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그리스도인의 단식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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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현아 | 작성일2009-02-27 | 조회수983 | 추천수12 | 반대(0) 신고 |
재의 예식 후 금요일 - 그리스도인의 단식
학생 때 영어 단어를 외울 때 연습장에 까맣게 써 가며 외웠던 기억이 납니다. ‘왜 그냥 눈으로 보고 암기하면 안 될까?’라고 생각할 때 선생님이 답을 해 주셨습니다. “사람이 머리로만 기억하는 게 아니란다. 몸도 기억을 한단다. 그래서 속으로만 외우는 것보다 입으로 소리를 내고 손으로 써보면 더 잘 기억하게 되는 거야.” 처음 이 말을 들었을 때 몸이 기억을 할 수 있다는 것이 매우 신기하게 들렸습니다. 저의 한 친구에겐 복숭아 알레르기가 있는데 많은 과일 속에 복숭아 향만 들어있어도 몸에서 이상한 반응이 일어납니다. 그러나 이 알레르기가 태어날 때부터 있었던 것은 아니랍니다. 마치 살아오면서 배탈이 났거나 좋지 않은 기억이 있는 음식들을 몸이 거부하여 잘 먹지 못하는 것처럼 알레르기도 그렇게 안 좋은 기억을 몸이 기억하고 거부하는 것입니다. 악기를 배울 때나 운동을 배울 때 처음엔 머리를 써가면서 연습합니다. 그러나 나중엔 머리를 쓰면 더 안 되고 그냥 몸에 배인 실력으로 할 때 더 잘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누가 일일이 생각하며 걷고 눈을 깜빡이겠습니까? 이 모든 것은 몸에 배어있는 것입니다. 상어와 같은 물고기들은 뇌를 빼 내도 계속 헤엄쳐서 갑니다. 왜냐하면 헤엄치는 능력은 뇌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몸에 배어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수난을 느끼며 감사해하는 것도 머리로만이 아니라 몸으로 조금이라도 그 수난을 체험할 때 그 감사가 몸에까지 새겨집니다. 단식은 음식을 먹지 않음으로써 몸에 고통을 주는 것입니다. 배고파본 기억이 있는 사람이라면 단식을 꺼릴 것입니다. 몸이 원하질 않기 때문입니다. 저도 단식을 며칠 한 적이 있는데 이틀 동안 물도 마시지 않았습니다. 밥과 물을 먹지 않으니 온 뼈마디가 쑤셔왔습니다. 그러다보니 당연히 신앙인으로서 그리스도께서 나의 죄를 위해 얼마나 큰 고통을 받았는지를 느끼게 되고 그 분께 대한 고마움이 뼛속까지 들어오는 듯한 느낌이었습니다. 단식은 그저 육체를 절제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단식하는 목적은 몸 안에 그리스도의 수난의 기억을 새겨놓는 것입니다. 인간은 하느님을 영적으로만 찬미하는 것이 아니라 몸까지 주님을 찬미하게 해야 합니다.
오늘 요한의 제자들이 “저희와 바리사이들은 단식을 많이 하는데, 스승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습니까?”라고 묻습니다. 그들은 그저 단식을 하는 것 자체가 하느님께서 기뻐하시는 줄 알았나봅니다. 하느님은 인간이 행복하기를 원하시지 고통받기를 원하시지 않습니다. 그러나 진정 몸을 절제하면 영이 맑아지는 것은 확실합니다. 왜냐하면 육과 영은 서로 반대되기 때문입니다. 육적인 사람은 영이 메마르게 되어있습니다. 그래서 세례자 요한도 극기의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따라서 그들의 제자들도 단식하는 것 자체가 좋은 것이라 생각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먹보요 술꾼’으로 불렸고 제자들까지 단식 같은 것은 시키시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단식의 새로운 의미를 가르쳐주십니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야 없지 않으냐?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러면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 예수님이 신랑이시고 교회가 신부입니다. 혼인잔치에서 신랑과 함께 있으면서 단식한다는 것은 옳지 않은 일입니다. 오히려 잔치를 준비한 사람에게 실례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당신 ‘수난’을 예고하십니다. 당신을 빼앗긴 후, 즉 신랑을 빼앗긴 후 그리스도인들은 그 분의 수난을 기억하기 위해 단식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주님의 수난을 기억하기 위한 단식이 아니면 그리스도인의 단식이 아닙니다.
단식은 사실 그리스도교보다도 다른 종교들에서 훨씬 많이 합니다. 그런 단식들은 육체를 이기고 영을 충만하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단식은 필수불가결하게 그리스도의 수난을 몸으로 기억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이는 단식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삶 안에서 주어지는 모든 육체적 영적인 고통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 고통들을 그리스도의 고통에 합일시키지 않고서는 언제나 핵심을 잃은 부수적인 것들에 머물고 맙니다. 그리스도의 수난을 몸과 영으로 체험하고 그분을 더욱 사랑하게 되는 시기이기 때문에 사순이 고통과 죽음이기도 하지만 은총의 시간이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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