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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 인쇄

한자 救援
라틴어 salvatio
영어 salvation

   “도와 건져 준다”로 풀이되는 구원이란 말은 누가 남을 재앙에서 벗어나게 해 주고 아울러 먼저 상태로 회복시키거나 보다 나은 상태에 놓인다는 것을 뜻한다. 이 ‘구원’이란 단어는 위험을 제거하는 것과 마음의 위안을 제공하는 양면이 있는 동시에, 건져 주는 이와 건져진 이가 서로 불가결한 관계를 맺는다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다. 구원행위를 표현하는 말은 다양하나 그 중에서도 일반적으로 흔히 쓰이는 ‘살린다’라는 동사가 상황의 긴박함을 잘 말해 주는 바와 같이, 구원은 인생의 기본적이고 궁극적인 문제와 관련된다. 인간은 살다 보면 누구나 인생에 대하여 불안감이나 부족함을 느끼면서 행복을 갈망하고 있다. 동서고금을 통해 볼 때, 현인들은 만족스럽지 못한 인생에서 자기 자신을 스스로 구제하려고 노력했으며 그들이 발견한 구제 방법들을 아낌없이 남에게 가르쳐 왔다. 그리고 자의로 해탈에 도달하려는 불교마저도 중생을 고해에서 극락세계로 인도하고 제도하는 보살의 역할을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남은 도와주되 자기 자신을 위하여는 도움을 거절하는 현인들을 볼 때, 공교롭게도 그들은 현세에 대하여 비관과 절망에 빠져 부정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이 공통된 점이다. 그렇다면 인간을 구제하기 위하여 구태여 우리가 속해있는 현실세계를 등지고 살아야만 되는가? 또한 고대 그리스 현인들처럼 물질세계에 속하는 육체를 버리고 영혼만이 누릴 수 있는 행복을 후세에까지 미루어야 하는가? 이를 잘못 이해하면 구원이란 선각자의 고답적인 지혜와 도피생활을 의미할 수 있다. 그래서 구원을 아예 기대하지도 않고 인생을 운명으로 초연히 받아들이며 죽음을 헌거롭게 대면하는 태도야말로 인간의 존엄성을 보존하는 유일한 길로 보인다. 이렇게 볼 때, 구원은 현세에 머무르는 인간의 실패를 말하는 것 같다.

   그러나 우리 역사 속에 우리가 살아야 할 인생을 통해서 영원히 지속되는 행복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는 이색적인 주장은 성서 가르침의 주축이요 교회 가르침의 기초이다. 인간의 부족함을 인정하고 현세를 낙관적으로 볼 때, 자기가 사는 세계에서 소외된 인간을, 바로 이 세계에서 출발하여 영원한 생명으로 들어가게 하는 비결은 하느님의 개입에 있다. 하느님께서 우리의 현세상에 개입하시어 모든 인간을 위하여 당신과 일치하는 행복으로 나아가는 길을 마련해 주셨다는 사실은 ‘속량’(贖良)이란 개념뿐 아니라 구원이란 단어로도 표현된다.

   외연이 넓은 구원의 동의어로 쓰이고 있는 죄의 용서(루가 9:49-50, 19:9-10), 성세(1베드 3:21), 은총(에페 2:8, 사도 15:11), 부활(에페 2:6), 하느님과의 일치(베드 1:4-5) 등은 실제로 구원의 여러 과정을 말해 줄 뿐이다. 또한 구원이란 말을 대신하여 쓰이는 해방, 화해, 완성은 신인관계와 대인관계의 여러 관점을 표시하며 이들은 구원 개념에 귀착된다. 구원이란 말은 부정적으로 알아들을 위험이 있다 하더라도, 하느님의 절대적이고 결정적인 역할을 강조하기 위하여는 더할 나위 없이 적절한 표현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교회 전통에서 볼 때도, 교부시대부터 제 2차 바티칸 공의회에 이르기까지 이어받고 개발해 온 독특한 표현들, 예컨대 ‘구원계획’, ‘구세사’, ‘구원경륜’, ‘구원의 시기’, ‘구원의 수단’, ‘구원의 표시’ 등을 살펴 보건데, ‘구원’이란 단어는 다소 복잡하고도 함축성 있는 단어임에 틀림없다.

   1. 인간을 위하여 개입하시는 하느님 : 구원이란 우선 하느님께서 인간을 위하여 이 세상에서 하시는 일을 뜻한다. 하느님의 개입이 가능하냐는 문제가 처음부터 제기된다. 인간자유를 해친다거나 단순히 하느님초월성을 보호한다고 해서, 하느님의 개입을 거부하는 것은 미흡한 신관(神觀)에서 비롯된다. 하느님의 개입, 심지어 하느님존재문제마저도 선결문제는 아니다. 성서신학은 그 가능성을 따지지 않고 사실부터 출발하여 개입하시는 하느님 정체의 일부라도 관상(觀想)하며 표현하려 한다. 그래서 철학가들의 신이 못하시는 일도 그리스도인들의 신은 해 내신다는 결론부터 인정해야 한다. 인간하느님의 개입을 원하든 원하지 않든 간에 하느님의 활동 및 하느님의 정체를 규정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인간은 하느님의 개입으로 하느님다운 하느님, 즉 자기 피조물에 구애받지 않으실 뿐 아니라 자기 신성(神性)에도 구애받지 않으시는 하느님을 발견한다. 인간신성인간성의 상봉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성부성자와 성신으로 현존하시는 하나이신 하느님은 ‘관계의 하느님’이시니만큼, 신성을 상실하지 않고서도 피조물들과 새로운 차원에서 관계를 맺으신다. 성부께서 보내신 성자께서 인간이 되시어 우리와 함께 머무르시고 이제부터 영원토록 인간으로서도 계신다는 사실이, 하느님의 개입 자체는 창조와는 다르게 인간을 상대방, 즉 인격자로 삼으시어 인간에게 당신의 생명을 부여하기 위하여 함께 하신다. 인성(人性)을 취하시어 인간이 되신 아드님께서는 영원히 변함없는 하느님의 아들이시기 때문에 본성의 차원에서 벌어진 하느님인간 사이의 틈을 없이 하셨다. 즉 그리스도의 인성은 삼위일체의 대내관계를 변질시키지 않으면서 특히 인간 구원에 있어서 신인관계의 발판이 된다. 인격의 차원에서 인간을 당신의 상대방으로 삼으심으로써 인간의 개성을 요구하며 또 확정하신다. 왜냐하면 구별과 일치의 원천이신 성령께서 신인관계를 이루시는 분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느님의 개입으로 인간은 개성을 상실하기는커녕 하느님 앞에 서 있는 존재로서 살고, 몸의 부활로서 전인(全人)으로 완성된다. 하느님인간을 인격자로 보심으로써 인간이 누리는 자유의 불가침해성을 보장하신다. 하느님의 개입은 인간의 진상을 은폐하기보다도 오히려 인간이 범하는 죄악을 문제시함으로써 죄악을 필요 이상으로 확대하는 것 같으나, 실제로는 죄악의 성격을 드러내시면서 죄악을 없애 주신다. 하느님께서 인간의 죄악을 따지시는 것은 죄악이 인간의 구성요소가 아님을 드러내시는데 있으며, 인간에게 용서를 베푸시는 것은 단지 인간을 본상태로 되돌리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보다 나은 상태로 올려 주심을 뜻한다.

   하느님의 개입은 갑자기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인간을 살리시는 하느님을 소개해 주는 성서하느님의도를 부분적으로나마 암시하고 있다. 사도 바울로에 의하면, “하느님께서는 미리 정하신 사람들을 불러 주시고 부르신 사람들을 당신과 올바른 관계에 놓아 주시고 당신과 올바른 관계를 가진 자들을 영광스럽게 해 주셨다”(로마 8:30). 여기에서 볼 수 있는 네 단계로 나누어진 구원과정은 하느님께서 구원될 자들을 예정하신다는 사실부터 시작된다. 예정론은 하느님의 절대적인 자유, 헤아릴 수 없는 자비, 구원의 무료성(無料性)을 뜻하는 것이고 “하느님께서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다”(1요한 4:19)는 것을 말해 준다. 따라서 하느님이 사람을 예정하셨다 해서 어떤 사람은 이미 배척하셨다고 말할 수도 없거니와, 오직 하느님만이 아시는 의도를 존중하여, 살리시는 하느님께 절대로 의지할 뿐이다. 한편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다 구원을 받게 되고 진리를 알게 되기를 바라신다.”(1디모 2:4) 는 말씀과 “예수의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자들을 처벌하실 것이다.”(2데살 1:8-9)는 말씀은 서로 모순이라 생각할 수도 있다. 이 난제를 풀기 위하여 다음의 몇 가지 점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이 되신 당신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와 관계없이 구원을 제공하시지 않으신다. 당신과 인간 사이에 중개역할을 맡으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1디모 2:5).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예정되었듯이(에페 1:4-12 참조)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심판을 받는다(사도 17:31, 1베드 4:5, 히브 6:2). 따라서 우리가 그분에 대하여 취한 태도에 따라 우리의 구원이 결정된다. 인간이 예수를 위하여 하는 일도 결정적이다. 그러므로 확실히 우리 세상에는 지옥이 없다. 즉 이 지상에서 하느님께로부터 결정적으로 떼인 자는 없다(로마 5:8-11).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으신 (2고린 5:15) 예수 그리스도 덕분에 모든 인간이 구원을 향하게 되었는데, 신앙으로 응답하기만 하면(로마 10:9-10) 구원이 아니라 하느님의 순수한 선물이다(에페 2:5, 사도 15:11). 성서는 무엇보다도 구원의 무료성을 강조하고 있다. 한 마디로 말해서 구원문제를 다룰 때 하느님의 입장과 인간의 입장을 꼭 구별하면서, 인간이신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유일한 중개자로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신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2. 역사 속의 모든 사람을 위하여 : 시간초월하시는 하느님의 결의 및 심판역사 안에 머무르는 인간의 반응을 같은 차원에서 언급할 수는 없다. 즉 구원의 영원성과 시간성, 그리고 하느님의 역할과 인간이 몫을 구별해야 한다. 따라서 하느님인간을 일치시키는 구원을 세상에 제공된 구원과 심판으로 확정된 영원한 구원으로 나누면서, 이 두 단계의 연관성을 강조해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예정론이 구세사를 필요 없게 만드는 결정론으로 변하여 신뢰보다는 공포감을 일으킨다든가, 또는 하느님의 요구를 무시한 채 구원을 현세상에 제한시키는 세속주의가 생긴다든가, 또는 하느님이 보편적 구원의 의도를 가지신다 해서 지옥의 가능성을 전혀 인정하지 않는 미망에 빠져 무책임하게 사는 위험들이 종종 있어 왔다.

   그 다음, 하느님께서 구원을 제공하시는 배경도 고려해야 한다. 선하게 창조된 인간자유를 악용하여 창조자이신 하느님과의 관계를 끊고 죄를 범하고 말았다. 죄 속에 사는 온 인류(로마 3:10-20)가 유죄 판결을 면할 수 없게 되었다(로마 5:16.18).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역사 속에서 행하실 심판을 포기하시고, 당신 아드님을 보내 주셔서 죄를 단죄하시고(로마 8:3) 모든 인간을 죄의 멍에에서 해방시키셨다(로마 5:21). 그분은 우리 죄의 용서뿐 아니라 당신의 생명까지 주셨다. 하느님께서는 벌하는 정의가 아니라 살리는 정의를 드러내 보이셨다(로마 3:21-24). 하느님께서 거저 베푸신(1디모 1:9) 구원을 신앙으로 받아들이기만 하면(로마 10:9) 이를 받아들이는 이들에게는 더 이상 유죄 판결이 없다(로마 8:1 · 34). 그러나 이 기회를 거부하는 자는 역사를 끝맺는 최후의 심판을 면할 수 없다(마르 3:29, 8:43-48). 따라서 지옥에 가는 자는 이중 죄인이라고 할 수 있다. 최후심판은 창조주를 거부하고 그분께 도전하는 자들과 하느님과 결합시켜 주는 구원을 거부하는 자를 단죄할 것이다. 따라서 하느님께서는 무력하고 결백한 자를 단죄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과의 관계를 되찾는 길을 알면서도 하느님이 베푸시는 생명을 거부하는 자들만을 멸망시키실 것이다.

   이제 우리는 세상에서 진행 중인 구원의 과정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즉 하느님께서는 죄인이 마땅히 받아야 할 심판을 일단 포기하시고 구원의 길을 더 주심으로써 인류의 역사를 활성화시키셨다. 실제로 죄 때문에 불안 속에 떨며 현실을 외면하는 인간은 위축된 생활을 해 왔던 것이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부르시고 만민에게 축복약속하시면서부터 (창세 12:2-3) 결판을 보게 될 종말까지 역사를 안내하심으로써 역사의 양극을 제정하시고, 당신 아드님을 보내심으로써 역사 한 가운데에 규범과 기준을 세워 주셨다. 하느님께서는 일반 역사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을 이용하시어 당신 뜻을 이루신다. 사실 성신께서는 예언자들을 시켜서 구원과 멸망을 가지다 주는 사건들을 가리신다(요한 16:12-13). 즉 사건과 사건의 의미를 밝히는 말씀으로 구성된 계시를 통해서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께서는 우리 상황 속에서 구세사를 형성하신다. 하느님의 개입방법(여러 차례의 제약들)과 범위(이스라엘을 통해서 만민에게)를 드러내는 구약시대가 구세주이신(루가 2:11) 하느님의 도래를 준비하였다.

   예수(“주님이 살리신다”, 마태 1:21)라고 불러진 하느님의 아들은 환자들을 치유하신 때나(마르 3:4, 5:23 · 28, 6:56, 10:52), 제자들을 구제하실 때나(마태 8:35, 14:30), 자기 자신에 대하여 신앙을 구함으로써 구원의 성격을 드러내셨다. 그분은 잃어버린 것(루가 9:56, 19:10), 즉 세상을 구원하기 위하여(요한 3:17, 12:47) 오셔서 말씀하신다(요한 5:34). 남을 구원하면서도 자기 자신을 스스로 구원하시지는 못하지만(마르 15:30) 죽음부활로 ‘영원한 구원의 원천’이 되셨다(히브 5:7-9). 실제로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이름은 예수의 이름밖에 없다(사도 4:12). 그래서 교회가 선포하는 복음을 유태인(사도 13:26)과 외교인(사도 13:47, 28:28)을 위한 구원의 말씀이다(로마 1:16). 인류 구원에 있어서 당신 몸인 교회를 살리시는 그리스도(에페 5:23)께서 필요하듯이, 교회도 필수적이다. “교회 바깥에는 구원이 없다”는 격언이 말하는 바와 같이, 그리스도의 몸교회와 관계없이 구원은 있을 수 없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는 구약시대부터 이미 보여 주신 대로 인간을 단체로 부르시고 구원하셨듯이, 오늘날도 온 인류를 당신의 백성으로 모으시기 때문이다. 인간이 되심으로써 모든 인간과 관계를 맺으신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이를 위하여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써 온 인류를 구세주(사도 5:31)가 되셨기에, 교회도 모든 이에게 파견된다. ‘일치의 성사’, 곧 구원의 성사교회는 인류를 대표하여 주님이 마련하신 구원을 기념하고 실현하는 제사를 올리고 산 이들과 죽은 이들을 위하여 기도한다. 따라서 모든 믿는 이들은 바울로가 자기 민족인 이스라엘뿐 아니라(로마 11:14 · 26) 외교인에게도 복음을 전파하였듯이, “하느님의 구원이 이방인에게로 돌아가게 되었다는 것을 알고”(사도 28:28) 세상 끝까지 구원의 말씀을 선포하고 있다. 하느님께서 모든 외교인들에게 늘 회개은총을 베푸시며, 교회에 들어오지 못한 많은 이들이 양심대로(로마 2:14-16) 살기로 이미 ‘실존적 기본 결단’을 내리고 하느님의 자녀답게 살고 있다. 그래서 모두가 선교사인 믿는 이들은 그들의 죄를 일깨워 주면서 하느님이 그들에게 베푸신 은혜(곧 예수 그리스도신비)를 발견하도록 이끈다. 그러므로 믿는 이들은 교회박해하는 자들을 단죄하기보다도 그들이 회개하고 교회 품에 들어오도록 구원의 길을 터 주어야 한다(마태 5:44-45). 이렇게 함으로써 믿는 이들은 남을 구원한다기보다도 구원을 허락하신 하느님응답할 뿐이다. 믿는 이들은 성서를 연구하면서(2디모 3:15) 자기 구원(필립 2:12)과 남의 구원을 위해 일한다(1고린 9:22, 10:33). 오늘날이 바로 ‘구원의 날’이기 때문이다(2고린 6:2). 구원의 상속자(히브 1:14)가 된 우리는 희망으로 구원받았다.(로마 8:24). 그래서 온갖 선행을 하면서(야고 2:14) “그리스도께서 구원을 주신 날”(히브 9:28)을 기대하고 있다. 우리는 이제 그리스도의 피로써 의로움을 얻었으니 그리스도의 덕분으로 하느님의 진노에서 구원될 것이다(로마 5:9). (文世華)

   [참고문헌] T.G. Pinches et al., Hastings ERE, 11 / EncDict Bibl 2101-07 / X. Leon-Dufour, ed., Vocabulaire de theologie biblique, Paris 1962 / M.E. Boismard, St. John's Prologue, tr. Carisbrooke Dominicans, Westminister Md. 1957 / L. Cerfaux, Chrit in the theology of St. Paul, tr. G. Webb and A. Walker, New York 1956 / J. Danielou, Christ and Us, tr. W. Roberts, New York 1961 / F.X. Durrwell, The Resurrection, A Biblical Study, tr. R. Sheed, New York 1960 / A. Gelin el al., Son and Saviour, tr. A. Wheaton Crev. ed., Baltimore 1962.
출처 : [가톨릭대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