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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모스서◆ 인쇄

한자 ∼書
라틴어 Prophetia Amos
영어 Book of Amos

   1. 시대 : 아모스는 여로보암 2세(기원전 787∼744)때 이스라엘 왕국에서 예언자로 활약하였다. 당시 다윗제국은 남북으로 분단되어 북쪽 이스라엘은 여로보암 2세가, 남쪽 유다는 우지야(기원전781∼740)가 통치하고 있었으나 군사 · 외교 · 문화면에서 전성기를 이루고 있었으니 그 이유는 강국이던 이집트와 아시리아가 정치적으로 침체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아시리아가 쇠약해진 틈을 타 다윗이 다스렸던 영토의 탈환을 꿈꾸었다. 여로보암 2세의 부왕인 요아스(기원전 803∼787)는 숙적이던 시리아가 아시리아의 침공을 받아 국력이 쇠잔해지자(아모 1:3, 2열왕 8:11 이하 참조) 요르단 밖의 옛 이스라엘 도읍들을 탈환했으며(2열왕 13:25) 여로보암 2세도 다마스커스의 세력을 꺾었었다.

   그러나 아모스가 예언자로 등장할 무렵에는 시리아가 차츰 안정기에 접어들어 서침정책(西侵政策)을 펴 이스라엘을 위협하기 시작했으며, 아시리아의 티글랏 필레셀(Teglat-Phalazar) 3세도 지중해 연안의 도시국가들을 침공하여 기원전 740년에 아르팟(Arpad), 738년에는 칼네(Calne)를 정복했고(아모 6:2 참조), 734년에는 블레셋을 침공하였으니 자연 이스라엘도 722년에 사마리아의 멸망을 앞두고 궁지에 몰리게 되었다. 근 백년 동안 예후 왕조의 치세 아래 이스라엘에는 사치풍조가 만연되었으며 인권은 억압되고 사회정의는 땅에 떨어져 부정과 불의가 난무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스라엘성소들은 타락한 예배행위와 우상숭배로 더럽혀지고, 베델 성소는 여로보암 1세(기원전 933-911) 이후 국왕 휘하에 들어가게 되어 그 예배는 형식에 그치고 방탕한 축제로 탈바꿈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퇴폐풍조와 부도덕한 성윤리가 범람하고, 순수성을 자랑하던 이스라엘 신앙은 신전(神殿) 내에서 매음행위를 하여 풍요와 다산(多産)을 비는 가나안의 자연종교에 물들게 되었다(호세 4:4-14 참조).

   아모스는 이러한 시대에 하느님부르심을 받아 지배계층의 부정과 불의, 부당한 억압과 수탈을 고발하며 타락한 예배행위와 성소들을 힐난하고 하느님의 윤리기준에 의거하며 계층의 고하를 막론하고 모든 잘못을 질타하여 예언자로서의 사명을 다하였다. 그리고 여로보암 2세 때인 기원전 750년경(7:10-17참조) 자신의 설교가 받아들여지지 않으므로 후대에 증거로 남기기 위해 기록한 것으로 여겨진다(여호 24:26-27 참조). 따라서 이스라엘 예언자 중에서 아모스는 최초의 ‘작가 예언자’라고 하겠다.

   2. 인물 : 아모스는 트코아(Tekoa)라는 촌읍 출신인데, 이곳은 베들레헴에서 도보로 두 시간 가량 걸리는 유다사막 부근이다. 그는 유다왕 우지야의 가축떼를 치던 목축업자(boger, 7:14)로 추정되는데(2역대 26:10) 왕의 목장감독하는 관리였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무화과나무의 일종으로 가축사료로 쓰이던 시크마나무를 재배하는 사람이었다(7:14). 그리고 아모스의 직업과 신분을 가리키는 ‘노케드’(Noged, 아모 1:1)란 용어를 살펴보면, 모압의 왕메샤(Me놈)도 노케드라 불렸고(2열왕 3:4), 우가릿(Ugarit) 문헌에서도 대사제를 ‘노케드’라고 불렀는데 단순히 ‘고용인으로서의 목동’이라기보다는 왕의 목장을 관리하던 ‘목장주’라고 번역해야 옳을 것이다[서인석, 하느님정의분노, 분도출판사, 1975, pp.58-60 참조]. 그리고 아모스가 받은 소명은, '군대식 소명체험'으로 하느님의 명령에 절대적으로 복종하는 군인과도 같으며, 하느님과의 대화에서 들은 '비밀'(sod, 아모 3:7)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전하는 사명을 받은 점으로는 하느님과 끊임없이 대화를 나누며 예언직을 수행한 예레미야와도 흡사하다(예레 20:7-9)[서인석, <예언자들의 소명체험>, 신학전망 26(1974), p.175 이하 참조].

   아모스는 그 당시 상당한 지식층에 속하는 인물로 추정되니 역사와 지리에 대한 지식도 깊었으며(아모 1:3-2:3), 뛰어난 논전가로서 사건을 질서 있게 전개시키며(9:1-4, 4:6-12)지혜문학(智慧文學)의 정교한 표현법(3:3-8, 5:19, 6:12)[H.W. Wolff, Amos, geistige Heimat, Neukirchen 1964, 참조]과 장엄한 전례문을 다양하게 사용하고(1:3-2:16, 4:6-13, 5:4-6. 14-15) 언어의 유희와 아이러니도 구사하였다(3:12, 5:5, 6:13, 8:1).

   3. 메시지 : 아모스가 첫 신탁(1:3-2:16)에서 다마스커스 · 가자 · 불리셋 · 티로 · 에돔 · 암몬 · 모암 · 유다 · 이스라엘 등 여러 민족의 불의를 고발했지만 그가 맞서 투쟁한 것은 바로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에 대한 압제와 불의는 현대에도 계속되고 있으니 아모스의 고발은 우리자신, 나아가 인류 전체에 대한 고발인 것이다. 아모스는 베델의 사제 아마지야 등이 나라의 안보를 위협하는 모반자로 몰아붙여도, 정의하느님이 내릴 갖가지 재앙을 예증하며 회개를 호소하였으나 그의 분노하느님만나 정의를 위해 투쟁해야 할 소명을 받았던 것이다(1:1-2, 2:12-13, 7:10-17). 그는 일식 · 지진 · 메뚜기떼 등을 하느님정의가 만천하에 드러날 ‘야훼의 날’(5:18-20)에 대한 징표로 삼았다.

   아모스는 첫째로 우상숭배를 공격하며 자연의 생성과 소멸은 우상 바알의 관장이 아니라 하느님의 관장이라고 주장하고 하느님은 자연을 초월하여 자연 내의 어떤 세력과도 혼동되지 않으며 지진과 가뭄과 수확도 지배하신다고 말한다(4:4-12). 그 하느님이스라엘이집트의 종살이에서 해방시키고 가나안을 주어 자유의 영토로 삼게 하셨고(2:9 이하, 3:2), 지금도 지진(1:1)과 천재지변을 통해 이스라엘역사 속에 참된 해방의 활동을 하고 계시니, 당신 백성에게 "사자처럼 시온에서 으르렁거리고"(1:2), 예언자를 ‘탄생시키고’(2:11, 7:15), 하느님봉헌된 전사(戰士) ‘나지르’ 사람들을 부르고 계신다. 하느님은 불의와 폭력을 일삼는 여러 나라 가운데 끼여 있는 이스라엘회개하고 정의를 세워 만백성의 등불이 되도록(이사 49:6) 아모스를 통해 호소하나 이스라엘은 불의와 폭력, 사기와 착취 등 온갖 만행을 저지른다. 그러므로 아모스는 마지막으로 하느님의 엄한 심판을 예고하는데, 그는 그 심판을 ‘하느님과의 만남’ 또는 ‘하느님과의 대좌’(아모 4:12)라고 표현한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과의 만남에서 공포와 전율을 느끼게 되고 암흑 속에서 통곡하게 될 것이다. 그날은 불의를 범한 자들을 모조리 없애는 살육의 날(6:8-11)이니 이스라엘 백성이든 이교 백성이든 불의한 자들은 아무도 심판을 면하지 못할 것이다(2:13-16, 9:2-4). 여기서 아모스는 이스라엘 백성에게만 애정과 자비를 보이는 편파적인 하느님을 넘어 보편적인 하느님을 보게 한다.

   또한 아모스는 타락한 예배와 형식에 그친 종교적 위선을 고발하였다. 그러나 더 심한 노성(怒聲)으로 고발한 것은 사회정의를 짓밟는 행위였다. 아모스는 이스라엘이집트에서 해방된 뒤 시나이에서 하느님과 맺은 맹약(盟約)을 잊어버린 것이 모든 불의의 원인이라고 생각하였으며(3:1), 한 나라의 운명은 그 나라의 정의도덕,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에 대한 배려와 인권의 존중과 하느님에 대한 경외심에 달려 있다고 여겼다. 그리고 아모스는 히브리인들의 유일신(唯一神) 사상을 순수하고 고차적인 수준으로 이끌었으니 가난한 이웃에 대한 폭력과 비행을 한 분이신 보편적인 하느님을 거스르는 행위로 규정한 것이다. 아모스의 하느님가난한 이들의 편에 서 계시며 그들을 해방시키시는 분이다[A.S. Kapelrud, Central Ideas in Amos, Oslo 1956 / J.F. Craghan, Amos dans la nouvelle recherche, BTB, II, 1972, pp.243~262 참조].

   4. 구조와 영향 : 아모스서는 여러 개의 단편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다음과 같이 나눌 수 있다. ① 신탁(神託) : 아모스서의 신탁들은 아주 짧고 폭발적인 어투다(1:2, 3:2, 5:16 이하, 7:9 등). 그러나 동일한 양식 안에 제법 긴 문장으로 된 신탁도 있으니 “…의 세 가지와 네 가지 죄 때문에 …”라는 도입어(導入語)로 시작된 신탁이다(1:1, 4:6-12 참조). ② 자서전[J.D. Watts, Vision and Prophecy in Amos, Leyde 1958] : 다섯 편의 현시(顯示)가 여기 속한다. 그런데 이 현시들은 원래는 앞부분에 위치했으리라 추측되니, 다섯 번째 현시의 내용으로 보면 아모스가 베델에서 추방되기 전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③ 전기 : 7:10-17의 표제에는 아모스가 3인칭으로 등장하니 아모스에 대해 전해져오는 설화를 쓴 것 같다.

   따라서 후대의 한 편자가 위와 같은 여러 단편적인 글들을 수집하여 한 권의 책으로 엮은 것 같다. 편자의 작업 과정을 추정해 본다면, 편자는 독자들이 쉽게 기억하도록 여러 신탁을 특수 표제 하에 한데 모아 어떤 신탁들은 "이 말씀을 들어라"(3:1, 4:1, 5:1, 8:4)라는 표제하에, 어떤 신탁들은 "저주 있어라"(5:7 · 18, 6:1)라는 표제하에 결집해 놓았을 것이다. 그런데 7-9장의 내용은 다소 일관성이 결여된 것 같다. 편자는 왕과 사제의 자녀들이 칼맞아 죽게 되리라는 이야기(7:10-17)를 셋째 현시 뒤에다 넣었는데, 이유는 그 앞 구절 여기저기에 칼이라는 말이 나오기 때문인 것 같다(17:1 · 9 · 17). 그리고 다섯째 현시(9:1-4)가 신탁 사이에 삽입된 것도 다소 이상하다.

   또한 편자는 신명기 전승의 단편(2:4-5)과 위협을 강조하는 찬미가(4:13, 5:8-9, 9:5-6) 등 아모스가 짓지 않은 단편도 삽입하였다. 그러나 어떤 주석가들은 이러한 찬미가가 직접 아모스가 지은 것이라고도 한다. 한편 9:13-15는 제 2이사야의 작품과 비슷하다는 저에서 아모스의 작품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다. 그러나 고대 근동의 여러 문헌에는 위협 신탁 뒤에 반드시 번영과 행복에 대한 약속이 뒤따르고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러므로 아모스서는 시대순의 내용에 따라 편집된 작품이 아니다. 편자는 9:8-15의 행복을 알리는 구절을 제하고는 ‘위협과 저주’라는 도식에 따라 아모스서를 편집하려고 했음이 틀림없다.

   아모스의 예언은 이스라엘인에게 깊은 인상과 영향을 주었다. 그의 예언대로 다마스커스(기원전 732년)와 사마리아(기원전 722년)도 멸망하였다. 그리고 호세아 · 이사야 · 미가 등 여러 예언자도 아모스의 예언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즈가리야는 먼 후일 아모 1:1에 언급된 그 유명한 지진을 기억하고 있었고, 토비트기(2:6)는 아모 8:10을 인용까지 하고 있다. 신약성서도 여러 곳에서 직접 간접으로 아모스서를 인용 또는 암시하고 있다. 그 예로 묵시 10:7과 11:18은 아모 5:25-27을, 사도 15:16-17은 아모 9:11-12를 인용 또는 암시하고 있다.

   과거에는 아모스에 대한 주석이나 연구가 활발하지 못했으나 현대에 와서 사회정의나 국제정의가 절실히 요청됨에 따라 아모스에 대한 관심도 크게 상승하였다. 아모스의 단순하나 강직한 어투, 가난과 소외와 억압에 짓눌린 사람들에 대한 줄기찬 변호, 그리고 그의 고차원적인 유일신 사상 때문에 사막의 예언자 아모스는 현대인에게도 가장 힘찬 예언자이다. 그는 가난한 자들의 해방을 부르짖는 예언자이다. 그것은 인류의 양심과 정의를 존중하는 예언자의 목소리가 오늘날에도 예수 그리스도교회를 통해 울려 퍼지기 때문이다(아모 1:2, 3:8). (徐仁錫)

   [참고문헌] J. Touzard, Le Livre d'Amos, Paris 1909 / P.G. Rinaldi, Amos, Turin 1953 / A. Neher, Contribution a l'etude du prophetisme, Paris 1950 / T.H. Sutcliffe, The Book of Amos, London 1959 / H.W. Wolff, Amos, geistige Heimat, Neukirchen 1964 / L. Monloubou, Prophete-Amos, SDB, VIII, col. 706-724, Paris 1969 / C. Hauret, Amos et Osee, Paris 1970 / E. Hammershaimb, The Book of Amos, London 1970 / 徐仁錫, 하느님정의분노, 분도출판사, 1975 / 金正俊, 正義의 預言者, 아모스註釋, 한국신학연구소, 1976.
출처 : [가톨릭대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