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원장신부님 강론 말씀)
2009.3.9 사순 제2주간 월요일
다니9,4ㄴ-10 루카6,36-38
"자비로운 사람"
‘인정머리 없는 사람’이란 말 들으면 그 인생은 끝입니다.
무자비한 사람은 무자비한 심판을 받습니다.
자비로워 사람입니다.
사마천의 사기에서도 덕이란 결국,
각박하게, 빡빡하게 대하지 않는 것이라 하니
결국 너그럽고 자비롭게 대하는 것이 덕입니다.
좋고 싫음을, 잘남과 못남을 초월하여 모두를 품에 안는 자비입니다.
마치 온 생물을 품에 안은
넓고 깊은 바다와도 같고 땅과도 같은 자비입니다.
싫어도 못나도, 그 무엇도 자비에서 제외되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미사도 자비송을 세 번 되풀이함으로 시작됩니다.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
그리스도님 자비를 베푸소서.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
생각 없이 지나칠 때도 많지만 ‘자비’의 뜻이 참 깊고 넓습니다.
사전을 찾아보니
‘고통 받는 이를 사랑하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
또 ‘부처가 중생을 불쌍히 여겨
고통을 덜어주고 안락하게 해 주려는 마음’이라 소개되어 있었습니다.
사랑에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더해진 불교 용어로
‘사랑’보다 한없이 깊고 넓은 ‘자비’입니다.
하여 대자대비하신 부처님 대신
대자대비하신 하느님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그렇습니다.
대자대비하신 하느님, 이게 하느님의 정의입니다.
“그러니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우리 모두를 향한 하느님의 소원이 있다면 이 말씀 하나일 것입니다.
이 자비심이 분별의 잣대입니다.
이 자비심이 바로 지혜와 겸손이요 깨끗한 마음이자
바로 하느님의 마음입니다.
이 자비심에 따라 분별하여 행하는 것이 하느님의 뜻입니다.
이어 주님은 자비의 구체적 처방을 가르쳐주십니다.
아주 단순하여 마음만 먹으면 누구나 실행할 수 있습니다.
“남을 판단하지 마라(stop judging).”
“남을 단죄하지 마라(stop condemning).”
“용서하라(forgive).”
“주어라(give).”
모두 넷입니다.
영성생활은 습관이요 습관이 될 때 덕이 됩니다.
‘남을 판단하지 않기’,
‘남을 단죄하지 않기’,
‘용서하기’,
‘주기’가 습관이 될 때 비로소 자비로운 사람입니다.
반면 ‘남을 판단하기’,
‘남을 단죄하기’,
‘용서하지 않기’,
‘주지 않기’가 습관이 될 때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무자비한 사람이 되어 버립니다.
매사 긍정적이고 자비로운 사람이 되는 길은 아주 분명합니다.
항구히 남 판단하지 않는 것이요,
남 단죄하지 않는 것이요,
남 용서하는 것이요,
남에게 주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대자대비하십니다.
다니엘 예언자의 고백처럼,
위대하시고 경외로우신 분,
의로우신 분,
자비하시고 용서를 베푸시는 분이십니다.
그 누구도 판단이나 정죄하지 아니하시고
끊임없이 용서하시고 주시는 분입니다.
우리 역시 잘나서, 죄가 없어서 구원이 아니라,
하느님의 자비로 구원을 받습니다.
백성들을 대신한 다니엘 예언자의 회개가 참 진솔합니다.
“당신의 계명과 법규에서 벗어났습니다.”
“당신의 종 예언자들에게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당신께 거역하였습니다.”
“당신의 말씀을 듣지 않고, 당신의 법에 따라 걷지 않았습니다.”
“저희는 오늘 이처럼 얼굴에 부끄러움만 가득합니다.”
진정한 회개를 통해
끊임없이 하느님의 용서와 자비를 체험해 갈 때
비로소 하느님을 닮아 자비로운 사람이 됩니다.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가는 여정 중에 있는 우리들임을 깨닫습니다.
오늘도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주님은 당신 말씀과 성체의 은총으로
우리 안에 자비심을 가득 담아 주시며 말씀하십니다.
“그러니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루카6,36).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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