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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아버지' - [유광수신부님의 복음묵상]
작성자정복순 쪽지 캡슐 작성일2009-03-14 조회수537 추천수3 반대(0) 신고

 <아버지>(루가 15,11-32)

  -유광수 신부-


 램브란트의 "탕자의 비유" 그림은 매우 유명하다. 그 그림을 보면 아버지가 돌아온 작은 아들을 껴안고 있는 모습이다. 늙은 아버지의 눈은 지긋이 잠겨 있고 아들을 껴안은 아버지의 한 쪽 손은 아버지의 손이요 다른 한쪽은 어머니의 손이다. 아버지 품에 안긴 작은 아들의 신발은 다 달아서 낡아 떨어졌고 발뒤꿈치는 굳은살이 박혔다. 옷은 남루한 옷차림에 아버지의 품에 얼굴을 파묻고 흐느껴 우는 모습이다. 아버지는 우는 작은 아들의 등을 아버지의 손과 엄마의 손으로 어루만져 주며 감싸주고 있다.

 

 아버지의 재산을 가져다가 다 낭비하며 방탕한 생활을 했던 아들을 나무라는 엄한 아버지의 모습도 그리고 돌아온 아들을 꾸짖는 모습도 없다. 오직 돌아온 아들을 반갑게 반기며 그 동안 아버지 곁을 떠나 고생했던 아들을 위로해주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처음과 똑같이 아들을 사랑해 주는 아버지의 모습이다. 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은 조금도 변함 없이 한결같다. 늘 넉넉함과 포근함이 아버지의 품이고 언제나 반겨주고 안아주는 분이 아버지이시다. 작은 아들의 잘못을 보지 않으시고 오직 돌아온 것만으로도 감격해서 잔치를 벌이시는 아버지이시다.

 

아버지 앞에 작은 아들의 모습은 정말 가난하고 나약한 모습이다. 얼마나 많이 방탕한 생활을 하며 돌아다녔던지 신발이 다 달았고 맨발로 돌아왔을까? 아버지 집을 떠날 때 그처럼 당당하고 의기 충전했던 모습은 어디 가고 마치 젖떨어진 어린이처럼 아버지 앞에 무릎꿇고 아버지 품에 안기는 어린이의 모습이다.

 

이 그림의 중심은 방탕한 아들에게 있는 것도 아니고 그의 낭비 생활 또는 그의 귀향에 있는 것도 아니다. 이 비유의 중심은 아버지이시다. 아버지 곁을 떠난 아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시는 아버지, 아버지의 재산을 다 날려버리고 빈 털털이로 돌아오는 아들을 보고 달려가서 입맞추고 안아주며 반가워하시는 아버지, 예전의 아들의 권리를 되찾아 주시는 아버지의 사랑이 중심이다. 바로 이 아버지가 하느님이시다.

 

 아버지는 유산을 나누어 달라는 아들의 청을 즉각 거절하거나 적어도 바보 같은 짓을 하지 말도록 충고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이런 말은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재산을 나누어주고 작은 아들이 자기 가고 싶은 대로 가도록 놓아주었다. 아마도 아버지는 아들의 마음을 헤아리고 계셨는지도 모른다 즉 아들이 아버지 집을 떠나는 것은 아버지에 대한 미움이 있어서가 아니었다. 그것은 젊음의 충동과 새로운 세계에 대한 동경, 그리고 멀리 있는 미지의 것에 대한 야망과 새로운 경험에 대한 욕망이었다.

 

시골에 있는 젊은이들이 답답하게 시골에 틀어 박혀있기 보다는 서울에 올라가서 새로운 세계를 경험해보고 싶어하는 그런 충동이 바로 작은 아들에게도 있었다는 것을 아버지는 알고 계셨는가보다.
 
아버지는 작은 아들을 말릴 수도 있었을 것이고 꾸짖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잘못을 저지르지 않도록 미리 막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아버지는 작은 아들을 마음대로 하게 내버려두신다. 왜 그러셨을까? 하느님은 인간을 창조하셨을 때 자유를 주셨다. 일단 자유를 주신 이상 하느님은 인간의 자유를 보장해주신다. 자유를 위해 창조된 이상 인간이 제 마음대로 만사를 결정해 가도록 방임해 두신 것이다. 자유를 주고 나서 일일이 간섭을 한다면 그것은 자유를 주신 것이 아니다.

 

비유에서 작은 아들은 점점 더 깊은 구렁으로 빠져든다. 처음에 아들은 약간의 돈을 소비하는 사람이었고 실패를 몇 번 맛본 사람에 불과했다. 그러나 다음에는 주색에 빠져 흥청거리기 시작했고, 최악의 비참한 지경이 되어 돼지를 돌보다 굶어 죽게 될 신세가 되었다. 그 당시 사람들에게 돼지란 가장 더러운 동물로 취급하였다.

 

하느님은 인간이 자기가 선택한 길로 가는 것을 그대로 놓아두시며 그 행동의 결과로 밑바닥까지 떨어지도록 그냥 놔두신다. 인간 스스로 모든 것을 결정하고 혼자 서 있을 수 있다고 확신할 때, 하느님께서는 그 사람이 제 마음대로 결정하게 놔두신다. 그래서 자신의 힘으로만 위로 오르려 할 때 그의 의지와는 반대로 깊은 곳으로 거꾸로 떨어지는 절망을 경험하게 하신다. 이상한 것은 인간은 누구나 자기가 하는 일이 잘 될 때 하느님께 구원을 청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 혼자서 모든 것을 결정하려드는 것이다. 그러나 자기 결정대로 행해져 화를 당할 때 그 탓을 하느님께 돌리려 한다.

 

 작은 아들은 더 이상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을 때까지 깊은 바닥으로 떨어졌을 때 비로소  자기의 행동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닫고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저를 아버지의 품팔이꾼 가운데 하나로 삼아 주십시오." 하고 말하리라 생각하고 일어나 아버지에게로 갔다. 아들은 자기가 아버지께 어떤 것도 요구할 수 없도록 모든 권리를 상실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자기의 잘못을 깨닫고 아버지께 돌아 온 아들을 아버지는 사랑스럽게 받아주셨다. 비유에서 아버지는 아들을 기다리고 있다가 먼저 방탕한 아들에게 달려가 그를 불쌍히 여겨 아들이 자기 죄를 고백하는 것을 채 끝내지도 못하게 했다. 그리고는 아들이 돌아왔다 하여 잔치를 준비하게 했다.

 

 하느님께서도 회개한 죄인을 이렇게 대해 주신다. 사람이 제정신을 차리고 반성하여 다시 돌아 올 수 있었던 것은 하느님의 은총 덕분이다. 하느님께서 다시 받아들이신다는 것은 인간이 지은 죄를 모르시거나 잘했기 대문이 아니라 주님의 자비 덕택일 뿐이다. 하느님께 뉘우치고 집으로 돌아온 죄인을 당신의 사랑으로 덮어 주시는 것, 과거의 모든 일을 잊으시고 죄로 생긴 빚을 헤아리지 않으시고 오히려 죄인을 전보다 더 잘 대해 주신다는 것은 하느님의 은총의 이해할 수 없는 신비이다.

 

아버지의 관대한 성품은 곧 하느님이 어떤 분인가를 알게 해주는 것이다. 무한한 사랑, 사랑으로 돌아온 아들을 감싸 안아주시고 새 옷으로 갈아 입히시고 가락지를 껴주고 돌아온  아들을 축하해주기 위해 잔치를 벌이시고 음악으로 흥을 북돋아 주시는 것에 하느님의 사랑이 묻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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