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라자로의 소생 그리고 고 김 수 환 추기경님의 소생.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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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유웅열 | 작성일2009-02-23 | 조회수622 | 추천수4 | 반대(0) 신고 |
라자로의 소생, 그리고 故 김 수 환 추기경님의 소생. (예수, 생명의 문 - 요한복음 묵상)
라자로의 소생은 예수께서 보여주신 마지막 일곱째 표징이다.
예수께서는 이 표징으로 당신이 생명의 주인임을 보여 주신다.
요한은 예수의 수난에 앞서 라자로 소생 이야기를 통해 예수 파견의 목적을 밝히고 있다.
곧, 예수께서 우리를 죽음에서 생명으로 인도 하신다는 목적을 밝힌다.
라자로의 소생에서 하느님의 영광은 빛나고, 죽음의 어둠이 극복된다.
예수께서는 이렇게 가르치신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입니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 것입니다. 또 살아서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입니다.”(요한 11,25-26)
요한에게 부활은 죽음 후에야 누릴 수 있는 실제가 아니다.
부활은 지금 여기서 누리는 완전한 새로운 실존 방식을 뜻한다.
예수를 믿는 사람은 그의 육신이 죽더라도 그리고 라자로처럼, 무덤에 묻히더라도 살 것이다.
죽음은 예수를 통해서 무력하게 된다. 예수와의 친교를 통해 우리는 지금 여기서 부활을 완전히 새로운 삶으로 체험하게 된다.
라자로의 소생은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표징이다.
그러므로 이 소생 사건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확증하시는 것을 드러내는 표징이기도 하다.
라자로는 무덤에 묻힌 지 나흘이나 되었다. 그의 육신은 이미 부패하기 시작한 상태이다.
무덤에 묻힌 것은 부패한다. 이것은 우리에게도 마찬가지다.
예수께서는 당신의 강생을 통하여 우리의 삶에 포도주의 새로운 맛을 베푸셨다.
예수께서는 기도를 드리신 다음 큰 소리로, “라자로, 나오시오!”(요한11, 43)하고 외치신다.
이것은 부활의 신비를 암시하는 놀라운 상징이다.
예수를 믿는 사람에게는 죽음이 아무런 역할도 하지 않는다.
죽음을 통해서도 파괴될 수 없는 다른 실재 안에서 살고 있다.
신앙하는 사람은 이미 부활하여 예수 안에서 참된 생명을 누리고 있다.
부활이란? 우리를 항상 다시 살리시는 하느님의 사랑 안에 들어서는 일을 뜻한다.
그래서 우리는 영원히 하느님 곁에 그리고 하느님 안에 있게 될 것이다. 안젤름 그륀 신부 지음. 오늘의 묵상:
이 지상의 삶은 영혼과 육신이 일체감을 갖고 생활하다가,
육신의 죽음으로 육신은 흙으로 돌아가지만 그 육신을 감싸고 있었던 영혼은 육신을 떠나 새로운 삶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우리는 사도신경으로: “전능하신 천주 성부 천지의 창조주를 저는 믿나이다.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님 성령으로 인하여 동정 마리아께서 잉태되어 나시고............................... 하늘에 올라 전능하신 천주 성부 오른편에 앉으시며... 모든 성인의 통공을 믿으며 죄의 용서와 육신의 부활을 믿으며 영원한 삶을 믿나이다.” 하고,
우리의 믿음을 수시로 또는 매 미사 때마다 우리의 믿음을 재확인하며 신앙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실체는 영혼과 육신의 결합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영혼 단독으로는 존재성이 없으므로 육신의 죽음으로 새로운 육신의 옷을 갈아입는 것이 아닌가하고 생각합니다.
육신의 부활은 결국 새로운 옷으로 갈아입는 신비가 일어나리라는 생각을 해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 보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들은 故 김 수 환 추기경님이 남기고 가신 말씀으로 “고맙습니다. 서로 사랑하십시오.”를 새로운 삶의 지표로 삼고 있습니다.
모든 것의 시작은 ‘감사함에 있는 것이고 다음으로 용서하고, 이어서 사랑해야 하며, 그 사랑으로 서로 위로하고, 내가 가진 것을 나누어야한다는 생각’이 우리들의 가슴에 새로이 자리 잡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故 김 수 환 추기경님이 이 세상에 새로운 빛으로 부활하신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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