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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미즘◆ 인쇄

영어 Thomism

   토미즘은 성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에 의하여 세워진 철학과 신학의 체계이다. 또한 14세기 이후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토마스의 학설이나 그의 근본사상을 척도로 삼아 발전시켜 나아가는 철학과 신학의 체계나 학파를 토미즘이라고 한다. 여기에서는 전자의 의미로 토미즘에 관하여 서술하기로 한다.

   1. 토미즘의 배경 : 토미즘이 탄생하게 된 데는 물론 성 토마스 아퀴나스 자신의 노력이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새로운 체계의 탄생을 위한 길을 준비하기 위하여 그의 스승인 알베르토 마뉴스(Albertus Magnus)가 크게 기여했음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스승인 알베르토와 제자인 토마스의 이름은 그들의 위대한 저작들 속에서 떼어 놓을 수 없는 것으로 함께 남아 있을 것이다. 알베르토토마스의 견해 사이에는 많은 접촉점이 있으나 그들은 각자 서로 다른 천재성을 지니고 있었다. 토마스의 견해는 알베르토의 그것보다 더 비판적이었다. 알베르토에 비하여 토마스는 자신이 다루는 소재를 완전하게 파악하고 그것을 질서정연하게 정리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토마스의 문제는 간결하고 분석적이며 종합적이다.

   그의 분석력과 종합력은 조화를 이루고 있다. 토마스는 고대 그리스 철학의 유산으로서 새로운 것을 창조하였다. 알베르토토마스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의 철학그리스도교철학과 신학에 이끌어 들이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 알베르토는 그의 열정으로서 이니셔티브를 취하는 장점을 가지고 있으나 불완전하고 임시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 토마스알베르토의 작업을 계속 추진시켜 나아가 걸작을 완성시켜 놓았다고 할 수 있다. 또 토마스에 있어서 철학의 논리적 형이상학적 기초는 알베르토에 있어서보다는 더 아리스토텔레스적이다. 토마스는 완전한 체계를 만들기 위해서는 지식의 전체를 통일해야 된다고 생각하였다. 철학에 있어서 토마스이성의 자율성을 강조한다. 결론을 이끌어 내고 그것을 옹호하기 위하여 토마스권위보다는 경험이나 이성에 호소하는 방식을 취하여 자신의 저작을 이루어 놓았다. 그리하여 경험적인 세계를 사유의 기초와 출발점으로 삼은 것이다. 신학에 있어서 토마스계시의 자율성을 선포하고 있다. 자연질서와 초자연 질서가 그 동일한 근원으로서 진리인 신 자체에 근거하고 있으므로 이 양자 사이에 갈등이 있을 수 없다고 그는 주장한다.

   그는 자연과 초자연, 신앙과 이성을 조화, 종합시키려고 노력한 것이다. 13세기의 아우구스티노(Augustinus) 학파와는 달리 토마스아리스토텔레스의 가장 중요한 기본학설을 그의 인식론형이상학에 수용하고 있다. 인간은 활동적인 지성의 자발적인 힘으로써 감관에서 제1개념들을 끄집어내어 신의 특별한 도움이 없이 그것들의 도움으로 제1의 기본명제에 대한 확실성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의 형상학은 존재의 유비(analogia entis)에 근거하고 있다. 가능태(potentia)와 현실태(actus)의 이론을 토마스형상(forma)과 질료(materia)에 응용할 뿐만 아니라 피조물의 존재에 있어서 본질(essentia)과 현존(existentia)의 관계에도 적용시키는데, 이때에 존재의 제한은 본질의 가능성 속에 근거하고 있다. 개별화(individuation)의 원리가 되는 것은 시공적으로 규정된 질료이다. 불멸하는 정신영혼은 육체의 유일한 본질형상이다. 그리하여 인간은 고유한 본질의 원리인 정신영혼과 질료로 이루어진다. 인간은 보다 더 확실한 지식, 증명할 수 있는 지식으로써 피조물로부터 시작하여 신에게로까지 도달하게 되며, 신은 제1의 원동자(原動者), 최고의 원인, 절대적이고 필연적인 존재이며 자립적으로 존재하는 유(有, esse subsistens), 순수 현실태(actus purus)이면 모든 질서와 목적성의 원리가 된다. 신개념의 이러한 특징들은 오로지 유비적인 것이다.

   인간의 목표는 영원행복이고 이것은 피안적인 삶 속에서 하느님을 봄으로써 이루어진다. 인식론에 있어서 토마스의지에 대한 이성의 우위를 주장하고 있다. 윤리와 사회이론에서 토마스아리스토텔레스의 덕론(德論)을 그리스도교적, 아우구스티노적 태도와 연결시키고 있다. 또한 그는 스토아(Stoa)적 신, 플라톤적 사상을 비판적으로 수용하고 있다. 덕은 피조물적 존재와 그 목표방향의 표현으로서 신적인 법의지에 상응하는 이성질서를 엄수하는 것이다. 인간적인 충동성은 스토아철학에서와는 달리 적극적으로 평가되고 있다. 부부와 사유재산은 근본적으로 국가법률의 자의(恣意)에 의존하고 있지 않다. 공동선(bonum commune)을 목표로 하고 있는 국가공동체는 자연적 인륜질서의 표현이다. 그 권위교회로부터 유래하지 않고 자연적 인륜법에 근거하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와는 달리 토마스아우구스티노와 함께 인간이 현세적인 의미에서 정치적인 존재만은 아니라고 한다. 인간은 또한 교회의 지체로서 현세를 초월하는 피안적 질서로 향해져 있다는 것이다.

   2. 신학과 철학의 종합 : 토마스에 있어서 신학과 철학의 종합은 기본적으로 신학적으로 규정되어 있다. 이러한 종합을 이해하려면 토마스가 특별히 ≪신학대전≫(Summa Theologiae) 서두(I, q. 1)에서 기술하고 있는 바를 살펴보아야 한다. 토마스가 중요시하고 있는 것은 주관적 신앙이 아니라 성서에 담겨 있는 ‘거룩한 가르침’의 객관적 내용과 신앙고백의 내용들이다. 이 내용들은 하느님계시를 통하여 알려진 것이다. 계시에는 인간구원에 필수적인 내용들이 내포되어 있고 인간이성계시를 불확실한 정도로만 이해할 수 있다. 계시는 부분적으로는 특별한 ‘초자연적’ 지식을 중개하고 자연적 인식의 확실성을 중개해 준다. 토마스는 이러한 ‘거룩한 가르침’을 거리낌 없이 학문이라고 한다. 표면상으로 볼 때 신학은 그 원리의 확실한 통찰을 결여하고 있으므로 비학문적으로 보일 수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신앙개조(箇條)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토마스에 의하면 신학 이외의 학문, 예컨대 광학(光學)에 있어서 그 원리들이 다른 상위의 학문(예컨대 수학)에 의하여 뒷받침되고 있듯이 신학도 신과 성인들의 지식에 의존하고 있으며, 이러한 지식속에 있는 신앙의 명제들은 확실한 진리인 것이다. 계시는 객관적으로 이러한 의존관계를 중개해 주고 있다(제2항).

   계시는 어느 내용이 신학적으로 취급될 수 있고 신학이 하나의 학문일 수 있는 관점을 제공하고 있다. ‘계시 가능한 것’(revelabilia)도 신학에 속한다. 여기에서 말하는 가능성은 사실로써 계시된 것뿐만 아니라 이것을 토대로 하여 새로이, 깊이 인식할 수 있는, 구원에 중요한 의미를 띠고 있는 모든 것을 내포하고 있다. 그러므로 신학은 다른 학문의 인식이나 사회적 규범들이 구원을 위해 중요한 내용을 내포하고 있는지 없는지를 계시에 의하여 검토할 수 있다는 것이다(제3항). 신학자가 이러 저러한 사실의 명제만을 제시한다면 그것은 불충분한 것이다. 신학에서도 이성적 사회적인 파악, 내용적 근거 제시, 참된 것이 어떠한 것인지를 살피는 통찰이 요구된다. 캔터베리안셀모(Anselmus, ?∼1109) 이래로 신앙의 지성(intellectus fidei)이 신학의 목표로서 유효한 것이고 학문으로서 신학의 의미에 부합하는 것이다.

   토마스에 있어서 이러한 의미의 목표는 신앙과 지식이 서로 배척하는 관계에 있는 것으로 보는 이론속에 나타나고 있다. 원래적인 의미에서 이미 ‘알려진 것’은 동시에 ‘믿어질 수 없다’(II-II, 1, 5). 여기에서 지식은 신앙을 배척한다. ‘지식’이란 분명한 원리를 근거로 하는 관찰 혹은 통찰을 의미한다. 그리하여 지식이란 자연이성이 확실히 도달할 수 있는 어떤 것으로서 지칭되고 있다. 그러므로 신학에서 본래적으로 학문적이라고 할 수 있는 모든 것은 인간의 작품 즉 자연이성의 업적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원리적으로 통찰할 수 없는 신앙의 내용에서 신학분야의 한계점이 그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문으로 신학은 인간 노고의 영역에 속하며 그 원리들이 타당한 한에 있어서 비신자도 거기에 참여하고 종사할 수 있다(제6항). 왜냐하면 신학의 지식도 인간이성과 관계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이성계시은총선행하는 것으로서 전제가 된다는 말이다. 토마스는 신학과 철학의 조화 내지는 종합을 꾀함에 있어 늘 신학의 우위와 독립성을 강조하고 있다. 왜냐하면 신학의 안정성은 전적으로 계시에 근거하여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인간적 이해의 나약성으로 말미암아 신을 직관하지 못하므로 결국 신학은 철학과 연관을 맺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때에 신학은 철학적 논증을 사용하게 되어 철학을 ‘시녀’로서 맞아들이게 된다. 그렇다고 하여 철학이 그 자립성과 권리를 상실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내용적으로 신학에 종속되는 철학은 별 쓸모가 없다. 토마스에 의하면 신학은 한 가지 점에 있어서 특별히 철학에 영향을 준다고 한다. 즉 철학으로 하여금 ‘계시 가능한 것’으로 관심을 돌리게 한다는 것이다. 이론적 학문의 기초 이외에 실천이성의 영역이 있음을 인정한다면, 이성이 신의 인식에까지 도달할 수 있는 출발점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토마스에 의하면 이성 속에는 ‘자연욕구’(desiderium naturale)가 작용하고 있어 인간적 사유의 제한을 넘어 자신의 능력을 충만시키는 대상을 진실로 볼 경우에 비로소 안식을 얻는다는 것이다. ≪이교도 대전≫(Summa Contra Gentiles)의 긴 부분(III., c. 25-50)에서 토마스철학자의 사유가 위에 말한 역동성에 상응하지 못하여 좌절하게 되고 침체에 빠지게 됨을 지적하고 있다. 마침내는 신앙이 비로소 사유를 불안과 궁핍에서 해방시켜 결말지어 준다는 것이다.

   3. 진리의 문제 : 서양 중세에 있어서 진리에 관한 근본문제는 판단진리와 존재자와의 관계이고, 인간적 사유와 관계하며 신 속에 그 최종근거를 가지는 이른바 존재진리의 해명이었다. 진리존재자의 존재 규정으로서 특징지은 것은 아비첸나(Avicenna, 980∼1037)이다. 아비첸나는 신의 존재양식을 최고 존재자로서 규정하며, 이때에 존재는 바로 그의 본질이므로 필연적으로 실재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본질이 순수진리이다. 아리스토텔레스를 따르는 토마스의 견해에 있어서 인식은 판단과 함께 완성된다. 판단이란 개념들을 결합시키고 분리시키는 지성(intellectus componenes vel dividens)이다.

   어떤 사태가 현실적으로 결합되어 있거나 분리되어 있는 대로 한 판단이 본질의 개념들을 결합시키거나 분리시킨다면 그것은 진실된 것이다. 판단 성질인 이러한 진리 속에 원래적 의미의 진리가 있다는 것이다(≪신학대전≫ I, 16, 14, 2). 왜냐하면 “진리란, 있는 것을 있다 하고 없는 것은 없다고 하는 것”이므로 진리토마스는 다음과 같이 짧게 정의하고 있다. “진리는 사물과 지성 사이의 일치이다”(veritas est adaequatio rei et intellectus, ≪신학대전≫ I, 16. 1). 토마스는 감각지각의 진리와 본질개념의 진리가정하고 있다. 왜냐하면 감각과 정신은 그 대상 자체로부터 적접적으로 인식의 내용을 전달받기 때문이다(≪신학대전≫ I, 17, 3).

   4. 존재의 문제 : 존재(esse)란, 그것을 통하여 어떤 존재자(ens)가 있는 그러한 완전성이다. 존재는 감각적으로 지각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각각의 존재자는 존재를 소유하거나 존재자이기 때문에 무(無)와 구별된다. 토마스에 의하면, 존재는 무에 모순되는 개념이다. 여기에서 무는, 헤겔(Hegel)이나 하이데거(Heidegger)에 있어서와는 달리 단지 존재의 결핍으로 이해될 뿐이다. 존재는 현실태의 상태를 의미할 뿐만 아니라 모든 완전성의 무한한 충만 혹은 모든 있는 것, 있을 수 있는 것의 무한한 충만을 의미한다(≪신학대전≫ I, q. 4a lad 3; q. 4a 2). 우리가 만나는 현실적인 것은, 그것이 존재를 가지고 있거나 자신의 본질의 정도에 따라 존재에 참여(participatio)하는 한에 있어서 존재자인 것이다. 토마스에 있어서 존재는 가능태에 기초해 있는 현실태를 의미할 뿐만 아니라 모든 것 중에서 가장 완전한 자(inter omnia perfectissimum)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다른 모든 완전성은 이 완전성이나 존재의 현실태에 포함되어 있다(≪신학대전≫ I. 4, 2).

   그리하여 존재는 모든 다른 완전성을 자신 안에 일치시켜 지니고 있으며 다른 모든 완전성 중에서 최초의 것이고 근원적인 것이다. 이러한 의미의 존재토마스는 ‘존재의 현실태’ (≪신학대전≫ I, 3. 4ad 2) 혹은 ‘존재자체’(ipsum esse)라고 부른다. 존재자가 존재에 참여한다는 토마스의 사상의 근저에는 신 플라톤 철학의 ‘참여’ 개념이 깔려 있음을 알 수 있다. 토마스에 있어서 가장 적합한 신의 이름은 ‘거기 있는 자’(≪신학대전≫ I, 13, 11)로서 나타나고 있다. 그러므로 “신은 … 그의 존재이다”(I, 3, 4c). 즉 존재가 바로 신의 본질이다. 이것은 “나는 곧 나다”(출애 3:14)라고 한 신의 이름을 존재론적으로 해석한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토마스존재론은 질송(Gilson)이 말한 바와 같이 결국 ‘출애굽기 형이상학’으로 환원된다. (朴鐘大)

   [참고문헌] Walter Brugger, Philosophisches Worterbuch, Freibung, Basel, Wien 1967 / Wilhelm Keilbach, Einubung ins philosophische Denken, Munchen 1960 / De Uries. Lotz, Philosophie im Grundriss, Wurzburg 1969 / Sacramentum Mundi, Theologisches Lexikon fur die Praxis, Band 3, 4. / H. Fries(Hrsg), Handbuch theologischer Grundbegriffe, Band 4, Munchen 1962 / Emerich Coreth, Metaphysik als Aufgabe, Innsbruck 1958 / Rudolf Gumppenberg, Sein und Auslegung, Bonn 1971 / James Hastings; (ed), Encyclopaedia of Religion and Ethics, Edinburgh, New York 1981.
출처 : [가톨릭대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