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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문화] 성서의 세계: 점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04-11-09 조회수3,405 추천수0

성서의 세계 : 점(占)

 

 

발람과 사울

 

이집트를 탈출한 이스라엘 민족은 우여곡절 끝에 사해 북쪽, 요르단 동녘의 모압 평야에 이르러 진을 친다(민수 22―24장). 이스라엘인들이 거기까지 오면서 한 일을 이미 알고 있던 모압 임금 발락은 겁에 질린다. 그리하여 그는 당시 국제적으로 이름을 날리던 점쟁이 발람에게 원하는 대로 다 해주겠다고 약속하면서 그를 데려온다. 자기 민족보다 강력한 이스라엘에 맞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아보려는 것이다. 또 이 신통한 점쟁이가 이스라엘인들을 저주해 주면, 그들을 쳐부수고 자기 땅에서 몰아낼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발락에게 온 발람은 제단들을 쌓게 하여 황소와 숫양을 제물로 바친다. 그러고 나서는 어떤 징조를 찾는다. 이윽고 발람이 발락에게 점 내용을 밝히는데, 그 내용이 발락의 바람과는 정반대로 이스라엘을 축복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제사와 징조 찾기가 되풀이된다. 발람은 이번에도 발락의 기대를 저버린다. 야훼 하느님께서 함께 계시는 이스라엘에게서는 어떠한 재앙도 어떠한 불행도 볼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이렇게 선포한다. “정녕 야곱에는 점술이 없고 / 이스라엘에는 주술이 없다”(민수 23,23).

 

이스라엘은 본디 성조 야곱의 다른 이름인데, 조상의 두 이름이 민족 이름으로 쓰이는 것이다. 그리고 이 말에서, 옛날에는 “점술”과 “주술”이 같은 부류의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발람의 이 말은, “야곱에 맞설 점술이 없고 / 이스라엘에 맞설 마술이 없다.”로 번역할 수도 있다. 이스라엘인들을 해칠 점술도 마술도 없다는 뜻이다.

 

그로부터 약 200년 뒤, 이스라엘의 첫 임금 사울은 신령이나 죽은 이의 영을 불러내어 혼령과 인간 사이를 매개하는 영매와 또 점쟁이들을 나라 밖으로 몰아낸다(1사무 28,3-25). 야훼 하느님에 대한 믿음과 점술이나 주술이 병존할 수 없기 때문에 취한 조치이다. 그러나 이 비극의 주인공 사울은 커다란 자가당착에 빠지고 만다. 불레셋인들과의 결전을 앞두고 두려움에 휩싸인 그는 자기가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 해답을 찾는다. 그것을 주실 수 있는 분은 야훼 하느님이신데 그분께서는 침묵을 지키신다. 당신의 말씀을 따르지 않는 사울을 이미 배척하셨기 때문이다(1사무 15,23). 미래에 대한 불안을 이기지 못한 사울은 아직도 은밀히 영매 일을 하는 여자를 찾아내게 한다. 그리고 밤중에 변장을 하고서 그 여자를 찾아간다. 거기에서 알아낸 것은 자기의 비극적 종말이다.

 

 

점술의 땅 메소포타미아

 

성서의 이 두 일화에서 이미 엿볼 수 있듯이, 이스라엘과 주변 민족들에게서도 세계의 다른 곳들과 별로 다름없이 점술과 주술이 번성하였다. 특히 세계 사대 문명 발상지 가운데 하나로 이스라엘에 여러 면으로 큰 영향을 끼친 메소포타미아는 점술이 대단히 발달하고 번성하였다. 이 메소포타미아의 점술은, 늘 미래에 대한 호기심과 불안을 구체적으로 풀어줄 대상을 찾는 인간의 근본 성향 때문에 현대의 서양에서까지 생명력을 견지하고 있다. 사실, 성서의 어떤 전통에 따르면 발람도 메소포타미아 출신이다(민수 23,7; 신명 23,5).

 

어디에서나 비슷하지만 점술은 두 가지 범주로 나뉜다. 첫째는 자연적으로나 생리적으로 일어난 현상을 보고 판단하는 것이다. 천체를 관찰하는 점성술이 여기에 속하는데, 고대 메소포타미아에서는 이 분야가 국가와 왕실의 전유물로서 엄격히 통제되었다. 메소포타미아에서 가장 널리 쓰이던 점술은 희생제물로 바친 짐승의 내장 특히 간의 모양을 살피는 내장점(內臟占)이다. 이 점은 신중히 선택되어 신전에 딸린 학교에서 고도의 교육을 받은 제관들만 볼 수 있었다. 고대 근동인들은 생명이 피에 들어있고 간이 바로 그러한 피의 자리로서 생명 그 자체라고 생각하였다. 게다가 메소포타미아에서는 불가사의한 논리로, 희생제물의 간과 신들을 동일시하였다. 그 결과로 간을 잘 살피면 신들의 태도나 의도를 알아내고 미래를 예견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이 밖에도 이상한 기후 현상이라든가 괴이한 형태의 구름, 사람이나 짐승의 기형 출산, 뱀이 갑자기 나타나거나 없어지는 현상, 새가 나는 모양, 나무의 모양, 불길과 연기의 모습, 개가 요상하게 짖는 것을 해석하는 점, 관상이나 손금으로 보는 점, 그리고 이상한 꿈을 풀이하는 꿈점 같이 것이 이 첫째 범주에 속한다.

 

점술의 둘째 범주는 점쟁이 자신이 어떤 현상을 만들어 그것을 보고 판단하는 것이다. 물이 든 그릇에 기름을 떨어뜨려 그 모양을 살피는 기름점, 화살을 흔들거나 주사위를 던져 판단하는 점, 그리고 사울의 경우에서처럼 혼령을 불러들이는 강신술 등이 여기에 속한다.

 

메소포타미아에서는 이렇듯 다양한 점술이 종교의 핵심 분야 가운데 하나였으며 백성의 삶의 일부였다.

 

 

하느님의 백성 이스라엘의 점

 

구약성서에도 점술이나 주술에 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그리고 이것들에 관한 이스라엘인들의 자세는 사울의 경우에서도 나타나듯이 이율배반적이다. 이스라엘에서는 점술과 주술이 엄중히 금지된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그러한 것들이 다양한 형태로 백성들 사이에 널리 퍼져있었음을 볼 수 있다. 정통 종교와 점술 및 주술의 경계를 확연히 긋기가 어려운 경우도 없지 않다. 구체적으로는, 하느님의 뜻을 알아보는 데에 쓰였다는 사실 외에는 구체적인 사항이 별로 알려지지 않은 “우림과 둠밈” 같은 것을 점술로 분류하느냐 마느냐는 문제가 그 한 예이다(탈출 28,30; 1사무 28,6; 느헤 7,65). 또한 구약성서는 천여 년의 생활상이 시대순으로 일목요연하게 나타나 있지 않고 복합적이며 복잡하게 반영되어 있다. 그래서 일부에서는, 점술에 대한 비판이나 금령이 구약성서 전체에 해당하는 근본적인 자세가 아니라, 특정 시대나 특정 저자들의 견해일 따름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이사야 예언자는 유다 땅에 “동방에서 온 점쟁이들이 가득하고 / 불레셋처럼 주술쟁이들이 가득하다.”고 한탄한다(이사 2,6. 그리고 8,19 참조). 성서에서는 점술이나 주술에 쓰이는 물건이라든가 방법 등이 자세히 서술되지 않는다. 그렇지만 성서의 땅에서도 특히 메소포타미아의 영향으로 다양한 점술이 번성하였음은 분명하다. 열왕기 저자에 따르면, 북부 이스라엘 왕국은 자기가 저지른 죄악 때문에 멸망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 가운데에는 점도 들어있다(2열왕 17,17). 폭군으로 유명한 유다의 므나쎄 임금 역시 다른 여러 죄악과 함께 영매와 점쟁이들과 어울린 죄로 단죄를 받는다(2열왕 21,6). 그래서 요시야 임금은 개혁을 하면서 점쟁이들과 영매들을 대대적으로 제거하게 된다(2열왕 23,24).

 

다른 한편으로, 율법에서는 점술을 비롯한 갖가지 주술이 명백히 금지된다. “너희는 점을 쳐서도 안되고, 주술을 부려서도 안된다”(레위 19,26. 그리고 탈출 22,17; 레위 19,31; 신명 18,10-14). 이러한 요사스러운 술법들은 “역겨운 짓”으로 하느님의 백성을 “부정하게” 만든다(신명 18,9; 레위 19,31). 영매나 점쟁이들을 찾아가는 것은 우상을 숭배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중대한 죄이다. 하느님께서는 그러한 죄를 저지르는 자를 당신 “백성에게서 잘라 내리라.”고 경고하신다(레위 20,6). 하느님의 백성은 이런 사술(邪術)을 부리는 자들이 아니라 예언자의 말을 들어야 한다(신명 18,15). 율법에 이어 예언자 자신들이 점술에 혹독한 비판을 가한다. 점쟁이들은 거짓 예언자들과 한통속으로(에제 22,28; 미가 3,7), 그들이 쏟아내는 것은 거짓말일 따름이라는 것이다(예레 27,9-10; 즈가 10,2).

 

 

하느님의 새 백성과 점

 

신약성서에서는 점과 관련된 직접적인 언급이 사도행전 16장 16-19절 한 군데에만 나온다. 마케도니아 지방 필립비라는 고을에 점귀신 들린 하녀 하나가 점을 쳐서 주인에게 큰 돈벌이를 해 주고 있었다. 그 여자가 바오로 사도 일행을 보고, “이 사람들은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의 종으로서 지금 여러분에게 구원의 길을 선포하고 있습니다.”라고 소리를 지른다. 여러 날을 그렇게 외치는 바람에 기분이 언짢아진 바오로가 그 점귀신에게,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에게 명령하노니 그 여자에게서 나가라.” 하고 명령한다. 그 순간에 그 주인의 돈벌이도 사라져버린다.

 

복음서는 기쁜 소식을 선포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활동과 수난에 집중되어 있다. 이 예수님의 삶과 죽음에는 점술 같은 것이 끼어들 여지가 조금도 없었다. 사도행전과 서간들은 초기 신도들의 삶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들의 삶에서도 점술은 전혀 볼 수 없다. 물론 구약성서와 달리 신약성서는 짧은 기간에, 수가 많지 않은 신도들의 삶의 일부분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인간의 유일한 “길이요 진리요 생명”으로 오신 분(요한 14,6), 곧 한 분뿐이신 창조주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강력한 복음을 받아들인 그들은 점술 같은 것을 찾을 필요성을 전혀 느끼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구원의 길”을 걷고 있다고 확신한 그들은 자기들을 이끌어주시는 주님을 신뢰하고 그분께 의지하는 것으로 충분하였다. 그들 안에, 그들 사이에 자리를 잡은 “진리”가 그들을 자유롭게 해준 것이다(요한 8,32).

 

[경향잡지, 2002년 2월호, 임승필 요셉 신부(주교회의 성서위원회 번역담당 총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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