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내 잔을 마실 수 있느냐" [정의구현 영웅심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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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장이수 | 작성일2009-03-11 | 조회수532 | 추천수5 | 반대(0) 신고 |
주님의 현존을 체험하는 것에는 많은 여러 지식과 심오한 정신이 절대적인 바탕이 되어 지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의 현존은 참으로 여러 곳에서 발생합니다. 성체 안에서, 말씀 안에서, 기도 안에서, 보잘것 없는 사람 안에서 ...우리 안에 주님을 뵙고자 하는 갈망이 내재해 있다면 언제나 어디서나 주님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주님을 응시함에 있어서 어느 것들이라도 한가지에 고정적으로 절대화 시켜 놓는다면 주님께서는 그 곳을 떠나버리시고 말 것입니다. 사람의 손으로 만들거나, 사람의 입으로 만들거나, 인간의 지식으로 창작해 내는 그런 곳에는 하느님의 마음보다는 인간의 뜻이 더욱 숨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하느님 앞서서' 혹은 '하느님 없이' 온갖 지혜들로 주님을 바라볼 수 있다고 자만할 때 인간이 '주님을 창조하는' 심각한 교만의 죄악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인간(모든 피조물)을 창조하셨기에 인간은 주님의 눈길 아래에 겸손히 머무를 수 있습니다. 거지 소경 ... 그는 인간적인 가치와 온갖 상태의 결핍 속에서 세상의 지혜와 지식과 심오한 정신에는 오히려 눈을 감았고 시련의 애절한 심성으로 주님이라는 그 이름만을 응시(기다림)해 오며 구차한 삶을 살아온 사람에 불과합니다. 그런 그에게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라는 자비로우신 사랑의 목소리를 감미롭게 듣게 되어집니다. 말씀 보다도 앞서 계시는 주님, 성체 보다도 앞서 계시는 주님, 기도 보다도 앞서 존재해 계시는 주님이십니다. 거지 소경에게는 모든 상태가 상대적으로 부족하지만 주님께 향하는 순수한(가난한) 부르짖음(응시)이 거짓된 인간 지식(지혜)과 세상이라는 인간 중심의 옷으로 치장해 있는 이들 보다도 더욱 주님을 열망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말씀 이전에 주님께서 계셨고, 성체 이전에 주님께서 계셨으며, 기도 이전에 계셨습니다. 주님께서는 "나는 있는 나다" 이셨습니다. 백인대장도 "한 말씀만 해 주십시오"라고 주님께 대한 믿음을 고백합니다. 말씀 보다도 더 먼저 현존해 계시는 주님을 믿는 그런 깨끗한 마음이 예수 그리스도의 신비에 초대받고 하늘의 축복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이 영원한 평화이며 생명이 됩니다. .........................................................................................................................
"내가 마시는 잔을 마실 수 있느냐"
"내가 받는 세례를 받을 수 있느냐"
그리스도께서 마시는 잔은 고통의 잔이며, 그리스도께서 받는 세례는 피의 세례였다. 그분 그리스도 주님께서는 육신의 고통 이전에 마음의 고통부터 게세마니에서 이미 겪으셨고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 흘리신 피와 물은 이 땅에 완전하게 스며들었다. 따라서 이 땅의 죄악된 뿌리는 완전하게 뽑히게 되었으며 구원의 생명을 얻을 수 있게 되었다.
당신께서 거룩하게 하신 물의 세례 뿐만아니라 당신의 육신으로부터 직접 피와 물을 흘려주시었다. 거룩한 당신의 성혈은 당신께서 홀로 받으시고 당신께서 받으신 당신의 피로서 죄를 사하여 주시며 세상의 죄악에서 풀어주셨다. 세례자 요한은 광야에서 말하였다. '나는 다만 물로 세례를 베풀 따름이지만 당신들이 알지 못하는 사람 한 분이 당신들 가운데 서 계십니다' '나는 물로 세례를 베풀었지만 그분은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실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은 십자가에서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셨는데 십자가에 매달리신 성체의 늑방에서 피와 물이 흘러 나왔다. ( 성체는 육신만이 아니라 피와 물도 함께 있었다. 요한1서 ) 그리스도의 잔과 세례는 '받는 잔과 세례' 이다 '받는다'고 함은 '섬긴다'는 의미가 그 안에 있다. 사람을 섬기고자 하는 감사함과 겸손이다.
사람을 섬기고자 하는 착한 마음과 착한 육신에서 "내(그리스도) 잔"은 그리스도의 피와 물로 채워지고 주님 성령의 세례 속에서 '주님의 생명'은 흐른다. 나의 잔이 아닌 '그리스도의 잔' 안에는 죽음의 세력이 흐르는 것이 아니라 생명이 흘러 내리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잔'으로 변화하고 성령 세례로 말미암아 하느님 사랑을 '내어 주는' 자기 비움의 가난이 되어야 한다.
세상을 잡으면 도리어 세상의 지배를 받게 되지만 세상을 놓으면 오히려 세상의 지배를 받지 않는다. 세상 안에 자신이 있는게 아니라 자신 안에 세상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세상을 버린 사람이 아니라 세상을 담은 사람이다. '복자'(축복받은 사람)는 결코 고난을 미화하지 않으며 오직 사랑으로서 그리스도의 고난에 함께 결합하여 일치(그리스도께로 수렴)한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영원하여 그 사랑의 끝은 없다. 온갖 지식들이 사랑 안에 조용히 스며들고 모든 것이 사라지지만 사랑만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사랑의 성체는 죽은 뒤라도 결코 그 생명을 잃지 않으며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한 사랑의 생명 끈으로 지속되어 지는 것이다. '하느님의 사랑'이 채워지는(받는) 수취인은 '하느님의 사랑'을 전하는(주는) 전달자이다. 사랑의 중개자가 되는 것이다.
* 한 번에 단지 한 사람만을 *
난 결코 대중을 구원하려고 하지 않는다. 난 다만 한 개인을 바라볼 뿐이다.
난 한 번에 단지 한 사람만을 사랑할 수 있다. 한 번에 단지 한 사람만을 껴안을 수 있다.
단지 한 사람, 한 사람, 한 사람씩만... 따라서 당신도 시작하고, 나도 시작하는 것이다.
난 한 사람을 붙잡는다.
만일 내가 그 사람을 붙잡지 않았다면 난 4만 2천명을 붙잡지 못했을 것이다.
모든 노력은 단지 바다에 붓는 한 방울 물과 같다. 하지만 만일 내가 그 한 방울의 물을 붓지 않았다면 바다는 그 한 방울 만큼 줄어들 것이다.
당신에게도 마찬가지다.
당신의 가족에게도 당신이 다니는 교회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단지 시작하는 것이다. 한 번에 한 사람씩.
- 마더 데레사 어록 중에서 -
예수의 ''작은 이''는 결코 복잡하지 않다. 하느님 앞에 겸손, 끊임없는 자기 희생, 순수한 사랑이다. 단순함 그 자체이다. 보통사람들은 그 단순함의 길에서 오히려 헤매인다. ''작은 사람'' ''작은 길''의 단순함이란 분리되기 이전의 상태이다. 이중성으로 분리되어 하나의 연결점을 찾으려 함으로써 헤매이게 되는 것이다. 예수의 ''작은 이''는 우리 자신이 작아져야 한다는 뜻이다. 우리 자신을 비워야 한다는 의미인데 비움이라는 것은 "내어 줌"을 말한다. 내어줄 때 비워지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다 내어 주셨기에 우리 안에 살아 계신다. 그런데 우리 자신이 제 안에서 자꾸 커진다면 어찌 주님께서 제 안에 살 수 있겠는가. 자신이 커진다는 말은 곧 머리에 ''하느님이 아닌 것''을 받아 들이고 집착하기 때문이다. ''하느님이 아닌 것''이란 온갖 피조물을 말함이 아니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이 되심으로써 인성 안에서 모든 피조물과 하나가 되셨다. 그러할진데 어떻게 모든 것들이 ''하느님 아닌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그것들을 '하느님'이다고 말함이 아니다) 성부께서는 피조물들을 부분적으로만 아름답게 해 주신 것이 아니라 완전한 전체로 아름다움과 품위로 입혀 주셨다. 하느님 당신의 사랑으로 만드셨기에 완전한 면이 내재되어 있는 것이다. 영혼은 하느님을 통해서 피조물을 인식하는 것이지 피조물을 통해서 하느님을 인식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즉 피조물이 나를 얽매여서 내 영혼을 자유롭지 못하게 할 것인가. 피조물이 과연 내게 그럴 힘이라도 있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자기에 따라서 속박되기도 하고 자유롭게 되기도 하는 것이다. ''하느님이 아닌 것''이란 바로 자기 자신 안에 있다. 자기 자신이 하느님의 사랑을 열망하면 그것들은 하느님의 것이다. 자기 자신이 하느님의 사랑을 열망하지 않는다면 그것들은 ''하느님이 아닌 것''들이다. 사람의 열망이 이렇듯 하느님의 열망도 하느님 당신을 우리에게 주시고 싶은 열망이 있으시다. 하느님을 사랑함으로써 하느님의 소유가 되어 하느님과 합일(수렴)되는 것이다. 자기 자신을 버리지 못하고 자신의 이중성으로 커진다면 ''하느님 아닌 것''에 얽매여 있슴이다. 그럴때, 하느님께서 내 안에 사실 수 없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다 내어 주시고서도 그분께서는 밖으로 가신다. 그리스도께서 내 밖으로 나가시면 우리는 비참한 인간의 활동에 빠질 수도 있다. 그러나 내 안에 머무시며 나와 당신 사이를 거니시며 우리 안에서 사신다면 하느님께서 행하시는 것이다. 그것은 나와 대중과의 관계가 아니다. 나와 대중과의 관계로 본다면 선동가일 뿐이다. 자신 안의 영웅심리로 인해 ''하느님 아닌 것''에 갇혀 있게 된다. 단순한 나와 너와의 관계에서 비롯하여 넓혀 지는 것이다. 주님의 하늘나라 (''하느님의 것'')은 이렇듯 작은 겨자씨가 알게 모르게 자라남과 같은 것이다. 우리는 참으로 자신의 처지를 알고 예수의 ''작은 이''가 되어야 한다. 많은 대중을 바라보는 사람일수록 그에게서 ''하느님의 사랑''이 드러나는 것을 볼 수 없다. 다수를 명분으로 삼아 한 사람을 버리고 또 한 사람을 버리는 일들이 오히려 많다. 자신을 대단하게 여기기 때문에 ''작은 것''에 연연하지 않는다는 그런 이유가 많은 것이다. 예수님은 사람의 능력을 잘 아신다. 그래서 작은 하나의 일에 소홀히 하지 않도록 ''잃어버린 한마리 양''을 찾는 그 성심을 보여 주신다. 예수님의 말씀은 바로 ''사람 안(능력 한계)에서'' 생명을 주시는 움직이는 진실한 가르침이시다. 잃어버린 한마리 양을 위해 당신의 자비와 사랑을 베푸셨다. 주님의 은총을 입은 이들은 세상으로부터 천대받은 죄인들과 오래된 병자들이었다. 그들은 모두 잃어버린 한마리의 양과도 같았다. 착한 목자의 성심은 결코 대중 위의 영웅이 되려는 인간의 허영심과 완전히 다른 것이다. 두 양치기가 살았다. 한 양치기는 다수를 위해 한마리 양을 이리의 습격에 내버려 두었다. 또 다시 이리가 습격해 왔다. 그러자 또 한 마리의 양을 이리에게 내 주었다. 점점 그렇게 하자 그 양치기에게는 자기 양의 숫자가 급격하게 줄어 들었다. 마침내 임금이 와서 그 결과를 물었고 그 양치기는 불충한 종으로서 쫓겨났다. 그러나 다른 양치기는 '한 마리 양'을 위해서라도 자기 목숨까지 돌보지 않고 지켰는데 그러자 그 양치기의 우리(목장) 안에는 모두가 온전하게 살아있게 되었고 마침내 임금이 와서는 그에게 모든 것을 맡기게 하였다. 그대 한 사람이 조금 형편이 낫다면 단지 ''잃어버린 한 사람''만을 보아라. 이는 나도 그렇고, 당신에게도 마찬가지이다. 정의구현이라는 거창한 것으로 자기 입으로만 자신의 허영심을 채우지 말고 진실로 자신의 주위에 있는 가장 보잘것 없는 가련한 한 사람에게 사랑의 실천을 행하여야 한다. 99 마리의 양이 어찌 1 마리의 양을 모른채 하면서 오늘도 주님, 주님, 하면서 찾을 것인가. 1 마리 양이 길을 잃었고 평화와 생명의 위험에 처하였다면 그 1 마리 양을 위해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목숨을 걸고 찾아 가신다. "가장 보잘것 없는 잃어버린 양 하나" 에게 예수님이 계신다. '십자가 그 자리'에서 예수님께서는 목숨 걸고 그 양을 지키며 당신을 기다리고 계시는 것이다. 당신이 나타날 때까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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