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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부활,사순 시기, liturgy, Missa, 천사와 악마, 종부성사, 그리스도의 탄생, 어머니이신 성모 마리아 등
◆정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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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丁夏祥
[관련단어]
기해박해
정약종
정하상(1795∼1839).
성인
.
축일
은 9월 20일. 본관은 나주(羅州),
한국
천주교
회 초기
평신도
지도자. 1801년 신유(辛酉)박해 때 순교한
정약종
(丁若鐘)의 둘째 아들이고,
실학
자
정약용
(丁若鏞)의 조카이며
세례명
은
바오로
이다. 부친은
실학
자
이익
(李瀷)의 학문을 이어
서학
(西學)을 연구하고, 1784년
한국
천주교
회 창설에 참여한 초기
평신도
지도자였으며, 1801년 순교하였다. 순교적
희생
으로
진리
를 증언한
순교자
인 아버지와
신심
이 유달리 깊었던 어머니 유
세실리아
(柳∼)의
인도
로 어려서부터
천주교
신앙
을 깨우쳤다. 1801년의
신유박해
때 부친과 친형 철상(哲祥)이 서소문 밖에서 처형당하여 순교하자 7세인 정하상은 누이동생 정혜(情惠)와 어머니를 모시고
마재
[馬峴, 京畿道 楊州郡 瓦阜面 陵內里
마재
부락]의 큰댁으로 낙향하였다. 20세 때 단신 상경하여
교우
조증이
(趙曾伊) 집에
의지
하며 한국
교회
를 위해 헌신하기로 결심하고
교리
와 학문을 철저하게 익히기 위해 함경도 무산(茂山)에 귀양가 있는
조동섬
(趙東暹,
유스티노
)을 찾아가 수년 간 학덕을 닦았고, 서울로 귀환하여 한국
교회
의 발전을 위한
초석
으로 종횡의 활동을 펴게 된다.
1801년의
신유박해
로 오직 한 분이던 성직자
주문모
(周文謨)
신부
와 대표적인
평신도
지도자들인 순교한 후 좀처럼 부흥의 계기를 찾지 못하는 조선
천주교
회를 위해 첫째로 흩어진 교인들을 찾아내
신앙
의 불길을 다시 태우게 하고
신도
들의
신앙
생활을 조직화하는 한편, 한국
교회
에 다시금 성직자를
파견
해 주도록 북경주교(北京主敎)를 상대로
성직자영입운동
(聖職者迎入運動)을 추진하게 된다. 그는 이 어려운 사업을
현석문
(玄錫文, 가롤로)과
유진길
(劉進吉,
아우구스티노
) 등
희생
적이며 유능한 동지와 힘을 모아 추진하였다. 정하상은 북경주교에게 한국
교회
에 성직자를
파견
해 주도록 직접 호소하기 위하여 1816년 이후 전후 아홉
차례
나 국금(國禁)의 위험을 무릅쓰고 왕복 5천리의 길을 엄동설한에 노복의 비천한 역무를 담당하며 부경사대사신(赴京事大使臣)의 사행 기회에 틈타 북경을 왕래하며 북경주교에게 계속
청원
(請願)하였다. 그러나 당시 북경교회의 사정도 여의치 못하여 한 사람의 성직자도 조선왕국으로
파견
할 수 없는 사정이었다. 1823년부터 정하상은 국내
교회
의 실질적 지도자의 일을 맡아보면서 역관(驛館)으로 북경과의 연락이 용이한
유진길
과 부경사행의 노복인
조신철
(趙信喆, 가롤로)을 밀사로 북경
교회
와 꾸준히 교섭케 하였다. 정하상의 성직자 영입운동은 마침내 세계교회로까지 확대된다. 즉 북경주교를 대상으로 하는 성직자 영입운동이 실효를 거두기 어려움을 체험적으로 간파하게 된 정하상은 마침내 세계
가톨릭
의 최고
수위권
자(首位權者)인 교황에게
청원
하기로 한 세계적 경륜(世界的 經綸)의 성직자 영입운동을 전개하게 된다.
1825년 정하상은
유진길
과 의논 후 “저희들은 교황성하께 두 가지 일을
겸손
되이 제안하옵는데, 이 두 가지가 똑같이 필요한 줄로 생각하나이다. 이 두 가지는 서로 분리될 수 없는 것이옵니다. …
신부
를
파견
하는 것이 저희들로서는 큰 은혜요 저희들에게는 크나 큰
기쁨
이 되리라는 것은 틀림없는 일이오나, 이와 동시에 저희들의 욕구를 영속적으로 채워 주고 장래에 있어서 저희들의 후손들에게 영속적으로 채워 주고 장래에 있어서 저희들의 후손들에게 영신적
구원
을 보장하여 줄 방법이 강구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불충분한 일일 것입니다”라고 매우 함축적인 내용을 담은 대교황청원문(對敎皇請願文)을 올렸던 것이다. 성직자의
파견
만인 아니라 영속적인
구원
을 보장할 적극적 대책을 청구하고 나선 것이다. 이
청원
문은 북경주교의
동정
어린 배려로
마카오
교황청
포교성성 동양경리부로 접수되었고, 포교성성장관 움피에레스(Umpierres)
신부
의 의견이 첨부되어 1827년
로마
교황청
에 접수되었고, 포교성성장관 카펠라리(Capellari)
추기경
의 주선으로 파리 외방전교회(巴里外邦傳敎會, La Societe des Missions-Etrangeres des Paris) 소속의 전교성직자이던
브뤼기에르
(Brugiere)
주교
의
조선전도
자원이 있어 마침내 1831년 9월 9일자로 교황
복자
그레고리오 10세[전기 카펠라리
추기경
이 교황으로 선임되어 등극]에 의해 조선교구의 설정이 세계에 선포되었다.
정하상의 업적을 살펴보면 첫째 그는 조선교구 설정의 직접적 계기를 이룬 진보적이고 세계적 안목을 가졌던
박해
시대 한국
교회
평신도
지도자의 한 사람이었다. 둘째로 정하상은 조선교구 설정 이후 조선교구로 부임해 오는 성직자를 계속 영입(迎入)해 들였고, 그 성직자들의 충실한 협조자로의
회장
일을 헌신적으로 수행하여 한국
교회
발전에 지극히 큰 공헌을 쌓았다. 즉 1834년말 중국인
유방제
(劉方濟)
신부
를 비밀리에 영입하였고 1835년
모방
(Maubant)
신부
, 1836년에
샤스탕
(Chastan)
신부
, 그리고 1837년에 조선교구 제2대
교구장
인
앵베르
(Imbert)
주교
를 영입하였다. 이리하여 조선교회가
교구장
인
주교
, 전교자인 성직자 그리고 교구
신자
를 가지는
교회
로의
교회
체제를 갖추게 했으며 이들 성직자를 협조하여 한국
교회
발전을 위해 몸바쳐 일하였다. 셋째로 그는
앵베르
주교
로부터 속성
신학교
육을 받고 성직자(聖職者)가 되기 위해
선택
된 한 사람이었다. 그의 순교적 열성과
교리
에 대한 지적 이해, 그리고 놀라운
신덕
에 탄복한
앵베르
주교
가 베트남의 베리트(Beryte)
주교
의 예를 따라
박해
하의 조선
교회
에 필요한 방인성직자 양성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 학지(學知)와 수덕(修德)과 신망(信望)의 정하상은 한국인 최초의 성직자가 될 것으로 기대되었으나 1839년의
기해박해
가 일어나면서
앵베르
주교
가 순교하고 정하상 자신도 순교하게 되어 그
희망
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넷째로 장하상은 한국인 최초의 호교론서(護敎論書)인 <상재상서>(上宰相書)로써
박해
자에게
천주교
입장을 밝히고
박해
를 그치도록 문서로 힘있게 주장하였다. 체포되기 전에 미리 저술하였고 체포 후
박해
당국자에 제출된 <상재상서>는 불과 2,000여 자의 단문의 글이나 가장 요령 있게 주장한 명문으로 이름 높은 소책자이다. 다섯째로 정하상은
생명
의 극(極)을 다하여 순교함으로써 천주의
신앙
을 증거하고 영생의
영광
을 얻었으며 한국인의
신앙
을 굳게 실증하였다.
그는
기해박해
때인 1839년 9월 22일 서소문 밖에서 45세를 일기로 순교하였다. 그보다 두 달 늦게 79세의 노모 유
세실리아
도 옥사 순교하였고, 다음 달에 누이동생인 정혜마저 순교하였다. 이 세 분
순교자
는 1925년에
복자
로
시복
(諡福)되었고 1984년 5월 6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시성
되었다. 정하상의 일생은 오로지 천주만을 위한 고귀한 것이었다. (⇒)
기해박해
,
정약종
(李元淳)
[참고문헌] 邪學謀叛罪人洋漢進吉等鞫案 / 右捕盜廳謄錄 / 憲宗實錄 / Dallet, Histoire de l'Eglise de Coree / A. Launay 原著, 安應烈 譯, 한국 79위 순교복자전, 京鄕雜誌社, 1957.
출처 : [가톨릭대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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