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동엽 신부가 말하는 '추기경 그 후'
"인류의 슬픔·고뇌 교회의 것으로 여겨야 합니다"
인간적이고 고뇌하는 신앙인 김수환 추기경
그의 유훈은 양심 찌르듯 '바보스러운' 실천
지금 필자는 가장 어려운 글을 쓰고 있다. 아마도 신문사 청탁원고 가운데 가장 무리한 글을 쓰고 있는지도 모른다.
‘추기경 선종 그 후…’라는 제목을 받고 연구소 책상 앞에 앉아 있는 시방, 문득 필자에게 한 장면이 떠오른다. 해변가를 거닐고 있는 성 아우구스티누스가 바닷물을 손으로 모래 웅덩이에 퍼 담고 있는 어린이와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다. 삼위일체의 신비를 깨달아보려는 그의 노력에 ‘어린’ 천사가 그에게 날린 일침이 뇌성처럼 들려오는 듯하기 때문이다.
“네가 지금 하려는 것이 꼭 바닷물을 손으로 퍼서 웅덩이에 담으려는 어리석음과 똑 같으니라!”
무슨 글로 그 드넓은 인격을 담아낼 수 있겠는가. 어떤 그림으로 그 웅장한 큰 바위 얼굴을 그려낼 수 있겠는가.
삼가고 삼가는 마음으로 필을 들었지만, ‘그와 동시대를 살았다는 것 자체가 영광’이라는 헌사까지도 무색할 ‘김수환’표 삶에 어떤 소감을 말하는 것 자체가 몹시 저어된다.
추모열기와 유훈에 대하여
필자는 이번 장례일정과 장례미사를 지켜보면서 경이에 빠졌다. 그동안 감춰졌던 그분의 개별적이고도 비밀스런 사랑이 하나씩 둘씩 커밍아웃하는 것을 TV화면을 통하여 목도하노라니 절로 눈이 휘둥그레졌던 것이다. 그 기간 필자는 확실히 숨은 증인들을 통하여 한 폭의 모자이크 그림이 완성되어 가고 있음을 보았다. 한 사람 한 사람이 모자이크 한 조각씩을 비밀이요 보물처럼 간직해 오다가 그 분 선종을 계기로 함께 짜맞춰보니 온후하고도 육중한 ‘큰 바위 얼굴’이 절로 그려지는 것이었다.
정계, 재계, 종교계를 막론하고, 지위고하를 불문코, 이분으로부터 받은 감화를 구체적으로 증언하는 40만 조문행렬은, 지금 우리 대한민국이 어떤 인물을 목말라하는지를 웅변으로 시위하였다. 그 염원의 화신을 적어도 필자는 김 추기경에게서 보았다. 그 잔상을 필자는 이렇게 스케치해 본다.
김수환, 그는 가장 인간적인 사람이었다.
김스테파노, 그는 노상 고뇌하는 신앙인이었다.
사제 김수환 스테파노, 그는 천년 미래의 후배들도 닮고 싶어 할 선배였다.
김추기경, 그는 20세기 조국을 빛낸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인이었다.
그렇다면, 이 ‘큰 바위 얼굴’이 우리에게 남겨주신 유훈은 무엇일까. 고 김추기경은 그 요지를 ‘사목정보’를 대표한 필자와의 마지막 인터뷰에서 이렇게 한 문장으로 말씀해 주신바 있다.
“기쁨과 희망, 슬픔과 고뇌, 인류의 그것들을 바로 우리들의 그것으로 여기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성직자는 물론 신자들도 그래야 합니다.”
그는 이 한 문장으로 당신께서 하실 말씀을 다 하신 셈이다. 사실 이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사목헌장’의 기조정신이자 늘 당신의 사목지표였다.
현양 사업에 대하여
김 추기경 현양 사업은 ‘미래 세대’를 위한 우리의 의무다. 우리는 동시대를 살았기에 그럭저럭 그의 향기를 맡을 수 있었다. 미래의 세대들도 그 향기를 맡도록 해 주는 것은 우리의 사명이다.
위대한 인물은 자주 나오지 않는다. 대한민국의 차원에서도 이만한 인물 한 세기에 한 명 나올지 말지다. 그러기에 현양 사업은 더욱 중요하다. 이는 향후 몇 천 년 국가 자산의 차원에서 반드시 이루어져야 할 일이다.
유다인이 오늘날 세계를 호령하는 것은 역사적인 인물을 기리는 계승정신이 탁월하였기 때문이다. 미국을 보라. 시대의 영웅을 얼마나 다각도로 미래 세대들의 역할모델이 되도록 기리고 있는가.
여기서 방법적인 문제를 거론하는 것은 시기상조일 것이다. 단지, 기념관 건립, 그분의 애국애족 정신 현양 및 영성 현양 정도로 갈래를 잡아야 하지 않을까 싶다.
영성에 대하여
고 김수환 추기경의 영성을 우리는 어떻게 정리할 수 있을까. 그 단초를 필자는 위에 소개한 그의 인물스케치에서 발견한다. 곧 그의 영성은 그의 인격, 그의 신앙, 그의 사제적 소명, 그리고 그의 지도자적 소명으로 나누어 조명할 수 있다는 말이다. 아이디어 수준에서 거칠게 정리해 보자면 다음과 같을 것이다.
“김수환, 그는 가장 인간적인 사람이었다.” 그분은 얼굴, 목소리, 표정이 어우러져 가장 인간적인 인간의 풍모를 연출해 냈다. 소박하고 진솔하고 때로는 약한 모습까지 그대로 숨기지 않는, 영락없는 이웃집 아저씨 같은 분이었다.
“김 스테파노, 그는 노상 고뇌하는 신앙인이었다.” 그는 항상 자신을 하느님 앞에 부끄럼 없는 삶을 살려고 노력하셨다. 이것이 그로 하여금 지극히 작은 사랑도 정성껏 실천하여 ‘큰 사랑’으로 승화시키게 한 원동력이었고, 궁극적으로 스스로를 하느님의 자비를 갈구하는 초라한 영혼으로 낮추게 하는 겸손의 비결이었다. 그의 안구기증은 한 신앙인으로서 그가 선택했던 사랑의 실천이었던 것이다.
“사제 김수환 스테파노, 그는 천년 미래의 후배들도 닮고 싶어할 선배였다.” 무엇보다도 그는 100마리의 양떼보다 ‘길 잃은 한 마리’ 양을 소중히 여기는 섬세한 사랑을 지니셨다. 그분의 온후한 미소는 우리들에게 위로와 평화를 주셨고, 그분의 맑고 그윽한 눈빛은 우리들에게 끝없는 연민을 보내주셨다.
“김 추기경, 그는 20세기 조국을 빛낸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인이었다.” 추기경으로서 그는 대한민국의 정신적인 지도자였다. 용기 있는 시대의 양심이었고, 날카로운 예지력을 지닌 예언자였으며, 사상적으로 반대자까지도 품는 애국자였다. 이로써 그는 ‘너희와 모든 이를 위하여’라는 그의 사목모토를 완벽하게 구현하였던 것이다.
그가 남긴 여운
개인적으로 필자는 김 추기경님의 수혜자 가운데 하나다. 중요한 시기마다 그분은 교구의 장벽없이 필자를 바라봐 주었고 응원해 주셨다. 개별적으로 불러주시기도 하셨고 또 촌지를 보내주시기도 하셨다. 그분은 필자를 한 교구의 사제로 보지 않으시고 한국 교회의 사제로 보셨던 것이다. 그것이 그분의 안목이셨다. 마지막 가시는 길에서는 필자의 저작을 영적 동반자로 삼아주시기도 하셨다. 필자에게는 송구스럽고 눈물겨운 일이다.
고 김 추기경을 회고할 때마다 필자는 마더 데레사의 ‘한 번에 한 사람’을 떠올린다.
‘한 번에 한 사람’
난 결코 대중을 구원하려고 하지 않는다.
난 다만 한 개인을 바라볼 뿐이다.
난 한 번에 단지 한 사람만을 껴안을 수 있다.
한 번에 단지 한 사람만을 껴안을 수 있다.
단지 한 사람, 한 사람, 한 사람씩만…….
그분은 꼭 그러셨다. ‘한 사람씩’ 보듬어주시는 특별한 카리스마를 실천하셨던 것이다.
몰라서 실천하지 못한 것이 아니다. 그가 보여준 삶은 지극히 작고 구체적인 실천이었다. 그의 용기 있는 발언은 단지 모두 가지고 있는 ‘양심’의 실천이었고, 소외된 이들과 함께한 그의 감동적인 삶은 단지 모두가 알고 있는 ‘사랑’의 실천이었고, 그가 보여준 눈물은 거짓에 대한 일반적인 ‘수치감’의 충실한 실천이었던 것이다.
그의 유훈, 그것은 ‘실천’인 것이다. ‘바보야’가 촌철살인으로 우리의 양심을 찌르듯이 ‘바보스러운’ 실천인 것이다.
출처: 가톨릭신문 http://www.catholictimes.org/view.aspx?AID=88426
발행일 : 2009-0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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