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용서는 두 자유가 상봉하는 장소 - 윤경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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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윤경재 | 작성일2009-03-14 | 조회수579 | 추천수10 | 반대(0) 신고 |
용서는 두 자유가 상봉하는 장소 - 윤경재
‘아버지, 재산 가운데에서 저에게 돌아올 몫을 주십시오.’ 하고 아버지에게 말하였다. 그래서 아버지는 아들들에게 가산을 나누어 주었다. 작은아들은 자기 것을 모두 챙겨서 먼 고장으로 떠났다. 그가 곤궁에 허덕이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그 고장 주민을 찾아가서 매달렸다.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저를 아버지의 품팔이꾼 가운데 하나로 삼아 주십시오. 아버지는 종들에게 일렀다.‘어서 가장 좋은 옷을 가져다 입히고 손에 반지를 끼우고 발에 신발을 신겨 주어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아라. 먹고 즐기자. 큰아들은 화가 나서 들어가려고도 하지 않았다. ‘얘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고 내 것이 다 네 것이다. 너의 저 아우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되찾았다. 그러니 즐기고 기뻐해야 한다.’ (루카 15,11-32)
‘되찾은 아들의 비유’라고 이름 붙은 이 대목은 성경에서 가장 아름답고 우리에게 진한 감동을 줍니다. 아빠 하느님과 성자 예수의 모습을 이보다 더 분명하게 그릴 수 없을 정도입니다. 많은 사람이 이 대목을 읽고서 하느님의 품으로 찾아 돌아왔으며, 수많은 예술가들이 이 대목을 미술로 음악으로 시로 소설로 창작하여 하느님의 사랑과 용서를 찬미하였습니다. 아무리 여러 번 읽고 음미하여도 질리지 않습니다. 언제나 삶의 새로운 활력과 기쁨을 용솟음치게 합니다. 인류가 단 하나의 이야기만 선택하라는 명령을 받는다면 아마도 이 대목일 것입니다. 이 장면에서 우리는 용서의 참 모습을 읽게 됩니다. 우리는 용서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잘 모를 때가 많았습니다. 유대 율법에 장자가 아닌 사람은 재산상속을 요청할 권리가 없었습니다. 그저 장자가 어떻게 처분하느냐에 따라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었습니다.(루카 12,13절 참조) 그러니 이 둘째 아들은 아버지가 살아 계실 때 재산상속을 요청하는 것이 한 푼이라도 더 뜯어 낼 기회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면 어쩌면 찬밥신세가 될지도 모른다고 여겼습니다. 그는 철저하게 타산적이고 기회주의자이었습니다. 남을 생각하고 배려할 줄 모르는 자였습니다. 또 집회서 33,20절에 살아있는 동안 재산을 아들이나 아내에게 넘겨주지 마라는 글귀도 있습니다. 그런데도 아버지는 둘째가 재산상속을 요청하자 두 아들에게 공평하게 나누어 줍니다. 큰 아들에 대한 배려도 잊지 않았습니다. 둘째는 이 재산을 가지고 먼 나라에 가서 탕진합니다. 더군다나 배고프다는 이유만으로 하느님의 백성이 되기를 포기하고 이방인의 붙이가 되어 부정한 동물과 접촉하는 죄를 짓습니다. 그는 율법을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전부 어긴 셈이었습니다. 심지어 이방인조차도 그를 거절하였습니다. 돼지 치는 열매 꼬투리조차 먹도록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아버지의 집을 생각하는 동기도 실은 배고픔에 지쳐 떠올린 것이지 고상한 이유에서가 아니었습니다. 이제 목숨만 건질 수 있다면 무슨 짓이라도 할 참이었습니다. 아들이 아니라 품팔이라도 좋으니 배곯지만 않는다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무거운 발걸음으로 집을 향해 돌아옵니다. 하지만 아버지는 오매불망 기다리던 아들이 돌아오는 것을 보고 한걸음에 달려 나가 아들을 껴안고 입을 맞춥니다. 둘째가 예상하던 것과는 달리 아들로 맞으며 잔치를 베풀어 줍니다. 이 장면을 보던 큰 아들은 부아가 치밀어 올랐습니다. 둘째와 자기를 비교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자신이 더 잘났으니 더 받아야 한다고 자부했습니다. 그리고 아버지가 베푸는 잔치에 참여하기를 거부하였습니다. 그럼에도 아버지는 첫째를 타이릅니다. 아버지는 언제나 참고 받아들였습니다. 둘째가 율법에 없는 짓을 요구하고 집을 떠나갈 때도 안타깝지만, 허용하였습니다. 그를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었습니다. 그의 자유를 존중해서였습니다. 그것이 삶이라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와 용서를 청하자 아무 조건 없이 받아들입니다. 또 첫째가 옹졸한 태도를 보여도 나무라기보다 옳은 길로 인도하여 그의 잔치에 초대하였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깊숙이 흐르는 두 가지 자유를 발견합니다. 가슴이 아프지만 그래서 그 인내의 십자가를 평생 지고 살더라도 강제하지 않고 상대방의 뜻을 존중하며 허용하는 자유입니다. 그래서 조르즈 신부님은 “용서는 상호 존중이며, 두 자유가 상봉하는 장소이다.”라고 말합니다. 초대는 하되 강제하지 않는 마음을 우리는 용서라고 부를 수 있겠습니다. 지금도 십자가 위에서 저를 인내로 기다리시는 주님의 용서를 느끼며 글을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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