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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구약] 구약 여행36: 바빌론 강 기슭 거기에 앉아(시편 137,1)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5-08-23 조회수5,061 추천수1

[안소근 수녀와 떠나는 구약 여행] (36) “바빌론 강 기슭 거기에 앉아”(시편 137,1)


유배지에서 시온을 떠올리며 눈물 흘려



바빌론 모형.


유배라는 것이 어떤 것일까요? 기원전 587년, 바빌론 군대에 의하여 예루살렘이 함락되고 성전이 불타 없어지며 다윗 왕조가 무너지고 유다 주민들이 바빌론으로 유배 가게 된 것은 이스라엘 역사에서는 최악의 사건이었습니다. 이스라엘에게 유배는 철저한 실패를 의미했고 하느님과의 관계 단절을 의미했습니다. 그러나 그 의미를 생각하기 전에, 먼저 상황을 파악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50년간의 유배 동안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요?

그 시대의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이스라엘 땅에 남아 있던 유다인들과 바빌론에 가서 살고 있던 이들의 처지를 각각 살펴보아야 합니다. 세 번째 부류로서 이집트로 내려간 유다인들도 적지 않았지만, 이들은 기원전 6세기에는 아직 생존에 급급했고 더 늦은 시기에 이르러서야 중요한 유다인 공동체를 이루게 됩니다.

먼저는 유다 땅에 남아있던 이들이 있습니다. 유배를 간다고 해서 유다 땅에 있던 이들이 남김없이 모두 바빌론으로 끌려가고 예루살렘이 텅 비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실제로 유배를 간 사람의 수는 2만 명가량 되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인구 대부분은 유다 땅에 그대로 남아 있었습니다.

또, 아시리아는 북왕국 이스라엘을 멸망시킨 다음 식민 정책으로 이민족을 이스라엘 땅에 살게 하여 사마리아인들의 피가 섞이게 하였지만, 남왕국 유다를 멸망시킨 바빌론은 유다 땅에 다른 민족들을 옮겨 살게 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래도 피해는 적지 않았습니다. 거의 모든 도시가 파괴되었고, 농경에도 엄청난 피해가 있었습니다. 바빌론이 예루살렘을 함락시키는 사이, 에사우의 후손 에돔은 영토를 확장시켜 헤브론에까지 이르렀습니다. 구약 성경에서 가장 짧은 책, 21절로 된 오바드야서는 그래서 에돔을 고발합니다. “너는 네 아우의 날을, 그 재난의 날을 흐뭇하게 바라보지 말아야 했다. 유다의 자손들이 멸망하던 날 너는 그를 두고 기뻐하지 말아야 했다”(오바 12).

다른 한편으로, 바빌론인들은 백성들에게 충성을 받아내기 위해 유배 간 이들의 땅을 유다에 머물러 있던 가난한 이들에게 분배했습니다. 유다를 통치하기 위해 바빌론은 그달야를 총독으로 임명합니다. 그는 미츠파에 자리를 잡고 재건을 시작하려 했으나, 다윗 왕실에 속한 이스마엘의 지휘 하에 유다인들이 3개월 만에 그를 암살합니다. 그렇게 암살을 해 놓고서는 바빌론의 보복이 두려워 많은 이들이 베들레헴 근처로 피신했다가 이집트로 내려갑니다. 그달야 곁에 머물러 있고자 했던 예레미야도, 그달야가 암살된 후 강제로 이집트로 끌려가게 됩니다.

종교적인 측면에서는, 폐허가 된 예루살렘 성전 터에 모여 어떤 경신례를 거행한 것으로 보입니다. 분명 예루살렘 파괴는 종교적으로 큰 위기를 가져왔는데, 유배의 상황을 이해하고 설명하기 위한 노력으로 신명기계 역사가 편집되었습니다. 예언서들의 편집 과정도 진행되고 있었을 것입니다.

바빌론에 유배 간 이들의 처지를 잘 보여주는 것은 “바빌론 강 기슭 거기에 앉아 시온을 생각하며 우네”(시편 137,1)라는 시편 구절입니다.

열왕기 하권 24장 14-16절은 첫 번째 유배에 끌려간 사람들의 수를 전해 주고, 예레 52,28-30은 세 차례에 걸친 유배로 끌려간 이들의 수를 전해 줍니다. 그 두 번째 본문에 따르면 기원전 597년에 3023명, 586년에 832명, 582년에 745명, 총 4600명이 유배를 갔다고 되어 있는데, 이 숫자가 가장들만을 헤아린 것이라면 유배자의 수는 약 2만 명이 될 것입니다.

숫자상으로만 본다면 유배를 가지 않은 이들이 더 많습니다. 그러나 사회적으로 말하면 귀족, 관료, 사제, 율법학자, 기술자, 토지 소유주 등이 모두 유배를 간 것이기에 그 영향은 엄청났습니다.

바빌론인들은 유배 간 이들을 바빌론 남부의 마을들에서 한데 모여 살게 했고, 그들은 어느 정도 자유를 누리면서 토지를 구입하고 집을 짓는 등 삶을 조직해 갔습니다. 물질적으로 말한다면 이들은 과거에 유다 땅에서 누리던 것과는 비교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극단적으로 가난했던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바빌론에 정착했습니다. 실제 역사 기록이 아니라 후대에 가상으로 작성된 이야기이기는 하지만, 다니엘서에서는 다니엘과 친구들이 바빌론 조정에서 임금을 섬겼다고 말하지요. 바빌론이 멸망한 후에도 느헤미야는 페르시아에서 헌작 시종으로서 임금을 가까이 모셨습니다. 기원전 538년에 키루스가 칙령을 내려 유배 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했을 때에도, 많은 이들은 그대로 머물러 살려고 했습니다. 어느 정도는 살 만했기 때문이겠지요.

그들의 더 깊은 위기는 종교적인 것이었습니다. 성전이 파괴되고, 다윗 왕조의 임금이 유배를 가게 되며, 약속의 땅이 바빌론인들의 지배를 받게 된 상황에서 어떻게 하느님의 주권에 대한 믿음을 보존할 수 있습니까? 많은 이스라엘인이 가지고 있었던 신학적 틀로는, 성전 파괴와 유배는 설명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들이 알고 있는 하느님은 시온을 선택하신 분, 예루살렘 성전에 계신 분, 다윗에게 영원한 왕조를 약속하신 분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의 상황은 신학적으로 어떻게 이해할 수 있습니까?

에제키엘은 이 문제에 대해 답을 제시하고, 제2 이사야는 바빌론의 종교에 접하게 되는 상황에서 유일신 사상을 통하여 이스라엘의 신앙을 더욱 굳게 하며 귀환의 기쁜 소식을 알릴 것입니다.

[평화신문, 2015년 8월 23일,  안소근 수녀(성 도미니코 선교수녀회, 대전가톨릭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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