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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완숙◆ 인쇄

한자 姜完淑

   강완숙(1760~1801). 순교자.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회장. 세례명 골룸바. 1794년 12월 23일 조선입국에 성공한 우리나라 최초의 선교사인 중국인 주문모(周文謨) 신부는 서울에 들어와, 최인길(崔仁吉, 마티아)의 집에 숨어서 1795년 6월까지 전교에 힘썼다. 그러나 곧 한영익(韓永益)의 밀고로 외국인 신부의 입국과 그의 거처가 아려져 체포령이 내리자, 주(周)신부는 강완숙의 집에 피신하여, 체포를 면해 향후 6년간 전교활동을 계속할 수 있었다.

   강완숙은 본시 충청도 내포(內浦)지방의 양반집안에서 태어났다. 머리가 영리하며 성격이 활달한데다가 구변이 좋아 어려서부터 당시의 여자들과는 남다른데가 있었다. 그는 10여세가 되었을 때 불교에 뜻을 두었으나, 얼마 아니 가서 이를 포기하였다. 일찍이 충청도 덕산(德山)에 살고 있는 홍지영(洪芝榮)에게 후처로 시집갔으나, 남편은 성품이 용렬하여 행복가정생활을 이루지 못하고 항시 속세를 떠나고 싶은 생각에 젖어 있었다. 이럴 때에 천주교가 충청도 지방에까지 전해지자, 강완숙은 “천주란 하늘과 땅의 주인이다. 교의 이름이 바르니, 도리도 틀림없이 참되리라”하여, 책을 구해 읽고 깊은 감명을 받아, 믿고 좇았을 뿐 아니라 집안을 권유하여 식구들을 교화시킴은 물론, 이웃 여러 마을의 사람들에게도 적극적으로 복음을 전달하였다.

   1791년 신해(辛亥)박해 때에는 감옥에 갇힌 교우들에게 먹을 것을 갖다 주는 등 밤낮으로 그들을 돌보다가 자신도 잡혀 며칠 동안 갇히는 몸이 되었다. 평소 강완숙의 열렬한 권유에도 불구하고 입교를 주저해오던 남편 홍지영은 후환이 자신에게까지 미칠까 두려워 하여 헤어져 살기를 원하므로, 감옥에서 나온 강완숙은 시어머니와 자신의 딸과 전처의 아들인 홍필주(洪弼周, 비리버)를 데리고 서울로 이사하였다. 서울로 올라온 강완숙은 여러 교우들과 접촉하면서 전교에 힘쓰는 한편, 지황(地璜, 시바)을 도와 주신부를 맞아들이는 데 큰 구실을 하였다.

   주신부는 곧 강완숙에게 세례를 주어 최초의 여회장(女會長)으로 삼아 여자들에 대한 전교를 전담케함과 동시에 교회일을 맡아보게 하였다. 한영익이 주문모 신부의 전교활동에 관한 일을 관가에 고발하자 강완숙은 주신부를 자기 집 나무광에 숨겨두었다가 3개월 뒤 사랑방에서 거처케 하였다. 이로써 주신부는 향후 6년간 이곳을 중심으로 포교 활동을 계속할 수가 있었다.

   강완숙은 여회장으로서 자상하고 재빠른 행동으로 주신부를 도와 교회일을 도맡아 처리했고, 당대의 일류 학자들과도 교류하여 교리를 토론했으며, 많은 처녀와 부녀자를 감화시켜, 당시 벼슬하는 집안의 부녀자들까지도 입교하는 자가 많았다. 특히 당시의 국왕인 정조(正租)의 서제(庶弟)가 되는 은언군(恩彦君) 이인(二絪)이, 그의 아들 상계군(常溪君) 담(湛)의 반역죄에 연계되어 강화도(江華島)에 남아 있던 부인 송(宋)씨와 며느리인 과부 신(申)씨를 찾아, 그들의 불행을 동정하여 복음을 가르쳐, 그들로 하여금 주신부로부터 직접 세례를 받아 끝까지 신앙을 지키게 하였다.

   이와 같은 강완숙의 활약에 힘입어 주신부 입국당시 겨우 4,000명에 불과했던, 신자수는 5년만에 1만여명을 헤아리게 되었는데, 특히 그 중에서도 여신도의 수가 절대다수였음을 볼 때, 골룸바의 활약이 얼마나 컸는가를 짐작 할 수가 있다. 1800년 6월 28일 천주교에 대해 비교적 관대했던 정조가 죽고, 그의 아들 순조(純祖)가 어린 나이로 즉위하여 계증조모인 대왕대비 정순왕후(貞純王后)가 수렴섭정을 하며 천주교에 대한 박해를 가하니, 이른바 신유 대박해(辛酉大迫害)가 일어나게 되었다. 즉 1801년(순조원년) 정월에 총회장 최창현(崔昌顯)을 잡아 가두고, 사학(邪學)[천주교]를 금하는 교서를 내리는 동시에 오가작통법(五家作統法)을 강화하여 천주교의 전파를 막고 이를 믿는 자를 뿌리째 뽑아내려고 시도하였다. 이에 전국 각처에서 수많은 천주교도들이 잡혀 순교에까지 으르게 되었는데, 그 해 2월 24일에는 강완숙도 그의 일가족과 함께 잡히게 되었다. 강완숙은 자기가 체포되는 위기 속에서도 주신부 만은 안전한 곳으로 피신시켜 체포를 모면할 수 있게 하였다.

   주신부 체포에 혈안이 된 포도청에서는 갖은 고문으로 강완숙에게 주신부의 행방을 다구쳤으나, 함구하여 밝히지를 않았다. 그러나 자기로 인해서 수많은 신자들이 심한 고통을 받고 있음을 가슴아파한 주신부가 1801년 4월 24일(음 3월 12일)에 자수하여 그 해 5월 30일 처형당하자, 이를 옥중에서 전해 들은 강완숙은 자기 옷을 찢어서 그동안 주신부가 조선에서 활동한 경과를 적어 후세에 남기고자 하였으나, 이것을 전해 받은 어느 여교우의 부주의로 말미암아 잃고 말았음은 후세 사람들을 위해 더욱 애석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강 골룸바는 함께 갇힌 귀부인 4명과 함께 옥중에서도 심령수업에 힘쓰면서 순교하는 그 날 만을 기다렸다. 그 동안 모진 형벌인 주뢰(周牢)를 여섯 번이나 받으면서도 끝까지 굽히지 않으므로 형리들도, “이 여인은 사람이 아니라 신이다”라고 감탄까지 하였다. 이렇듯 옥중에서 갖은 고난을 겪은 지 만 3개월만인 그 해 7월 2일(음 5월 23일), 형장인 서소문밖으로 나가는 길에서도 강완숙은 다른 4명의 여교우들을 격려하고 주의 영광을 노래하였다. 즐거운 빛으로 제일 먼저 목숨을 바치니, 그때 나이 41세였다.

   [참고문헌] 崔奭祐, 韓國天主敎會의 歷史, 한국교회사연구소, 1982 / Ch. Dallet, Histoire l'Eglise de Coree, Paris 1874 / 黃嗣永帛書.
출처 : [가톨릭대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