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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어, 외국어, 관련어, 문장으로 검색하세요. 예)부활,사순 시기, liturgy, Missa, 천사와 악마, 종부성사, 그리스도의 탄생, 어머니이신 성모 마리아 등

◆요한1◆ 인쇄

라틴어 Joannes
영어 John
독일어 Johannes
[관련단어] 가르멜회 

   ① 사도 ∼(J. Apostolus, ?∼100?). 12사도의 한 사람. 성인. 갈릴래아의 어부, 제베대오의 아들. 장(長)야고보의 동생(마태 4:21, 10:2, 마르 1:19, 3:17, 루가 6:14, 사도 1:13). 형 야고보와 함께 일찍부터 가업(家業)을 버리고 예수의 제자가 되었다(마태 4:21 · 22). 12제자 중에서도 베드로, 형 야고보와 함께 대표적 인물이며, 예수 생애의 중요한 장면에 등장하고 있다(루가 8:51, 마태 17:1, 마르 14: 33). 타고 난 과격한 성격 때문에 ‘벼락의 자식’이라 불릴 정도였지만(마르 3:17), 요한복음이나 편지 등과 관계가 깊다고 보고 ‘사랑의 사도’로도 일컫는다. 요한복음에는 그의 이름이 나오지 않는다. “예수가 사랑하고 계신 자”(13:23)라는 것이 요한이라고 일컫기도 하지만, 확실한 것은 아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로부터 성모 마리아를 돌보아 드릴 것을 부탁 받았다(요한 19:26). 성신 강림 후 베드로와 함께 예루살렘(사도 3:1)과 사마리아(사도 8:14)에서 포교활동을 하였다. 전설에 의하면 로마의 도미티아누스 황제(재위 : 81∼96)의 대박해 때 파트모스섬으로 유배되었다가 에페소로 돌아가 서기 100년경에 90세로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파트모스섬에서는 <요한 묵시록>을, 에페소에서는<요한복음>과 3서한을 썼다고 한다.

   미술에서는 독수리 또는 안에서 뱀이 기어 나오려 하고 있는 배(杯)와 함께 복음사가로, 파트모스섬 위의 환시자(幻視者)로, 또는 펄펄 끓는 솥 속의 환시자로 묘사되고 있다. 축일은 12월 27일.

   ② 세례자 ∼(J. Baptista). 사제 즈가리야와 엘리사벳의 아들. 예수의 사촌(루가 1:36). 세례자로 불리는 것은 예수에게 세례를 주었기 때문이거나 아니면 하느님의 권위에 의해서 세례의 새로운 의식, ‘회개의 세례’를 가르쳤기 때문이다(마태 3:13-17, 마르 1:9-11, 루가 3:21 이하). 그의 출생, 석녀(石女)의 잉태, 어머니 태내에서 이미 성령이 충만함, 할례(割禮), 명명(命名) 등이 천사(가브리엘)에 의해 성전(聖殿)에서 그의 부친 즈가리야에게 고해졌다(루가 1). 가장 위대한 예언자로서 예수에 의해 증명되고(루가 7:28) 태어나면서부터 평생을 나지르 사람으로서 바쳐진 수행자(修行者)이며, 메시아의 선구자(先驅者), 선지자 엘리야의 정신과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루가 1:17, 마태 17:12 이하). 청년시절에 황야에서 기도고행으로써 자신을 준비하고 부름 받을 때를 기다렸다(루가 1:80). 로마황제 티베리우스(재위 : 14∼37)의 재위 15년째인 28년에 하느님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자, 그는 베타니아의 요르단 계곡으로 갔다(요한 1:28). 그리고 ‘하느님 나라가 다가왔으니’(마태 3:2), 죄를 용서받기 위해(루가 3:3) ‘회개의 세례’를 받을 것을 전달하였다.

   요한의 세례에는 원죄(原罪)를 사해줄 힘은 없다. 이 세례는 내심의 영성(靈性)을 상징한 것이며, 이것을 받으려면 내심의 개선을 필요로 한다. 이 세례는 하느님 나라에 받아들여지기 위한 회개에 의한 준비단계로서, 죄의 고백도 포함되어 있었다(마태 3:6). 그는 선교(宣敎)의 초기부터 자기는 메시아가 아니라면서, 장차 오게 될 메시아증인이 되었다(루가 3:15-18, 요한 1:19-28). 그는 장차 오게 될 그리스도를 위한 길을 마련하였다. 그리스도에게 세례를 주는 것을 사양한 요한에 대해, 그리스도는 “모든 정의는 완수해야 한다”(마태 3:14)(예수는 죄인인 인류의 대표자로서 죄인처럼 세례를 받아야 하며, 그것은 구세주로서 완수해야 하는 의무라는 뜻)고 말하고 요르단강에서 요한으로부터 영세하였다. 요한은 자기 제자와 어떤 유다인이 세례에 관해 의논했을 때, 제자들에게 답하여,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라고 하면서, 신랑과 신랑의 친구비유를 가지고 그리스도에 관해 증명하고, “그분은 더욱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요한 3:25-30)고 말하고 그의 선교를 끝마쳤다. 그 후 갈릴래아 분국(分國) 헤로데 대왕의 아들 헤로데 안티파스의 결혼에 대해 그 부도덕함을 비난했다가 체포되어 사해(死海) 동쪽 마케르스성(城)의 감옥에 투옥된 후 참수당하였다.

   ③ 십자가의 ∼(J. a Cruce, 1542∼1591). 성인. 축일은 12월 14일. 스페인의 신비가. 아빌라의 데레사(Teresa of Avila)와 함께 맨발의 가르멜회를 창설하였다. 폰티베로스(Fontiveros)에서 귀족 혈통을 이은 가난가정에서 태어난 그는 1563년 메디나 델 캄포(Medina del Campo)에 있는 가르멜 수도원에 들어갔으며, 살라만카(Salamanca)에서 신학을 공부한 뒤 1567년에 서품받았다. 좀 더 엄격한 수도 규칙을 찾아 카르투지오회(會)의 수사(Carthusians)가 되려고 하였으나 아빌라의 데레사에게 설득되어 데레사의 개혁을 가르멜 남자수도회에 소개하고, 두루엘로(Duruelo)의 첫 개혁 수도회(맨발의 가르멜회)에 입회하였다. 그 뒤 알칼라 데 헤나레스(Alcala de Henares)에 있는 가르멜회 대학에서 교편을 잡았으며(1570∼1572년), 아빌라의 강생수도원의 고해신부가 되었다(1572∼1577년), 그러나 1577년 개혁을 원하지 않는 수도원장 때문에 톨레도(Toledo)에 있는 가르멜 수도원에 갇혔으며, 9개월만에 칼바비오(Calvavio)의 수도원으로 도망침으로써 가르멜회맨발의 가르멜회와 이전의 가르멜회로 완전히 분리되었다. 그는 베자(Baeza) 대학의 총장(1579∼1581년)과 세고비아(Segovia)의 소수도원장을 지냈으며, 1581년부터는 그라나다에서 아라비아의 신비주의와 접하였다. 이리하여 개인적인 체험과, 성서토미즘을 바탕으로 하여 주석을 덧붙인 <갈멜산에 오름>(The Aseent of Mount Carmel), <영혼의 어두운 밤>(The Dark Night of the Soul), <영의 노래>(The Spiritual Canticle), <타오르는 사랑의 불길>(The Living Flame of Love) 등의 작품을 남겼다. 말년에는 선임자에게 불신을 받고 라 페누엘(La Penuel)의 탁발 수도회에서 우베다(Ubeda)로 쫓겨 가 거기서 세상을 떠났다. 1762년 시성, 1926년 교회학자로 선포되었다. (⇒) 가르멜회

   ④ 몬테코르비노의 ∼(J. a Monte Corvino, 1247∼1328). 최초의 중국 선교사. 나폴리왕국 몬테 코르비노에서 태어나 프란치스코회에 입회하였다. 1289년까지 아르메니아와 페르시아에서 활동하다가 그 해 아르메니아의 왕 하이툰(Haitun) 2세의 사절을 대동하고 교황 니콜라오 4세를 만났고, 교황의 서한을 후대하여 다시 동방으로 갔다. 그 서한 가운데 하나가 몽고왕에게 보내는 것이었다. 1291년 페르시아를 거쳐 인도에 도착하여 약 1년 동안 머무르면서 100여명을 개종시켰다. 1292년 바다를 건너 중국에 도착하였고, 1294년 북경에 입성하였다. 당시 북경에 인접한 산서성(山西省) 에는 네스토리우스파의 일파인 경교도(景敎徒)들이 살고 있었는데 이들과 논쟁하여 많은 사람들을 개종시켰고, 1299년에는 북경에 최초의 성당을, 1305년에는 제 2의 성당을 각각 건립하였으며, 신약성서시편을 번역하는 등 저술활동을 폈다. 1307년 교황 글레멘스 5세는 그를 북경주교로 임명하였다. 그는 또 복건성(福建省)에 대성당과 수도원을 건립하고 교구를 설치하게 하였으며, 북경에도 수도원과 제3 성당을 설립하였다.

   그가 죽은 지 약 40년 후인 1368년 몽고가 중국 땅에서 축출되면서 그가 활동한 중국포교지의 교회도 거의 소멸되었다. 1924년 상해 중국교회회의는 교황청에다 그의 시복을 신청하였다.

   ⑤ 천주의 성 ∼(J. a Deo, 1495∼1550). 성인. 원명은 Juan Ciudad. 포르투갈의 몬테 모로노보 태생. 파란 많은 생활을 한 뒤 스페인 카스틸랴의 오로프루사(Oroprusa) 백작의 목부(牧夫)가 되고, 이어서 1522년 백작 휘하의 병사(兵士)가 되어 스페인 프랑스 전쟁에 참전, 후에 헝가리에서 스페인 터키 전쟁에서도 싸웠다. 그 뒤 아프리카로 추방된 한 귀족의 하인이 되었는데, 아빌라의 복자 요한의 설교를 듣고 그 덕행에 매료되었다. 1540년 그라나다(Granada)에 병원을 세우고, 영웅적인 사랑과 헌신으로 병자를 돌보면서 의료봉사(醫療奉仕) 사업에 몸을 바쳤다. 그가 죽은 뒤 1589년 교황 식스토 5세의 인가를 얻어 ‘요한의 자비의 벗 모임’이 발족되었다. 1630년 교황 우르바노 8세에 의해 시복(諡福), 1690년 알렉산데르 8세에 의해 시성(諡聖)되었다. 레오 13세는 1886년에 또한 비오 11세는 1930년에 각각 그를 병원 · 병자 · 간호인 등의 수호성인으로 선언하였다. 축일은 3월 8일 그의 유골은 그의 이름을 붙인 그라나다의 동수도회 성당에 안치되어 있다.
출처 : [가톨릭대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