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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문화] 성서의 세계: 제비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04-11-09 조회수3,686 추천수0

성서의 세계 : 제비

 

 

예수님의 옷과 마티아 사도

 

사형수를 십자가에 매달 때에는 옷을 벗겼다. 옷을 비롯하여 그가 가지고 있던 유물은 형을 집행한 군사들의 차지가 되었다. 옛날에는 천이 귀하였기 때문에 사형수들이 걸쳤던 옷가지도 마다하지 않았던 것이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군사들도 이러한 관습에 따라 그분의 옷을 나누어 갖는다. 네 복음서가 모두 이 이야기를 전한다(마태 27,35; 마르 15,24; 루가 23,34; 요한 19,23-24). 이 가운데에서 가장 자세히 서술하는 요한 복음서에 따르면, 예수님께서는 속옷과 겉옷을 입고 계셨다. 네 명의 군사들은 우선 겉옷을 가져다가 저희 수에 맞게 나눈다. 그런데 속옷은 솔기가 없이 위에서 밑에까지 통으로 짠 것이어서, 사등분하게 되면 가치가 많이 떨어진다고 생각한 것 같다. 그래서 제비를 뽑아 한 사람이 그것을 통째로 차지한다. 복음서 저자들은 이로써 시편 22장 19절의 말이 실현된 것으로 보았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뒤, 베드로를 비롯한 열한 사도는 스승을 배신한 끝에 자살한 유다의 자리를 채울 필요성을 느낀다(사도 1,15-26). 물론 사도가 되려면 일정한 자격을 갖추어야 한다. 곧 다른 사도들처럼, 예수님께서 활동하시는 동안 줄곧 그분과 동행한 사람이어야 한다. 제자들은 이러한 요건을 갖춘 요셉과 마티아 두 사람을 앞에 세우고 기도한다. “모든 사람의 마음을 아시는 주님, 이 둘 가운데에서 주님께서 뽑으신 한 사람을 가리켜주시어, 유다가 제 갈 곳으로 가려고 내버린 이 직무, 곧 사도직의 자리를 넘겨받게 하십시오.” 그리고 나서 제비를 뽑은 결과 마티아가 열두번째 사도가 된다.

 

 

던지는 제비

 

신약성서의 이 두 예에서도 볼 수 있듯이, 고대 근동에서는 제비뽑기가 널리 이용되었다. 그러나 그 형태는 우리 나라에서 통상 쓰였고 또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것과는 다르다. 우리에게 제비란 으레 뽑는 것이다. 그리고 당사자들이 직접 여럿 가운데에서 하나를 골라잡는다. 그러나 고대 근동에서는 이를테면 던지는 제비가 쓰였다. 그래서 성서에서는 제비와 관련하여 주로 ‘던지다’와 ‘떨어지다’라는 동사가 쓰인다.

 

성서에는 제비가 무엇으로 어떻게 만들어졌으며, 또 ‘던지기’가 어떻게 실시되었는지 구체적인 이야기가 나오지 않는다.

 

그런데 잠언 16장 33절에 보면, ‘제비를 옷 폭에 던지다.’라는 표현이 나온다. 지금도 중동에서는 남자들이 목에서 발까지 위아래가 하나로 된 폭 넓은 옷을 입는다. 그래서 바닥에 앉았을 때에 한복의 치마폭과 같은 부분이 생겨 그 위에다가 사전에 표시를 한 제비들을 던졌다. 물론 여러 가지 정황으로 보아 그냥 땅바닥에 던지는 경우도 많았음에 틀림없다. 이때에 먼저 떨어진 제비에 해당하는 사람이 뽑혔던 것으로 여겨진다. 이러한 과정을 전체적으로 ‘제비를 던지다.’라고 표현한 것이다.

 

우리 나라에서는 당사자가 직접 제비를 뽑는데, 성서에서는 원칙적으로 제삼자가 종지 같은 데에 제비들을 넣고 흔들어 제비가 떨어지게 하였기 때문에 이해 당사자는 수동적으로만 참여한다. 기원전 10세기경의 그리스 시인인 호메로스가 쓴 것으로 알려진 일리아드에 보면, 제비들을 투구 안에 넣고 흔드는데 흔드는 사람은 공정을 기하고자 고개를 돌렸다고 한다.

 

제비를 만드는 재료는 특별히 정해진 것이 없었던 것 같다. 구약성서 이후에 편집된 유다인들의 탈무드에 따르면, 일년에 한 번 거행되던 속죄일에 주님을 위한 속죄제물로 바칠 숫염소와 광야로 내보낼 숫염소를 고를 때에 제비들을 넣는 그릇을 회양목나무로 만들었는데, 나중에는 금으로 만들기도 하였다고 한다. 제비 자체는 올리브 나무, 호두나무, 회양목나무, 검은 조약돌과 흰 조약돌 등 편의에 따라 만들었다. 이것은 성전에서 쓰던 제비인데, 일반인들은 사금파리, 나중에는 종이도 사용하였다.

 

이렇게 성서의 제비는 우리와 달리 뽑는 것이 아니라, 통에 넣어 (흔들어서) 던지는 것이고 또 떨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형태는 주사위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우리말에서는 제비가 아니라 주사위라고 옮기기도 한다.

 

 

공정한 판정을 위하여

 

그렇다면 이러한 제비를 언제 뽑았는가? 잠언 18장 18절에 보면, “제비가 분쟁을 끝내고/세도가들 사이를 판가름한다.”라는 말이 나온다. 잠언은 오랜 세월 동안의 경험이 축적된 말이다. 당사자들의 이해가 달려 자칫 분쟁을 일으킬 수 있다든가 섣불리 취사선택을 하기가 어려운 경우, 제비뽑기가 매우 적절한 결정 방식으로 쓰였던 것이다. 그 배경에는 일반 사람들은 물론 “세도가들”도 제비뽑기의 결과에 흔쾌히 승복하였다는 사실이 있다.

 

“제비는 옷 폭에 던져지지만/결정은 온전히 주님에게서만 온다”(잠언 16,33).

 

제비뽑기를 단순히 운수의 문제가 아니라 하느님의 뜻이 담긴 것으로 믿었기 때문에, 아무도 그 결과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던 것이다.

 

구체적으로 제비뽑기는 상당히 다양한 계기에 이루어졌다. 그러한 계기들을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여럿 가운데에서 하나를 가려낼 때이다. 여럿은 개인이나 집단이 될 수도 있고, 짐승이 될 수도 있고, 날짜가 될 수도 있다. 마티아 사도를 뽑은 것이 여기에 속한다. 그리고 구약성서의 한 전통에 따르면, 이스라엘에서 첫 임금 곧 사울을 뽑을 때에 이 방법이 쓰인다(1사무 10,20-24). 판관 시대에 베냐민 지파를 상대로 전쟁이 일어났을 때에, 어느 지파가 선봉을 서느냐 하는 것도 제비뽑기로 결정한 것 같다(판관 20,9.18). 성전에서 봉직하는 사제들, 성가대, 문지기들의 작업도 이 방법으로 할당하였다(1역대 24,5; 25,8; 26,13). 바빌론 유배에서 돌아온 이들 가운데에서 어떤 사람들을 예루살렘에 살도록 하느냐는 문제가 대두되는데, 이때에도 이 방식이 채택된다(느헤 11,1). 성전에서 쓰이는 장작을 대는 집안들의 순서도 제비뽑기로 결정된다(느헤 10,35). 이 마지막 두 예는 물론 유배 이후 복구 시대라는 특별한 경우에만 해당된다.

 

제비뽑기는 잘못한 사람을 가려내야 할 경우에도 쓰인다(여호 7,10-26; 1사무 14,42; 요나 1,7). 짐승과 관련된 것은 위에서 말한 속죄일의 숫염소가 유일한 예이다. 두 마리 짐승 가운데에서 하느님을 위한 것과 귀신으로 생각한 것 같은 아자젤을 위한 것을 골라야 하기 때문에, 그 선택을 하느님께 맡긴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이교인의 경우이기는 하지만, 제비뽑기는 택일에도 쓰였다. 페르시아의 재상 하만이 유다인들을 몰살할 날을 이 방법으로 결정한 것이다(에스 3,7; 9,24).

 

제비뽑기를 시행하는 둘째 계기는 여러 사람이 물건이나 땅을 분할할 때이다. 예수님의 옷을 군사들이 나누어 가진 것이 바로 이 예에 속한다. 사람까지 포함된 장물이나 노획물이나 전리품을 분배할 때에도 흔히 제비뽑기를 하였다(욥 6,27; 시편 22,19; 잠언 1,14; 집회 14,15; 에제 24,6; 요엘 4,3 등).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들어간 이스라엘인들은 바로 이 방법으로 땅을 나누어 받는다. 사실 구약성서에서 대부분의 제비뽑기가 이 경우에 해당한다. 여기에서부터 “제비”에 해당하는 히브리 말(과 그리스 말)의 의미가 넓어진다.

 

이스라엘인들이 나누어 받은 땅은 자손들에게 대대로 물려주어야 한다. 그래서 ‘제비’가 ‘상속재산’을(여호 17,14; 시편 16,5 등), 그리고 어떤 이에게 주어지는 ‘몫’이나 ‘직무’도 의미하게 된다(사도 1,17; 8,21). ‘제비’는 더 나아가서 각자에게 주어진 ‘운명’이라는 은유적 의미도 지니게 된다(이사 17,14; 예레 13,25; 다니 12,13 등 참조). 신약성서에서는 하느님에게서 받는 궁극적 구원까지도 뜻하게 된다(골로 1,12). 이러한 의미의 다양화를 제비와 토지와 몫과 운명을 다 뜻하는 영어 ‘lot’에서도 볼 수 있다.

 

 

결정은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에서는 점을 보는 것을 엄금하였다(신명 18,10). 어떤 매체를 통해서 어려운 문제를 풀거나 불안을 느끼는 미래를 아는 것이 법으로 허락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제비뽑기는 점술과는 엄연히 구분된다. 특히 가나안 땅을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제비를 뽑아 나누어주는 것은 하느님의 명백한 명령에 따른 것이다(민수 34,13; 36,2 등). 그래서 아예 제비 뽑는 일을 “주님 앞에서” 곧 성소에서 실시하기도 한다(여호 18,6; 19,51). 이는 제비뽑기가 하느님께서 사람들에게 당신의 뜻을 알려주시는 하나의 방식으로 생각되었음을 의미한다. 그래서 “제비는 옷 폭에 던져지지만`/`결정은 온전히 주님에게서만 온다.”는 격언이 생긴 것이다(잠언 16,33).

 

사도들이 열두번째 사도를 제비로 선택한 것도 같은 생각을 드러낸다. 열한 사도는 자기들이 동료 사도를 뽑아 세운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하느님께서 선택하시는 것이다. 그래서 당신께서 뽑으신 사람을 제비로 알려주십사고 기도한다.

 

사도행전 2장부터는, 곧 성령 강림 이후 초대교회에서는 더 이상 제비를 뽑는다는 이야기가 나오지 않는다. 이는 교회를 가르치고 이끌어주시는 성령의 활동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경향잡지, 2002년 7월호, 임승필 요셉 신부(주교회의 성서위원회 번역담당 총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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