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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문화] 성서의 세계: 자루옷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04-11-09 조회수7,268 추천수0

성서의 세계 : 자루옷

 

 

자루와 옷

 

복음서(마태 11,21 = 루가 10,13)에 따르면,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기적을 많이 일으키셨는데도 회개하지 않는 고을들을 꾸짖으시며 이렇게 말씀하신다. “불행하여라, 너 코라진아! 불행하여라, 너 베싸이다야! 너희에게 일어난 기적들이 띠로와 시돈에서 일어났더라면, 그들은 벌써 자루옷을 입고 재를 뒤집어쓰고 회개하였을 것이다.” 코라진과 베싸이다는 유다인들이 사는 곳이고, 띠로와 시돈은 이교인들이 사는 곳이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백성이 하느님을 모르는 자들보다 오히려 못하다고 한탄하시는 것이다.

 

"공동번역 성서"와 개신교에서는 “자루옷”이 아니라 “베옷”이라 하고 「200주년 기념 신약성서」에서는 그냥 “자루”라고 한다(그러나 이 번역본의 묵시 6,12와 11,3 참조). 우선 베옷은 베로 지은 옷인데, 베는 삼실이나 무명실이나 명주실 따위로 짠 피륙을 일컫는다. 베는 삼베의 준말로도 쓰이는데, 우리 나라에서는 이 삼베로 상복(喪服)을 만든다. 사실 성서의 사람들은 자루옷을 상복으로도 입었다. 그래서 삼베로 만든 옷이라는 뜻에서 “베옷”이라고 옮겼을 것이다.

 

“자루옷”에 해당하는 그리스 말은 ‘삭코스’라고 하는데, 이 단어는 본디 히브리 말을 비롯한 셈족어에서 유래한다. 아카드 말에서는 ‘샥쿠’, 히브리 말에서는 ‘삭(알파벳으로는, saq)’이라고 한다. 이것이 그리스 말을 거쳐 라틴 말(saccus)로 이어지고 또 현대의 서양 말로 흘러 들어간다. 영어에서는 sack, 불어에서는 sac, 독일어에서는 Sack라고 한다. 우리 나라에서는 현재 ‘배낭(背囊)’이라는 한자말을 주로 쓰는데, 예전에는 ‘륙색’이라는 외래어를 곧잘 사용하였다. 이는 영어(rucksack)에서도 쓰이지만, 원래는 독일 말로 ‘등’을 뜻하는 Ruck과 ‘자루, 부대, 주머니’ 등을 뜻하는 Sack이 결합하여 이루어진 복합 명사이다.

 

구약성서 히브리 말의 ‘삭’과 신약성서 그리스 말의 ‘삭코스’는 일차적으로 ‘자루’를 뜻한다. 그러나 위의 복음서 구절 같은 데에서는 자루 형태의 의복을 뜻한다. 그래서 영어에서는 sack에다 ‘옷’을 뜻하는 cloth를 붙여 사용한다. 이는 그냥 ‘베’나 ‘삼베’라 하지 않고 ‘베옷’ 또는 ‘삼베옷’이라고 하는 것과 같다.

 

 

자루처럼 생긴 옷

 

사실 그리스 말 ‘삭코스’는 신약성서에서 네 번, 그리스 말로 쓰인 구약성서 제2경전에서 열다섯 번 쓰이는데 다 옷을 가리킨다. 히브리 말 ‘삭’은 구약성서에서 마흔여덟 번 나오는데, 다섯 번만 ‘자루’의 뜻으로 쓰이고 그 밖에는 늘 의복을 뜻한다. 이 낱말은 원래 염소나 낙타 같은 짐승의 ‘털로 짠 거친 천’을 뜻하는데, 이 천의 첫째 용도가 곡식 같은 것을 넣는 자루였다(창세 42,25.27.35; 레위 11,32; 여호 9,4).

 

이러한 천으로 만든 ‘자루옷’이 구체적으로 어떤 모습이었느냐에 관해서는 크게 두 가지 의견이 있다. 첫째는, 지금도 쓰이는 곡식이나 시멘트 자루처럼 위아래로 긴 네모 형태이다. 밑은 터지고 위는 머리와 팔이 나올 수 있게 구멍을 만든 것이다. 같은 낱말이 ‘자루’와 함께 옷도 뜻한다는 데에서 이러한 견해가 충분히 신빙성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구약성서에서는 더러 이 옷을 허리에 걸친다는 표현이 나온다(창세 37,34; 2사무 3,31; 1열왕 20,31; 유딧 4,10; 이사 15,3; 예레 4,8 등). 이러한 사실을 바탕으로 자루옷의 모양에 관한 둘째 의견이 제시된다. 곧 더운 지방의 미개인들이 입던 것처럼 매우 단순한 형태로 허리에만 둘렀다는 것이다.

 

이러한 견해들을 놓고 우선은, 자루옷도 다른 것과 마찬가지로 세월이 흐르면서 그 모양이 조금씩은 변하였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리고 같은 시대에도 남자와 여자, 그리고 어른과 아이가 입는 자루옷에 차이가 있었을 것이다. 사회적 신분이라든가 경제적 여건도 한 요인으로 작용하였을 수 있다. 어떠한 재료로 만들었든 모든 천이 흔하지 않던 그 옛날에, 예컨대 가난한 남자 어른이나 아이들은 간단히 허리에만 두르는 자루옷을 입었을 것이다(그러나 2마카 3,19 참조). 그리고 길이가 길든 짧든 다 허리에 띠를 묶었을 것이다. 그래서 자루옷을 허리에 걸친다는 표현이 나왔다고 본다.

 

“나는 자루옷을 내 맨살 위에 꿰매고”라고 욥은 한탄한다(욥 16,15). 자루옷 안에 아무 것도 걸치지 않았기 때문에(1열왕 21,27) 털이 살갗을 찌른 것이다. 자루옷을 입은 모습을 남에게 보이고 싶지 않을 때에는 그 위에 정상적인 복장을 하기도 한다(2열왕 6,30; 유딧 8,5). 경우에 따라서는 자루옷을 입지 않고 앞에다 펼쳐놓기도 한다(2사무 21,10; 유딧 4,11). 그 의미는 분명하지 않지만 자기가 겪는 지극한 슬픔과 고통을 특히 하느님 앞에 극적으로 드러내는 상징적 행동으로 여겨진다. 또 때로는 성전 제단에도 자루옷을 두르는가 하면(유딧 4,12) 집짐승들에게까지도 이 옷을 입히기도 한다(유딧 4,10; 요나 3,8).

 

이사야 50장 3절을 보면 “나는 흑암으로 하늘을 입히고 / 자루옷으로 그 덮개를 만든다.”라는 말씀이 나온다. 또 요한 묵시록 6장 12절에는 ‘해가 자루옷처럼 까맣게 된다’는 표현이 나온다. 이로써 자루옷은 은유적으로 쓰일 정도로 검은 색깔이 특징이었을 알 수 있다. 이렇게 질감이 거칠고 색이 어두운 자루옷으로 자기의 아픈 감정을 드러냈던 것이다.

 

 

아픈 마음의 표시

 

성서의 사람들은 구체적으로 어떤 때에 자루옷을 입었는가? 자루옷은 먼저 죽음을 애도하는 의복이다. 아들이 죽었을 때에 아버지나 어머니가(창세 37,34; 2사무 21,10), 남편이 죽었을 때에 아내가 자루옷을 입는다(요엘 1,8). 과부는 자기의 신분을 드러내는 과부옷을 착용하는데, 유딧처럼 절개가 굳은 과부는 그 안에 계속해서 자루옷을 입고 지내기도 한다(유딧 8, 5). 성서에는 부모가 돌아가셨을 때에 이 옷차림을 하였다는 말이 없지만, 상제들도 상복으로 자루옷을 입었음에 틀림없다.

 

이 특수 의상은 자기가 저지른 죄를 참회할 때에도 차려 입었다. 그래서 니느웨에서는 요나의 말을 듣고 임금을 비롯하여 온 백성이 자루옷을 걸치고 하느님께 용서를 청한다(요나 3,5-8. 그리고 1열왕 21,27; 느헤 9,1과 위에서 인용한 마태 11,21도 이 경우에 속한다).

 

자루옷은 한 개인으로서 또는 나라를 대표하는 사람으로서 모욕을 당하였을 때에도 입는다. 예컨대 침략군 사령관의 모욕적인 언사를 듣고 임금과 신하들이 자루옷을 걸치고 성전에 가서 기도한다(2열왕 19,1-2). 가까운 사람이 아플 때에는 그 아픔에 동참하는 의미에서 자루옷을 입기도 한다(시편 35,13). 자루옷은 전쟁에 졌을 때에 패배를 인정하고 자신을 낮추는 모습을 보일 때에도 입는다. 그래서 아람 임금 벤-하닷이 이스라엘 임금 아합과 싸워 패하자, 그의 신하들이 자루옷을 입고 아합에게 가서 벤-하닷의 목숨을 살려달라고 간청한다(1열왕 20,31-32).

 

나라 또는 민족의 불운 앞에서도 자루옷을 입었다. 곧 민족적으로 큰 슬픔이나 재앙이 닥쳤거나(에스 4,1-4; 1마카 2,14; 예레 6,26; 아모 8,10), 나라가 망하였을 때이다(이사15,3; 애가 2,10; 에제 7,18). 국난을 당하였을 때에는 이 복장을 하고서 하느님께 자비를 청한다(2열왕 6,30; 유딧 9,1; 1마카 3,47; 시편 30,12; 이사 20,2; 바룩 4,20; 요엘 1,13). 그래서 “기도할 때 입는 자루옷”이라는 표현도 쓰인다(바룩 4,20).

 

율법에 따르면 온 국민의 공동 금식은 일 년에 한 번 속죄일에만 하라고 되어있다(레위 23,26-32). 그러나 어떤 시대에는 특정 국난을 애도하는 기념일을 기해서라든가(즈가 7,1-5; 8,18-19) 특별한 계기에 하느님의 자비를 간청하고자 금식일을 더 늘린다(예레 36,6. 9; 요나 3,5 참조). 자루옷은 이러한 특정 금식일의 복장으로 사용되기도 한다(이사 58,5). 옛날 이스라엘 사람들은 개인 차원에서든 집단 차원에서든, 고통과 죄가 밀접히 관련되어 있다고 여겼다. 그래서 자루옷을 입고 기도를 하거나 금식을 하는 데에는 자기들이 저지른 잘못을 뉘우치고 하느님께 고백하는 의미도 담겨있다(특히 느헤 9,2 참조).

 

자루옷을 입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다. 그 전후로도 여러 가지 행위를 한다. 먼저 자기의 아픈 마음을 드러내는 의미로 입고 있던 옷을 찢어서 벗는다(창세 37,34; 2사무 3,31; 1열왕 21,27; 1마카 3,47). 이어서 자루옷을 입고서는 머리에 재나 흙이나 먼지를 뿌린다(느헤 9,1; 유딧 4,11; 4,1; 2마카 10,25; 애가 2,10). 때로는 아예 잿더미 위에 앉거나(요나 3,6), 상심을 이기지 못할 때에는 잿더미 속에 뒹굴기도 한다(욥 16,15; 예레 4,8). 또 감정이 격할 때에는, 율법에 금지되었는데도(레위 19,27-28; 21,5; 신명 14,1) 이웃 민족들의 관습에 따라 머리털과 수염의 일부나 전부를 깎고 몸에 상처까지 낸다(이사 22,12; 예레 48, 37; 아모 8,10). 그리고 금식을 하며(에스 4,3; 1마카 3,47; 시편 35,13) 슬퍼하거나 통곡한다(에스 4,1; 1마카 2,14; 이사 22,12; 에제 27,31).

 

이렇게 자루옷은 상심·애도·참회의 의복이었다. 율법에는 이 옷에 관한 언급이 없다. 그것은 순전히 관습상의 복장이었을 따름이다. 새 계약의 백성 그리스도인들은 물론 유다인들도 이제는 자루옷을 입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마음의 상태를 밖으로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마음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옷이 아니라 / 너희 마음을 찢어라”(요엘 2,13).

 

[경향잡지, 2002년 3월호, 임승필 요셉 신부(주교회의 성서위원회 번역담당 총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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