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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영혼의 잠! 사순 제2주일강론 [감곡성당 김웅열 토마스아퀴나스 신부님]
작성자박명옥 쪽지 캡슐 작성일2009-03-08 조회수710 추천수3 반대(0) 신고

                                       

 

         

      매괴 성모님 순례지 김웅열 신부님

 

                          겨울연가 - photo by 느티나무신부님

 

 

†찬미예수님

밖에는 봄을 재촉하는 봄비가 내리고 있습니다.

오늘 이 미사성제를 드리며 말씀과 성체를 통해 은총의 비가 내리길 빕니다.


강론을 하면서 보면 자신의 의사와 상관없이 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사람들을 분류해 보면~~

 1) 인사형- 연신 앞으로 고개를 숙입니다.(안녕하십니까?)

 2) 내숭형(묵상형)- 이 내숭형은 단시간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고. 고도의 훈련을 통해서만 가능한데... 앞에서 보아도, 뒤에서 보아도 고개하나 까딱하지 않고 완벽하기에 자신만이 아는 거죠. 우리 성당에도 이런 분이 3분 있습니다.^^

 3) 도리도리형-왼쪽으로~~오른쪽으로~~왔다갔다~~

 4) 콧구멍형-항상 머리가 뒤로 젖혀지기 때문에 콧구멍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이렇게 졸려면 구석에 가거나 기둥 뒤 안 보이는 데 가서 졸면 되는데, 잘난 척 하느라고 맨 앞자리에 앉아 언제나 조는 교우가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찬미예수님” 하면 벌써 샷터가 내려갑니다.

다음 주가 되니 아니나 다를까 또 졸기 시작하였습니다.

신부님께서 꾀를 내어 다른 사람은 다 듣고 이 사람만 못 듣게 작은 소리로

“천당 가고 싶은 사람 다 일어나십시오.”

그 다음 그 사람이 들을 수 있도록 크게 “지옥 가고 싶은 사람 다 일어나십시오” 이 사람 자다가 “일어나시오” 소리만 듣고 벌~떡 일어났습니다.

그 이후에도 그 형제가 졸았겠습니까?


1월 초에 저희 부친께서 세상을 뜨셔서/ 상을 치르고 미사를 드리러 진천으로 오는데 / 3일 동안만 잠을 못 잔 것이 아니라/ 6일 동안 한 잠도 자지 못했기에 /차를 몰고 고속도로를 내려오는데/ 세상에 그렇게 졸릴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양쪽 차유리를 내리고 양 뺨을 때리고 꼬집어도 눈꺼풀이 내려앉는데 사고가 나기 십상일 것 같았고/ 아버지 장례미사 치르다가 큰 아들 상 당할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차를 갓길에 세우고, 앉았다 일어났다 하면서 잠을 깨우고 심령기도, 화살기도, 있는 소리 없는 소리를 다 지르면서 내려왔습니다.

                                                

 

졸음이 왔을 때 눈꺼풀이 왜 그리도 무거운 지~~

그런데 이 육신의 졸음은 해결할 방법이 있습니다. 자면 됩니다.

충분한 휴식을 취하면 이 문제는 해결되지요.


문제는 사람의 영혼의 잠입니다.

영이 졸린 사람은 해결하는 길이 쉽지 않습니다.

영이 졸린 사람은 두 가지를 놓치게 됩니다.

반드시 들어야 할 것을 못 듣고

반드시 보아야 할 것을 못 봅니다.

귀중한 것을 놓치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 인생에 있어서 영적인 잠에 빠져 있기 때문에 귀중한 걸 놓치는 일이 한 두 번이 아닙니다.


오늘 복음-공관 복음 중 루가복음에 가장 상세하게 언급이 되어 있는데(루가9. 32)

예수님께서 모세와 엘리야를 만나고 계실 때, 베드로와 그의 제자들은 깊은 잠에 빠져 있었습니다.

예수님과 구약의 위대한 예언자를 만나던 그 첫 장면을 제자들은 깊은 잠에 빠져 있었기에 놓친 것입니다.

깊은 잠에서 깨어나 그때야 예수님과 모세와 엘리야를 본 베드로는

이 자리에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예수님께, 하나는 엘리야에게, 하나는 모세에게 바친다고 합니다.

잠에서 덜 깨었으니 분위기 파악을 제대로 못한거지요.

그래서 베드로는 분수 중에 상분수를 떤 겁니다.

그 자리에서는 그 말을 할 처지가 아닙니다.


본당에서도 영적으로 깊은 잠에 빠진 사람들은 혼자 잘난 척하면서 교만을 떱니다.

우리 인생에서 영적인 잠, 마귀 같은 어둠의 잠이 몇 가지 있습니다.

 1)편견

한쪽으로 치우쳐 생각하는 것

한평생 맞지도 않은 눈금을 가지고 하느님을 재고 주변 사람을 잽니다. 그리고 자신에게 집착하기 때문에 하느님이, 주변 사람이 들어올 수 없게 만듭니다.


어느 자매가 아이 손을 잡고 명동으로 사람구경을 나갔습니다. 아이에게 ‘이 세상이 얼마나 화려한가!’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시골에서 올라온 이 자매는 명동의 쇼우윈도우를 보면서 너무 즐거워

아이한테 “저것 좀 봐!” 하는데 엄마 손을 잡은 아이는 자꾸 “앙앙” 울기만 했습니다.

아이가 운다고 머리통을 쥐어박아가며 한참을 가다가 아이 신발 끈이 풀어져 끈을 매어 주려고 무릎을 꿇고 아이와 눈높이를 맞추었는데, 보이는 건 여자들의 무다리와 남산만한 엉덩이었습니다.

아이의 눈높이에서 바라본 세상은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바로 지옥이었던거지요.

이 자매는 앞으로 절대 내 기준에 맞추어 강요하지 않겠다!

 

요즘 젊은 엄마들 주변 친구들과 수준을 맞추느라고

아이들에게 바이얼린, 피아노, 바둑.....을 가르치는데~~

실상은 내면에 부모의 기준, 자기만족 때문에 가르치고 있는 부모들이 많습니다.

바로 이것이 자기기준이요, 편견입니다.

이렇게 살아가는 사람은 영이 병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는 아니라고 하지만 영이 맑지 못한 겁니다.

그런 사람은 남을 심판하는 데 앞장을 섭니다.

 

마태복음 7,1절 남을 심판하지 않으면 나도 심판받지 않을 것이다.

남을 저울질 하는 대로 희도 저울질 당할 것이다.


 2) 영적인 혼수상태        

미사를 드리고 한주일 동안 영이 기쁘게 살아가는 신자가 있고

똑같이 미사를 드려도 미사 내내, 강론 내내~~

온통 분심과 잡념으로 영적혼수상태에 서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미사 한 시간 동안 껍데기만 앉아 있는 사람입니다.

어떤 이는 묵주기도를 매일 15단씩 바치지만 사도신경부터 분심으로  시작해서 혼수상태에 빠져서 묵주심공을 바칩니다.

성서도 손가락만 넘기지 역시 혼수상태입니다.

영적인 혼수상태에 빠진 사람은 항상 소극적으로 살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10년 전이나~~ 20년 전이나~~

항상 거기서 거기이고 진보를 사지 못하고 퇴보하며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신앙적인 결심도 연말에 보면 이루어진 게 없습니다.

 

3) 안일하게 살려는 마음입니다.

신앙은 투쟁입니다. 신앙은 훈련입니다.

귀중한 것, 영적인 것을 얻기 위해 어떤 어려움도 뚫고 나가야 합니다.

미사참례, 묵주기도... 잘 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정신적인 무관심입니다.


곤충을 사람과 비교해 보면~~

첫째, 거미와 같은 사람

거미는 어두컴컴한 곳에 예쁘지도 않은 몸을 숨기고 있다가 벌레를  잡아먹습니다. 

이렇게 자기가 갖고 싶은 것을 얻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남을

짓밟고 일어서려고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둘째, 개미와 같은 사람

개미는 부지런하지요?

그러나 개미는 절대 옆을 쳐다보지 않습니다.

현대인들은 극단적인 이기주의자로 ‘내 하는 일 관여하지 말라!’

이것은 피를 나눈 형제끼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내 형한테 관여 안 할 테니까 형도 내 일에 관여하지 마라.”

형제끼리도 얼마나 무서운지 모릅니다.

거미보다 더 무서운 극단적인 이기주의자들입니다.

‘나 혼자 천당 가면 그만이다!’ 그런 생각으로 삽니다.

 

셋째, 벌과 나비와 같은 삶을 살아라!

이것이 하느님이 원하시는 삶입니다.

벌과 나비는 꽃가루를 날라 사랑을 맺게 해 주고 사람들에게 꿀을 줍니다. 

자신의 삶을 성서의 가르침대로 살며. 내 고통을 힘들어 하지 않고.... 

이런 사람을 복음에서 말하는 천국을 지향하는 사람입니다.

  

정신적인 무관심, 이기심, 자기편견, 영적혼수상태....이것이 영적무관심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셔서 약을 주시기도 하지만, 어떨 때는 아픔을 주시기도 합니다.          

                                        

첫 번째 약이 고통입니다.

고통 없이는 영적으로 성장할 수 없습니다.

슬픔 없이 예수님이 없습니다.

십자가를 기쁘게 받아들이지 않으면 절대 성장할 수가 없습니다.

물론 고통 자체는 악입니다.

슬픔은 고독입니다.

이 고통 없이 쉽게 주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제가 정말 좋아하는 가수 한 분이 계신데 임주리라고~~

그분의 노래 ‘립스틱 짙게 바르고’ 를 들으니 그 노래 가사가 구구절절 사연이 많고 얼마나 호소력이 있던지.....

한 달 후  이 가수가 TV 에 나와 말하는데, 산전수전, 지상전, 공중전까지 다 겪었더라구요...

‘아, 그래서 그렇게 노래가 호소력이 있었구나!’

어려움을 통해서 만들어내는 노래는 이처럼 생명력이 있습니다.


화가도 인생의 쓴맛을 느낀 뒤에 기가 막힌 그림을 그리는 법입니다.


생명을 전하는 말씀도 많은 체험을 한 사제의 강론이 힘이 있고 사람을 감화시킵니다.


그러나 학자의 가르침은 맑고 이론적이기는 하나 사람을 변화시킬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고통은 인생의 눈을  열어 영적인 졸음으로부터 멀어지게 합니다.

건강할 때는 교만하던 사람도 몸에 병이 들면 자신의 한계를 느끼고 겸손해집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우리에게 고통을 약으로 주십니다.


둘째, 결핍감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충만감으로 부족함을 모릅니다.

자기는 항상 선하다고~~

자기는 항상 정의롭다고~~

자기는 항상 지혜롭다고~~

자기는 항상 의인편이라고~~

어린이는 누구에게라도 도움 받을 존재이기에

어린이와 같이 되지 않으면, 심판의 하느님께 용서받지 못할 것입니다.

결핍감 없이는 하느님의 넘치는 사랑과 용서를 받지 못할 것입니다.


하느님과 우리를 단절시키는 것은 자기만족입니다.

여기 있는 우리 모두는 사제이든 수도자이든...

항상 부족한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기도를 많이 해도 주님이 하신 기도에 비하면 그건 기도도 아닙니다.

우리가 아무리 봉사를 많이 한다고 해도 주님의 봉사에 비하면 그건 봉사도 아닙니다.

우리가 아무리 선하다고 해도 주님의 선하심에 비할 수 없습니다.


디모테오 전서 1장 11절

바오로 사도가 “나는 죄인의 괴수입니다!” 라고  한 것은 결핍감의 극치를 나타냅니다.


죄 중의 가장 큰 죄는 죄의식이 없는 겁니다.

결핍의식은 주님 앞에 항상 부족하다고 느끼는 것이며 영적인 잠에서 깨어 나 하느님의 용서에 이르게 하는 것입니다.

사순절은 깨어 있는 시기입니다.

주님, 나로 하여금 언제나 당신께 깨어 있게 하소서! 아멘


            2003. 사순 제2주일 강론말씀

      http://cafe.daum.net/thomas0714 주님의 느티나무카페에서
 

                   겨울연가 =photo by 느티나무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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