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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욥기 No22 성서구약성서해설 종류시서와지혜서
욥기는 어떤 성서인가요?

욥기는 어떤 성서인가요?

욥기는 구약성서의 세 번째 부분인 성문서에 속하는 지혜문학의 하나입니다. 욥기라는 성서 이름은 이 책의 주인공인 ‘욥’의 이름을 따서 지어졌구요. 그 이름의 뜻은 아직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았지만, 기원전 2000년대 서부 셈족 사이에 흔한 이름이었다고 해요. 욥의 고향으로 나오는 “우스”가 어디인지도 확실치 않아요. 아람 쪽이라고도 하고 에돔 지역이라고도 해요.

욥기

 

언제 쓰여졌나요?

욥기는 여러 면에서 아주 해석하기 어려운 책으로 꼽혀요. 욥기의 저술 연대를 추정할 수 있는 자료가 욥기 안에는 거의 없거든요. 게다가 언어들도 다른 성서에 잘 나오지 않는 단어들이 많구요.

학자들의 견해도 중구난방으로, 멀리 기원전 13세기의 모세 시대부터 가까이는 기원전 2세기의 마카베오시대까지 들고 있어요. 그래도 조금 의견이 모아지는 쪽은 바빌론 포로기의 전·후라는 쪽이에요. 헷갈리시죠? 아마도 욥기는 족장 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 데서 드러나듯이, 상당히 고대에서부터 내려온 이야기를 바탕으로 오랜 기간의 복잡한 형성과정을 거쳐 후대에 오늘과 같은 꼴로 굳어졌을 거예요.

 누가 썼나요?

이젠 독자 여러분도 어느 한 사람을 구약성서의 저 자로 못박는다는 게 상당히 곤란하다는 걸 알고 계실 거예요. 앞에서도 말씀드렸지만, 욥기는 여타 성서와 다른 특성을 여러모로 지녀 욥기의 뼈대를 잡은 저자를 추정하기가 참 곤란해요. 아마 욥기라는 독창적인 견해를 남긴 저자는 의인들이 고통을 당해야 하는 문제에 대해 전통적인 해결책이 아닌 새로운 견해를 집요하게 추구했던, 유난히 고통과 하느님의 정의에 민감했던 사람으로 여겨져요.

 왜 썼나요?

욥기는 고통에 관해 묻고 도전하고 항의하는 책입니다. 전통적으로 고통은 상선벌악 개념에 따라 이해되었습니다. 악한 자가 받는 벌이 곧 고통이라는 것이죠. 하느님의 보상적 정의를 가리키는 이 말이 전적으로 틀리지는 않지만, 고통의 모든 문제를 해명해 주지도 않습니다. 현실적으로 선한 의인들이 당하는 고통은 적잖았으니까요.

욥기는 하느님의 정의와 함께 인간의 삶의 목적과 의미에 대한 궁극적인 물음입니다. 욥기의 끝에 가서도 욥이 제기한 물음, 곧 고통의 원인은 밝혀지지 않습니다. 의인이 당하는 고통은 인간 삶과 연관된 하나의 신비입니다. 문제는 그 고통을 어떻게 받아들이는가 입니다. 고통을 비롯한 모든 것이 시간 안에서 사라져 갑니다. 궁극적으로 그 문제의 답을 얻을 곳은 영원하신 하느님, 창조주 그분 안에서 입니다. 결국 남은 답은 하느님께 대한 신뢰뿐입니다. 욥은 하느님의 놀라우신 현존을 체험하고 그분께 승복합니다. 신약시대에 와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이 바로 그에 대한 결정적인 증언입니다.

 <새김과 나눔>

욥기에 관해 자신이 들었거나 예전에 가졌던 느낌과, 이 번에 새로 읽고서 느낀 점을 비교하여 나눠 보십시오.

어찌하여 당신은 나를

닦달하십니까?(욥기 1-28장)

시험을 당하는 욥(1-2장)

갑자기 불행하게 된 욥의 첫마디 반응은 무엇입니까?(1,21)

 우스 지방에 사는 부유하고 의로운 사람 욥을 두고, 사탄이 하느님께 욥의 믿음을 시험해 보자고 제안합니다. 여기에 나오는 사탄은 신약에 나오는 악마가 아니라 고발하는 이 또는 적대관계에 있는 사람을 말합니다. 하느님이 허락하시자, 사탄은 욥의 재산과 자녀와 건강까지 모두 빼앗습니다. 영문도 모른 채 갑자기 큰 재난을 만난 욥은 아내와 달리 하느님을 원망하지 않고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그를 위로하기 위하여 세 친구가 찾아옵니다.

 욥과 친구들의 첫번째 대화(3-11장)

엘리바즈는 고통을 하느님의 무엇이라고 말합니까?(5,17-22)

 산문이 아닌 시적인 문체로 바뀐 첫머리에서, 욥은 자신이 당한 재난을 원망하면서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더 좋았을 거라고 한탄합니다. 앞머리에 나온 욥의 모습과 사뭇 다르죠? 그 당시 주변세계의 지혜를 대표하는 친구 중에서 엘리바즈는 “재난은 사람이 스스로 빚어 내는 것”(5,7)이라고 주장합니다. 즉 욥이 잘못한 것이 있어서 재앙을 자초한 것이니까 어서 잘못을 고백하라는 것입니다. 빌닷 역시 하느님께서 욥에게 “죄값을 물으신 것이 분명하”다고 말합니다(8,4). 소바르는 “악에서 손을 떼고”(11,14) 나서면 하느님께서 다시 돌보아 주실 것이라고 밝힙니다. 그러나 욥은 그 말에 위로받지 못하고 자신의 무죄를 계속 고집합니다.

 욥과 친구들의 두 번째 대화(12-20장)

욥이 하느님께 청한 두 가지 청원은 무엇입니까?(13,20-27)

 욥의 세 친구는 자신의 무죄함을 주장하는 욥을 비난합니다. “여인에게서 난 사람이 어찌 죄없을 수 있겠는가?”(엘리바즈:15,14). “악인의 빛은 결국 꺼지고”(빌닷: 18,5) “악인의 웃음소리란 금방 멎는 것”(소바르: 20,5)이라며 욥을 윽박지릅니다. 사실 하느님 앞에서 온전히 흠없는 자가 어디 있으리오마는, 그들의 잘못한 정도에 따라 앞날이 좌우되지 않는다는 것은 현실과 역사의 체험입니다. 자신이 그 경우를 당하고 있는 욥은 답답합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무죄를 입증할 변호인으로 하느님을 요청합니다.

 욥과 친구들의 세 번째 대화와 지혜의 글(21-28장)

욥이 친구들에게 바라는 단 한 가지는 무엇입니까?(21,2)

 욥과 친구들의 세 번째 대화는 이미 나와 있는 각자의 주장을 되풀이하는 것이라 특별히 새로울 것이 없습니다. 다만 과부와 고아처럼 어려운 이들을 돌봐야 한다는 요구가 한층 강조되고 있는 것이 눈에 띕니다. 글의 흐름에 어울리지 않게 갑자기 끼어든 28장은 후에 끼어놓은 것으로, 주님을 두려워하는 것이 참된 지혜라고 밝힙니다.

 <새김과 나눔>

욥의 친구들이 주장하는 인과응보는 오늘날 우리들 주변에서도 흔히 거론되는 가르침입니다. 나는 이 가르침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습니까? 예수님의 답변(요한 9,1-5)을 참고하십시오.

이제 저는 이 눈으로 당신을 뵈었습니다(욥기 29-42장)

욥의 마지막 고백과 선서(29-31장)

욥이 가난한 사람들을 돌본 근거를 어떻게 제시합니까?(31,13-19)

 세 친구들과의 대화가 헛된 공방전임을 깨달은 욥은 자신의 과거 모습과 현재 처지를 비교하면서 울부짖은 뒤, 자신의 결백을 선서합니다. 이 선서문은 자신의 결백을 주장한 내용이 사실과 다를 경우 자신이 저주를 받아도 좋다는 형태로 발표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욥은 자신이 하느님과 이웃에게 잘못한 것이 없다고 구체적으로 밝힌 다음 전능하신 분의 답변을 듣겠다고 마지막 말을 던집니다.

 엘리후의 변론(32-37장)

엘리후는 하느님께서 왜 사람을 고생시키신다고 설명합니까?(36,15-21)

 욥의 최종 고백에 이어 갑자기 엘리후라는 젊은 사람이 등장합니다. 그가 마지막 맺음말에 언급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이 부분은 후대에 덧붙인 대목이라고 여겨집니다. 엘리후가 변호하는 하느님의 모습 역시 앞의 세 친구처럼, 전형적인 인과응보형입니다. 다만 하느님께서 고통을 통해 사람을 구하시고 교육시키신다는 내용을 좀더 충실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마침내 나타나신 하느님(38,1-42,6)

욥은 하느님께 무어라고 대답하였습니까?(40,3-5; 42,2-6)

 드디어 욥기의 절정에 이릅니다. 욥과 세 친구들이 고대해 마지 않던 하느님께서 폭풍 속에서 나타나시어 말씀을 시작하십니다. 그분은 어느 한 편을 옹호하거나 비난하지 않으시고, 당신의 뜻대로 창조하신 자연세계의 각종 현상을 예로 들어 당신이 누구시며 어떻게 일하고 계신지를 밝히십니다. 인간의 온갖 지식으로서도 이 모든 현상의 원인을 깨닫고 해결책을 제시할 수가 없음을 느끼게 하여, 피조물인 인간 본연의 자세와 한계를 깨닫게 하십니다. 이 글 속에 나오는 베헤못과 레비아단은 신화에 나오는 괴물을 가리킵니다.

 욥이 잘된다는 뒷 이야기(42,7-17)

어찌 보면 욥기의 끝마무리는 싱겁습니다. 도대체 치열한 논란이 되었던 고난의 의미에 대해 딱부러지는 답변이 나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욥은 하느님 체험과 그분께 대한 믿음 안에서 그 문제를 끌어안게 되었습니다. 욥기는 행복한 결말로 끝납니다. 재산을 두 배로 돌려받고 자녀도 원상회복됩니다. 이렇게 욥은 칭찬받고 세 친구는 솔직하지 못했다고 꾸중듣습니다. 이렇게 보면, 하느님께 불경스럽다고 느끼리만큼 도전했던 욥이 하느님께 칭찬받은 것입니다. 신앙에 있어서 무조건 ‘예스맨’이 되기보다 하느님께 치열하게 물음을 던지는 것이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통해 참으로 중요한 하느님 체험과 신앙을 키울 수 있으니까요?

 <새김과 나눔>

욥기의 물음은 우리 삶과 신앙에서도 중요한 내용입니다. 내가 겪은 고난의 의미를 어떻게 받아들였으며, 나의 신앙의 성장에 따라 어떤 변화를 보였습니까? 그에 따라 하느님관은 또 어떻게 변하였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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