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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신약] 복음 묵상: 마태 5,13-16, 세상의 빛과 소금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0-05-01 조회수4,256 추천수2

[정인준 신부의 복음 묵상] 마태 5,13-16, 세상의 빛과 소금

 

 

참행복에 대한 가르침이 끝나고 이어서 주님께서는 제자들이 지켜야 할 삶의 지침에 대하여 말씀해 주시며, 가장 먼저 세상의 소금이며 빛이 될 것을 당부하십니다(마태 5,13-16 참조). 아무리 이론으로 좋고 마음을 감동시키는 것이라도 실제 행동이 따르지 않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5,16)라는 주님의 말씀을 새겨야 하겠습니다.

 

몇 개월을 성당 공사를 하며 왔다 갔다 하던 현장 감독이 아무도 모르게 한 본당에 슬쩍 예비신자 교리를 등록하고 부인과 아이들이 함께 열심히 다닌다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얼핏 공사장의 억센 모습에서 ‘그가 어떻게 갑자기 신자가 되려고 했을까?’ 하는 의아한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세례를 받기 얼마 전, 그의 심정을 들어볼 기회가 있었습니다.

 

공사장에서 일하다 보면 개신교, 불교 등 여러 신자들을 만나게 되는데, 이번에 성당 공사를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천주교 신자들을 많이 만나게 되었더랍니다. 그러면서 천주교 신자들과 다른 종교 신자들을 알게 모르게 비교하게 되었는데, 천주교 신자들은 표현이 없을 뿐만 아니라 종교적인 색채나 과장도 없이 수수하여 그 인간적인 모습에 매력을 느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입교하게 된 동기는 오랫동안 지켜본 자기 회사의 회장 부부와 그 가정이었다고 했습니다. “사장님은 얼핏 보기에 엄격해 보이는데 사실 마음은 부드럽고, 늘 부인을 위하는 모습과 없는 사람을 배려하는 모습에 무척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나도 세례를 받으면 회장님처럼 살아야지!’ 하는 생각에 그 부부에게 대부모님이 되어달라고 청했습니다.”며 속마음을 털어놓는 그의 모습은 참으로 진지했습니다.

 

그런 말을 들으면서 군종신부 시절, 장교들이 “나중에 종교를 선택할 때 꼭 천주교로 가겠습니다.”라는 말을 하면서 천주교 신자들의 조용함과 진실, 그리고 개인생활의 철저함을 꼽던 것이 생각났습니다.

 

 

법 정신

 

예수님께서는 율법을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고 완성하러 왔다고 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과 땅이 없어지기 전에는, 모든 것이 이루어질 때까지 율법에서 한 자 한 획도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5,18)라는 말씀을 들으면 ‘외유내강(外柔內剛)’이라는 동양의 가르침이 생각납니다.

 

법은 자신이 지키기 위한 것이지 바리사이나 율법학자들처럼 남에게 가르치기 위한 것이 아님을 가르쳐주는 말씀입니다.

 

전방 생활을 마치며 목사님들과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때 군종참모를 맡고 있던 목사님은 신자와 사제가 일치하며 꾸밈없이 인간적으로도 서로를 진실로 위하는 천주교가 제일 부럽다고 하셨습니다.

 

일반 장교들도 천주교 신자들은 외적으로는 부드러운데, 삶에는 성실하고 철저한 면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어보면 우리 신자들이 늘 자랑스럽습니다.

 

긴 군생활을 마치고 오랜만에 본당사목을 나왔을 때에도 신자들은 군종 시절 그때의 신자들같이 말없이 복음을 생활화하고 있었습니다.

 

솔직한 표현이지만 사제가 신자를 생각하는 것보다 신자가 사제를 생각하는 것이 더 깊은 것 같습니다. 실천이 따르지 않는 율법은 아무 소용이 없다는 생각과 함께 주님께서 하신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5,20)라는 말씀이 더 새롭습니다.

 

이 율법이 후대에 와서 너무 문자 위주로, 또 세분화해서 실생활을 좌지우지하며 뜻을 곡해해서 그렇지, 본디 법 정신은 하느님의 사랑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고대 근동의 함무라비 법전과 탈출기, 신명기의 하느님의 율법을 비교해 보면,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습니다. 근동의 법전은 통치자인 왕과 귀족들의 권위를 유지하기 위한 것이고, 성경의 율법은 소외된 이들을 보호하기 위한 뜻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과 땅이 없어지기 전에는, 모든 것이 이루어질 때까지 율법에서 한 자 한 획도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5,17-18)라고 말씀하신 것에서 새겨야 할 점이 있습니다.

 

여기서 ‘한 자’라고 하는 것은 그리스어의 제일 작은 글자 ‘요타(ι)’를 말하는 것이고 ‘한 획’이라는 것은 ‘케라이아(κεραια)’라고 하는데 율법의 가장 작은 부분을 뜻하는 것입니다. 법은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처럼 가르치기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정신대로 실천하기 위한 것임을 주님께서 일깨워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무리 작은 계명이라도 그것을 실천하고 가르칠 때, 비로소 법의 문자에서 의미가 살아나는 것이고 하느님 나라를 준비하는 것임을 주님께서 설명해 주십니다. 주님의 가르침은 율법의 글자에 매이기보다는 그 정신이 중요한 것임을 증명하는 것이고, 하느님의 사랑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은 그 법을 ‘글자’로 묶어놓지만 주님께서 그 법의 의미를 살리시는 것입니다.

 

 

말의 씨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는 자는 누구나 재판에 넘겨질 것이다. 그리고 자기 형제에게 ‘바보!’라고 하는 자는 최고의회에 넘겨지고, ‘멍청이!’라고 하는 자는 불붙는 지옥에 넘겨질 것이다.”(5,21)라는 주님의 말씀을 대할 때마다 마음이 찔리는 게 있으시지요?

 

“가까울수록 예의를 지키라.”는 우리네 말이 있습니다. 어쩌다 내뱉은 한마디 말 때문에 내 이웃에게 상처를 줄 때가 있습니다. ‘바보 멍청이’라는 꼭 그 표현은 아니더라도 “야, 그것밖에 할 수 없어?”라고 내뱉은 말이 남모르게 애쓰고 고민했던 그동안의 일을 한순간에 무시하는 결과가 될 수 있습니다.

 

선한 일이든 또 악한 일이든 하루 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은 없을 것입니다. “욕도 하면 는다.”고, 나쁜 습관도 고치지 못하면 점점 나쁜 쪽으로 기울어질 것입니다. 또 반대로 미소도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은 아닌가 봅니다. 요즈음 쉽게 듣는 ‘웃음치료’에서도 순간순간 웃음을 꾸준히 연습해야 한다고 합니다.

 

‘말이 씨가 된다.’는 말대로 우리가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 우리의 표현도 달라질 것입니다. ‘바보 멍청이’라는 표현도 그렇지만 가까운 이웃을 무시하는 내 마음보가 더 문제인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은 작은 표현이라도 좋게 하고 양보하며 살라는 뜻으로도 해석할 수 있습니다.

 

한마디 말 때문에 기분이 잡칠 수 있다면, 또 부드럽고 겸손한 한마디의 말이 하루, 아니 그 이상 축복받는 기쁨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왕 기쁘고 멋진 삶을 살기를 바란다면, 오늘 주님의 말씀대로 ‘바보 멍청이’라는 표현보다는 긍정적이고 겸손한 한마디의 표현이 우리를 좋은 쪽으로 변화시킨다는 것을 마음에 담아야 할까 봅니다.

 

 

사랑의 묘약

 

교회에서 ‘이웃 사랑’이라는 말은 우리가 흔히 들어왔던 단어 가운데 하나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이웃’에게 조건을 두지 말고 사랑의 의무를 다하라고 가르치십니다. 이웃이 나를 이해해 줄 때도 있지만, 그 반대일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내 중심’이 아니라 ‘하느님 중심’의 사랑을 당부하시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그분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주신다”(5,45). 사람에게서 가장 고귀한 것을 꼽으라면 ‘사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모세 법에서 강조한 것처럼 우리는 먼저 하느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그래야 비로소 하느님으로부터 넘치는 사랑의 에너지를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느님 사랑 없이 무슨 힘으로 원수를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낯선 사람, 박해하는 사람을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나와 친하거나 나에게 이로운 사람, 나에게 잘해준 사람을 기억하며 내 중심으로 감사하며 좋아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그 사랑에는 한계가 있고 편을 가르게 하지만 이와는 달리 하느님 사랑은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해주십니다.

 

도니체티의 오페라 ‘사랑의 묘약’이 떠오릅니다. 물론 음악에서야 ‘남녀간의 사랑’이 주제이기는 하지만, 이것을 하느님 사랑에 접목하여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해주는 약’이라는 점에서는 남녀간이든 하느님과의 관계이든 하나의 공감을 불러올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은 불완전한 것을 덮어주고 이해해 줄 수 있는 ‘묘약’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그러므로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라는 가르침이 멀게 느껴지고 불가능한 것만은 아닙니다. 희생적인 ‘부모 사랑’을 입어 제대로 설 수도 없었던 우리가 이렇게 성장할 수 있었고, ‘주님 사랑’이 좁아터진 우리 안에게 ‘원수 사랑’을 가능하게 해주었습니다. 사람은 사랑을 먹고 자라나고 그리고 사랑 안에서 좋은 결실을 이룰 수 있는 것입니다.

 

산상수훈에서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참행복의 조건을 이야기하십니다. 또한 삶의 모범인 빛과 소금의 역할과 법의 근본정신은 사랑이고 이것이 모든 행동과 말에 바탕이 되어야 함을 가르쳐주십니다.

 

* 정인준 파트리치오 - 교황청 성서대학에서 성서학을 공부하고 이스라엘 히브리 대학과 교황청 그레고리오 대학에서 수학하였다. 원주교구 총대리를 역임하고 지금은 제천 서부동성당 주임신부로 있다.

 

[경향잡지, 2010년 4월호, 정인준 파트리치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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