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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문화] 성서의 세계: 저승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04-11-08 조회수3,603 추천수0

성서의 세계 : 저승

 

 

지옥 - 고성소 - 저승

 

주일과 대축일에 우리는 더러 사도신경으로 믿음을 고백한다. 그 가운데에 이런 말이 있다.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시고 묻히셨으며/저승에 가시어 사흗날에 죽은 이들 가운데 부활하시고.” 지금은 이렇게 “저승에 가시어”라고 하지만, 1997년 이전에는 “고성소에 내리시어”라고 하였고, 1967년까지는 또 이 말마디가 “지옥에 내리시어”라고 되어있었다.

 

‘지옥 - 고성소 - 저승’은 서로 다른 곳이 아니라 한 장소이다. 본디 사도신경의 표현은 ‘천당과 연옥과 지옥’의 교리가 확립되지 않았던 때에 사후 세계 또는 죽음의 세계를 가리키던 성서의 용어이다. 구약성서와 신약성서에서는 이 세계를 가리키는 대표적인 말이 있다. 곧 구약성서의 히브리 말에서는 ‘셔올’이고, 신약성서의 그리스 말에서는 ‘하데스’이다. 그래서 지옥 → 고성소 → 저승으로 바뀐 것은 한국·중국·일본에서 이루어진 번역의 문제이다. 성서 용어를 한자말 또는 우리말로 적절히 표현할 수 있는 낱말을 찾거나 만들다가 결국 ‘저승’으로 귀결된 것이다.

 

‘지옥(地獄)’은 말 그대로 지하 감옥으로, 생전에 큰 죄를 지은 사람들이 영원한 벌을 받는 곳이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러한 ‘지옥’으로 내려가셨다 함은 조리에 맞지 않는다. 그래서 중국과 한국과 일본에서는 한때, 라틴 말 limbus(우리말에서는 두음법칙에 따라 ‘임보’)를 ‘고성소(古聖所)’라고 번역하여 사용하였다. 이는 말 그대로 ‘옛 성인들이 머무르는 곳’, 곧 예수님 부활 이전의 성인들과 의인들이 그분의 구원을 기다리고 있었다고 하는 곳이다.

 

이러한 의미의 지옥이나 고성소는 사도신경의 뜻에 들어맞지 않는다. 사도신경이 성서의 용어로 가리키는 장소는 의인이나 죄인의 구분 없이 죽은 이면 모두 가는 곳이다. 성서가 말하는 이러한 죽음의 세계를 표현하는 데에 ‘저승’이라는 말이 그 중 낫다고 판단하여 “저승에 가시어”로 바꾼 것이다. 다만, 성서에서는 죽음의 세계가 당시 사람들의 우주관에 따라 지하에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에 따라 지옥/고성소에 “내리시어”라고 번역하였다. 그런데 ‘저승’은 흔히 수평적으로, ‘이승’ 너머 어떤 곳으로 생각한다(라틴 말의 ‘임보’도 본디 ‘세상 끝’을 뜻한다). 이에 따라 우리말 표현도 저승에 “가시어”로 바꾼 것이다.

 

 

죽음의 세계

 

그렇다면 성서의 사람들은 죽음의 세계를 어떻게 생각하였는가? 여기에서 먼저 유념해야 할 사항은 성서가 어떤 가르침을 체계적으로 제시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또한 많은 경우에 교리로 내세우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당시 대중의 사고와 표현 방식을 이용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성서 여기저기에 나오는 사후 세계에 관한 말을 모아 정리한다고 해서, 죽은 이들의 운명이라든가 죽음 이후에 관한 교리가 그대로 나오지는 않는다. 사후 세계를 이를테면 대중적으로 생각하였기 때문에, 그에 대한 성서의 용어나 표현은 문화적 교류가 활발하였던 이집트나 메소포타미아와 많은 공통점을 지닌다. 다만, 이 두 문명권의 문학에서는 사후 세계에 관하여 상당히 자세하게 서술하는 반면에, 성서에서는 자제하는 경향을 보인다.

 

성서의 사람들은 우주가 크게 세 개의 층으로 되어있다고 생각하였다. 곧 천상과 지상과 지하이다. 지상 곧 땅 밑으로는 거대한 물이 있고 그 아래로 큰 강에 둘러싸인 ‘셔올(하데스)’이 자리잡고 있다.

 

해가 지는 서쪽에 사후 세계가 있다는 견해도 나타나기는 하지만(외경인 「에녹서」 22,1-5), 이 셔올은 일차적으로 지하에 있는 세계라고 생각하였다(민수 16,30). 지하에서도 가장 깊은 곳이다(신명 32,22; 이사 7,11; 에제 31,14; 마태 11,23; 루가 10,15). 그래서 운문에서는 그곳이 “산의 뿌리” 밑에 있다고 표현하기도 한다(요나 2,6). 또 땅 밑으로 내려간 곳에 있다 하여, “깊은 구렁”이나 “구덩이”라고 부르기도 한다(시편 16,10; 28,1; 이사 38,17 등). 땅 밑에는 지하의 대양(大洋)이 흐른다. 그에 따라 셔올은 여러 가지 위협적인 물의 표상으로 서술되기도 한다(시편 42,8; 69,2-3.15-16; 요나 2,3-4).

 

지하에는 천체의 빛이 미치지 못한다. 어둠이 바로 셔올의 근본적인 특성이다. 그래서 이곳은 “어둠”이나 “암흑”으로도 부른다(시편 88,7.13; 욥 17,13). 어둠은 침묵으로 이어진다. 셔올은 곧 “침묵의 땅”이기도 하다(시편 94,17; 115,17). 암흑과 침묵은 멸망의 상태와도 같다. 그래서 아예 셔올을 “멸망의 나라”라고 부르기도 한다(욥 26,6; 시편 88,11; 잠언 15,11 등).

 

옛날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죽음은 곧, “너는 먼지이니 먼지로 돌아가리라.”라는 창세기의 말씀을 생각하게 한다(3,16). 그래서 죽음의 세계는 또 먼지가 특징을 이루기도 한다(욥 17,16; 21,26; 시편 7,6). 죽음의 세계를 장소적으로 이해하였기 때문에, 그곳에는 대문과(욥 38,10; 시편 9,14 등) 빗장도(욥 17,16) 있다고 생각하였다.

 

저승에 문이 있다는 표상은 단순한 입구의 의미를 넘어, 죽은 이들이 한번 들어가면 죽음이 그들을 가두어버려 다시는 나오지 못한다는 셔올의 성격과 죽음이 죽은 이들에 대해 행사하는 세력을 드러낸다(특히 마태 16,18). 사실 성서의 사람들은 죽음과 함께 셔올도 곧잘 의인화하여 생각하곤 하였다. 그들에게 셔올은 만족할 줄 모르고 목구멍을 계속해서 벌린 채 사람들을 산 채로 집어삼켜 버리는 괴물과도 같다(잠언 1,12; 20,20; 이사 5,14; 하바 2,5).

 

 

죽은 이들의 세계

 

이러한 셔올로 내려가는 이들은 아무런 기쁨도 아픔도 느끼지 못한다는 것이 전반적인 생각이었다(집회 14,16). 욥이 “그곳은 악인들이 소란을 멈추는 곳 / 힘 다한 이들이 안식을 누리는 곳”이라고 하는데(욥 3,17), 이는 암흑과 침묵 속에 아무런 생기 없이 지속되는 생존 방식을 시적으로 묘사한 것으로 이해된다. 하느님의 권능이 미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셔올에 내려가면 사람들에게서는 물론 하느님에게서조차 멀어지고 잊혀진다. 그래서 그곳을 아예 “망각의 나라”라고 부르기도 한다(시편 88,13). 그곳에서는 사람들을 돌보시는 하느님의 선하신 손길이 닿지 않기에, 그분 현존의 혜택을 누리지 못하기에, 그분께 감사를 드릴 일도, 그분을 찬양할 일도 없게 된다(시편 6,6; 30,10; 88,11-13; 115,17; 이사 38,18; 집회 17,27-28).

 

하느님과의 생생하고 활발한 관계가 끊긴다는 것이야말로, 성서의 사람들이 죽음이나 저승과 관련하여 느끼는 가장 큰 아픔이었다. 결국 이러한 셔올에 갇혀있는 이들은 “그림자”라고 불린다(시편 88,11; 이사 14,9). 죽었다고 해서, 셔올로 내려갔다고 해서, 생존이 완전히 끝나지는 않는다. 그러나 어둠과 침묵과 망각과 멸망의 이 나라에서는 마치 그림자와 같은 생존이 지속될 뿐이다. 셔올이 죽음 이후의 세계이기는 하지만, 거기에는 아무런 희망이 없기 때문에 본 의미의 내세는 아니었던 것이다.

 

어떠한 사람들이 셔올로 내려가 이렇게 최소한으로 약화된 삶을 사는가? 우선, 죽으면 악인이나 선인이나 아무 구분 없이 모두 죽음의 세계로 내려간다. 이러한 생각은 근본적으로 신약성서에까지 이어진다(사도 2,27.31). 그러나 선악에 대한 보상, 영혼의 불사불멸, 육신의 부활에 관한 새로운 사상이 대두되면서, 죽음의 세계도 여러 가지로 생각하게 된다.

 

이러한 유다교의 생각을 신약성서의 저자들도 그대로 이어받는다. 그래서 선인이 행복을 누리는 곳과 악인이 불행을 겪는 곳으로 죽음의 세계가 세분되기도 하고(루가 16,23), 셔올 곧 하데스도 부활 때까지만 죽은 이들이 갇혀있는 곳으로 묘사되기도 한다(묵시 20,13). 그리고 선인들이 부활을 기다리는 “낙원”도 나오고(루가 23,43. 여기에 2고린 5,8; 필립 1,23; 히브 12,22; 묵시 7,9 등도 보탤 수 있다), 악인들이 벌을 받는 “지옥”도 나온다(마태 5,22; 25,41 등). 그러나 지옥에 관한 본격적인 교리는 성서 이후 교회 시대에 가서야 확립된다.

 

 

죽음의 장벽을 부수시고

 

사도신경은 성서의 용어를 빌려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뒤에 저승에 가셨다고 표현한다(1베드 3,19; 2베드 4,6 참조). 말은 내용이라는 몸을 표현하는 옷과 같다고 할 수 있다. 저승 또는 저승에 가셨다는 것 역시 의복과 같은 것이다. 우리는 그 의복 너머의 실체를 알아들어야 한다. 우선 장소적인 이해를 넘어서야 한다.

 

사도신경의 이 표현은 예수님께서 완전히 돌아가셨음을 말한다. 참 인간이 되신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마침내 죽음의 세계 밑바닥까지 내려가시어, 산 사람들만이 아니라 이미 죽은 이들과도 운명을 같이하신다. 그리고 부활하심으로써, 돌아오는 길 없는 죽음의 세계에 생명의 길을 여신다. 희망 없이 그림자와 같은 생존을 지속하던 이들에게 당신의 운명에 동참할 수 있는 길을 터놓으신다.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맏이”로(골로 1,18) 부활하심으로써, 나머지 죽은 이들도 당신의 부활에 참여할 수 있게 해주신 것이다.

 

사도신경의 말은 결국 예수 그리스도께서 산 이와 죽은 이의 구분 없이 모든 인간의 완전한 구원자이심을 고백하는 표현이다. 그분의 죽음과 부활로 이제 죽음은 더 이상 “멸망의 나라”로 들어가는 대문이 아니라, 부활 곧 새로운 생명으로 태어나는 과정일 따름이다.

 

[경향잡지, 2001년 12월호, 임승필 요셉 신부(주교회의 성서위원회 번역담당 총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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