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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성경] 말씀과의 친교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5-08-04 조회수5,789 추천수1

말씀과의 친교 (1) 창조하시고 구원하시는 하느님의 말씀



교구장 주교님께서 2015년 사목지표를 발표하시면서, 교구의 모든 사제와 수도자, 신자들이 마태오복음을 시작으로 매해 복음서 하나씩 필사하여 2018년 교구 설정 70주년이 될 때, 모든 교구민이 자신의 손으로 쓴 4복음서를 갖자고 제안하셨습니다. 순교자들의 정신을 이어받으며 우리도 주님의 말씀대로 살겠다는 마음을 그렇게 봉헌하자는 말씀입니다.

저도 개인적인 경험으로 성경 말씀을 빈 마음으로 규칙적으로 봉독하고 손으로 직접 써 가는 것이 말씀의 은총을 받는 가장 좋은 길이라고 생각해 왔기에, 주교님의 제안에 열심히 동참하고 있습니다.

훌륭한 학자들이 성경을 연구하여 올바른 신학의 기초를 마련하는 일이 초대교회 때부터 계속 되어 왔고, 이러한 작업이 하느님의 말씀을 올바로 받아들이는 큰 틀을 제공해 왔기에 교회 건설에 매우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결국 말씀은 우리 영혼의 양식이 될 때, 그 몫을 다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이번 연재하는 글을 통해 하느님의 말씀이 어떻게 구원의 역사에서 활동하셨고, 우리가 어떻게 말씀과 친밀하고 인격적인 관계를 가질 수 있는지 나누고자 합니다.

첫 나눔을 다음 두 성경 구절을 제시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비와 눈은 하늘에서 내려와 그리로 돌아가지 않고 오히려 땅을 적시어 기름지게 하고 싹이 돋아나게 하여 씨 뿌리는 사람에게 씨앗을 주고 먹는 이에게 양식을 준다. 이처럼 내 입에서 나가는 나의 말도 나에게 헛되이 돌아오지 않고 반드시 내가 뜻하는 바를 이루며 내가 내린 사명을 완수하고야 만다.”(이사 55,10-11)

“한처음에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는데 말씀은 하느님이셨다. 그분께서는 한처음에 하느님과 함께 계셨다. 모든 것이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고 그분 없이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 은총과 진리가 충만하신 아버지의 외아드님으로서 지니신 영광을 보았다.”(요한 1,1-3.14)

앞에 인용한 이사야 예언서는 이 세상을 창조한 것도 하느님의 말씀이요, 구원의 역사를 이루어 온 것도 말씀을 통해서였다는 선언입니다. 인간이 자신의 뜻을 이루려고 많은 시도들을 하지만 하느님께서 그 모든 것을 아우르시면서 결국 당신의 말씀을 이루신다는 것입니다. 다음에 인용한 요한복음 서문은 세상을 창조하시고 구원의 역사를 이끌어 오신 하느님의 말씀이 사람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시어 완전한 구원을 이루어주신다는 장엄한 선언입니다. 하느님 말씀의 창조와 구원역사, 그리고 말씀과의 친교를 함께 묵상해 나가고자 합니다. [2015년 6월 21일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남북통일 기원 미사) 대전주보 3면, 총대리 김종수 아우구스티노 주교님]

 

 

말씀과의 친교 (2) 창조의 말씀



이스라엘 백성은 아브라함의 부르심과 이집트 탈출, 광야 40년 여정과 가나안 정복 그리고 유배와 귀환의 오랜 역사를 통해 그 모든 것이 하느님의 말씀대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깊이 깨닫고, 모든 역사의 시작인 창조 역시 하느님의 말씀으로 이루어졌다고 고백합니다.

세상 창조는 “하느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빛이 생겨라.’ 하시자 빛이 생겼다.”(창세 1,3)로 시작하여 “우리와 비슷하게 우리 모습으로 사람을 만들자.”(창세 1,26)는 말씀으로 세상의 모든 생명의 창조가 이루어집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의 신앙고백입니다.

나아가 성경은 하느님의 구원역사가 곧 창조라고 말합니다. 남의 나라 땅에서 유배의 설움을 겪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해방을 선언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늘아, 위에서 이슬을 내려라. 구름아, 의로움을 뿌려라. 땅은 열려 구원이 피어나게, 의로움도 함께 싹트게 하여라. 나 주님이 이것을 창조하였다.”(이사 45,8)

그리고 최종적으로 세상을 창조하신 말씀이 우리 가운데 사람이 되어 오시어 구원의 은총과 진리를 펼치시고(요한 1,1-18), 그 역사가 완성될 때를 가리켜 다음과 같이 새로운 창조라고 말씀하십니다.

나는 또 새 하늘과 새 땅을 보았습니다.
첫 번째 하늘과 첫 번째 땅은 사라지고
바다도 더 이상 없었습니다.(묵시 21,1)
보라, 내가 모든 것을 새롭게 만든다.(묵시 21,5)

이처럼 성경은 이 세상을 만드시고, 죄인을 벌하시되 구원으로 이끄시고 결국 하느님께서 당신의 자비로우신 뜻대로 세상을 완성해 주시는 모든 과정을 창조라는 주제로 표현합니다.

이렇게 보면, 예수님께서 많은 병자들을 치유해 주시고, 세리와 창녀를 친구로 맞아 주시며 그들이 사랑받는 온전한 삶을 회복하도록 해 주신 일도 그들에게 새 삶을 창조해 주신 것입니다. 물론 최종적으로 주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우리 죄를 대신하는 속죄의 죽음을 당하심으로써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시고 하느님의 자녀, 하늘나라의 떳떳한 시민이 되도록 우리의 천상적 생명을 재창조해 주셨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극진히 사랑하시어 이렇게 우리의 죽을 생명을 새 생명으로 다시 창조해 주시고,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3,34)고 명하셨습니다. 우리가 주님처럼 사랑하려면, 주님께서 우리 안에서 사셔야 합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니 그분이 곧 그리스도이십니다. 왜 우리가 말씀을 늘 가까이 대해야 하는지 그 이유가 분명합니다. 말씀에 대한 높은 지식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마치 감사한 마음으로 먹는 음식이 우리의 육신적인 생명을 건강하게 유지해 주듯 말씀 한 구절 한 구절을 나에게 주시는 주님의 말씀으로 대하는 것, 그리고 음식처럼 규칙적으로 자주 대하면 우리의 영적 생명이 건강하게 성장합니다. [2015년 6월 28일 연중 제13주일(교황 주일) 대전주보 3면, 총대리 김종수 아우구스티노 주교님]

 

 

말씀과의 친교 (3) 구원의 말씀



태초에 생명을 창조하신 하느님께서는 그 생명들이 당신 안에서 완성되는 곧 구원에 이르는 역사를 이끌어 가십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이 모든 역사를 미리 말씀으로 보여주셨습니다.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을 이집트 탈출과 광야 여정 그리고 가나안 정복으로 이루어주셨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이 하느님께서 주신 가나안 땅에서 우상을 섬기며 불의한 삶을 살자 예언자들을 통해 유배를 예고하셨고, 유배의 고통으로 신음하는 그들에게 고국으로의 귀환을 약속하셨습니다. 하느님의 말씀대로 모든 것이 이루어졌습니다.

이 긴 역사를 통해 이스라엘이 깨달은 것은 인간의 구원이 결코 인간의 손에 달려있지 않다는 것이었습니다. 돌아보면 자신들이 가진 것 없이 유랑하며 힘겹게 산다고 느끼던 때가 오히려 하느님의 은총 안에 살던 시기였고, 가진 힘을 자랑하며 의기양양 국가를 운영하던 때가 사실은 가장 하느님께 등을 돌리고 살다가 결국 유배의 벌로 이어진 시기였다는 것을 보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유배에서 돌아온 이스라엘은 메시아에 대한 기대와 희망을 키워갔습니다. 많은 예언서들의 후반부가 하느님께서 보내주실 메시아 갈망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이 세상에 우리와 똑같은 인간으로 오셨습니다. 그분의 이름이 예수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같은 처지에 사시면서 하느님 아버지와의 깊은 친교를 이루시며 우리도 어떻게 하면 하느님을 잘 섬길 수 있는지를 보여주셨고, 죽으시고 부활하시며 우리가 어떻게 부활의 생명을 얻을 수 있는지를 몸소 보여주셨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십니다.

예수님은 가난한 이들을 가까이 하시며 모든 이들이 부족함이 없이 살기를 원하셨고, 세리와 창녀를 맞아들이시며 어느 누구도 차별 없는 한 형제임을 가르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 사이에 이 일을 이루어가는 것이 구원에 이르는 길임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주님의 기도’는 첫 마디에서부터 우리 모두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라는 것이고, 마태오복음 25장 ‘최후의 심판’은 고통과 궁핍 중에 있는 형제들을 우리가 어떻게 돌보는 것이 구원에 이르는 길인지를 보여줍니다.

우리가 어떤 이들의 어려움을 돌보아 주었다고 해서 그 공로로 구원에 이르는 것은 아닙니다. 형제의 고통을 진심으로 나의 것으로 여기고 돌보는 사람은 십자가의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구원을 위해 필요한 것을 다 이루셨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우리 죄를 대신하는 희생의 피를 흘리셨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평화의 인사말을 건네시고, 그들에게 ‘숨을 불어넣으며’ 성령을 받으라고 말씀하실 때(요한 20,21-22), ‘숨을 불어넣었다’는 동사는 태초에 하느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 코에 숨을 불어넣었다는 것(창세 2,7) 같은 단어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을 믿고 성령을 받아들이는 사람을 부활의 새 생명으로 재창조 곧 구원하신다는 뜻입니다. [2015년 7월 5일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 대축일 대전주보 3면, 총대리 김종수 아우구스티노 주교님]

 

 

말씀과의 친교 (4) 말씀은 사귐의 대상



앞에서 말씀을 받아들이는 것이 음식 먹는 것과 비슷한 점이 있다고 했습니다. 제가 강론 때에 자주 드리는 말씀입니다. 정말 말씀의 은혜를 받는 데에 성경에 대한 깊은 지식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음식을 맛있게 잘 먹기 위해서 앞에 놓인 음식의 영양에 대한 지식이 필요 없습니다. 그냥 ‘감사한 마음’으로 ‘꼭꼭 씹어’ 먹으면 됩니다. 말씀도 ‘나에게 주시는 하느님의 말씀’으로 내 안에 받아들인다는 믿음으로 읽고 쓰는 그 시간에 집중하면 됩니다.

사람들이 예수님 앞에 데려온 중풍병자를 향해 “네 평상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가거라.” 하시자 그가 즉시 일어나 집으로 갔고(마태 9,1-7), 죽어서 무덤에 묻힌 라자로에게 “라자로야, 이리 나와라.” 하시자 그 말씀을 듣고 그가 무덤 밖으로 걸어 나왔습니다(요한 11,43-44). 말씀이 우리 안에 들어오시면 이렇게 우리를 치유하시고, 새 생명을 주십니다. 우리에게 이런 단순한 믿음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어떤 사람과 깊은 친교를 이루고 그를 진심으로 사랑하게 되면, 그가 자주 생각나고 그가 잘 되기를 바라고 그를 기쁘게 해 주고 싶고 그와 많은 시간을 함께하고 싶어집니다. 마치 그 사람이 내 안에 사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과 이런 인격적인 친교를 이루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하듯이 그분께 시간을 내드려야 합니다. 묵주기도는 하느님의 아들이 인간이 되시어 하느님 나라를 알려주시고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시어 영원한 생명의 은총을 주신 신비에 잠기는 기도입니다. 성체조배는 우리를 위해 당신 자신을 내어 주신 예수님의 실체 앞에 그분과 함께 머무는 시간입니다. 성경을 자주 읽고 써보는 것은 그분의 행적을 내 마음에 새기는 일입니다. 미사는 이 모든 것을 교회의 전례 안에서 구원받은 백성 공동체가 감사와 찬미를 드리는 거룩한 시간입니다. 가난하고 고통받는 이웃을 돕고 위로해 주려고 나선다면 그것은 그분이 주신 단 하나의 계명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는 말씀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이런 소중한 일들이 모두 주님께 시간을 내어 드리며 그분께 가까이 가는 길이 됩니다. 우리 각자 돌아봅시다. 나는 예수님께 얼마나 시간을 내어 드리고 있는가? 그리고 마치 음식을 먹고 영양을 섭취하여 육신의 생명을 살듯이, 그분께 내어드리는 이러한 시간들을 얼마나 규칙적으로 하고 있는지.

주님은 나를 사랑하시기에 항상 나를 기다리십니다. 주님께서 지극한 사랑으로 당신 목숨까지 내어 놓으시고 우리를 위해 이루신 구원업적이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결코 헛되지 않은 것보다 그분이 더 원하시는 것이 있겠습니까? 주님께 시간을 내어 드립시다. 한 주간을 돌아보면서, 내 취미를 위해 쓰는 시간 적어도 그만큼은 예수님께 내어 드립시다. [2015년 7월 12일 연중 제15주일 대전주보 3면, 총대리 김종수 아우구스티노 주교님]

 

 

말씀과의 친교 (5) 말씀의 정점인 성사



성사는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은총을 눈에 보이도록 드러내 주는 표지’입니다. 그래서 성사에는 하느님께서 은총을 내려 주시는 ‘말씀’과 그 은총을 받도록 실행하는 ‘질료와 행위’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세례성사는 예수님 공생활 초기에 친히 세례자 요한을 찾아가 받았고, 부활하신 뒤 제자들을 불러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마태 28,19)라는 말씀에 따라 교회가 행하는 죄 용서의 은총을 베푸는 성사인데, 물로 씻는 예식으로 이루어집니다. 고해성사는 예수님께서 사도들에게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요한 20,23)라는 말씀에 따라 행하며, 사제가 십자성호와 사죄경을 염함으로써 이루어집니다. 성체성사는 예수님께서 죽음을 앞두고, 십자가 위에서 이루어질 은총의 사건 곧 당신의 죽음으로 우리의 죄가 죽고 우리는 주님의 생명을 받아 살게 되는 은총의 결정적인 성사입니다. 예수님 친히 빵과 포도주를 건네시며, 그것이 당신의 몸과 피라고 선언하시고 그 예식을 행하라고 명하셨습니다. 다른 성사들도 그러합니다. 예수님 친히 사도들을 뽑으셨고(성품성사), 병자들을 치유하시며 죽음을 넘어선 영원한 생명을 가르치셨으며(병자성사), 하느님께서 친히 맺어주신 부부의 끈을 사람이 풀 수 없다고 분명히 선언하셨습니다(혼인성사). 그리고 제자들은 복음을 전하는 초기부터 세례 받은 이들이 성령의 은사로 신앙이 굳건해짐을 체험했습니다(견진성사).

히브리서는 그 시작에 이렇게 선언합니다. “하느님께서 예전에는 예언자들을 통하여 여러 번에 걸쳐 여러 가지 방식으로 조상들에게 말씀하셨지만, 이 마지막 때에는 아드님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히브 1,1-2) 그렇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세상을 창조하시고 구원의 역사를 이끌어 가시는데, 마지막에는 그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와 똑같은 인간으로 오셔서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시고 십자가 죽음으로 구원업적을 완전히 이루시고, 이후 교회가 그 일을 계속하도록 명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친히 행하셨고 그분 말씀에 따라 교회가 세상 끝날까지 행해야 할 일 가운데 가장 중심에 바로 성사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성사들을 받을 때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바오로 사도는 성체성사에 대하여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은 이 빵을 먹고 이 잔을 마실 적마다 주님의 죽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당하게 주님의 빵을 먹거나 그분의 잔을 마시는 자는 주님의 몸과 피에 죄를 짓게 됩니다. 그러니 각 사람은 자신을 돌이켜보고 나서 이 빵을 먹고 이 잔을 마셔야 합니다. 주님의 몸을 분별없이 먹고 마시는 자는 자신에 대한 심판을 먹고 마시는 것입니다.”(1코린 11,26-29) 주님께서 은총을 우리에게 주시고자 성사를 제정해 주셨으니, 성사에 나아가기에 앞서 항상 자신을 성찰하고 자신의 부족함을 안은 채로 겸손되이 그 은총을 믿고 청하면 됩니다. 우리의 부족함을 그분이 이미 잘 알고 기다리고 계십니다. [2015년 7월 19일 연중 제16주일 대전주보 3면, 총대리 김종수 아우구스티노 주교님]

 

 

말씀과의 친교 (6) 말씀과 기도



성경은 하느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고 구원으로 이끌어 가시는 역사이며 동시에 그 안에서 살아가는 하느님 백성의 신앙고백입니다. 성경에는 하느님의 역사에 경탄하며 드리는 찬미와 감사는 물론 하느님의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고 빗나가는 배반의 역사도 함께 있습니다. 그 안에서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은 이들은 끊임없는 기도를 바칩니다. 아브라함, 모세, 사무엘, 다윗, 솔로몬 그리고 수많은 예언자들은 구원의 역사를 찬미하며 자신들이 겪는 고통스러운 현실을 두고 탄원과 간절한 청원 그리고 감사의 기도를 바칩니다.

주님을 따르는 사람들의 삶에서 기도가 어떤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지 사도행전이 많은 영감을 줍니다. 사도행전의 사도들과 그들이 전한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들에게 더 이상 예수님은 이전처럼 그들 곁에 계시지 않기에 지금의 우리와 같다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들 곁을 떠나신 뒤 사도들과 성모님에 대해 사도행전은 다음과 같이 전합니다. “그들은 모두, 여러 여자와 예수님의 어머니와 그분의 형제들과 함께 한마음으로 기도에 전념하였다.”(사도 1,14) 그리고 성령강림 직후 베드로 사도의 설교를 듣고 회개한 삼천 명에 대하여 “그들은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고 친교를 이루며 빵을 떼어 나누고 기도하는 일에 전념하였다.”(사도 2,42)고 전합니다. 또 사도들이 가난한 신자들을 돌보는 일을 하도록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사람 일곱’을 뽑으라고 할 때에도 사도들 자신에 관해서는 “우리는 기도와 말씀 봉사에만 전념하겠습니다.”(사도 6,4)라고 말합니다. 그 이후에도 사도들과 교회에 봉사하는 이들이 자신들이 하는 일을 항상 기도와 함께 했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기도는 사람이 하느님께 드리는 감사와 탄원이나 청원을 넘어섭니다. 기도 안에서 우리의 영이 하느님을 향함으로써 하느님께서도 우리의 기도 안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기도를 이끌어 가십니다. 좋은 기도는 우리가 만들어낸 좋은 언어가 아니라, 주님의 뜻 안에 머무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너희가 기도할 때에 믿고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다 받을 것이다.”(마태 21,22) 하신 말씀 그리고 악령에 들려 죽은 것처럼 보이던 아이의 손을 잡아 일으켜 세워주심에 놀라 묻는 제자들에게 “그러한 것은 기도가 아니면 다른 어떤 방법으로도 나가게 할 수 없다.”(마르 9,29)고 하신 말씀도 기도 안에서 주님 친히 당신의 뜻을 알려주시고 활동하신다는 의미입니다.

주님 뜻에 꼭 맞는 기도라면 우리가 할 수 없을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일러줍니다. “성령께서도 나약한 우리를 도와주십니다. 우리는 올바른 방식으로 기도할 줄 모르지만, 성령께서 몸소 말로 다할 수 없이 탄식하시며 우리를 대신하여 간구해 주십니다.”(로마 8,26) 성삼위 하느님의 한 분이신 성령께서 이렇게 우리를 도와주신다면, 우리는 기도를 하면서 주님 뜻에 맞는 천상적인 기도를 배울 수 있습니다. “희망 속에 기뻐하고 환난 중에 인내하며 기도에 전념하십시오.”(로마 12,12) [2015년 7월 26일 연중 제17주일 대전주보 3면, 총대리 김종수 아우구스티노 주교님]

 

 

말씀과의 친교 (7) 말씀에 순종하고 말씀에 함께 하신 성모님



창세기 2-3장은 하느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은 아담과 하와가 생명나무가 있는 그 동산에서 쫓겨나는 이야기를 전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이 세상에 죽음이 들어왔고, 이 죽음의 운명을 부활의 새 생명으로 재창조해 주신 분이 말씀이시며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바오로 사도는 죽음과 생명의 이 역사를 다음과 같이 선언합니다.

“죽음이 한 사람을 통하여 왔으므로 부활도 한 사람을 통하여 온 것입니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는 것과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살아날 것입니다.”(로마 15,21-22)

교회의 교부들은 이 선언을 하와와 성모님에게도 적용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이 아닌 뱀의 유혹을 따랐던 하와의 불순종으로 시작된 죽음의 역사가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38)라고 응답한 마리아의 순명으로 인해 새 생명의 역사로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창세기와 관련하여 그리스도를 ‘새 아담’, 마리아를 ‘새 하와’라고도 부릅니다.

처녀 마리아의 응답으로 하느님의 아들이 인간으로 오셨다는 것은 사람의 능력으로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인간의 합리적인 정신에 뿌리를 두면 둘수록 더욱 그러합니다. 그래서 현대의 여러 신학자들이 처녀 마리아의 잉태를 부정하려고 했습니다. 이것은 오직 창조주 하느님에 대한 믿음 곧 성령의 인도를 통해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마리아는 하느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할 준비도, 말씀을 받아들여 잉태할 준비도 되어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어린 시절의 이야기에서도 성모님의 이러한 모습을 잘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탄생에 목자들이 찾아와 전해주는 말에 “마리아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겼다.”(루카 2,19), 그리고 잠시 잃었던 어린 예수를 예루살렘에서 찾았을 때 아들이 하는 뜻밖의 말에 “그의 어머니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다.”(루카 2,51)고 합니다.

하느님의 계획은 인간의 생각을 뛰어넘는다는 것을 잘 알고 살아갈 줄 알았던 성모님은 자신의 인식과 기대와는 다른 일을 그대로 마음에 담아놓으셨습니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로 계시가 완성될 때, 성모님 안에 담아놓으신 모든 것이 손상 없이 말할 때를 기다리신 것입니다. 말씀을 생명으로 잉태하여 세상에 내어 놓으신 성모님은 곧 교회가 살아가야 할 길을 먼저 걸으신 모범이십니다. 십자가의 예수님은 제자에게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요한 19,27)하신 말씀으로 성모님을 우리 모두 그리고 교회의 어머니로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모두, 여러 여자와 예수님의 어머니와 그분의 형제들과 함께 한마음으로 기도에 전념하였다.”(사도 1,14)는 데에서 보는 것처럼, 성모님은 사도들과 함께 예수님의 지시대로 예루살렘에서 기도에 전념하며 기다리셨고, 결국 성령강림과 교회 창립의 현장에 함께 하셨습니다. 이 모든 것이 하느님의 말씀을 주어진 그대로 받아들이고 따르신 그분께 일어난 일입니다. [2015년 8월 2일 연중 제18주일 대전주보 3면, 총대리 김종수 아우구스티노 주교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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