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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어, 외국어, 관련어, 문장으로 검색하세요. 예)부활,사순 시기, liturgy, Missa, 천사와 악마, 종부성사, 그리스도의 탄생, 어머니이신 성모 마리아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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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틴어 Eusebius

   ① 체사레아의~(E. Caesariensis, 260?~339). 최초의 그리스도 교회사가. ‘교회사의 아버지’로 불린다. 팔레스티나 태생. 스승인 팜필로스(Pamphilos)를 통해 오리제네스(Origenes)의 계보 학통(學統)을 이어 오리제네스가 수집한 카이자리아의 그리스도교 도서관에서 학구의 일생을 보냈다. 로마황제 디오클레티아누스(재위 : 284~305)의 대박해 때까지는 카이자리아의 장로로 있다가, 후에 주교로 취임하였다(313년). 그의 신학적 경향이 오리제네스적인 종속론(從屬論) 계통을 계승하고 있었기 때문에 아리우스 논쟁 때는 아리우스의 입장에 동정하였다. 니체아회의에서는 ‘호모우시오스 신경(信經)’에 일단 서명했지만, 그 후의 논쟁 발전에서는 아타나시오파(派)에 반대입장을 취하며, 항상 콘스탄티누스 대제(재위 : 306~337)의 통일정책을 받아 들였다. 대박해에 종지부를 찍은 대제의 출현은 그로서는 대망의 ‘구원의 시기’가 도래한 것으로 생각되어 대제에게 여러 번 송사(頌詞)를 바쳤고, 대제의 사후에는 ≪콘스탄티누스전≫(Vita Constantini)을 저술하였다. 이 전기에는 대제가 경건한 신앙자로 묘사되어 있어서, 후세의 학자간에서 여러 가지 평가가 나오기도 하였다.

   이 ≪콘스탄티누스전≫이나 송사에서 그는 대제의 제국을 하느님의 지배의 지상(地上)에 있어서의 모상(模像)으로 생각하고, 황제는 하느님의 대리인, 하느님모상, 하느님선택한 사람이란 황제이념을 창조하였다. 이 이념이 바탕이 되어 황제를 교회의 수장(首長)으로 보는 동방교회의 전통이 생겼고, 1917년의 혁명 때까지 러시아에 존속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콘스탄티누스에 관해서는 그밖에 ≪콘스탄티누스 치정 30년 기념연설≫(335)이 대표작이다.

   그의 저서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역사서(歷史書)로, 아브라함의 탄생(기원전 2015년?)에서 303년까지를 연표(年表)로 만든 ≪연대기≫(年代記)는 중세 역사기술의 기초가 되었다. 또한 303년부터 재삼 증보되어 325년에 10권으로 완성한 ≪교회사≫는 그리스도교 승리의 역사를 기록함으로써 호교적(護敎的)인 목적을 추구하려고 한 것이며, 수많은 귀중한 문서 · 저서 발췌를 수록, 고대교회사를 아는 데 없어선 안되는 사료(史料)의 보고(寶庫)이다. ≪교회사≫의 부록(附錄)에서 후에 확대 독립된 ≪팔레스티나 순교자전≫은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박해의 실제를 아는데 중요한 자료이다. 또한 호교적인 2대 저술로는, 이교도를 대상으로 한 ≪복음의 준비≫(Praeparatio evangelica, 15권), 유태인을 대상으로 한 ≪복음의 증명≫(Demonstration evangelica, 20권)이며, 이 두 개의 저서에는 고전 그리스의 사상가들로부터 방대한 인용이 있어, 그의 박학을 증명해 준다. 그밖에 성서석의(聖書釋義)도 많이 썼지만, 오늘날 잔존한 것은 적다.

   그의 사상은 본질적으로 오리제네스적, 중용적이다. 정통파인 호모우시오스를 배척하는 동시에 아리우스주의도 배척한다. 그는 또한 아타나시오(Athanasius)의 교설을 ‘사벨리우스주의’라고 비난하였다.

   [참고문헌] M. Weis, Die Stellung des Eusebius im arianischen Streit, Freiburg 1920 / J. Stevenson, Studies in Eusebius, Cambridge 1929.

   ② 베르첼리의~(E. Vercellensis, 283/~371). 성인. 축일은 8월 2일. 주교. 수도원 창건자. 반(反)아리우스주의자. 사르디니아에서 태어나 이탈리아 베르첼리(Vercelli)에서 별세하였다. 교황 율리오 1세(재위 : 337~352) 밑에 성직자로 있다가 344년경 베르첼리의 초대주교로 임명, 수도원을 세우고 많은 성직자들과 공동신앙생활에 들어갔다. 그는 서방에서의 수도원 생활의 도입자로 일컬어진다. 아리우스 문제 해결을 위해 교황 리베리오의 사절의 한 사람으로 로마황제 콘스탄티우스 2세에게 가서 교회회의 개최를 요청하였다. 355년의 밀라노 교회회의에서는 성 아타나시오(Athanasius)를 비난하는 선언에 서명을 거부하고 팔레스티나로 추방되었다가, 콘스탄티우스 2세가 죽고 율리아누스 황제가 즉위하자 귀국이 허용되었다. 362년 성 아타나시오와 함께 알렉산드리아 교회회의를 주최, 비타협적인 주교들 사이를

   화해시키는 결의사항에 찬동하였다. 이탈리아로 돌아온 그는 프와티에(Poitiers)의 주교 힐라리오(Hilarius)와 협동으로 아리우스주의자들에 대항하였다. 그는 추방당했을 때의 고난 때문에 순교자로 숭경받고 있다.
출처 : [가톨릭대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