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광야(성거산지기신부님 사순1주일 강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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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시원 | 작성일2009-03-07 | 조회수605 | 추천수4 | 반대(0) 신고 |
Photo by 성거산지기 정지풍 아킬레오 신부님
성거산의 꽃
광 야(廣 野) 2009년 사순 1주일 사순제1주일 우리들은 살다보면 후회하는 일들이 종종 있습니다. 무언가 일이 뒤틀어졌을 때라든가, 이것을 선택했어야 하는데 하며 후회하는 일들을 만나게 됩니다. 그러나 후회가 항상 실패한 과거와 현재의 모습에 주저앉게 하지는 않습니다. 때론 보다 나은 미래를 향한 새로운 결심을 이끄는 동력이 되기도 합니다. 후회는 한편으론 자신을 위로하는 매개가 되기도 하고, 계획을 다른 방향으로 돌려 세워 새로운 목표로 이끌기도 합니다. 비록 후회가 새로운 미래를 향한 좋은 밑거름이 될 수도 있지만 그러나 ‘후회하다’라는 말은 여전히 부정적인 이미지를 갖고 있습니다. 후회라는 말을 하느님께도 적용할 수 있을까? 하느님도 후회하신 적이 있었을까? 전지전능하신 하느님의 속성과는 어울리지 않는 말일 것입니다. 오늘 독서 창세기말씀을 보면 당신의 창조사업에 마치 실패하신 하느님이라는 인상을 받습니다. 하느님은 무엇을 , 왜 후회하셨을까? 하느님께서 후회하셨다는 표현이 창세기 6장 6절과 7절에서 번갈아 나오고 있습니다. 성서에서는‘후회하신’다는 부정적인 어감 때문인지‘마음 아파하셨다’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6절을 보면 하느님이 세상에 사람을 만드신 것을 후회하셨다고 말씀하시고 7절을 보면 사람뿐 아니라 짐승과 당위에 기어 다니는 것들과 하늘의 새들까지 쓸어버리겠다고 단호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장면이 하느님께서 창조설화에서 첫째날부터 여섯째날까지 열심히 창조사업을 하시고 오늘 독서말씀에서는 왜 하느님은 후회를 하셨을까? 그것은 하느님이 땅위에 있는 사람들의 악이 너무도 큰 것을 보셨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마음 속에 생각하는 모든 것이 언제나 오로지 악한 것 뿐임을 보신 것입니다. 하느님은 당신이 지은 것들을 향해 언제나 ‘보시니 좋더라’라고 11번이나 말씀하셨는데 그것들이 ‘보시기에 악하다’고 말씀하십니다 결국 하느님은 당신이 땅위에 창조한 모든 것들을 땅위에서 없애겠다고 후회하시며 작정을 하십니다. 그런데 하나의 예외 조항을 두었는데 그것은 땅위에서 노아를 제외시키고 없애시기로 마음 먹은 것입니다. 노아가 하느님의 심판으로부터 구원받은 근본 이유는 그가 의롭고, 흠없는 온전한 자이며 하느님과 동행하는 자였기 대문입니다. 그런데 성서가 전하는 핵심은 하느님의 심판에서 노아 한 사람만이 구원받았다는 것을 말하려는 게 아닙니다. 하느님의 노아 한 사람만의 선택은 노아 한 사람의 구원사건에 잇는 것이 아니라 홍수심판 이후 하느님이 그와 함께 새로운 창조세계를 이끌어 가신다는데 있습니다. 이점을 우리는 눈여겨 보아야 할 것입니다. 창세기 9장은 홍수심판 이후 하느님이 노아와 계약을 맺는 내용입니다. 그래서 이를 가리켜 ‘노아 계약’ 이라고 불러오고 있습니다. 그런데 자세히 분석해보면 하느님이 노아하고만 계약을 맺으신 것이 아니라 ‘모든 생명체’와 맺으신 ‘영원한 계약’입니다. 노아 계약이 보여주는 것은 한편으론 인간이 지킬 계명들과 , 다른 한편으론 야훼가 이행할 의무 조항이 모두 모든 생명체를 보존 할 것이라는 동일한 주제입니다. 모든 생명체의 폭력으로 인해 홍수 심판이 왔다면, 이제 그런 폭력을 근절하고 모든 생명체를 보존함으로써 하느님은 다시는 홍수로 심판하지 않을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느님의 새 창조의 규정이며 새로운 평화의 규정입니다. 노아계약에 나타난 창조세계 보존은 이전 첫 창조 때와는 무언가 새로운 것임을 우리는 묵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창조사업의 동반자가 해야 할 일ㄴ은 하느님의 창조 사업이 펼쳐지는 이 땅위에 다시는 폭력을, 생명의 피흘림을 금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과 인간 사이에 그리고 인간과 자연세계 그 모든 생명체와 맺은 하느님의 첫 번째 계약이고, 이 계약은 성서의 수마노은 율법과 계명들보다 앞서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있기 전부터 모든 생명체들과 맺은 하느님의 첫 번째 계약입니다. 사순절이 시작된 우리들은 하느님과의 맺은 첫 번째 계약을 자주 묵상하며 그리스도인들이 반드시 지켜야 할 하느님의 말씀을 자주 파기해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자행되는 모든 생태계 파괴의 현장에서 외쳐야 할 하느님의 말씀이며 명령을 우리는 지켜나가야 할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사순 시기를 맞아 우리에게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보낸 40일을 상기시키며 세례 받으신 이후에 광야에 가서 기도하시고 유혹을 받으신 복음대목을 묵상하도록 이끌어 줍니다. 복음에서 보면 세례를 통해 축복을 받으신 예수님께서 그 축복의 의미를 새기시려고 택하신 장소가 광야입니다. 완전히 사람들과의 사귐이 끊어진 고독한 생활을 하십니다. 들짐승과 함께 지냈다는 말은 여우, 승량이, 사슴 밖에 살지 않는 황량한 고독 속에 사셨다는 뜻입니다. 광야는 도시의 자취라곤 찾을 수 없는 곳이며 문명으로부터 소외되어 있는 빈곤감과 외로움이 깊은 장소입니다.
성서에서 이야기하는 광야는 구약의 백성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길목이었고 하느님의 백성이 탄생하는 장소였습니다. 거기서 야훼의 시련을 이겨내지 못하는 이스라엘에게 야훼는 만나와 구리뱀으로 은혜를 베풀었으므로 광야는 인간의 나약함을 드러내는 곳일 뿐 아니라 하느님의 자비가 개선하는 곳이기도 합니다. 세례자 요한의 시기에는, 광야가 재림할 메시아를 고대하며 회개하는 장소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리스도는 구약의 백성처럼 광야에서 여러 가지 시험을 당했으나 그들과는 달리 그것을 모두 이겨내고 성부께 충실하였지요(마태 4:1-11). 그의 지상 생활 중에 예수는 군중을 피하기 위하여 광야로 갔고 한적한 기도의 장소로서 광야를 택하였었습니다. 왜 하느님께서는 당신이 선택한 사람들을 광야로 이끄시는가? 예수님께서는 왜 광야를 선택을 하셨을까요? ①광야에서는 외로운 곳입니다. 아무도 살지 않기에 철저히 혼자이어야 하는 곳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로지 홀로 서시기 위하여 광야로 나가신 것입니다. 바로 절대 고독을 찾아 광야로 가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절대 고독 안에서 하느님을 만나기 위하여 광야에 가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과 동행하는 법을 배울 수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②광야는 옛 삶을 버리고 새 삶을 살도록 훈련하는 자리입니다. 사람이 새롭게 살려고 할 때는 언제나 갈등을 겪기 마련입니다. 이런 갈등을 이겨내야만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는데, 광야는 그런 갈등의 과정을 잘 견딜 수 있도록 힘을 주는 자리입니다. 따라서 광야는 하느님을 만나는 장소, 훈련의 장소. 준비의 장소이기 때문에 광야를 광야학교라고 부르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영혼의 우물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③광야는 하느님의 음성을 듣는 장소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광야에서는 세상의 소리가 들리지 않습니다. 거기서 들리는 소리는 오직 하느님의 음성 외에는 아무 것도 없기 때문에 하느님의 음성을 듣는 장소이기도 합니다. 거기서 사십 주야를 단식하시면서 하느님과 함께 머무셨습니다.
우리도 때로 온전히 혼자 있는 절대 고독의 시간, 광야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우리의 삶에서도 광야의 체험이필요합니다. 어느 누구의 도움도 없이 오직 하느님하고만 지내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이것이 기도시간이요, 관상시간일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 아무도 우리에게 도움을 줄 수 없으며 아무의 도움도 소용이 없는 그런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광야의 시간을 갖게 됩니다. 내 배고픔의 훈련, 고독 훈련, 목마름의 훈련, 버림받음의 훈련의 장소입니다. 따라서 광야는 십자가이며, 자기 부정의 장소요, 정화의 장소입니다. 신.구약 성경 속의 광야는 지리적인 위치만을 뜻한다기 보다는 상징적인 의미가 깊은 장소인 듯 합니다. 고통과 시련의 장소이지만 구원의 역사가 이루어졌던 곳이고, 세상과 떨어져 침묵과 고요 속에서 자기 자신을 발견하고 하느님의 은총을 느끼는 곳입니다 광야나 사막이나 비슷하지만 영성 차원에서 이를 굳이 구분 하자면 광야의 영성은 파스카를 향하는 우리 인생의 여정에서의 그리스도 영성을 말하며 사막의 영성이라 할 때 우리는 수도 영성을 떠올릴 수 있을 겁니다. 그러나 광야의 상징을 직접 표현하는 것은 이러한 행위에 있지 않고 일찍이 광야에서 있었을 놀라운 선물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재현된다는데 있습니다. 오늘날 수도원의 관상적인 영성의 기원이 사막교부들의 영성에서 비롯된 것이잖아요. 오늘날 수도원의 관상적인 영성의 기원이 광야에 은둔하여 기도하고 수덕에 전심하는 사막 교부들의 영성에서 비롯된 것이며 수도원 발생의 근거지가 되기도 하였습니다. 사순시기는 광야의 시간입니다. 주님을 찾는 시간입니다. 세상과 떨어져 침묵과 고요 속에 자기 자신을 발견하는 은혜로운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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