과 벌을 내리신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하느님의 응보는 모두 현세에서 이루어지는 것으로 믿고 있다.(내세에서의 응보, 예를 들어 ‘의인의 불사불멸 사상’은 기원전 50-30년경 저술된 지혜서에서 비로소 나타난다.) 이러한 원칙은 다음과 같은 엘리바즈의 말을 통해 명확히 드러난다. : “생각해 보게나. 죄없는 이 누가 멸망하였는지? 올바른 이들이 근절된 적이 어디 있는지? 내가 본 바로는 밭을 갈아 불의를 심은 자와 재앙을 뿌린 자는 그것을 거두기 마련이라네.”(4,7-8)

 

하느님의 정의를 강조하는 친구들은 악인의 운명을 제시하면서(5,3-5; 8,11-19; 11,20; 15,20-35; 18,5-21; 20,4-29) 욥이 지금 겪고 있는 고통은 분명 그의 죄로 인한 것이 분명하다고 몰아세운다. : “자네 악이 크지 않는가? 자네의 죄악에 끝이 없지 않은가? … 그래서 그물이 자네 주위를 둘러치고 공포가 갑자기 자네를 소스라치게 한다네. 자네는 어둠을 보지 못하는가?”(22,5-11) 그리고는 욥으로 하여금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하느님과 화해할 것을 종용한다. : “자, 이제 그분과 화해하여 평화를 되찾게. 그러면 자네에게 행복이 찾아올 것일세.”(22,21)

 

그러나 욥은 이론과 신학에 입각하여 구체적인 삶의 진실을 외면하는 친구들을 공박하면서(16,2-3) 자신은 결코 죄를 짖지 않았음을, 자신의 무고함을 완강히 주장한다.(6,28-30; 9,21; 10,7; 12,4; 13,18.23; 16,17; 23,10.12) 그리고 자신의 결백함을 밝혀주시고 명예를 회복시켜 주실 하느님과의 만남을 간절히 원한다.(7,7-21; 9,25-31; 10,2-22; 13,20-22) 결국 욥이 원하는 바는 친구들의 위로도, 논쟁에서의 승리도 아닌 오직 하나 하느님 자신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욥은 하느님이 당신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시어 찾을 수 없다고 토로한다. : “아, 그분을 어디에서 찾을 수 있는지 알기만 하면 그분의 거처까지 찾아가련마는! 그분 앞에 소송물을 펼쳐 놓고 내 입을 변론으로 가득 채우련마는.”(23,3-4)

 

여기서 말하는 하느님의 부재(不在)는 존재론적인 부재가 아니라 욥이 느꼈던 실천적인 부재이다. 욥은 자신이 원하는 바대로 하느님이 나타나주시지 않자 실망하여 하느님을 원수지간으로 몰아간다. : “어찌하여 당신의 얼굴을 감추십니까? 저를 당신의 원수로 여기십니까?”(13,24) 하지만 그는 언젠가 자신의 무고함이 드러나게 되리라는 희망을 버리지 않는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구원자’로서 곁에 현존하고 계심을 깨닫게 된다. : “그러나 나는 알고 있다네. 나의 구원자께서 살아 계심을.”(19,25)

 

③ 하느님과의 만남과 대화(38,1-42,6)

 

마침내 운문 부분의 마지막에 이르러 하느님의 말씀이 욥에게 내려진다. 그러나 욥이 기대했던 그러한 말씀이 아니었다. 하느님은 인간의 원의에 따라 조종되는, 인간 사고의 틀 안으로 끌어들여지는 분이 아니라 절대적으로 자유로우신 분임을 드러내 보이신다.

 

하느님의 현존을 체험한 욥은 비로소 창조주 하느님은 피조물인 인간과 존재론적으로 다르신 분일 뿐 아니라, 인간 사이의 주고받는 교환의 법칙에 따라 기계적으로 행동하시지 않고 당신의 절대적인 자유 속에서 행동하심을 깨닫게 된 것이다. : “저는 알았습니다. 당신께서는 모든 것을 하실 수 있음을. 당신께는 어떠한 계획도 불가능하지 않음을! … 그렇습니다. 저에게는 너무나 신비로워 알지 못하는 일들을 저는 이해하지도 못한 채 지껄였습니다. … 당신께 대하여 귀로만 들어왔던 이 몸. 이제는 제 눈이 당신을 뵈었습니다. 그래서 제 자신을 부끄럽게 여기며 먼지와 잿더미에 앉아 참회합니다.”(42,1-6)

 

결국 욥은 하느님의 현존을 체험함으로써, 하느님을 믿고 경외하는 것은 현세적인 그 무엇을 얻기 위함이 아니라, 그분이 우리에게 생명을 주신 분이시기 때문임을 깨닫게 된다. 아무런 까닭 없는 믿음, 이것이 바로 우리 모든 신앙인들이 지녀야 할 참된 믿음의 자세임을 욥기는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월간 빛, 2003년 7월호, 송재준 마르코 신부(대구가톨릭대학교 성서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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